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리커버 특별판)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 동녘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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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혁명가 김산을 만났다

몇 년 전 중국인 혁명가들의 역작을 다뤘던 중국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중국이라는 나라의 정신적 뼈대는 이들 혁명가들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었을까를 생각하며 우리나라 혁명가들의 이야기가 무척 듣고 싶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조선인 혁명가들의 이야기는 시대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밭에 나가 일을 하고 거둔 곡식들은 모두 일본인들에게 착취당했고 가난을 벗어날 길이 없었던 조선인들은 글을 배울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가난과 무지, 이것은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조선인들에게 역사의 기록이란 부르조아의 전유물이었던 것이다. 혁명가들은 이런 현실을 매우 잘 알았다. 이들은 산을 깎아 만든 신흥학교에서 조선 독립을 위해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전술과 전투를 배웠다. 제국주의라는 시대격변속에서 식민지 민중이었던 독립군들의 삶은 중국인들의 그 어떤 투쟁보다도  격렬하고 더 방대하였으나, 열악한 환경은 조선 혁명가들의 삶을 역사에 잠들게 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만 한다. 

 

이 책 아리랑1941, 미국에서 출판되었지만 곧 사라졌듯이 수많은 자료와 기록들은 일본의 왜곡과 방해로 역사속에 잠들어 있었다.  한국인은 조선혁명가들의 이름보다는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와 같은 이들의 삶을 더 잘 안다. 그것 자체가 우리의 비극이며 우리의 민요 아리랑의 슬픔인지도 모른다. 

 

첫 장을 넘길 때는 님 웨일즈가 김산(장지락)의 전기를 다룬 책이리라 예상하였다. 예상은 틀렸다. 님 웨일즈가 김산을 만났을 때 그는 중국 비밀 공산당원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님웨일즈는 기자로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만났고 그들의 삶에 주목했다.  그 수많은 혁명가들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 김산이었다고 한다. 첫 눈에 매료된 김산에게 님 웨일즈는 책을 집필할 것을 제안하였고 김산의 방대한 일기와 구술을 바탕으로 이 책이 탄생하게 되었다. 님 웨일즈가 나중에 안 사실은 김산은 혁명가이면서도 시대에 보기드문 시인의 감성을 가졌었고 작가로서 훌륭한 글을 써왔다는 것이었다. 

 

나에게 젊은 시절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마도 조선이란 나라가 자기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춘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리라.-p56

 

그랬다. 김산이 기억하는 조선에서의 어린 시절은 죽어 있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태생적으로 가난했던 조선인들의 삶에서 김산에게는 오로지 민족의 해방이라는 거대한 숙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가치있는 삶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어린 나이에 맨 몸으로 뛰쳐나온 것은 오로지 그 이유였다. 일본인들과 싸우는 삶. 이후 그는 일본과 중국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한 삶을 걷는다. 

 

우리는 조선인이 천성적으로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존재라는 편견을 때려부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인 용기를 세계 만방에 떨치면서 영웅적으로 죽어갈 생각이었다.-p57

 

내 인생에 행복했던 기억은 하나도 없다. 나는 역사에 밀착해서 살아왔다. 역사는 목동의 피리 소리에 맞춰서 춤추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부상자의 신음소리와 싸움하는 소리 뿐이다. 투쟁하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이다. 그 밖의 것은 모두 내 세계에서는 하나도 의미가 없다. 바로 그 투쟁의 대립물 속에 나와 인간생활의 일치가, 나와 인간역사의 통일이 존재하는 것이다.-p68

 

