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격자 #영화

뉴욕의 한 번화가, 무겁게 내려앉은 밤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있었다.
목격자는 38명
그러나, 여성이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광경을 보고
모두가 침묵한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제노비스 사건이다.
여성의 도와달라는 소리는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어둠 속에 묻혀갔다.
제노비스가 죽어갈 때 침묵하던 다수는
제노비스가 죽고나서야 범인에 대한 증언을 했고
이 사건으로 긴급구조대 119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두고 심리학자들은
제노비스 신도롬 또는 방관자효과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주변에 사람이 많을수록 어려움에 처해진 사람을
도울만한 책임을 덜 느끼게 되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어려움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돕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토대로 한국판 <목격자>가 개봉되었다.
영화는 이성민 부부는 맞벌이를 하며 어렵게 새집을 장만한
기쁨에 들떠있는 행복한 모습에서 시작한다.
직장에서 동료들과 회식을 한 후 늦은 귀가를 한 날,
엘리베이터에서 아래층 여자와 인사를 나눈다.
베란다앞에서 감회에 젖어 아파트 앞 풍경을 보고 있던 이성민.
우연히 광장에서 한 여성이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순간을 목격하게 된다. 컴컴한 베란다에서 범인과 눈이 마추친 순간, 눈을 질금 감고 모든 것이 지나가길 바라며 폰을 찾았지만 떨리는 공포에 놓치고 만다. 이때라도 이상민이 살인현장을 신고했다면 여성은 살았을지도 모르지만 여성이 이미 죽었다는 생각에 아내와 아이를 보며 모른 척 하기로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잔인한 폭행에도 여전히 살아있던 여성이 힘들게 손가락을 들어 신고를 하려 폰을 누르는 순간 지켜보고 있던 범인에 의해 더욱 잔인하게 살해당한다.
이후 경찰조사가 시작됨에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목격자들..

급기야 아파트 내에서는 아파트값이 폭락한다는 이유로 살해사건을 은폐하길 원하며 주민들은 경찰조사에 협조하지 말아달라는 전단지가 돈다.
그러던 중 새벽 4시에 불이 켜져 있던 집들과 목격자들에게 이상한 일이 생기고 공포에 떨던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던 아래층 여자가 경찰서에 신고하러 가자며 이성민을 찾아온다.

그러나, 자신은 아무 것도 본 것이 없다며 냉정하게 보내고 만다. 휴대폰 벨소리가 울려 보니 아래층 여자의 폰이라 바로 따라간 이성민은 살짝 열린 현관문 사이로 살인범이 아래층여자를 죽인 것을 목격하게 된다.

방관과 무관심만이 자신의 가족을 지키는 일이라고 믿었던 이성민은 이때부터 살인범의 집요한 추적에 맞서 싸워야 하고 아내와 아이들에게까지 위협이 가해지자 자신이 얼마나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으며 누구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공포가 살인자의 추격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영화는 살인범과의 벌이는 긴장감과 공포를 극대화하며
아래층 여자의 실종전단지를 돌리는 남편의 슬픔을 철저히 무시하며 아파트값을 떨어뜨린다며 항의하는 주민들을 통해 현대인의 극단적 이기심을 보여주기도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제노비스 사건과 교차하여 최근 일어난 강서구 PC방 살인사건 역시 떠올리게 되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했던 경찰들이 현장을 떠나지만 않았더라도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텐데. 또한 살해현장을 찍는 사람들은 있어도 신고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던 숱한 방관의 장면들이 영화와 오버랩되면서 나 역시도 방관과 무관심이란 병에 걸려 자각조차 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떠올려보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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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교회 대한민국 권력 비판 3부작
김진호 외 지음 / 창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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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왜 혐오의 개독이 되었나?

 

권력이란 무엇일까. 일찍이 링컨은 그 사람의 본성을 알고 싶거든 그의 손에 권력을 쥐어보란 말을 했다. 권력을 등에 업고 직원에게 물컵으로 던지거나 욕설을 하는 대기업 임원들의 갑질 행태는 고질적인 문제이다. 그것만 봐도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 권력을 얻게 되면 이성을 잃고 폭주하는 기관차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어쩌면 교회는 대기업의 갑질보다 더 고질적이고 악랄하게 우리의 내면에 파고들어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권력을 등에 없고 특권을 누리며 그들만의 리그를 쌓아가고 있는 한국의 교회들을 언제부터인가 개독이라며 혐오를 감추지 않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미투의 열풍에 목사들의 기행적인 고발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한국교회의 혐오는 이미 평범한 수위를 넘긴지 오래되어 보인다.

