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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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언가를 할 때, 누군가의 목록을 참고하고는 한다. 어떤 것은 마치 신의 계명과 같이 영혼 깊숙이 다가올 때도 있다. 그 목록이 전문성과 독창성이 있다면, 더욱 그렇다. 바르고 굳건한 믿음으로 새겨진 영혼의 각인이 된다. 이런 추천 목록은 구원자다.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외로운 배에게 수호신이 되어 준다.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악마의 속삭임이 된 목록도 있다.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이라는 목록. 이 목록을 바탕으로 살인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핏빛으로 물든 타락의 도구가 된 목록.

소설,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에서 그 붉은 목록은 살인으로 선명하게 형상화되고 있다.

'"누군가 내 리스트를 읽고 그 방법을 따라 하기로 했다는 겁니까? 그것도 죽어 마땅한 사람들을 죽이면서요? 그게 당신 가설인가요?"' -33쪽.

'처음에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 리스트를 작성했을 때는 너무 기발해서 범인이 절대 잡히지 않을 만한 살인을 생각해내려고 했다. 그러니 만약 누군가가 그 책들에 나오는 살인 방법을 성공적으로 모방했다면 잡히지 않을 터였다. …… 범인이 누구든 간에 단순히 내 리스트만 이용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범인은 나를 알고 있다.' -43~44쪽.

보스턴에서 올드데블스라는 추리소설 전문 서점을 운영하는 멜컴 커쇼. 그에게 한 FBI 요원이 찾아온다. 그녀의 이름은 그웬 멀비. 커쇼가 몇 년 전에 서점 블로그에 작성한 목록.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이라는 목록 때문이었다. 누군가 그 목록을 보고 그 방법을 따라 살인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그녀. 그 목록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ABC 살인사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열차 안의 낯선 자들》, 아이라 레빈의 《죽음의 덫》, A.A. 밀른의 《붉은 저택의 비밀》, 앤서니 버클리 콕스의 《살의》, 제임스 M. 케인의 《이중 배상》, 존 D. 맥도널드의 《익사자》, 도나 타트의 《비밀의 계절》이었다. 아직 모든 목록이 완성된 건 아니지만, 대체 누가 이런 범행을 하고 있는 것인가. 게다가 그 범인은 커쇼를 알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목록을 왜 작성할까? 지은이는 '정체성을 부여하려는 방법'(73쪽)이라고 한다. 커쇼의 아내 클레어는 살짝 어긋난 사람이었다. 마약과 불륜. 그런 그녀로 인해 커쇼도 비틀어졌다. 결국, 클레어는 교통 사고로 죽음에 이르렀다. 그리고 교환 살인을 하게 된 커쇼. 마치 《열차 안의 낯선 자들》처럼. 전에 그가 작성한 목록에 비로서 그의 정체성이 부여된 걸까. 이제는 누군가 그 목록대로 살인을 하고 있는 상황. 누군가 살인을 매개로 내재된 일그러진 정체성을 그 목록에 부여하고 있는 걸까.

'현실과 허구는 다르니까.' -269쪽.

범인은 허구와 현실을 동일시하며 살인 행위를 지속하고 있었다. 살인은 예술(269쪽)이라며. 그렇게 현실 속 살인이든, 허구 속 살인이든 아름답다(269쪽)고 설파하는 범인. 아니다. 살인을 소재로 하는 어떤 허구도 그것을 미화하지 않는다. 단지 도구인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일어난 살인은 명백히 범죄다. 허구는 허구일 뿐이고. 이렇게 현실과 허구는 다르다. 허구와 현실을 혼동한다는 것은 성숙하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어두운 일탈로 타락했던 범인도 그랬던 것이다. 단, 살인에 있어 현실과 허구가 같은 것이 하나 있다. 즉, 작가의 말처럼 소설이든, 현실이든 완벽한 살인은 없다(254쪽)는 것이다. 늘 변수가 너무 많다(254쪽)는 것을 기억하시라.

붉게 물든 목록. 허구 속의 '완벽한 여덟 살인'을 다룬 목록. 누군가는 축복이라 생각하며 피를 묻혔다. 그러나 저주였다. 외로운 배였던 누군가는 침몰하고야 말았다. 목록의 작성자도 난파선이 되었고. 그렇게 의외의 범인과 뜻밖의 전개로 글은 이어진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글 안에서 속도감이 있게 그려지고 있다. 그 속도감 안에 긴장감도 잘 녹아서 흥미로운 색이 비춰지게 한다.