혁명가들의 신음소리, 오로지 투쟁만 있는 삶이 김산의 일대기이다가출 후 무조건 신흥학교를 찾아가 조선독립을 위해 살겠다는 말을 했을 때, 그는 고작 16살이었다. 작은 형의 지원으로 일본에 갔지만,  수 천명의 조선인과 중국인이 대학살을 당하자 중국으로 피난을 가게 되면서 자연적으로 의열단에 가입하게 된다. 1924년 의열단은 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로 분열이 되기 시작하는데 김산은 이미 정신적인 지도자이자 이상이었던 톨스토이의 이념대로 무정부주의자의 길을 걷게 된다. 같은 노선을 걸었던 혁명 동지들 김약산과 오성륜의 일화는 당시 혁명가들의 얼마나 치열한 투쟁을 했는지를 엿볼 수 있으며 동시대를 살며 같은 고민을 하였던 안창호와 이광수의 등장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꺼내 돋을새김 하는 과정과도 같았다그만큼 조선 혁명가들의 삶은 생경하면서도 익숙하였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사랑도 투쟁과 같았다. 김산은 여성을 사랑한다는 것이 혁명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지만, 두 동지들은 사랑도 혁명처럼 했다. 혁명과 사랑에 대한 김산의 고민은 투쟁에 전생을 저당잡힌 한 인간의 고뇌와 같은 것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김산에게는 낭만적이면서도 혁명이라는 과업 앞에서는 허무한 것으로 여겼고 욕망을 참지 못하는 것도 혁명의 모순이라 이해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랑을 하고나서야 세상에 빛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는 장면에서는 혁명가의 비운의 삶을 상기시켜주기도 한다.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사실하나만으로 그들의 피는 들끓었다. 그 역시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을 했고 그러면서 죽음과 동행했다. 그가 사랑한  아리랑을 일본 감옥과 중국 감옥에서 부르며, 님웨일즈에게도 불러 주었을 때도 그는 아리랑의 비극이 언젠가는 민족해방의 승리로 바뀔 것임을 믿었다. 

 

내 전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우리나라의 역사도 실패의 역사였다. 나는 단 하나에 대해서만-나 자신에 대하여- 승리했을 뿐이다. -p464

 

비극은 인생의 한 부분이다. 억압을 딛고 일어서는 것은 한 인간의 영광이요, 굴복하는 것은 한 인간의 수치이다. 내게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제국주의 전쟁 속에서 자신들의 생명을 맹목적으로 포기하는 모습을 본다는 것이 비극이다. 그것은 낭비인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를 억누르는 데 이용당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 내게는 비극이다. 그것은 어리석음이다. 자유를 위하여, 자기들이 믿고 있는 것을 위하여 싸우다 의식적으로 죽는 것은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영광이요 장렬함인 것이다. 죽음은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니다. 스스로 믿고 있는 하나의 목적으로 위해 자발적으로 싸우다 죽는 것은 행복한 죽음이다.-p472

 

이 책은 김산의 책이었다. 님 웨일즈가 만난 김산의 이야기가 아닌 암호로 쓰인 김산의 일기가 그의 책이  되었다.  집필 당시 김산은 전쟁중이었다. 동료들의 이야기가 사실적으로 쓰여있고 혁명의 날들이 기록되었기에 김산은 2년 뒤에 출간 해 줄 것을 부탁했다. 전쟁 중이며 혁명가로 살면서도 의학을 배웠고 독일어를 배웠고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마르크스 이론에 심취했으며 혁명가로 살기 위해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조선혁명가 김산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유일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남긴 김산의 노력덕분이라는 것이 고마웠고 이 책의 가치를 더욱 높게 만들어주고 있다. 그렇게 조선의 민족해방을 위해서는 투쟁만이 가치 있는 일이라 했던 김산은 1938년 일본스파이라는 오명으로 비밀 처형당했다. 이후 1983에서야 그의 신원은 불명예를 벗고 회복된다. 

 

아직도 우리는 비극 가운데 있다. 아리랑에 담긴 민족의 한, 그것은 비극이였으며 21세기를 사는 대한민국 역시도 비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건국일조차 갈등의 쟁점에 있는 한국사회에서 아리랑의 마지막 구절은 승리로 쓰고 싶다고 한 혁명가의 염원을 보며 이제 우리도 변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의 자유는 수 천, 수 만의 조선인이 희생한 댓가라는 것을 잊고 산다면 우리는 또 비극의 역사를 써야만 할 것이다. 


