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레 사진관 - 상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네오픽션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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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집에 오래된 사진첩이 있다. 그 안의 빛바랜 사진 하나. 작은 외삼촌 사진이다. 아마도 고등학생 때의 사진인 듯하다. 사진의 그분은 어린 나를 많이 귀여워해주셨다고 들었다. 나도 어렴풋이 기억이 있고. 그분이 지금은 하늘에 계신다. 하늘로 가셨을 때, 외할머니께서는 작은 외삼촌 사진을 여럿 지우셨다고 한다. 마음이 아프셨기에. 지금은 외할머니와 작은 외삼촌께서 함께 하늘에 계시리라. 그런 시련을 이겨내고 남은 사진 하나. 그 사진을 볼수록 친숙해진다. 내가 많이 닮은 작은 외삼촌이 담긴 그 사진. 이제 내가 그 사진을 귀여워해주고 있다. 처음, 그 사진을 사진첩에서 찾았을 때, 어머니께서는 많이 우셨다. 막내 이모도 많이 우셨다. 작은 외삼촌의 마음, 내 마음, 어머니의 마음, 막내 이모의 마음이 담긴 그 사진. 아직도 살아 있는 그 사진은 하나하나의 추억이 되어 따스한 품 안에 영원히 안기게 되겠지.


 또 다른 사진 이야기가 있다. 아픔이 있지만, 따스함으로 감싸는 두 이야기. 첫 번째 이야기는 '고구레 사진관', 두 번째 이야기는 '세계의 툇마루'다. 이 이야기들의 시작은 사진관이었던 오래된 집에 이사한 한 가족이다. 고구레라는 할아버지께서 하셨던 사진관. 그 집에 들어간 그 가족의 형제 가운데 형. 16살, 에이이치. 그가 이야기를 풀어간다. 어느 날, 어느 소녀에게서 한 사진을 받게 되는 에이이치. 사람들의 사진. 그리고 그 사진 안에 유령처럼 한 여인의 얼굴. 울고 있는 듯한 여인. 에이이치는 그 수수께끼에 다가간다. 그리고 여운(餘韻)이 남는다. 이 이야기가 '고구레 사진관' 이야기. 두 번째 이야기인 '세계의 툇마루'는 이상한 소문으로 상급 여학생의 강제적인 부탁으로 출발한다. 역시 사진의 수수께기. 사람들이 있고, 툇마루에서 세 명의 가족이 우는 환영이 있는 사진. 이번에도 풀리는 사진의 수수께끼. 그리고 남는 또 다른 여음(餘音).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니 다양한 일들도 생기게 마련이다, 개중에는 신기한 일도 있다, 나는 그런 세계관으로 이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107쪽.


 '세상에는 마음속에 떠올린 영상을 필름에 인화시키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모양인데, 그것을 염사라고 부른다고 했다.' -185쪽.


 미야베 미유키 여사. 즉, 미미 여사. 글이 노란빛이다. 봄빛을 머금은 노란빛. 유채꽃, 개나리꽃, 병아리의 그 노란빛. 겨울 추위의 아픔을 아물게 하는 따스한 노란빛. 여사는 추리 소설 안에서 모두의 아픔을 이야기하며, 여사만의 따스함으로 감싼다. 그 품에 안기는 게 정말 좋다. 마치 어머니의 품 같다. '고구레 사진관 (상)'의 두 이야기도 그런 이야기다. 사진을 매개로 가족의 아픔과 따스함을 이야기한다. 첫 사진의 여인은 며느리였다. 이혼한 옛 며느리. 가족이 되었다가 나뉜 여인. 두 번째 사진을 촬영한 사람은 약혼자. 가족이 되려다가 멀어진 남자. 그 아픔들을 이야기한다. 그 아픔들이 사진에 남았다. 염사였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일들 가운데 신기한 일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더욱 살아 있게 하는 건 에이이치의 가까운 이들이다. 그의 부모님, 동생, 단짝 친구. 또, 부동산 회사 사장, 우울한 부동산 회사 여직원, 탄빵이라고 불리는 동급 여학생 친구. 모두 자기만의 색으로 도움을 준다. 여기에 에이이치는 우울한 부동산 회사 여직원, 탄빵이라 불리는 동급 여학생 친구의 아픔도 놓치지 않는다. 따스함의 확장이다. 더 큰 날개로 아픔을 품는다. 사진을 매개로 가족의 아픔을 따스함으로 감싸니, 격렬한 화학 반응이 일어난 것이다. 긴 잔물결이 남는. 추억이 되는. 가을의 늦은 밤에 마지막으로 책장을 덮으며, 나도 사진을 남기고 싶다. 고구레 사진관에서. 아픔을 따스하게 감싸는 사진을. 작은 외삼촌 사진처럼 마음이 담긴 추억의 사진을. 오랫동안 품에 안고 다닐 사진을.