소설,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은 고전 범죄 소설에 대한 헌사다. 동시에 범죄 소설 독서 욕구 자극제이기도 하다. 완벽한 살인을 다룬 여덟 권의 고전 범죄 소설. 그리고 그것을 모방한 살인을 그리면서, 치밀함과 유려함을 놓치지 않았다. 또, 곳곳에 언급된 여러 범죄 소설도 지도에 표시된 물음표와 같았다. 느낌표로 바꾸고 싶어지는 그 물음표. 그렇게 이 책에 담긴 모든 책의 이름은 독자들에게 장바구니 추가 목록이 될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받은 책으로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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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1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4-03 14: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선은 나를 그린다
도가미 히로마사 지음, 김현화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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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소설은 수묵화의 세계에 등장한 한 청년의 성장 소설이다. 그런데 그는 판타지 소설이나 무협 소설의 주인공과 닮았다. 그렇지만, 수묵화라는 참신한 소재로 작가의 깊은 뜻을 잘 그렸음은 분명하다. 그렇게 이 책이 그린 그림에 생명의 향기와 삶의 기운이 서려 있음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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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04-28 1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성장 소설이 저는 재밌더라고요.^^

사과나비🍎 2022-04-29 02:11   좋아요 1 | URL
저도 그래요~^^* 그나저나 페크 님~ 잘 지내시고 계신가요?...^^*
저는 몸이 좋지 않아 고생하고 있네요... 페크 님은 건강 유의하시기 바랄게요~^^*

2022-04-29 1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선은 나를 그린다
도가미 히로마사 지음, 김현화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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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정희, ‘불이선란’, 19세기 중엽, 종이에 수묵, 55.0×31.1㎝, 개인 소장.


우연히, 추사 김정희(1785~1856)의 난 그림을 사진으로 본 적이 있다. 아마도 '불이선란'이라는 작품으로 기억한다. 감상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어떤 향기와 기운이 느껴졌었다. 서화 감상의 안목이 없는 사람도 느낄 수 있는 은은한 향기와 생생한 기운. 역시 명작이었다. 뛰어난 감상가이기도 했던 추사. 그는 서화 감상에 '금강안(金剛眼)과 혹리수(酷吏手)'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금강역사 같은 무서운 눈, 혹독한 세리(稅吏)의 손끝 같은 치밀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세상에서 금강안이라고 불린 추사.

소설, 《선은 나를 그린다》는 수묵화 세계를 그린다. 그리고 초기 금강안의 안목을 가진 청년도 그린다. 추사와 같은 그의 치유와 성장을.

'"자넨 좋은 안목과 심성을 가지고 있어. 그게 바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산이지."' -123쪽.

'"그림은, 수묵화는 내 생각 바깥에 있는 세상을 가르쳐줬어. 내가 뭘 느끼는지를 전해줬어."' -357쪽.

고등학생 때,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아오야마 소스케. 홀로 상실감 속에서 살던 그는 대학생이 되었다. 어느 날, 친구로부터 소개받아 전시회장의 짐 운반 아르바이트에 간다. 그곳에서 그는 어느 노인을 만난다. 그 노인은 그에게 여러 감상평을 듣고, 좋아한다. 그리고 그를 애제자로 삼겠다고 한다. 그 노인은 일본 수묵화의 거장 시노다 고잔이었다. 거장의 애제자. 기연이었다. 아오야마 소스케도 놀라지만, 시노다 고잔의 소녀이자 젊은 수묵화가인 지아키도 놀란다. 그리고 그녀는 반발한다. 수묵화와 아무 접점이 없던 그. 그녀는 그런 그와 내년 '고잔상'을 두고 경쟁하자고 한다. '고잔상'은 일본 수묵화 세계의 상징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는 상이다.

소스케는 수묵화를 처음 배우며, 마음을 그리고, 생명을 그렸다. 그렇게 회복하고, 발돋움하게 된다. 새로운 세상, 새 느낌을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지아키도 소스케와 함께 하며, 더욱 나아가게 되고.