 

이 책 권력과 교회는 어쩌면 일부 교인들에게는 상당히 불친절하고 불편한 책이 될 수 있다. 근본주의의 뿌리로 시작되는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현대라는 커다란 돋보기로 볼 때 교리적이고 원칙적인 면에서부터 전혀 다른 하나의 세계를 구축해 왔기에 세속적인 잣대로 보면 비판할 수 있는 부분은 당연지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을 하나의 위치성또는 수직족인 구조에서 행사할 수 있는 힘이라 본다면 권력을 지닌 교회의 횡포는 이미 사회구성원들에게 해악을 끼칠 수 있는 갑중의 슈퍼갑이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권력자가 되었음을 우리는 정치를 통해서도 충분히 경험해 보았던 것이다.

 

작년인가 초대형교회의 원로목사 김삼환이 자신의 아들인 김하나 목사에게 직을 세습하면서 세간의 비판을 받았던 일이 있다. 김삼환 목사는 아들 김하나 목사에게 담임목사로 세우기 위해 4년간을 성도들과 장로들을 설득해 왔고 반대하는 이들은 교회에서 철저하게 퇴출하는 식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이런 모습은 실정법을 위반하면서 부와 권력을 세습하려 하는 대기업의 행태와 닮았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한 것은 철저하게 성직자 중심주의인 한국교회에서는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대기업 회장이나 다름없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교회가 드러내는 주요 문제점은 양극화, 권력세습, 혐오주의다. 이는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사회의 문제이기도 하고 전지구적 문제이기도 하다.-p17

 

책은 대담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김응교는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끼리끼리쌓은 배타성이 위험수위를 넘었다는 지적을 한다. 이명박 전대통령을 당선 가능하게 하여 유행어가 되었던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출신학연)’은 교연이 사회권력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교회는 소사회로서 내부 결합이 강하면 강할수록 배타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이것을 책에는 부드러운 야만이라 하여 외부에서도 노골적인 배타성으로 보지 않고 집단 구성원들도 스스로 배타적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사실상 배타성이 작동하는 문화가 되었고 그 배타성과 결합한 것이 반동성애반공이다. 근본주의자들이 넘쳐나는 교회에서 반동성애와 반공에 올인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지금 교회는 믿음은 굳건히 하고 사랑은 차별의 벽을 쌓고 소망은 증오가 되어 스스로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교인들의 자각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오늘날 진정한 예수의 삶을 탈각시킨 것은 세가지라고 본다.첫째는 권력추구형 성직주의, 둘째는 건물 중심의 성장주의와 세습, 셋째는 승리주의로 포장된 비겁한 낙관주의이다.-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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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 나이듦에 관한 일곱 가지 프리즘
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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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머의 신작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를 읽다보니 이 책에서도 마음이 부서진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오래전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 파머는 이 시대의 정치는 비통한 자 the brokenhearted [직역을 하자면 마음이 부서진 자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의 정치라 하였다. 이 표현은 정치학의 분석 용어나 정치적 조직화의 전략적인 수사학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 대신 인간적 온전함의 언어에서 그 표현이 나온다. 온전함에는 오로지 마음만이 이해할 수 있고 마음으로만 전달할 수 있는 경험이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 온전함과 마음이 부서진자, 이 표현은 파머의 생을 관통하는 키워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평생을 글쓰기의 삶을 살았던 파머는 평소의 습작들을 모아보니 자신의 글쓰기가 향한 곳이 나이듦에 관한 사색이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 글들을 일곱 가지 카테고리로 나누어서 출간한 책이 바로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이다. 이 책을 통해 나이들어 가면서 떠오르는 모든 것들, 잘 나이들어 간다는 것의 의미를 하나씩 점검해나갈 수 있었다. 나이듦이라는 것은 때론 벼가 익어가는 자연의 법칙처럼 사회에서 완벽하게 어른스럽거나 나이든 사람으로서의 책임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식과 삶의 가장자리에서 벗어나 어떤 방식으로든 지속된 삶의 의미들을 읽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 같다. 나 역시도 그런 과정 중에 있는 것처럼. 