 덧붙이는 말.


 1. 이 '고구레 사진관'은 개정판이다.    

 2. '고구레 사진관'은 상하권으로 나뉘는데, 상권만 읽고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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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해리 세트 - 전2권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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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교회에 다닌다. 성가대를 하며, 가족과 함께 다닌다. 그런데, 난 이 교회를 나가자고 가족에게 계속 말한다. 다투면서. 어제도 그랬다. 이 교회의 전 담임 목사는 감옥에 갔다. 두 번째다. 횡령죄로 한 번, 모해위증죄로 한 번. 이렇게 두 번. 모해위증죄는 미성년자 성추행에 대한 명예훼손죄를 다투다가 그랬다. 세습 받았던 이 목사. 이제 교회를 떠나게 됐다. 사임했다. 그런데 원로 목사의 아내이자 이 목사의 어머니가 외치는 욕심을 보니, 정말 추했다. 또 목사 가족이 숨긴 그동안의 어둠도 여럿 드러나니, 정말 더러웠다. 왕이었던 목사. 그리고 그 곁의 간신들. 그 간신들은 이제는 갈 이 목사를 버리고 올 새 목사에게 아부한다. 그렇게 그 목사를 쇠사슬로 묶으려 한다. 지난 여러 해 동안, 그 간신들에게 당하고 있는 나. 그들의 검은 거짓으로 모함당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힘들다. 이 교회에 깊은 환멸을 느낀다. 하얀 가면을 쓴 그 검은 얼굴이 싫다.


 여기, 무진에도 하얗지만 속이 검은 안개를 머금은 악의 꽃이 피었다. 난만(爛漫)했다. 특히 큰 두 악의 꽃. 이해리와 백진우라는 악의 꽃이다. 해리는 가톨릭 신자, 백진우는 가톨릭 신부다. 해리는 과부로 장애인 단체를 이끌고 있다. 이름하여, 엔젤스 윙 장애인 주간보호 센터. 벌을 이용한 봉침을 놓기도 하는 이해리. 백신부는 필요한 돈과 사람을 그 시설에 보내고 있고. SNS에서 인기인인 그들. 많은 돈을 모금하고 있었다. 인터넷 신문의 기자인 한이나. 화가인 어머니가 암 수술을 해야 하기에 무진에 왔다. 어머니가 계신 무진에. 어릴 때 이해리의 친구인 그녀. 고등학교 1학년 때, 백진우 신부에게 성추행을 당한 그녀. 그리고 무진을 떠났던 그녀. 다시 돌아온 그녀가 길을 지나다가 한 여성을 만난다. 1인 시위를 하는 최별라라는 여성. 딸이 자살했다고 한다. 백진우 신부와 이해리를 이야기하면서 억울해한다. 그렇게 한이나는 거대한 악의 꽃밭으로 들어가게 된다. 백진우 신부와 이해리의 악행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여럿 만나게 되고. 교구가 운영하는 무진 소망원의 어둠도 알게 되고. 또 다른 악의 꽃도 알게 되고. 그리고 무진 인권 센터의 서유진 센터장과 강철 변호사의 도움도 받게 되고.