고잔은 '수묵의 본질은 즐거움'(68쪽)이라고 소스케에게 가르친다. '재능이나 감각은 그림을 즐기느냐 아니냐에 비하면 특별한 게 아니다'(174쪽)라고 한다. 또, '수묵화는 삼라만상을 그리는 그림'(215쪽)이라고 하며, '현상이란 바깥에만 존재하는 걸까? 마음속에는 우주가 없을까?'(251~216쪽)라고 묻는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라'(216쪽)고 한다. 이런 고수의 가르침을 받으며, 소스케는 빠르게 깨달음을 얻는다. 그런 그를 보며, 지아키도 자신의 부족한 것을 알게 되고.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

문자의 향기와 책의 기운.

금강안이었던 추사는 '문자향 서권기'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고잔의 가르침도 결국에는 이것이 아닐까. 선각자들이 남긴 글. 즉, 문자와 책 같은 가르침을 통해 체화된 깨달음. 그렇게 내면에 담긴 깊은 깨달음의 향기와 기운. 그것이 선이 되어 나오는 것이 수묵화라고. 그렇기에 수묵화가 즐거움이 되는 것이라고. 그 즐거움 속에서 나오는 향기와 기운이 생명이고, 삶이라고. 그래서 '수묵화가 마음과 생명을 그리는 그림'(381쪽)이고, '수묵화가 선의 예술이라면 선은 삶의 방식 그 자체'(381~382쪽)라고. 결국, '선은 나를 그리고 있는 것'(384쪽)이 된다고.

소설, 《선은 나를 그린다》는 수묵화의 세계에 등장한 한 청년의 성장 소설이다. 그런데, 노인 고수들과 청년 주인공의 기연. 엄청난 성장으로 적수가 없을 정도로 강하게 되는 그. 결국, 아픈 과거를 딛고 세상에서 우뚝 서는 그. 그리고 절세미인과 그의 사랑. 이런 그는 판타지 소설이나 무협 소설의 주인공과 닮았다. 그렇지만, 수묵화라는 참신한 소재로 작가의 깊은 뜻을 잘 그렸음은 분명하다. 그렇게 이 책이 그린 그림에 생명의 향기와 삶의 기운이 서려 있음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덧붙이는 말.

하나. 이 책의 지은이 도가미 히로마사는 현직 수묵화가라고 한다.

둘. 이 책은 제59회 고단샤 메피스토상 수상, 2020년 아마존재팬 랭킹 1위, 독서미터 ‘읽고 싶은 책’ 랭킹 1위, ‘왕의 브런치’ 선정 2019년 올해의 책 대상, 2020년 일본 서점대상 3위라고 한다.

셋. 우리나라에 이 소설이 원작인 만화와 이 책이 동시에 발매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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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유괴
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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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다가 보면, 기상천외한 생각을 보기도 한다. 추리 소설은 그런 착안들의 향연이 성대하게 열리는 곳이라 할 수 있고. 이런 풍성한 연회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발상이 있기 마련이다. 새로움을 보는 눈을 가진 이의 놀라운 생각. 사람들의 감탄이 절로 나오게 된다. 추리 소설에서는 주로 수수께끼에 그런 참신한 맛을 넣는다. 그렇게 독자는 훌륭한 요리사의 싱그러운 맛을 음미하며, 지적 유희를 즐기게 되고.

추리 소설, 《화려한 유괴》도 독특한 맛이 있다. 추리 소설의 식도락을 즐기는 이들도 만족할 만한.

'자, 다시 한번 설명할 테니 마음 가라앉히고 들어. 우리 블루 라이언스는 현재 일본 전 국민을 납치했다. 오직 그뿐이야.' -28쪽.

일본 전 국민을 납치했다는 범죄 집단 블루 라이언스. 그런데, 이런 범죄 행위가 성립될 수 있는 걸까. 범죄 대상이 일본 전 국민이 될 수 있는 걸까. 일본 전 국민의 신체적 자유를 구속할 수 있는 걸까. 누구나 이런 의문을 품을 것이다. 그런데, 총리 공관에 전화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몸값으로 일본의 연간 방위비를 빗대어 5천억 엔을 요구한다. 일시불이라면, 한 정당의 연간 기부금 정도인 5백억 엔으로 합의해준다고도 하고. 장난 같았다. 그런데, 젊은 연인이었던 두 명이 청산가리를 먹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장난 같지 않았다. 그래서 탐정 사몬지 스스무가 등장하게 된다. 그런데, 두 번째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한 남자가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된 것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플라스틱 폭탄으로 비행기를 폭파하기까지 한다. 많은 희생자가 나오게 된 상황. 돌연, 블루 라이언스는 노선을 바꿔 국민 앞에 나선다. 그들이 지정한 5천 엔짜리 와펜을 사면 안전을 보장해준다고 말하며 협상하기 시작했다.