 

꼰대라는 말이 있다. 아집과 고집으로 똘똘 뭉쳐 젊은이들에게 나이를 앞세워 잔소리만 해대는 노인을 일컫는 은어지만, 고지식한 노인네들을 대부분 우리는 꼰대라 부른다. 이런 꼰대들은 쉽게 볼 수 있다. 꼰대들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나이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우스개소리로 꼰대가 되기 싫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라하고 싶다. 저자가 말하는 성숙하게 나이들기 위한 7가지 프리즘을 보자면,  



1장 경험에 열린 눈을 가지고 자신의 삶에 올바른 질문을 던지라

2장 젊은이에게 창조적으로 관여하라

3장 영적인 삶에 대해 성찰하라

4장 삶에서 끊임없이 의미를 만들어내라.

5장 우리가 사는 세상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라

6장 침묵과 고독 속에서 내면에 충실하라

7장 죽음이후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나이드는 길목에서 습관인지 성격인지 가끔씩 나를 점검하는 버릇이 있다. 나는 우아하게 늙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나역시 내가 혐오했던 꼰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이들에게 나는 좋은 어른의 모습일까. 더 나이가 들면 젊을 때와 달리 더 여유가 있을 시간의 바다에서 방향을 잃지 않고 여전히 맑고 젊은 영혼을 유지할 수 있을까하며. 또는 하루가 생각보다 빨리 저물고 한달이 자각하지 못한 채 흘러가고 일년이 너무 빨리 지날 때마다 나이듦은 때론 크나큰 공포로 여겨지기도 한다는 것을 떠올려보게 된다. 불혹이 지나고도 여전히 삶은 미스터리이다. 자유와 평화로운 현실은 늘척박하게만 여겨지고 민주주의를 사랑한다는 사람들은 서로를 향한 욕설과 무자비한 언어폭력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선량함을 가장하며 불공정한 행위를 정당화하고 반목과 갈등은 늘 현재진행형인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나 적다. 파머는 이러한 세상에서 부서진 자들의 마음을 모아 온전함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전 삶에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현실에 가까이 다가가는 운동이며, 그것이 온전함으로 들어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우리 삶이 착각에서 시작되었고 착각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는 과정이 영적인 삶이다. 우리가 온전함이라 생각하는 것들은 완전함이 아니며 오히려 불완전에서 오는 것들이 우리를 온전한 삶으로 안내하고 있다고, 우리의 부서짐을 사랑하라고 한다.

 

나의 삶은 내가 쓸 수도 있었던 시었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살 수도, 말할 수도 없었네.

-소로

 

이렇게 소로의 시처럼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을 쓰고 있다. 그것도 온 몸으로. 현실에 다가가는 운동을 끊임없이 하며 죽음이라는 현실을 마주할 때 온전함이라는 마음에 이르게 된다. 누구나 할 수 있다. 이제라도 내 시를 써보자. 삶이라는 시를. 


여러분, 영적인 삶을 살기 이전에, 삶을 살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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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많은 일들이
하나하나씩
문제를 인식할 시간조차 없이
쏘아올린 후 바로 터져버리는 불꽃놀이처럼 일어났다 사라졌다.
점멸하는 불꽃 파편의 여운만이
남아있는 지금 이 시간,
이제야 숨을 돌려본다.
날기를 원하는 자,
우선 서고 걷고 달리고
오르고 춤추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처럼
날기 위해서는
여러 번 넘어져서야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의 시간을 지나
세상 한 가운데를 질풍노도의 속도로 달려가는 청춘의 시기를 지나야만 한다는 것을, 때론 오름길과 내림길 중간에서 슬픔을 딛고 춤을 출 수 있는 노년의 성숙까지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 참이다.
비단 성장의 과정은 아이들 뿐만이 아닌 것이다.
두 딸의 사춘기를 겪으며 생기는 일련의 문제들과 맞물려
어른이라 부르는 나의 시간들조차 배움의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이제 막 사춘기를 지나는 두 딸에게나
어른이라 불리우는 나조차에게도
세계는 언제나 불안정해 보이며 문득문득 안개끼고 컴컴한 불안과 우울이라는 터널을 걷는 기분이 들때가 있다.
그러나, 점멸하는 불꽃들이 순식간에 사라져도
오래오래 가슴에 남아 아름다움을 남기듯이
길고 긴 어두운 시간의 터널이 지나고나면
사위를 밝히며 환한 아름다움을 몰고 오는 순간이 올 것이다.
누구보다 자유롭고 높이 날려면 고통의 시간을 껴안아야만 한다는 것을 배우는 중이다.

#내딸들힘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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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역사와 현실 - 다시 보고, 사색하기 문화교양총서 1
송찬섭 외 지음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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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현실의 창窓이다.