  

영화 '스포트라이트(Spotlight, 2015)' (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영화 '프라이멀 피어(Primal Fear, 1996)' (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이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사람들 부류가 있어요. 흔히 '상식적으로' 사고하고 늘 '좋은 쪽으로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 이게 이들의 토양이에요. 이게 이 사람들 먹이예요. 그래서 상식을 가지고 사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당해내기가 힘들어요. 그러니까 일반적인 생각을 가지고 대하면 절대 안 돼요. 아무리 작은 하나라도 다 의심해야 해요. 그래서 싸움이 정말 힘들어요.' -1권 246쪽.


 '"이 세상에 우리가 남기고 갈 것은 우리가 사랑했다는 사실이에요."' -2권 267쪽.


 영화 '스포트라이트(Spotlight, 2015)'와 '프라이멀 피어(Primal Fear, 1996)'가 있다. 가톨릭의 어둠을 밝혀내는 기자인 한이나의 얼굴에서 '스포트라이트'의 얼굴도 보았다. 이 영화에서는 기자가 여럿이었지만, 그랬다. 또, 해리로 상징되는 악의 꽃들의 두 얼굴에서 '프라이멀 피어'의 얼굴도 보았다. 해리라는 이름이 '해리성 인격 장애'에서 비롯됐다고 하니, 더 절묘하다. '프라이멀 피어'에서 두 얼굴의 대주교를 죽인 피의자는 두 얼굴을 보이며 무죄를 받는다. '해리'에서는 악의 꽃들뿐만 아니라 그 꽃들의 가시에 찔린 꽃들도 몇몇은 두 얼굴을 가졌다. 검은 거짓으로 점철된 얼굴을 가린 하얀 가면. 그 가면에 당한 사람들마저 가진 두 얼굴. 그렇지만, 악의 꽃들의 두 얼굴은 너무나 무거웠다. 무진의 검은 안개를 머금었기에. 난만해서 많은 사람을 현혹했기에. 그런데, 어쩌다가 그렇게 됐을까. 사랑의 부재가 그 시작이었으리라. 내가 다니는 교회도 사랑이 없고, 욕망만 난무하고 있다. 그 민낯. 그것을 가린 가면만이 보인다. 무진의 검은 안개를 머금은 악의 꽃들에게. 교회의 검은 얼굴들에게. 속지 않기를. 아프지 않기를. 그들을 위해. 나를 위해. 사랑으로 기도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피어오르게 한 '해리'에게 감사한다.




 덧붙이는 말.

 

 공지영 작가의 구설에 대해서는 배제하고 이 소설만 읽고 쓴 글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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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육아의 사회학 - 스스로 ‘정상, 평균, 보통’이라 여기는 대한민국 부모에게 던지는 불편한 메시지
오찬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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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주 전, 아버지 지인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아버지와 함께. 그런데, 신랑, 신부는 지각 결혼을 하는 듯했다. 그런 늦은 결혼을 하는 사연이야 구구절절하리라. 비혼(非婚)을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 요즘. 결혼은 예전보다 더욱 큰 결심이 있어야 했을 것이리라. 우리 부모님의 소원 가운데 하나도 나의 결혼이다. 몇 달 전에 하늘로 가신 작은 외할아버지께서 나에게 남기신 유언도 결혼이니. 나도 결혼하고 싶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없다. 또, 내가 다가가도 반기지 않는다. 며칠 전, 어렵게 용기를 내어 한 고백도 대답은 거절이었으니. 결혼하는 이가 부럽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그들은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기에 이렇게 됐는지. 그것이 알고 싶어, 한 권의 책을 손에 든다. 그 책에 담긴 시선을 바라보기 위해.


 '첫째, 존재를 미약하게 만드는 경제적 사정이고 둘째, 면역이 없기에 버티기가 힘들다고 판단한 인간관계의 문제, 마지막은 지금껏 배운 것이 너무나도 무용함을 인정해야 하는 빌어먹을 성 불평등의 세상이다. 이를 감수할 각오가 있어야 기혼자가 된다.' -28쪽.


