종이 동물원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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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은 눈부시다. 새로운 아침을 여는 찬란한 날개이기에. 그 날갯짓으로 무한히 나는 상상. 경이롭다. 그 상상이, 그 날개가 날면서 담아온 눈물과 땀. 그렇게 품은 깊고 넓은 바다. 살아 있게 하는 그 바다. 맑은 그 바다는 많은 살아 있음을 낳는 어머니가 된다. 그런 상상으로 빚어진 열네 가지 이야기가 있다. 나도 더불어 상상한다.

 

 ‘그때는 몰랐지만, 엄마의 종이접기는 특별했다. 엄마가 숨을 불어넣으면 종이는 엄마의 숨을 나누어 받았고, 엄마의 생명을 얻어서 움직였다. 그건 엄마의 마법이었다.’ -‘종이 동물원중에서. (14)

 

 이 이야기를 듣고, 눈물이 났다. 만들어진 모성이 아닌, 스스로 솟아나는 모성. 따뜻했다. 나도 이 이야기를 종이접기처럼 접어서 간직하고 싶었다. 숨을 불어넣어서. 소중히.

 잭, 이 이야기의 나다. 어릴 적에 우는 나를 달래기 위해 어머니께서 포장지로 종이접기를 해주셨다. 특별한 종이접기를. 마법 같은 종이 동물들은 친구였다. 그런데, 미국 백인 아버지. 중국 황인 어머니. 그 아들인 나. 미국의 백인과 다른 나. 그 다름이 싫어, 어머니와 종이 동물들을 멀리하는 나. 그리고, 시간이 흘러 하늘로 떠난 어머니. 어느 날, 나는 어머니께서 남기신 편지를 만난다. 슬픈 편지를.

 

 ‘그런 이야기를 떠벌리는 사람들은 그냥 관심을 받고 싶은 거예요. 그 왜, 2차 대전 때 일본군한테 납치당했다고 주장하는 한국인 매춘부들처럼.’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중에서. (513)

 

 731부대의 이야기를 담은 이야기다. 한국인이라면, 그냥 지나갈 수 없는 이야기. 그 희생자분들을 추모한다. 작가도 추모하며 지은 이야기리라. 작가는 숨김없이 731부대의 그 잔학성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그려냈다. 과거의 역사를 실제로 체험할 수 있는 기술로. 그렇게 그들의 만행이 증언으로 다가온다. 작가의 진지한 탐구에 깊은 울림을 경험하게 된다.

 

 이 두 이야기. 그밖에 열두 이야기가 더 있다. 그 여러 이야기는 눈부신 상상으로 지난 기억을 분명하게 다시 그리고 있다. ‘종이 동물원에서는 잭의 기억,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에서는 731부대의 기억. 그 기억으로 글에서 느끼게 되는 놀라움과 신기함이 강화된다. 애수(哀愁), 향수(鄕愁)도 진한 향을 내게 되고.

 또, ‘파자점술사’, ‘모노노아와레는 특이하게 언어의 기호인 문자를 재료로 하고 있다. ‘고급 지적 생물종의 책 만들기 습성’, ‘상급 독자를 위한 비교 인지 그림책에서는 작가의 사랑을 공감하게 되고.

 

 SF 환상 문학 단편 선집인 이 책. 상상이라는 나래가 담아온 눈물과 땀이 모인 바다로 만들어진 조약돌 같은 책이다. 오랜 시간, 상상의 꿈이 담긴 바다의 파도로 태어난 조약돌. 황홀한 햇살에 반짝인다. 오랫동안 반짝인다. 슬프고 아름답게 반짝인다. 그래서 홀로 그 반짝임을 고이 새겨 둔다. 눈부시게.  

 

 

 덧붙이는 말.

 

 하나. 단편 종이 동물원이 휴고 상, 네뷸러 상, 세계환상문학상을 2012년에 수상했다고 한다.

 둘. 단편집 종이 동물원이 2017년에 로커스 상 최우수 선집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셋. 단편 모노노아와레가 휴고 상을 2013년에 수상했다고 한다.

