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자 선언 - 판사 문유석의 일상유감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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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 선언은 무척 오래 들고 다니며 읽었는데, 챕터별로 나뉘어져 있어 시간 날 때마다 꺼내 읽기가 좋았다. 무엇보다 많은 생각꺼리를 제공해주는 것이 가장 좋았다. 우리 사회의 문제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인간 혐오로 시작하는 프롤로그를 읽다보면 공감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누구나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나 역시도 인간을 그닥 좋게 여기진 않는다. 사람들과 무리지어 다니는 것도 싫어하고 집단논리에 빠져 무조건 옹호하는 건 가장 혐오하는 행동인데다 가장 비슷한 면이 사람 많은 곳은 피해다닌다는 것이다. 특히나 산에 갈 때 아는 사람을 만날까봐 오히려 반대방향으로 가거나 인적 드문 곳으로 돌아가곤 하기도한다. 그렇다고 내성적인 성격은 아니다. 사람 만나는 게 귀찮다기 보다는 그 사람으로 인해 내 개인적인 시간을 방해받기 싫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만큼 나는 내 시간에 대한 방어벽이 다른 이들보다 강할 뿐이다. 여러 사람을 사귀는 것 보다 마음에 맞는 사람 두 서명만 곁에 두는 성격이라 나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은 까칠하거나 차갑거나 싸가지 없거나로 생각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하지만 사람은 타인이 보는 방향에서 그 사람의 성품이 결정되지는 않는다. 타인의 평가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므로 그것까지 고민하고 살기에는 살아가는 시간이 너무 짧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 우리 인생의 반 이상은 타인들의 틀에 맞추며 입맛에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천편일률적인 사고를 지향하는 사회분위기에서는 그 어떠한 개성은 존중받지 못하는 것도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주의의 부재, 개성의 거부가 아주 오래된 우리 사회의 고질병이 될 수밖에 없던 이유를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에서 들을 수 있다. 평창올림픽의 외신들의 찬양을 들어보면 총이 없어도 안전하게 거리를 다닐 수 있는 나라라는 것이 놀랍다는 반응이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외국인들 눈에 살기 좋은 나라로 꼽히는 나라중의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왜 우리는 불행한 걸까. OECD국가 중 자살율 1위를 몇 년째 고수하고 있는 우리나라. 만약 이 불행이라는 말에 의문을 제기한다면 당신은 행복한 나라에 살고 있다고 믿으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왜 불행하기만 한 걸까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면, 모두가 불행에 대해서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나 역시도 왜 우리는 불행한 걸까?라는 말을 들으면 그냥 동의가 된다. 나 역시도 마음 저변에 불안과 불행이 자리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어쩌면 그 불행의 저변에는 집단주의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모르게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개인주의자 연습

책을 읽으면서 나의 불안과 불행에 대한 점검을 하다보니 굳이 집단주의 문화가 집단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의식하며 살아오는 우리의 환경자체가 집단주의 문화의 영향이라는 것을 비로소 이해했다. 타인과의 비교가 행복의 기준이 되는 사회의 분위기 자체가 집단주의에 매몰되어 우리에게 거대한 족쇄를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개인의 삶으로는 행복한 삶인데 타인과 비교하게 되며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에서 오는 불행은 자신을 한없이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이라 여기며 자책감하게 된다. 이러한 자책감이 심해지면 우울증이나 정신병에 시달리게 된다. ''라는 개인에 대한 철저한 자각이 없이는 집단의 안일함에 물들어 더운 물에 자신이 삶기고 있는지도 모른 채 서서히 죽어가는 냄비 속 요리안의 개구리 같은 삶을 살아 가게 되는 것이다. 태어나보니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늘 타인과 끊임없이 비교당하며 살아온 한국인의 삶은 불행하다 할 수 있다. 무표정한 한국인들, 이번 생은 처음이라서 다음 생의 행복을 기약하는 것인지, 죽어라 일만 하면서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현대인들의 군상들을 보며 우리들의 불행은 이 개인주의에 대한 몰락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이다. 타인과의 비교를 멈추면 비로소 괜찮은, 그것도 꽤 괜찮은 존재의 자아가 누구에게나 있다.