 '일루즈는 이처럼 "시장에서 남성과 여성은 신분, 소유, 교양, 특히 미모와 매력 따위의 다양한 차원에서 무한 경쟁을" 벌이기에 "만성적 불안"이 사라지지 않음을 경고했다.' -46쪽.


 공감한다. 철저히 공감한다. 이제는 많은 이에게 결혼이 공포로 다가오기도 하는 세상이다. 나도 무한 경쟁에서 만성적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런 경쟁에서 낙오자였는지.


 그리고 육아도 이야기 한다. 몇 가지를 보면, '가장 악질적으로 '남용'되는 말, 모성'을 말하고, '소비하는 부모의 탄생'을 이야기한다. 또, '모든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는 육아서'의 잘못을 이야기하고, '유용한 사교육의 유해성'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자녀보호와 자녀소유'의 다름도 이야기한다.


 나는 솔직히 육아는 잘 모른다. 여동생의 첫째 딸이자 나의 첫째 조카를 어머니께서 돌봐 주셔서, 곁에서 잠깐 봤을 뿐이다. 그것도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그래도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였다.


 '나부터가 문제인데 그럼에도 글을 쓰는 이유는 나처럼 많은 사람이 '육아조차 경쟁하는' 걸 가능케 하는 이 부모라는 갑옷에 답답함을 느낄 거라는 확신 때문이다. (......) 문제는 옳은 방향임을 자임하는 사람들의 훈계가 너무 많아서 헷갈린다는 거다. 이때 고정관념을 깨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학은 큰 도움이 된다. 사회학이 제공하는 비판적 시선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원래 그런 것'이 일으키는 부작용을 발견하게 한다. 어떤 방향이 틀렸는지 알아낸다면 우리는 옳은 방향을 찾을 가능성을 조금씩 높여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는 이런저런 비법이란 게 등장하지 않는다. 자연스러운 일상의 문제점을 짚어내는 것도 분명 시민의 의무이고, 이는 곧 부모로서의 성장 아니겠는가.' -11~12쪽.


 열한 살 딸과 여섯 살 아들의 아빠라는 지은이. 사회학자라고 한다. 비판적 시선을 가진 자라고. 그의 날카롭고 바른 시선을 나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덕분에 나름 바른 눈으로 결혼과 육아를 바라보게 되었다고 자임한다.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 기획 의도 중에서. (사진 출처: 백일의 낭군님 홈페이지)


 우연히, 며칠 전, TV를 보다가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의 재방송을 잠깐 보게 되었다. 사극이었다. 궁금해서 찾아보니, 이런 기획 의도도 보게 되었고. 원녀와 광부라. 나도 그 가운데 하나인가. 아무튼 참신했다. 백일이라도 부부가 되는 게 부부가 안 된 나보다 낫다고 여겨지기도 했고. 게다가 요즘 '구운몽'을 읽고 있는데, 양소유는 부귀영화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에 여덟 인연이나 있고. 아, 나의 인연은 어디에 있나. 옛 중국의 사마상여가 탁문군에게 봉구황을 들려주었듯이, 나의 뜻도 들려주어야 하는데. 나의 인연은 보이지를 않네. 월하노인은 도대체 무얼 하고 계신지. 어서 월하노인께서 실을 이으셔야 나중에 삼신할머니도 찾아오실 텐데. 그리고 결혼도, 육아도 경쟁인 이 세상. 날카롭고, 바른 시선을 가진 이 이야기를 함께 할 텐데. 눈을 맞추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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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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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사고택에 갔었다. 어릴 적에 가족과 함께였다. 이제는 빛바랜 기억이지만, 이상하게도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것이 있다. 어린 나에게조차 온몸으로 다가오는 그것. 추사가 심었다는 백송에까지 서린 높은 향과 깊은 기였다. 아마도 추사의 문자향서권기(文子香書卷氣)였으리라.   


 외할머니댁에 추사의 대련이 있었다. 어느 명절에 가니, 있었다. 아마도 외삼촌께서 마련하신 것 같았다. 어린 나는 몇 자를 자세히 보다가 역부족인지라 무슨 뜻인지 더 궁금해졌다. 외삼촌께서는 화목한 가족을 뜻한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하니, 추사의 '대팽고회'를 본뜬 작품이었다. 추사고택의 백송에서 느꼈던 문자향서권기를 그 작품에서도 느꼈다. 요즘도 화목한 가족을 생각하며, 그때의 기억을 함께 떠오르고는 한다.