 넷. 작가는 중국계 미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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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론도 스토리콜렉터 70
안드레아스 그루버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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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북로드 페이스북)


 누구나 가까운 이에게 발등을 찍히고 억울해서 울부짖은 기억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도 그런 기억이 있다. 거짓과 진실. 모함과 누명. 그들은 거짓으로 모함했었다. 허나 진실은 누명이었다. 복수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부질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어찌해야 할지 몰라 슬퍼하기만 했었다. 그러다가 슬픔을 잊기로 했다. 온전히 잊지는 못해도 슬픔을 잊기로 했다. 그랬더니, 아픔이 작아지는 듯했다. 그저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그렇게 사필귀정(事必歸正)이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그러기 위해 정당하게 진심으로 외치리라. 진실을 부드럽게. 그런데, 한 소설의 남자가 있다. 그 남자도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 20년 전, 그날의 진실을. 그는 어떻게 외칠지 들어 본다.


 '당신 말이 맞았소.

 과거가 우리의 발목을 잡을 거라는.

 6월 1일은 우리 모두를 파멸시킬 거요.

 잘 지내시오!' -가제본 26쪽.


 '"네메즈, 이 사건에서 손을 떼시오. 너무 깊이 파고들지 말란 말이오." -가제본 135쪽. 


 연이은 죽음. 살해로 보이는 사건들. 그리고 자살로 보이는 사건들. 그 피해자들의 교집합은 연방범죄 수사국 수사관이나 그 가족이었다. 자비네 네메즈. 연방범죄 수사국 아카데미교관이자 수사관인 그녀는 의심을 품는다. 누군가 그 내막에 있다는 의심. 화살표는 오래전의 연방범죄 수사국의 한 부서로 향하고 있었다. 바로, 마약전담반. 슈나이더가 수사관으로서 첫 발걸음 내딘 그곳. 그녀는 결국, 마르틴 S. 슈나이더를 찾는다. 정직 처분을 받고 대학 강단에 있는 그를. 천하제일 프로파일러로 불리는 그를.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엄중히 말한다. 이 사건에서 손을 떼라고. 그런데, 네메즈가 어디 그럴 사람인가. 홀로 움직이던 그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러니, 슈나이더는 이 사건에 들어오게 되고. 이제 그와 그녀는 사건 안에서 어떻게 어울릴지.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성경, 마가복음 7장 21절~23절.


 '녹은 쇠에서 생긴 것인데, 결국 그 녹이 점점 그 쇠를 먹는다' -법구경.


 악한 것. 사람의 마음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한다. 녹. 쇠에서 생겨 점점 그 쇠는 먹는다. 범인들은 악한 것으로 더럽힌 사람이고, 녹이 먹은 쇠다. 그렇기에 배신하고 누명을 입게 했으리라. 죽음의 론도를 연주하고, 어둠의 윤무를 추었으리라. 20년 전 그날에도, 지금도. 우리는 마음의 그늘로 녹슬지 말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하리라. 범인들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리라.

 그나저나 네메즈와 슈나이더. 그 둘의 호흡이 잘 맞는다. 죽음의 론도1 안에서, 어둠의 윤무 안에서. 그 둘이 한 쌍의 날개가 되어, 힘찬 날갯짓을 한다. 아침을 여는 날갯짓. 악한 것과 녹을 확실히 찾아 사라지게 하는 날갯짓. 그 날갯짓을 바라보며, 만족감의 책장을 넘긴다. 다른 이들도 실망하지 않으리라. 치밀한 구성과 역동적인 전개에.   




 덧붙이는 말.


 이 소설은 슈나이더 시리즈의 네 번째 이야기다.  