'"겁먹은 인간일수록 덫에 걸리기 쉬운 법."' -430쪽.

블루 라이언스는 전 국민을 납치했다고 하며, 불특정 다수에게 살인 행위를 했다. 사람들은 두려웠다. 마치 살생부를 가진 듯한 그들. 그런데, 생명의 열쇠가 나타났다. 와펜이라는 구세주. 물론 블루 라이언스의 덫이었다. 겁이라는 수단을 활용한 함정. 그렇게 돈이라는 목적을 달성했다. 하지만, 그 돈으로 인해 그들도 겁을 이용한 덫에 걸리게 되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성경》, 〈디모데전서〉 6장 10절.

돈을 너무 사랑한 블루 라이언스. 지능이 높다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며, 악을 행했다. 그렇게 돈을 탐했다. 일견, 화려한 유괴로 사람들을 농락하며, 그들의 뜻을 이루는 듯했다. 그렇지만, 미혹을 받아서 그들 안에서 서로의 믿음이 떠나게 되었고. 그 근심으로써 결국은 자기를 찔렀다. 자신들이 판 두려움이라는 함정과 비슷한 함정에.

"미쳤어, 이 세상은."

"맞아."

사몬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또다시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신주쿠의 야경을 바라봤다.

"미치기는 했어도 아름다운 곳이지."' -432쪽.

배금주의자. 그들은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숭배한다. 그리고 삶의 목적을 돈 모으기에 둔다. 물론, 돈은 필요하다. 그런데, 그것을 너무 사랑하여, 악을 행하는 자들이 죄를 지었고, 벌을 받게 되었다. 배금주의가 팽배한 세상이지만, 결국 정의는 살아있는 것이다. 그렇다. 사건을 멋지게 해결한 명탐정이 보기에, 이곳은 미친 세상이어도 아름다운 곳인 것이다.

추리 소설, 《화려한 유괴》는 감탄사의 집합소 같았다. 흥미로운 시작에 이은 뜻밖의 전개. 그리고 멋진 대결과 깔끔한 마무리. 쉽게 읽히는 글의 곳곳에서 감탄사가 나왔다. 작가의 대담하고, 독특한 생각에 부드러운 글이 어우러져 진미(珍味)를 품은 것이다. 훌륭한 요리사의 특별 요리였다.

덧붙이는 말.

하나. 이 책은 1977년에 첫 출간이 됐다고 한다.

둘. 이 책은 사몬지 탐정 사무소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라고 한다.

셋. 이 책의 작가 니시무라 교타로는 1930년생으로 출간 작품 수가 680편이 넘는 일본 미스터리계의 거장이라고 한다. 그는 2022년 3월에 별세했다고 한다.

출판사로부터 받은 책으로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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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채색 아저씨, 행복의 도구를 찾다 - 잘하려 애쓰는 대신 즐기는 마음으로, 취미생활 1년의 기록
이경주 지음 / 아날로그(글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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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에 다닐 때, 어떤 동기 하나가 있었다.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는 친구였다. 동아리 선후배와 잘 어울리며, 대학교 생활을 즐겼던 그 친구. 축제 때는 여러 준비를 하며, 분주히 보내는 그 친구. 대학교에 있을 때는 수시로 그곳에서 지내기도 한 그 친구. 그에 반해 힘 절약주의자에, 낭만적 아웃사이더였던 나는 조용히 대학교 생활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동아리 활동을 해 보는 것도 괜찮았을 것 같다. 필수 과목은 아니지만 선택 과목 같은 느낌. 그 친구는 그 선택 과목을 즐기면서 수강한 것이었다. 평가가 없는 과목을. 즉, 그 친구에게는 대학교 생활에서 동아리 활동이 취미였다. 그 친구에게 지금 취미가 있을까. 있다면 뭐가 취미일까.

책, 《무채색 아저씨, 행복의 도구를 찾다》는 마흔셋의 나이에 그림을 취미로 갖게 된 사람의 이야기다. 그 나이에, 그림이라는 취미라니. 이런 생각을 하면서, 불현듯 대학교 다니던 그 시절의 그 친구를 떠올리게 된 것이다. 이 아저씨에게 그 친구를 투영하면서. 과연 그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삶은 팍팍해지고, 인생은 의미를 잃어가고, 일에 대한 열정은 슬슬 사라져가니 다른 세계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금방 1년, 그림을 그리며 생각한 것> 중에서. (220쪽).