 

저자 문유석은 타인과의 비교에 대한 집착이 무한경쟁을 낳고 자존감 결핍으로 인한 집단 의존중은 집단의 뒤에 숨은 무책임한 이기주의와 쉽게 결합하며 익명의 가면을 쓰고 무리를 지으며 잔혹해지는 대중의 속성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우리 사회에 넘쳐나는 폭력들, 여성혐오와 소수자들을 향한 차별, 극심해지는 온라인 악플들과 지나친 마녀사냥, 차별로 인한 다문화 가정의 눈물, 자기보다 못한 이들을 향한 가진 자들의 조롱, 말이 흉기가 되는 세상에 대한 모든 것들의 저변에 깔려 있는 집단이라는 속성이 개개인의 불행을 가져오는 부메랑이라 한다. 사회의 지나친 집단주의화는 개개인의 자유를 말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IT강국이라는 명성이 부끄러운 것은 평창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선수의 실격으로 메달을 탄 선수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찾아가 수많은 이들이 살해협박을 비롯한 온갖 악플을 다는 면에서도 IT최강국의 집단적 위력이 얼마나 무섭고 위협적인 것인지를 새삼 깨우쳐주기 때문이다. 그런 현상들이 우리 개개인이 얼마나 타인에 대하여 각박하며 한 치의 타협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개개인이 행복해야 나라가 행복하다. 주체적인 국민들 개인의 행복이 나라 전체의 행복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지 집단이나 무리가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습관화된 집단주의를 버리고 개인의 행복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


만국의 개인주의자들이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 그대들이 잃을 것은 무난한 사람이라는 평판이지만, 얻을 것은 자유와 행복이다. 똥개들이 짖어대도 기차는 간다. -P58


기억하고 싶은 구절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p23


인간이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니 과잉 기대도 말고 과장된 절망도 치우고 서로 그나마 예쁜 구석 찾아가며 참고 살자 싶다. 큰 기대 않고 보면 예쁜 구석도 꽤 있다. 이건 결국 자기변명이다. 그래야 남들이 나도 참아줄 테니, 어차피 사람들을 피해 혼자 살 것도 아니면서 인간의 본질적 한계, 이기심 위선, 추악함 운운하며 바뀌지 않을 것들에 대해 하나마나한 소리 하지 말고 사회적 동물로 태어난 존재답게 최소한의 공존의 지혜를 찾아가자. 그게 각자의 행복 극대화에도 최선의 전략일 것이다. -p18


왜 개인주의인가. 이 복잡하고 급변하는 다층적 갈등구조의 현대 사회에서는 특정 집단이 당신을 영원히 보호해주지 않는다. 다양한 이해관계에 따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전략적으로 연대하고, 타협해야 한다. 그 주체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개인이 먼저 주체로 서야 타인과의 경계를 인식하여 이를 존중할 수 있고, 책임질 한계가 명확해지며, 집단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에게 최선인 전략을 사고할 수 있다.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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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선언
#인문 #베트남여성의죽음


2007년 7월 열아홉 살인 베트남 여성 후안마이가
마흔 여섯 살인 한국인 남편에게 무차별 구타당해 갈비뼈 18개가 부러진 채 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로부터 6개월 전, 막노동을 하던 남편은 국제결혼 중개업체에 전 재산에 가까운 돈 천만 원을 주고 베트남에 가서는 수많은 여성들 중 후안마이가 한국인과 비교적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단 몇 분 만에 배우자로 선택한 후 당일로 바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말이 통하지 않은 채 결혼생활을 했다. 후안마이는 죽기 전날 남편에게 아래와 같은 내용의 베트남어로 편지를 남겼다.