 

  1. 주제가 같은 상태로 여러 번 되풀이되는 동안에 다른 가락이 여러 가지로 삽입되는 형식의 기악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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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적성에 안 맞는걸요 - 마음 아픈 사람들을 찾아 나선 ‘행키’의 마음 일기
임재영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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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아르테 네이버 포스트)


 마음의 병, 그리고 그 마음의 병이 깃든 사람들. 그 마음의 병을 어루만지며, 사람들을 찾아가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마음의 병을 고치는 사람. 그의 일기 같은 이야기다. 이 이야기로 내 마음에 떠오른 한 분. 몇 년 만에 기억의 수면 위로 올라오신 그분. 교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셨던 분이다. 미국에서 유학하고 계실 때, 마음의 병이 다가왔다던 그분. 내가 만났을 때는 다행히 마음의 병이 안 보여서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 병이 다시 찾아왔고, 소문이 돌았다. 불안증이라고 들었다. 잘 웃으셨고, 친절하셨던 분이었는데, 마음이 아팠다. 소문을 낸 사람이 마음의 병이 더 깊은 사람 같았다. 그렇게 다니던 교회에서 멀어지셨던 분. 지금은 마음의 병을 지우고, 두 아이를 잘 키우고 계시다고 들었다. 마음의 병이 있다고 백안시(白眼視)하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눈에 깊은 상처를 받고 병원을 가까이 하지 않는 분들. 그런 분들을 보고, 홀로 참고 참다가 결국에는 마음의 병을 얻게 되는 분들. 그분들을 위해, 거리로 나선 행키. 바이올린을 연주하셨든 그분의 선율을 생각하며, 행키의 이야기를 살포시 포개어 본다.


 '그들은 속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속 이야기를 들어줄 단 '한 사람'만 있으면 되는데

 그 한 사람이 없어서 홀로 참고 참고 또 참다가

 결국 마음의 병을 얻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정신과 의사를 만나지 못하는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누구에게 말도 못 하고 홀로 힘겹게 버티는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그들이 마음의 병을 얻기 전에 도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한 사람'이 되어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프롤로그 '당신 곁에 한 사람' 중에서. (6~7쪽)


 그들의 '한 사람'이 되어 위로하고 싶었다는 정신과 의사 행키. 행키는 '행복 키우미'의 준말이라고 한다. 영어 'hanky'는 손수건(handkerchief)의 준말이기도 하고. 그래서 마음 아픈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손수건이자 행복을 키우는 행키라고 한다. 사실, 그도 마음의 병을 앓았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의대에 진학해 우울증을 만났던 그. 동병상련으로 마음의 병든 분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 그렇게 거리로 나선 그. 거리의 의사다. 상담 트럭을 끌고 나선. 처음에는 사람들이 찾지 않던 상담 트럭. 그 우여곡절이 그려져 있다. 그러다가 TV 방송에 출연하게 되어 사람들이 그를 알게 되고. 그렇게 '찾아가는 고민 상담소'에 여러 상담이 이어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이 일기는 마음 깊숙이 들려준다. '일자리를 찾지 못해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남자, 자폐증을 가진 아이를 ‘독박 육아’ 하는 어머니, 알코올중독에 빠진 대학생, 딸이 성폭행당한 후 절망에 빠진 어머니 등'의 사례를 사실에서 살짝 변형하여 들려준다. 그분들에 대한 예의로. 그리고 행복을 키울 수 있는 다섯 가지 방법으로 '1. 삶의 즐거움을 음미하라', '2.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에 대해 감사하라', '3. 타인에게 먼저 도움의 손을 내밀어라', '4. 현재에 충실하라', '5. 평생 지속할 수 있는 목표에 헌신하라'를 말하기도 하고. 또, 2016년 2월, '찾아가는 고민 상담소'라는 이름으로 거리 상담을 시작한 행키. '찾아가는 마음 충전소'라는 이름으로 바꾸게 된 사연도 들려주고.


 '어쩌면 병원은 병이 난 후에나 찾는 곳이라는 인식 때문에, 사람들이 너무 늦게 찾아오는지도 모른다. 병원은 검사와 예방을 담당하는 곳이기도 한데 말이다. 특히나 정신병원은 미친 사람들이나 가는 곳이라는 편견 때문에 찾기를 꺼린다. 결국 아직 심각한 단계는 아니더라도 그렇게 될 위험성이 높은 사람들이 부담 없이 가서 도움을 받을 만한 정신 의료 기관이 없다는 게 문제다.' -'거리와 병원 사이' 중에서. (201쪽)


 행키가 말하길 마음이 아픈 분들이 정신병원에 오는 데 보통 18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18개월 동안 병을 키운 그분들. 그 18개월을 줄이고자 거리로 나섰던 행키. 병원, 정신건강복지센터, 거리 상담을 모두 경험한 행키. 병원은 편견으로 문턱이 높고, 정신건강복지센터는 병원에 비해서 전문성이 다소 떨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병원과 정신건강복지센터 사이에 있는 그곳을 상상하는 행키. 또, 정신 질환 예방, 조기 발견 및 조기 개입, 치료까지의 연결고리의 중요성을 절감한 행키.     