 나에게 그런 추사였다. 그리고 그런 추사일 것이고. 그런 추사에 대한 글을 만났다. 추사의 삶과 뜻. 그리고 그 안에서 그와 이어진 사람들.


 '족손인 김승렬이 쓴 완당 김정희 선생 묘비문을 보면 그의 평소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한 구절이 있다.


 풍채가 뛰어나고 도량이 화평해서 사람과 마주 말할 때면 화기애애하여 모두 기뻐함을 얻었다. 그러나 무릇 의리냐 이욕이냐 하는 데 이르러서는 그 논조가 우레나 창끝 같아서 감히 막을 자가 없었다.


 이런 성격의 추사였기에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더없이 존경했고 싫어하는 사람은 아주 싫어했다.' -20쪽.


 '(사랑은) (중략)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중략)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중략) -성경 고린도전서 13장 5~6절.


 의리와 이욕. 나에게 주어진 한 세상을 살면서 의리를 지키고, 이욕을 버리려고 한다. 추사의 삶도 그랬던 것 같고. 성경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과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고 한다. 그러니 추사의 그런 삶은 사랑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겠다. 사람에 대한 사랑. 삶에 대한 사랑. 그렇기에 청나라에까지 그의 벗이 있게 되었고. 물론, 그런 그를 괴롭히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사람과 삶에 대한 사랑으로 학문과 예술을 했던 추사. 그렇지만, 쓰라림 많은 삶도 살았다. 제주도와 북청에서의 유배 생활. 그 아픔을 견디어 냈기에 더 아름다운 학문과 예술을 이룬 것 같다. 상처를 이겨낸 비자반(榧子盤)이 가장 좋듯이.

 

추사 김정희 [세한도] 1844년(59세), 종이에 수묵, 23.3×108.3cm, 손창근 소장, 국보180호.


 어느 날이었다. 추사의 세한도(歲寒圖)에 대한 글을 보았다. 세한도에 추사는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는 낙관을 남겼다고 했다. '오랫동안 서로 잊지 말자'라는 말. 좋았다. 가끔 되뇌며, 혼자 좋아하는 말이 되었다. 그런 말을 해줄 사람을 찾으며.


  '이 <세한도>에서 더욱 감동적인 면은 서화 자체의 순수한 조형미보다도 그 제작 과정에 서린 추사의 처연한 심경이 생생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림과 글씨 모두에게 문자향과 서권기를 강조했던 추사의 예술세계가 소략한 그림과 정제된 글씨 속에 흥건히 배어 있다는 것이 이 그림의 본질이다. <세한도>의 진가는 그 제작 경위와 내용, 그림에 붙은 글씨의 아름다움, 그리고 갈필과 건묵이라는 매체 자체의 특성에 있다.' -288쪽.


 그렇다. 고마움이 가득 담긴 장무상망이라는 낙관을 그림에 남기는 추사. 그 추사의 마음이 잘 담겼기에 세한도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런 추사가 만남 없이 하늘에 있으니 장무상망할 수 없지만, 나 홀로 장무망이라도 하련다.


 '추사의 글씨는 대단히 괴기한 글씨로되 법도(서법)에 근거한 파격이고 개성이었다.' -11쪽.

 '서법에 충실하면서 그것을 뛰어넘은 글씨,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괴이하나 본질을 보면 내면의 울림이 있는 글씨, 그것이 추사체이다.' -412쪽.


 추사체. 처음 만났을 때, 가히 충격이었다. 이런 글씨체도 있다니. 격식 안에서 그 격식의 깨뜨림. 즉, 격식 안의 파격.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 추사체는 나에게 화두(話頭)였다. 그렇게 추사체로 수행(修行)했다.