 
★후안마이 편지

당신과 저는 매우 슬픕니다. 제가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한국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한국에서도 부인이 기뻐 보이지 않으면 남편이 그 이유를 물어보고 책임을 져야 되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남편은 왜 오히려 아내에게 화를 내는지, 당신은 아세요?

남편이 어려운 일 의논해 주고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아내를 제일 아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중략) 저는 당신의 일이 힘들고 지친다는 것을 이해하기에 저도 한 여자로서, 아내로서 나중에 더 좋은 가정과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당신은 아세요?

저는 당신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당신은 왜 제가 한국말을 공부하러 못 가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저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대화하고 싶어요. 당신을 잘 시중 들기 위하여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마시는지 알고 싶어요. 저는 당신이 일을 나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것을 먹었는지, 건강은 어떤지 또는 잠은 잘 잤는지 물어보고 싶어요. 제가 당신을 기뻐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도록, 당신이 저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려 주기를 바랐지만, 당신은 오히려 제가 당신을 고민하게 만들었다고 하네요.

저는 한국에 와서 당신과 저의 따뜻하고 행복한 삶, 행복한 대화, 삶 속에 어려운 일들을 만났을 때에 서로 믿고 의지하는 것을 희망해 왔지만, 당신은 사소한 일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화를 견딜 수 없어하고, 그럴 때마다 이혼을 말하고, 당신처럼 행동하면 어느 누가 서로 편하게 속마음을 말할 수 있겠어요. 당신은 가정을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큰일이고 한 여성의 삶에 얼마나 큰일인지 모르고 있어요. 좋으면 결혼하고 안 좋으면 이혼을 말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에요. 당신이 그렇게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진실 된 남편으로서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제가 당신보다 나이가 많이 어리지만, 결혼에 대한 감정과 생각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있어요. 한 사람이 가정을 이루었을 때 누구든지 완벽하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이해해야 되요.

물론 부부가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의 상처가 너무 많아 결국 이혼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한 사람의 감정을 존경하고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닫아버리게 하는 상황들과 원망하게 하는 상황들이 무관심하게 지나가게 되요.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자존심이 있고 자신을 ‘정답’에 서게 하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부부가 행복할 수 없고 위험하게 만드는 일을 계속 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거에요. (중략) 당신은 저와 결혼했지만, 저는 당신이 좋으면 고르고 싫으면 고르지 않을 많은 여자들 중에 함께 서 있었던 사람이었으니까요.

 

당신은 아세요? 제가 당신과 결혼하기 전에는 호치민 시에서 일을 했어요. 당신이 우리 집에 왔을 때 우리 집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어요. 저는 가정을 위해서 일을 나가야 했고, 그 일은 매우 힘들었어요. 하지만 봉급은 얼마 못 받았지요. 저는 노동이 필요한 일도 했었어요. 그 일은 매우 힘들었어요. 그것이 가축을 기르는 일이든, 농작을 하는 일이든... 가족들은 노동일로 벼를 심고 베는 일을 했어요. 베트남에서 그렇게 많은 일을 했어도 입을 것과 먹을 것만 겨우 충당할 수 있었지요. 그래서 제가 한국에 왔을 때에 더이상 바라는 것이 없었고, 단지 당신이 저를 이해해 주는 것만을 바랐을 뿐이에요. 저도 일을 해봤기 때문에 일을 어떻게 하고 또 그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제가 베트남에 돌아가게 되도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거에요. 저는 당신이 저 말고 당신을 잘 이해해주고 사랑해 주는 여자를 만날 기회가 오기를 바래요. 당신이 잘 살고 당신이 꿈꾸는 아름다운 일들이 이루어지길 바래요.