 며칠 전, 보호자로 같은 병원에 다닌다고 말씀하신 분이 계셔서, 그곳에서 뵐 수도 있겠다는 말씀을 드렸었다. 농담조로. 그런데, 병원에서는 만나지 않는 것을 바란다는 그분. 병원은 병이 있는 사람만이 오는 곳이라 생각하셔서 그런 것이리라. 난 병원은 건강검진도 하는 곳이라 병원에서 뵙는 건 나쁘지 않다고 말씀을 드렸었다. 치료도 있지만, 예방과 조기 발견도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마음의 병에도 예방과 조기 발견의 힘이 잘 닿을 수 있기를 바란다.


 '마음 아픈 사람들을 찾아 나선 '행키'의 마음 일기'라는 이 책의 작은 이름. 그 이름에서 보듯, 역시 이 이야기는 일기였다. 마음의 병을 이겨내는 온기를 담은 일기. 그 용기와 그 희망을 따뜻하게 담은 일기. 소중한 일기. 마음의 병을 지운 그분, 바이올린을 연주하셨던 그분의 가락을 음미하며, 이 따사로운 일기에 추위를 녹여 본다. 이 따뜻함, 나눌수록 더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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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ma1228 2018-12-10 06: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행키입니다! ^^ 리뷰 감사합니당~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ㅎㅋ

사과나비🍎 2018-12-11 22:56   좋아요 0 | URL
행키님~^^* 이곳에도 댓글 남겨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붕붕툐툐 2018-12-10 17: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너무 와닿아요~ 인생이 적성에 안 맞는다니~ㅎㅎㅎㅎ

사과나비🍎 2018-12-11 22:57   좋아요 1 | URL
아, 붕붕툐툐님~^^* 댓글 감사합니다~^^*
답글이 늦어서 죄송해요~^^;
예~ 책의 제목이 그렇지요~^^* 저도 읽는 순간! 와닿더라고요~^^*
그럼, 붕붕툐툐님~ 좋은 시간되시기 바랄게요~^^*

AgalmA 2019-01-02 15: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요즘 어른이 정말 적성에 안 맞다 하고 있어요ㅎㅎ
사과나비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사과나비🍎 2019-01-02 21:35   좋아요 1 | URL
아, AgalmA님~^^* 아, 어른이 적성에 안 맞으시다고 말씀하시고 계시군요~^^;
아, AgalmA님의 새해 인사 말씀 감사합니다~^^*
예~ AgalmA님도 새해 복 가득 받으시고요~ 행복과 건강이 함께 하시기 바랄게요~^^*
 
더 없이 홀가분한 죽음 - 고통도 두려움도 없이 집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법
오가사와라 분유 지음, 최말숙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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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장자 VS 하이데거) (동영상 출처: EBS)

 삶의 시작이 있으니, 그 끝이 있다. 그 끝은 죽음. 삶의 끝은 죽음의 시작이다. 그 죽음. 장자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도 노래하고 춤을 췄다고 한다.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 장자이기에. 또, 하이데거는 사람은 죽음의 자각으로 삶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천상병 시인은 삶을 소풍, 죽음을 귀천이라 하고. 그 죽음. 그것이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그것도 집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암이 낫는다면 항암치료를 받겠습니다. 하지만 겨우 한 달밖에 더 살지 못한다면 일을 선택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하더라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고 싶어요. 그러니 일을 할 수 있도록 진통제를 처방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항암치료 대신 건축가로서 일을 마무리 짓기로 하다' 중에서. (23쪽)