그는 <서울신문>의 이경주 기자다. 2018년 9월. '내가 고민하는 모습을 본 아내는 우물쭈물하다 또 아무것도 못한다며 아이처럼 내 손을 끌고 화실에 갔다.'(6쪽)라고 하며, 그 시작을 적었다. 지친 직장인이었던 그. 전에 한 선배가 술자리에서 '오래 사는 세상이다. 뭔가 할 게 필요해. 죽을 때까지 일할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재미를 느낄 취미가 필요하다. 취미를 노후에 찾겠다고 나서면 이미 늦어. 젊을 때 하나 마련해라.'(17~18쪽)는 조언도 있었다. 게다가 2018년에 주 52시간제가 도입되었는데, 기자는 주로 금요일, 토요일에 쉰다고 했다. 아이가 학교에 가는 금요일 오전이 그에게 자유 시간이 된 것이다. 아이가 그린 그림을 보고 미술을 배워볼 것을 고민하던 그. 그렇게 아이가 다니는 미술학원에 등록했다. 그리고 칭찬의 고수인 선생님을 만나게 됐다.

'취미는 산책처럼 마음 가는 대로 즐기는 것이 가장 좋다. 내게도 그림은 하고 싶은 때 하고 싶은 만큼만 하면 되는 '일상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게으름이 허용되고, 그리다 중도에 포기해도 상관없다. '하면 된다'의 영역이 아니라, '되면 한다'의 영역인 것이다. 남의 평가로부터 벗어나고, 오롯이 내 마음에서 떠오르는 무언가에 집중하는 것만으로 편안해진다.' -<원데이가 아닌 꾸준한 취미를 갖고 싶다면> 중에서. (181쪽).

그는 '그림은 일기'(213쪽)라고 한다. '그림마다 당시의 생각과 삶에 대한 태도, 그날의 기분, 결심 같은 것들이 갖가지 형상으로 새겨져 있다'(213쪽)고 했다. 그는 또 말한다. '그림은 감정을 쏟아 붓는 용광로의 역할을 했다. 분노에, 우울함에, 두려움에, 기쁨에, 아름다움에 대한 탄성으로 한참을 그리고 나면 평온함이 찾아왔다'(222쪽)고 한다. '취미는 산책처럼 마음 가는 대로 즐기는 것이 가장 좋다'는 그. 그림을 정말 즐겼다.


영화, <플레전트빌>(1998) 포스터.


<플레전트빌>(1998)이라는 영화가 있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TV 시트콤 '플레전트빌'. 흑백이다. 어느 날, 쌍둥이 남매가 이 TV의 세상으로 들어가게 된다. 흑백의 이 세상은 개인의 감정이 숨겨진 곳이었다. 그런데, 이 남매로 인해 개인의 감정을 찾게 되는 사람들. 그렇게 하나하나 컬러를 갖게 된다. 무채색 아저씨였던 이경주 기자. 일에 지친 직장인이었던 그는 감정을 담을 도구가 없었다. 마치 <플레전트빌>의 흑백 세상과 같았다. 그랬던 그가 감정을 담을 행복의 도구를 찾은 것이었다. 취미로 만난 그림이었다. 그렇게 유채색 아저씨가 되었다. 그것은 <플레전트빌>의 세상에서 컬러를 찾은 것에 비견되는 사건이었다. 인생의 소중한 변화였다. 탁월한 선택 과목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잠시 생각해 봤다. 대학교 동기인 그 친구. 동아리 활동에 열심이던 그 친구. 그도 아마 지금도 취미가 있을 것 같다. 산책처럼 마음 가는 대로 즐기고, 오롯이 집중하는 것만으로 편안해지는 그런 취미. 그 행복의 도구로 유채색 아저씨가 되었을 것 같다. 이경주 기자와 그가 다시 겹쳐진다.

책, 《무채색 아저씨, 행복의 도구를 찾다》는 그림이라는 취미 생활 1년의 기록이다. 그림만이 아니다. 그의 삶, 생각도 담겨 있다. 기자답게 글이 간결하고, 명확한 일기. 그가 그림을 그리며 느끼는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이 하나하나 다가온다.

덧붙이는 말.

하나. 이경주 기자는 2020년 7월부터 3년 임기로 미국 워싱턴 특파원을 지내고 있으며, 여전히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출판사로부터 받은 책으로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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