 

저는 베트남에 돌아가 저를 잘 길러주신 부모님을 위하여 다시 처음처럼 일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저의 희망은 이제 이것뿐이에요. 당신과 전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이어서 제가 한국에 왔을 때 대화를 할 사람이 당신뿐이었는데... 누가 이렇게 될 것이라 생각할 수 있었겠어요. 정말로 하느님이 저에게 장난을 치는 것 같아요. 정말 더 이상 무엇을 적을 것이 있고 말할 것이 있겠어요. 당신은 이 글씨 또한 무엇인지도 모르고 이해하지도 못할 것인데요.

 ****

사건 당일, 술에 취해 귀가한 남편은 후안마이가 가방에 여권과 옷을 꾸린 채 외출복 차림으로 있는 것을 보고는 사기결혼을 당하여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격분하여 그녀를 살해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이 사회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모르는 것이야말로 수치를 모르는 일이 아닐까.

 

-개인주의자 선언 중에서

 

매일 아침 좋은 글을 오늘은 후안마이의 편지로 대신한다.

좋은 글이 넘치는 세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문은 삶의 잔인한 면들을 인정할 때 비로소 사유가 시작되는 학문이라 생각된다. 세상에 넘쳐나는 잔인성, 그 잔인함은 먼 이국땅에서 날아와 한국에서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을 치던 어린 여성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우리 사회의 민낯을 직시하는 것이야말로 인문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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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밑줄 #인문
#개인주의자선언

세상을 아군과 적군, 정의와 불의로
이분법적 사고하는 이들은 천사도 악마도 아닌
인간의 비현실적인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일방적인 기대심리를 투영하여
과잉 열광하거나 조금이라도 자기 기대와
다른 모습을 보면 배신자 취급을 하며 돌을
던질 것이기 때문이다.

평생 하루하루를 분노,절망,투쟁,당위만으로
채우는 것을 신성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불행하다.
그리고 이들이 이끌고 가는 곳에 행복한 유토피아가 있을 리 없다.

인류역사에는 언제나 비극이 가득했지만,
그 어떤 불행한 시대에서도 인간이 행복하고자
하는 것은 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개인주의자 선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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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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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일생을 세 조각으로 나눈다면 처음 한 조각은 그저 떠나보내는 조각들로 채워지고 두 번째 조각은 현재라는 찰나의 조각이고 나머지 한 조각은 두 조각들의 잔해로 사는 것 같다. 우리의 일생은 기억만으로 충분한 시간들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백세 시대라 하여, 우리의 생의 시간들이 예전보다 연장된 삶을 살고 있지만, 나는 그 연장된 시간 역시도 우리는 어느 순간에 멈춰서서 지난 시간들을 추억하는 것만으로 시간을 채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에서도 도리고 에번스의 일생은 세 조각으로 나뉜다. 그저 의미 없이 흘러가던 어린 시절의 불확실한 시간의 기억들과 항상 현재인 것만 같은 사랑과 전쟁의 잔해와 두 조각들의 추억과 회한들로 보내는 노년의 조각들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누구나 세 조각의 기억을 갖고 산다. 바빴던 부모님을 둔 덕에 늘 부모님의 뒷모습이 어린 시절의 잔상처럼 남져진 것처럼, 도리고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은 형 톰이 이웃의 재키 맥과이어 부인과 키스하고 있던 장면이 전부다. 마치 에이미와의 불륜이 이때부터 예정되어 있던 것처럼, 그의 생의 방향은 오로지 에이미를 향해 있다는 것을 항변한다.


도리고의 두 번째 생의 조각은 대동아공영이라는 일본의 야욕으로 인해 포로가 되어 일본군의 철도 라인에 참여하는 기억들이다. 외과 의사였던 도리고는 대령의 신분이어서 일본인들에게 장교의 대우는 받았지만 역시나 고통스러운 기억들이다. 다른 이들의 실상은 더위와 더러움과 역겨운 냄새와 죽음이 도처에 있었지만, 도리고에게 찾아온 에이미와의 사랑은 죽음과 연관된 모든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을 천국의 기쁨이었다.