 아버지께서 2년 전 봄에 암 수술을 받으셨다. 병원에서. 췌장암과 직장암이셨다. 그때 암 환자분들을 많이 뵀었다. 물론, 말기 암 환자분들도. 아버지께서 수술을 받으러 가실 때, 그분들의 눈빛. 지금도 기억이 뚜렷하다. 죽음을 앞두신 그분들. 수술조차 하실 수 없으신 그분들. 꺼져가는 불빛들이신 그분들. 부러운 듯한 눈빛이셨다. 그래도 이내 마음을 잡고 죽음을 준비하시는 그분들. 홀가분한 죽음을 준비하는 그분들. 
 이 기억을 품고 있는 나였기에 말기 암 환자분 등 죽음을 앞둔 이들의 이야기에 울림이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작은 이름처럼 '고통도 두려움도 없이 집에서 죽음을 준바하는 법'도 담았다.

 '아직 재택 호스피스 완화 케어의 개념은 확립되지 않았지만 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재택이란 생활하는 곳, 호스피스란 생명을 돌보며 삶과 죽음 그리고 이상적인 임종에 대해 생각하는 것, 완화란 통증과 고통을 줄이는 것, 케어란 따스한 보살핌 속에서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싹트고 몸에 생기가 돋게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질 때 비로소 환자에게 진정한 재택 호스피스 완화 케어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떠나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함께 웃을 수 있는 마지막을 위해' 중에서. (7쪽)

 재택 호스피스 완화 케어. 이 책에서 처음 들었다.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할 텐데. 이런 제도도 있다니. 일본과 우리나라는 다른 점도 있겠지만, 새로운 선택지였다. 알아보니, 우리나라도 이른바 '연명의료결정법'이 2018년 2월부터 시행되고 있다고 한다. 재택까지는 아니지만, '웰다잉', '존엄사'를 다룬 법이라 한다. 그 뿌리가 잘 내릴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이 여러 논의를 계속하기 바란다.    

죽음을 알면 반드시 용기가 솟아난다.
죽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죽음에 대처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知死必勇, 非死者難也, 處死者難.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 염파 · 인상여 열전(廉頗藺相如列傳) 중에서.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도 중요하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 용기로 의연하게 대처하는 사람들. 저승사자와 다정하게 걸어갈 수 있는 사람들. 그런 선사들은 게송을 부르고 입적했다고 한다.


삶도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도 한 조각 뜬구름이 스러짐이다.

뜬 구름 자체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 나고 죽고 오고 감이 역시 그와 같다네.


생야일편부운기, 사야일편부운멸.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부운자체본무실, 생사거래역여시.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是)


 서산대사가 입적하기 전에 남긴 게송이라 한다. 이 게송, 적멸위락 (寂滅爲樂)1을 노래했다. 그 가락이 맑고 은은하다.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웃으며 죽음으로써 남겨진 가족에게 슬픔을 안겨주지 않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행복한 죽음은 없을 것입니다.' -'함께 웃을 수 있어야 진정으로 행복한 죽음이다' 중에서. (298쪽)


 이 책도 행복한 죽음을 이야기한다. 함께 웃을 수 있는 죽음. 우리 모두 그런 죽음을 위하여 나아가자. 그렇게 귀천하자.  



 

  1. <불교> 생사의 괴로움에 대하여, 적정(寂靜)한 열반의 경지를 참된 즐거움으로 삼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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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가들 -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탄생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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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법률가가 되고 싶었다. 아니, 지금도 법률가가 되고 싶다. 될 수 있다면. 그 법률가. 되리라는 희망을 가슴에 품고, 가끔 판사, 검사, 변호사가 되는 상상을 각각 해보고는 했다. 판사가 되어 옳은 길을 찾아 보이고. 검사가 되어 정의의 칼을 범죄자들에게 겨누고. 변호사가 되어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나아가고.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 무대인 법정. 많은 목소리가 어울린 그곳. 그곳의 주역이 되고 싶었다. 그런 나였기에 이번 사법농단 의혹1은 정말 안타까운 일로 다가왔다. 사법 불신! 우리나라를 흔들고 있다. 작금의 이런 상황. 그 뿌리를 알고 싶었다. 옛 스승께서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게 떠올랐기에. 무언가를 알고 싶을 때, 먼저 그 역사를 알아보라는 말씀이. 그리고 때마침 만난 책이 '법률가들'이다. 비록 가제본이지만. 그 일부를 담았지만. 