 게다가 추사는 서예뿐만 아니라 시와 문장, 금석학과 고증학, 13경, 불교, 차(茶), 회화 등에 해박했다고 한다(12~15쪽). 실로 감탄에 감탄이다.


 이 책의 후기에서 지은이는 말한다. 그 후기의 이름은 '완당평전에서 추사 김정희로'다. 그 이름대로 『완당평전』이라는 책이 나오기까지와 절판이 되기까지, 그리고 『추사 김정희』가 나오기까지의 이야기다. 『완당평전』으로 찬사도 받았지만, 오류에 대한 혹독한 비판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새로운 자료의 출현. 그래서 절판했다고 했다. 그리고 『추사 김정희』가 나왔다. 많은 노고의 결실인 듯하다. 감사의 글을 보니,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은 것 같고.


 나도 감사의 글을 살짝 남기련다. 이 책에게. 오래전에 추사고택의 백송과 '대팽고회'에서 느꼈던 문자향서권기를 다시금 만날 수 있었다. 추사와 함께 걸으며 빛이 담긴 발자국을 남길 수 있었다. 산숭해심(山崇海深,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처럼 추사의 학문과 예술은 높고 깊었다. 사람에 대한 사랑, 삶에 대한 사랑으로 높고 깊었다. 나는 그렇게 여전히 추사를 장무망하고 있다. 추사의 향과 기가 담긴 차(茶)를 마시며.  



덧붙이는 말.


초판 1쇄 기준으로 오자가 있다.

산숭해심(山嵩海深)  산숭해심(山崇海深)(17, 5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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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9-27 0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과나비님, 잘 지내셨나요.
추석연휴는 잘 보내셨는지요.
며칠간의 연휴가 끝나고 다시 일상적인 날들이 시작되겠지요.
오랜만에 서재의 새 글이 보여서 인사 드리러 왔어요.
편안한 밤 되세요.^^

사과나비🍎 2018-09-27 00:43   좋아요 1 | URL
아, 서니데이님~ 오랜만이에요~^^*
이렇게 잊지 않으시고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 저는 잘 지내고 있답니다~
서니데이님도 그동안 평안하셨는지요?...^^*
예~ 이제 연휴가 지나갔네요... 아쉬워요...^^;
그럼, 서니데이님도 좋은 꿈꾸시기 바랄게요~^^*
 
파이와 공작새
주드 데브루 지음, 심연희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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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Bridget Jones's Diary, 2001)' (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Bridget Jones's Diary, 2001)'를 오래전에 봤었다. 르네 젤위거, 콜린 퍼스, 휴 그랜트가 나왔던 영화. 알아보니,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했다고. 작가는 헬렌 필딩. 더 알아보니, 그 소설은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을 오마주한 거라고. 하긴,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남자 주인공의 이름은 다아시다. 나중에 알았지만, '오만과 편견'과 같다.읽었다. '오만과 편견'을. 아직 안 읽었던 소설이었기에. 역시 좋았다. 그래. 좋았던 사람이 많으니까 이렇게 오랫동안 헌사를 받고 있나 보다. 그리고 또 다른 헌사가 있다. '파이와 공작새'라는 소설. 할리퀸1 소설이 되시겠다. 할리퀸 로맨스 소설.


 '"이런 짓을 한 이유가 뭔지 알 것 같네요. 이래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죠? 여기 집주인이니까. 그리고 당신은 영화배우 님이니. 남이 살고 있는 데 함부로 들어와서 음식을 훔쳐 먹어도 된다고 생각한 거군요. 어때요, 내 말이 틀려요?"' -80쪽.


 '그러자 테이트가 말했다.

 "저는 집 안에 들어온 공작새를 쫓아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내 말을 절대로 믿지 않을 거예요. 에이미의 아빠가 어떤 놈인지 알려준다 해도 역시 믿지 않을 겁니다. 이미 철석같이 진짜라고 믿고 있는데 제가 어떻게 설득할 수가 있겠습니까? 케이시는 이미 저를 싫어하기로 마음먹었어요. 그걸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159쪽.


 '"아, 뭐. 오빠의 오만함과 당신의 편견이 만난 거죠. 아주 그럴듯한 맞수예요."' -423쪽.