 

일본인들에게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천황의 뜻'으로 통하는 무적의 정신앞에서 포로들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불가능을 필로폰에 의지해서라도 이루려고 하기에 인간의 한계에 다다른 상태에서도 철도라인을 성공시키려 하는 무모함과 더불어 무식함이 있었다. 턱없이 부족한 인력에 몰아치는 철도공사에 죽어나가는 포로가 더 많은 현실에서 채찍질을 멈추지 않는 일본인들의 모습은 흡사 악귀처럼 그려진다. 게다가 천황폐하의 의지를 보여주겠다며 아픈 다키를 죽을 때까지 매질하여 숨지게 하는 장면은 전쟁의 잔혹성과 일본인들의 잔인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전쟁 한 가운데에도 사랑은 피어난다. 휴가를 나가 만나게 된 키스 고모부의 부인 에이미를 본 순간, 사랑에 빠진 도리고의 모습은 소설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이들의 사랑은 죽음으로 인해 삶이 무의미해지는 전쟁속에서 인간의 삶에서 가장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동료의 죽음을 보며 아직 살아있다는 것에 안도하다가도 스쳐가는 죽음의 바람소리에 잠 들지 못하는 시간을 살고 있는 도리고에게 에이미만이 숭고하고 순결한 상징처럼 도리고의 시간을 잠식해간다.

 

호텔을 운영하며 짬짬이 시의원이라는 일도 열심히 했던 키스와 에이미 사이에 균열이 생긴 건 도리고 때문이 아니었다. 아름답고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에이미는 결혼 전 키스의 아이를 임신하였지만 키스의 강요로 유산을 한다. 강요된 유산은 결국 에이미에게 치명적인 상처가 되어 에이미 뱃속에 자리잡았고 이후 에이미는 잠시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한다. 그 균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것이 도리고였다. 사랑은 상처나 균열로 침범하여 돌이킬 수 없는 질병을 유발하는 바이러스이다. 둘의 사랑은 깊어가고 대담해져 갔고, 결국 키스에게도 둘의 관계가 알려진다. 부대에서 소식을 전해들은 도리고는 오히려 에이미에게 결혼을 맹세한다. 하지만 이후 도리고가 속해 있는 부대가 전쟁으로 인해 모두 사망했다는 소식이 에이미에게 전해진다.


그리고 세 번째 조각은 이후 에이미만을 추억하며 남은 생을 보내는 도리고와 살아남은 자들의 추억과 회환으로 점철된 노년의 조각들이다. 도리고는 일본의 패배로 오스트레일리아의 포로로 많은 이들의 생명을 살린 전쟁영웅으로 유명해졌고 외과 의사로서도 명성을 떨치며 살고 있다. 반면 일본인 장교였던 나까무라는 전쟁범죄자로 수배령이 떨어졌고, 마약중독자로 살다가 다시 새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가운데 최상민이라는 포로경비병의 이야기는 가장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작가가 조선인 포로의 이야기를 이처럼 문제적으로 접근하여 현실감 있는 캐릭터로 그려냈다는 것에 우선 놀라웠고,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가 제3자의 시선에서 더욱 처절하게 인식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최상민의 생의 세 조각은 가난한 조선인으로 태어난 어린 시절과 일본인 가정의 하인으로 들어가 매달 2엔과 혹독한 매질을 받고 살았다. 이후 포로수용소 경비병으로 자원하면 50엔을 준다고 하여 이곳까지 온 것이 전부다. 그의 여동생은 정신대에 팔려갔다. 일본이 패망하자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수가 되었는데 그에게 남아있는 생의 기억이란 그저 '50'이라는 돈이었다.