 '거칠게 평가하자면,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돌이킨 사람들은 예상한 것 이상의 불행을 맛보았고, 끝까지 개인의 안위만을 추구한 사람들은 기대한 것 이상의 영광을 누렸다. 전반적으로 그런 시대였고 어느 누구도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가제본 '1부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38쪽)


 1937년 고등시험 사법과 조선인 합격자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그렇게 살았다. 그 시대를 시작으로 이루어진 이 책. 이 책의 프롤로그를 바탕으로 줄거리를 본다.

 ​1부는 바로 그 '1937년 합격자들을 중심으로 일본 고등시험 사법과 제도를 탐구했다'. 고등시험 사법과 합격자들. 제1법률가군 이야기다. 

 2부는 '일제시대 '이류' 법률가로 취급받았으나 해방이후 고등시험 사법과 출신과 함께 법조계의 가장 중요한 뼈대를 형성한 조선변호사시험 출신들의 삶을 다뤘다'. 제2법률가군이다.

 3부는 해방으로 '일제시대 서기 겸 통역생으로 일하며 일본인 판검사들을 보조했던 사람들'이 법률가가 되는 기회를 잡은 이야기다. 미자격자였던 그들이 제3법률가군이다. 

 4부는 '해방공간에서 합법적으로 활동하던 조선공산당 등 좌익세력을 일거에 불법화시킨 1946년 5월의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이야기한다'.

 가제본은 4부까지의 이야기만 들려준다. 그래도 프롤로그에는 그 다음 줄거리도 있다. 

 5부는 '정부수립을 전후해 법조계에서 벌어진 각종 좌익 관련 사건을 다룬다'.

 6부는 '한국전쟁이라는 쓰나미가 법조계에 끼친 영향을 분석한다'.

 7부는 '이른바 '이법회' 또는 '의법회' 문제를 발굴함으로써 초창기 법조계 5년의 역사가 오늘에 끼친 영향을 설명한다'. 해방 당일 시행 중이던 조선변호사시험의 응시자들이 모두 합격증을 받게 된다. 그리고 해방 후 각종 필기시험을 면제받은 이 사람들이 이법회를 구성한다. 이법회 출신들은 제4법률가군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법률가들의 뿌리는 깊지 않았다. 너무 앝았다. 우선 일제 시대의 판사, 검사, 그리고 변호사도 친일의 흔적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제3법률가군을 형성하는 미자격자들. 그들의 일부는 그들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무리수를 두기도 한다. 그렇게 좌익과 중도의 날개를 꺾는다. 또, 일찍 옷을 벗고 전관이 되어 좋지 않은 관행을 만들기도 하고. 그리고 이법회의 존재. 난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만 만났지만, 그들의 정당성에 그늘이 드리우는 건 알 수 있었다. 물론 각기 다른 삶으로 나아가겠지만. 이렇게 우리의 법률가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그들. 그 뿌리가 깊지 않은 나무이기에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듯하다. 뿌리 깊은 나무가 되도록 우리 모두 잘 키워야 하겠다.  


 이 책, 가제본이었고, 일부였지만 우리 법률가들의 역사를 아주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마치 족보 같다. 평을 곁들인 족보. 우리 법률가들의 족보. 사람들이 족보를 보며, 뿌리를 알고, 오늘날의 자리를 알 수 있듯이. 많은 이들이 이 책을 보면, 법률가들의 뿌리를 알고, 오늘날의 자리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관심 있는 사람은 읽어 보시라. 후회는 안 하시리라.      



 

  1. 나무 위키 항목 참조. ( https://namu.wiki/w/%EC%82%AC%EB%B2%95%EB%86%8D%EB%8B%A8%20%EC%9D%98%ED%98%B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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