 요리사 케이시. 영화배우 테이트. 각각 파이와 공작새로 상징된다. 그리고 파이와 공작새를 매개로 얽매인다. 실연을 당한 요리사 케이시는 한적한 서머힐이라는 곳에서 휴식을 갖기로 한다. 알고 보니, 영화배우 테이트가 집주인. 새벽에 케이시가 있는 오두막의 베란다에서 샤워하는 테이트를 케이시가 한동안 봤다. 테이트는 그런 케이시를 파파라치로 오해했고. 그런데, 테이트는 케이시의 집 안에 들어온 공작새를 내보내고, 케이시가 만든 파이를 먹어서 오해를 받았고. 오해로 둘러싸인 그들. 그 둘은 함께 연극을 하게 된다.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와 다아시로. 과연, 어떤 일이 그들에게 생길지. 강한 자존심은 오만을, 깊은 오해는 편견을 만들기에.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My Lovely Sam-Soon, 2005)' (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오만과 편견'의 새로운 변주. 그것도 할리퀸 로맨스 소설. '파이와 공작새'. 사실, 할리퀸 로맨스 소설은 처음이다. 주로 여성의 환상이 가득 담긴 연애 소설이라는 느낌이다. '파이와 공작새'는 거기에 '오만과 편견'의 색을 입혔고. 살짝 다른 점은 베넷 부인 역의 올리비아 패짓의 역할. 그녀는 이해와 열정을 지녔다. 그래서 조언과 감동을 준다. 그렇게 케이시와 테이트가 오만과 편견으로 좌충우돌할 때, 안식처가 되어 주기도 한다. 그나저나 케이시를 보며, 생각난 사람이 있다. 바로, 김삼순! 우리나라의 브리짓 존스다. 김삼순과 브리짓 존스는 동명의 소설을 영상화한 것도 같다. 30대 미혼 여성의 일과 사랑의 이야기에서 많은 여성들의 공감을 얻으며, 인기가 높았던 둘. 담백과 농후를 넘나드며, 웃고 울게 만들었었다. 김삼순도 요리사! 케이시도 요리사! 그런데, 케이시의 얼굴은 다소 달고, 화려했다.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Bridget Jones's Diary, 2001)' 중에서. (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파이와 공작새'는 헌사였다. '오만과 편견'에 바치는. 그런데, 그 변주가 좀 지나쳤. 그 설탕과 색이 가벼움과 자극을 준다. 테이트의 샤워. 그리고 바라보는 케이시. 살짝 낯간지러웠다. 그렇게 낯간지러운 글이 간혹 보였다.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대사. 'I like you very much. Just as you are. (난 있는 그대로의 네가 정말 좋아)'가 맞다. 있는 그대로가 정말 좋은 거다. 너무 과하지 않게. '파이와 공작새'는 그게 다소 아쉽다. 그래도 그 쾌락! 다가가는 걸 말리지는 않겠다. 할리퀸 소설은 그런 재미인 것 같으니. 아, 아이들은 빼고.  


 

  1. 나무위키의 할리퀸 항목 참조. ( https://namu.wiki/w/%ED%95%A0%EB%A6%AC%ED%80%B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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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3-30 16: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오만과 편견>을 처음으로 읽었어요. 역시 읽어보니 요즘 로맨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올 법한 설정과 익숙한 장면들이 보였어요. 알라딘 블로그에 움직이는 사진 이미지를 등록할 수 있나요? 처음 봅니다.. ^^

사과나비🍎 2018-03-30 21:47   좋아요 0 | URL
아, cyrus님은 ‘오만과 편견‘을 최근에 읽으셨군요~^^* 예~ 아무래도 이 소설이 오랫동안 헌사를 받더라고요~^^* 아, 예~ 알라딘 블로그에 움직이는 사진이 등록돼요~^^* 검색하다가 보니, 좋은 사진이 있어서요~^^;
그나저나 cyrus님도 언제나 건강 유의하시고요~ 좋은 시간 보내시기 바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