위대한 조선이라니 무슨 소리야? 최상민은 이렇게 생각했다. 50엔은 어디 있어? 난 조선인이 아니야. 난 일본인도 아니야. 난 식민지 백성이야. 50엔은 어디 있어? 어디 있냐고.-P426

 

현재라는 찰나의 시간은 때론 미래의 영원 속에 존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도리고가 에이미와의 사랑을 추억하며 그 기억만으로 남은 시간들을 살아내는 것처럼 우리는 세 번째 생의 조각에서는 지난 시간위에 생을 덧칠하며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기억을 재단하고 편집하며 왜곡하는 과정을 겪으며 다시 아름다운 나만의 이야기를 써내려 가는 것이 일생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이 이런 과정에 접어든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음을 나는 이제 알 것 같다. 만약 도리고와 에이미의 사랑이 이루어졌더라면 도리고가 그처럼 에이미를 추억하며 살진 않았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다만, 그 현재의 찰나의 시간들이 주었던 그 여운이 너무 진하였기 때문에 그 여운만으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수많은 여자들과 바람피는 것만이 에이미에 대한 순결을 지키는 것이라는 이율배반적인 변명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소중한 기억의 한 조각만으로도 남은 생의 조각을 채워갈 수 있다. 사랑한 순간들의 기억은 남은 생의 시간을 전부 채우고도 남는다. 도리고가 그러했던 것처럼. 전쟁의 잔혹함과 사랑의 숭고함이 너무나 아름답게 펼쳐지는 생의 서사시였다.

 

****기억에 남는 구절

 

도리고 에번스는 미덕을 싫어하고,미덕이 찬양받는 것도 싫어하고,그에게 미덕이 있는 것처럼 구는 사람들도 싫어하고, 덕이 있는 척 행세하는 사람들도 싫어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덕이 있다는 칭찬아닌 칭찬을 들을수록 그는 미덕이 더욱더 싫어졌다. 그는 미덕을 믿지 않았다. 미덕은 잘 차려입고서 갈채를 기다리는 허영이었다. -p75


에이미에게 사랑은 우주에 닿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우주 안으로 폭발하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우주 안으로 폭발해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세상을 파괴하는 멸절이었다. -p202


그가 끊임없이 바람피우는 것은, 좀 기묘한 방법이긴 해도, 에이미의 기억에 대해 정조를 지키는 행동이기도 했다. 마치 엘라를 배신함으로써 에이미를 기리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p491


사랑은 두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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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 #영화
#나를위한국가는없다

동해에서 고기를 잡아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어부가 있다. 그의 이름은 남철우, 류승범이 열연했다. 류승범의 연기는 이제껏 보아왔던 연기와 다를 정도로 눈에 힘이 들어가 있었고 북한어의 완벽한 사투리와 억양으로 더욱 실감나게 북한인으로 보여진다.

영화는 북한의 어부 남철우가 그물이 엔진에 걸려 고장이 나게 되자, 남한에 표류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이때 남철우가 간첩인지 일반인인지의 감별이 우선 포인트이다. 이 감별은 물론 정확하지 않다. 간첩이라는 전제하에 심문하는 조사관은 자신의 아버지가 6.25때 빨갱이들에게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북한사람을 빨갱이라 부르며 가혹한 고문을 한다. 군사기밀지역에 산다는 이유로, 배 엔진이 다 탔다는 이유로, 몸이 근육질이라는 이유로, 남철우는 이미 간첩이 되어 있었다.

공산국가 VS 자유국가

랑시에르의 자발적 복종에는 이런 말이 있다.
‘멍에를 지고 노예 상태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사람들도 전 세대가 어떤 삶을 누렸는지 알지 못하고 그들이 태어난 대로 사는 것에 만족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재산, 어떤 권리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선 더 이상 생각도 하지 않고 출생 당시부터 주어진 삶의 조건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여기게 된다.‘

매일아침 ‘우리의식솔‘이라 쓰여진 김정은과 김일성 수령의 사진을 보고 눈을 뜨는 남철우의 일상에서도
감시와 억압은 매우 자연스러운 상태이다.


그런 남철우에게 남한의 자유는 부자연스럽기만 하다. 자신이 가는 곳마다 비춰지는 CCTV의 존재, 조사관의 가혹한 고문, 휘황한 네온사인 뒤 후미진 골목에서 이뤄지는 여성폭행은 남철우의 눈에는 전혀 다른 감시와 억압의 공포로 다가온다.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는 짙다.