롤랑바르트의 자서전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현재를 기록하라, 그러면 당신은 이미 작가다.’ 라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재는 이야기를 품고 있다. 현재가 모여 삶이라는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고 현재에 무엇을 담는가에 따라 미래가 색깔이 정해진다. 현재라는 시간은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가 서로 씨줄과 날줄이 되어 촘촘한 그물망으로 직조된다. 그렇기에 현재의 ‘나’라는 현주소를 점검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직시할 줄 아는 인문학적 사고가 요구된다. ‘영화’라는 문화 콘텐츠는 대중에게 가장 친숙하게 다가가 현실을 깨우쳐주는 인문학적 안목을 키워주는데 가장 인기 있는 장르다. 책이 문자로 타인의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케 하며 삶의 깊이에 다가가게 해 주는 것처럼 영화산업의 비약적인 발달은 책이 해주었던 역할을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인문학’이라는 키워드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은 이제 영화가 영상만이 아닌 책이 지녔던 인문의 가치까지 담아 낼 수 있도록 성장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역사와 현실』 이 책은 방송대 문화교양학과에서 간행하는 총서 제1권에 해당한다. 문화교양학과 교수님들의 책으로 영화와 역사, 철학, 신화를 공부했던 나에게는 무척이나 친숙하게 다가왔다. 교수님들이 영화에서 건져 올리는 삶의 진경들은 과연 어떤 것들 일까하는 호기심에 읽기 시작한 책인데 영화를 보지 않았어도 줄거리 요약과 시간과 공간적 배경 설명, 역사적 의의가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어 기억에 남는 인생영화 열편을 섭렵하고 난 후의 뿌듯함과 감동이 밀려왔다. 책에 실려 있는 영화이야기는 『레 미제라블』 , 『고요한 돈강』, 『토지와 자유』, 『타인의 삶』, 『굿나잇 앤 굿럭』, 『오피셜 스토리』, 『카게무샤』, 『귀신이 온다』, 『우리학교』, 『태백산맥』 등이 있다. 여기서 본 영화는 『레 미제라블』 과 『굿나잇 앤 굿럭』, 『귀신이 온다』, 『태백산맥』 뿐이었지만, 영화를 통해 미처 깨닫지 못하였던 부분들과 영화의 기술적 부분이 지닌 효과와 역사책에서 미처 배우지 못했던 시대의 아픈 기억들, 그 아픈 역사를 딛고 일어서는 민초들의 삶까지 핍진에 가까운 날 것의 삶을 반추하게 된다. 


그 가운데 『레 미제라블』 은 보면서 정말 많이 울었던 영화다. 말 그대로 레 미제라블은 비참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한 빅토르 위고의 원작에 가장 충실한 영화로 장발장을 통해 진정한 사랑과 용서란 무엇인가를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그 영화를 통해 현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와 명예, 권력과 같은 것보다 한 사람에 대한 진실된 마음만이 절망의 시대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만큼 장발장은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던 내게 어떤 자세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깨우쳐주었다.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그 때의 감동을 떠올려보며 장발장이라는 인물만이 아닌 전체적인 캐릭터들에게서 읽어내는 영화의 진면목들이 눈으로는 글자를, 머릿속에서는 영상을 그려가며 읽었다.  아니 어쩌면 그 영화가 지닌 의의를 다시 책을 통해 반추해 가며 깨닫는 현재의 핍진은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고 사는 우리들의 삶을 떠올리게 했고 노동자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상기하기도 하였다. 가난에 지쳐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던 세 모녀 사건처럼 비참한 사람들, 레 미제라블은 우리의 현실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대기업 패밀리들의 갑질 논란으로 촛불을 들기 시작한 이들과 악질 기업의 횡포로 자살을 선택한 40대 가장이나 하루 종일 사발면 하나를 먹으며 스크린 도어 작업을 하다 사망한 20대 청년은 현대판의 레 미제라블이다. 부와 권력으로 편제된 사회에서 기계적으로 적용되고 해석되는 권력과 법률은 가난한 이들에게는 무자비하고 가혹할 뿐이라는 것을,  공장에서 일하다 쫓겨나 아이를 위해 창녀가 된 팡틴의 삶이 그러했고 가난한 장발장이 빵 하나 훔쳐 먹은 것이 평생을 도망자로 만들었듯이 사회의 권력과 법률이 작동하는 매커니즘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공정을 추구하는 권력의 상징자 자베르가 자신이 권력자의 도구이며 하수인에 불과한 현실을 깨닫고 자살을 선택하였던 것은 미처 자각하지 못하였던 민낯의 추악함을 차마 받아들이지 못한 탓이다. 태어나자마자 씌워진 사회적 페르소나를 깨닫지 못하고 사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에 가장 가까운 캐릭터가 바로 자베르가 아닐까. 현대의 부조리와 모순에서 자신을 잃은 채로 살아가며 기득권들의 권력과 법률에 이용당하며 체제의 수단이 되어 살고 있는 수많은 자베르들이 깨어나야 비참함을 벗어날 수 있다. 