남철우의 정직함과 우직함을 응원하고 함께 해주는 경호원청년과 남철우는 무조건 간첩일 수 밖에 없다는 조사관의 힘겨루기에서 결국 남철우는 간첩이 아닌 것으로 결정이 난다.

국정원에서는 남철우에게 전향을 하면 돈과 결혼과 집을 준다고 회유를 하지만, 남철우는 고향에 두고 온 가족과 조국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그의 신념은 자유의 맛을 보여주기 위해 국정원에서 남철우를 서울도심 한복판에 떨어뜨려 놓았을때 자본은 악의 존재라는 이유로 한참이나 눈을 감고 걷는 모습에서 엿볼 수 있다.

계속된 회유에도 북에 돌아가겠다는 고집을 꺾지 못하자, 일주일만에 북으로 돌아가게 된 남철우.

북으로 돌아가는 날,
자신을 괴롭혔던 조사관을 재떨이로 패고 똑바로 살라는 일침을 가하고 돌아서는 철우에게 조사관은 목에 핏대를 올리며 애국가 1절을 부른다. 자신의 색깔론은 오로지 애국심의 발로라는 것처럼, 태극기부대와 묘하게 오버랩된다.

수리 된 배에 올라 남한에서 준 옷을 모두 집어던지고는 팬티바람으로 배를 타고 떠나는 남철우의 뒷모습은 뒤도 돌아보기 싫은 혐오감이 읽혀질 정도로 단호하다. 아니나다를까. 그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화환을 목에 걸고 조선인민민주주의 만세!!!를 열창하며 땅을 밟는 순간 안도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남철우는 보위국에 이끌려 남한의 조사관보다 더욱 혹독하고 악랄한 고문을 받는다. 고문을 받던 중, 위대한 영웅이라며 방송에 나가는 사진을 찍느라 눈물이 가득고인 얼굴로 억지웃음을 짓는 남철우 영웅동지의 모습에서 말못할 고통과 회한이 전달된다.

배가 아파 화장실을 찾은 남철우의 변에서 비닐에 쌓여있는 달러를 찾아온 보위국 사람들은 남철우에게 달러는 평생 비밀로 해줄테니 풀어주겠다고 한다. 대신 달러는 자기들이 쓰겠다고.

위대한 남철우 영웅동지, 자본의 유혹을 물리치고 돌아온 영웅동지 남철우는 변에 섞인 달러덕에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오는 남철우의 모습에는 자신을 지탱해주던 모든 신념과 믿음이 빠져버린 초췌한 몰골이다.

아내는 보위국에서 당한 채찍질로 뽀얀 살결에 빨간 생채기가 군데군데 나 있고 남철우는 아내의 노력에도 성불구가 됨 사실을 알게 되자 둘은 벌거벗은 몸으로 끌어안고 운다. 세살배기 딸아이의 머리 위에는 우리의 식솔이라며 김정은과 김일성이 그 가족을 내려다보고 있다.

나를 위한 국가는 없다

남철우가 경험한 전혀 다른 모습의 감시와 억압은 국가와 개인의 극단적인 형태를 말한다. 국가가 감시와 억압의 주체인 나라에서 자란 남철우. 태어나면서 억압되지 않는 자유는 보장되지만 온라인의 발달로 개인에 대한 감시는 강화된 남한의 시스템을 남철우는 이해할 수 없을 뿐더러 공산국가의 억압과 같은 것으로 본다. 남한의 CCTV와 휘황한 네온사인, 빠른 정보는 오히려 남철우에게는 엄청만 공포였던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통해 분단국가인 작금의 현실을 보면서 국가는 개인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을 일깨우게 된다. 나를 위한 국가는 없다. 다만, 우리는 우리 개인의 정신을 믿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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