『타인의 삶』 역시도 현재의 부조리와 모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레 미제라블의 비참한 사람들보다 우리의 현재를 더 투명하게 반추하는 영화다. 베를린 장벽이 부서지기 전의 독일의 실상을 보여주는 영화는 통일 직전의 사회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통일을 앞둔 우리나라에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동독의 국가안전부에서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신념으로 똘똘 뭉쳐있던 비즐러 대위가 예술인들을 감시하게 되면서 현실을 자각하게 하는 장면은 레 미제라블의 자베르의 자각과는 다른 것이었다. 자베르가 지녔던 정의에 대한 신념만큼 비즐러는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신념으로 똘똘 뭉쳐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인간적인 면모를 지니며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있는 예술인들을 통해 잊고 있었던 인간성을 서서히 회복하게 되면서 보여주는 비즐러의 모습은 본연의 자아를 찾게 된 이의 자유와 평화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장발장을 구속하는 것만이 정의인줄 알았던 자베르가 장발장 덕에 목숨을 구하게 되자 권력을 향한 자신의 욕망이 얼마나 추한 모습인지를 깨달은 뼈아픈 자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비즐러는 사회주의 체제에서도 사랑과 믿음을 보여주고 있는 예술인을 통해 가장 인간다운 삶에 대한 회복을 꿈꾸며 자신 본연의 모습을 찾아간다. 자신의 현재를 점검하는 과정은 페르소나와 허상으로 가득한 삶에서 불순물을 걸러내 민낯의 참나를찾는 필터의 과정이다.  


현재를 자각한다는 것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민낯의 나를 발견하는 일은 때론 괴로운 일이기도 하다. 현재의 나와 타인이 보는 시선은 다를 수도 있고 그 다름에서 오는 괴리감은 고통이 되기도 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 같지만 사실 현재라는 시간 안에는 수많은 모순과 부조리가 도사리고 있다. 현재의 모순과 부조리까지 이해하고 수용하며 세상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과정을 겪어야만 자신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다. 현실에 대한 뼈아픈 자각이 있어야만 민낯의 나를 만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현재를 얼마만큼이나 이해하고 있을까? 


그림자 무사를 의미하는 영화 『카게무사』는 우리나라 『왕이 된 남자, 광해』와 유사하다. 영주가 죽자 영주와 가장 닮은 무사가 영주의 역할을 한다는 설정인데 허상과 현실의 연결을 카게무사라는 그림자 무사가 담당하고 있다. 허상이 현실을 지배하는 가상의 세상은 권력의 이데올로기가 숨긴 진실을 들추어내어 준다. 구로사와 감독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노부가와가 아닌 이름도 성도 없는 무명의 무사가 허상위에 직조해가는 현실의 무대를 통해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를 신랄하게 고발하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역사를 대놓고 조작하고 있는 중국의 동북아공정이나 일본인들이 위안부에 대한 사과를 거부하며 위안부를 창녀로 왜곡하고 부정하고 있는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는 이러한 현실의 왜곡된 역사와 허상이 본질을 어떻게 날조하고 있는지를 돌이켜보게 한다. 장자의 ‘호접몽’처럼 잠에서 깨고 나니 꿈이 현실인지 현실이 꿈인지 모르는 것처럼 우리의 현실은 끊임없는 의심과 철학적 사색이 바탕이 되어야만 삶의 깊이에 다가갈 수 있다. 현재의 상황은 겉으로 보는 것과 실재의 본질은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현재라는 씨줄과 가상 세계라는 날줄이 만나 직조해 만들어내는 영화라는 이야기는 현재라는 본질에 다다르게 하는 또 다른 창이다. 현재를 기록하는 한, 우리는 모두 작가라는 롤랑바르트의 말처럼 현재를 이해하는 한, 풍요로운 삶을 보낼 수 있으며 삶의 본질에 다가가게 한다. 그 점에서  『영화 속 역사와 현실』은 우리의 민낯을 마주할 수 있게 하는 인문학이라는 창窓으로 읽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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