 20181030일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권이 전원합의체로 판결되었다. 그동안 왜곡과 조작으로 강제지용자들을 조선반도 출신의 노동자로 여론전을 펼쳐오며 왜곡의 역사로 일관해왔던 일본은 처음으로 강제징용의 불법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와 맞물려 방탄소년단의 도쿄 공연이 일방적으로 취소가 되었다.  방탄소년단의 공연 취소는 방탄소년단의 멤버 지민이 광복티셔츠로 비롯된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강제징용 청구권 승소에 대한 반발이라는 정치적 시각이 더 지배적이다.  아직도 일본과 한국은 길고 긴 투쟁중에 있는 것을 보여주는 헤프닝이기도 하지만, 방탄소년단이 지닌 문화적 힘이 정치권력까지 움직일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님 웨일즈가 김산을 처음 만난 날은 1937년이었다. 그 당시에 님웨일즈는 조선인을 처음 본 것이었는데 조선인을 보고 한 말이 있다. 아마도 조선인은 극동지역에서 가장 잘생긴 민족이라며  아름답고 총명하고 우수해보이는 민족이 외형상 두드러짐이 없는 작은 일본인들에게 복종하며 살게 된 것이 생물학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안간다고. 그 말을 들으니 지금의 한류는 우연이 아닌 우리 민족은 원래 우수했던 것이다. 작금에도 방탄소년단으로 인해 일본의 식민지 만행이 폭로되고 있으니 아리랑의 마지막 구절은 진정 희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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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 - 인지 과학이 밝힌 진보-보수 프레임의 실체
조지 레이코프 & 엘리자베스 웨흘링 지음, 나익주 옮김 / 생각정원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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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는 사회 분위기 때문인지 스스로를 진보나 보수로 정치색을 단정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음을 볼 수 있다이들은 희안하게도 어떤 정책적인 문제에 닥치면 진보나 보수의 노선을 충실히 따라간다예를 들어 무상급식이나 무상복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천편일률적으로 최저임금 인상 또한 반대를 하며 세월호에 대한 거부감을 보인다반대로 복지의 확대와 최저임금 인상을 찬성하는 이들은 세월호 리본을 달고 다닌다이런 첨예한 갈등은 엉뚱한 곳에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곤 하는데 평창올림픽에서 한 선수가 세월호 리본을 착용했다고 하여 반대 진영의 사람들로부터 여론의 뭇매를 맡기도 했다점점 양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에 한 번쯤은 고민해 보아야만 할 문제가 바로 보수와 진보의 프레임이 아닐까한다.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적 선긋기에 대하여 인지학적 연구를 꾸준히 해왔던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를 통해 이념이라는 것은 우리의 프레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 에는 프레임의 문제에서 구체적으로 전혀 다른 생각과 입장을 갖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있다프레임 안에서 보수와 진보는 왜 극단적이며 대립적인 입장이 되는 것일까?에 대하여 레이코프와 웨흘링은 정치적인 은유에서 이 두 개념이 갈라진다고 한다.

 

저자들은 인간의 사고에 가장 중요한 네 가지 이유를 든다.

첫째사람들은 자신의 사고가 의식적이라 가정한다는 것그러나 대부분의 98퍼센트는 완전히 무의식적사고를 한다.

둘째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합리성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신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다그러나 신체와 뇌의 물리적 실재에 의존한다.

셋째많은 사람들은 추론이 보편적이라고 주장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사유한다 믿는다그러나 모두가 하나의 보편적인 추론 방식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사람들은 세계에 대해 서로 다르게 사유한다저마다의 문화적 경험과 개인적 경험을 통해 마음속에서 변별적인 구조를 습득해왔기 때문이다.

넷째사람들은 인간이 축자적으로 -세계 내에 존재하는 그대로-사물을 이해할 수 있으며사물에 대해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그러나우리는 언제나 은유를 통해 사유하고 말한다는 사실하지만 이 사실을 거의 의식조차 못 하고 산다예컨대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 은유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쉽게 추론하거나 말할 수 없다는 함정이 있다.

 

은유의 표현은 정치적 연설이나 해석에서 선호되고 있다이 은유가 지닌 힘은 매우 조작적이고 설득적인 힘을 실을 수 있기에 혹자들은 모든 은유에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말한다따라서 저자들은 은유가 어떻게 정치적 사고와 정치적 행위를 정의하는지어떻게 실제로 국가 간 전쟁을 초래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인간 인지의 기본적인 기제를 살펴보아야 하며 인간이 기본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은유로 이해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가령자유와 정의공정성과 같은 개념이 이 은유를 통해 우리의 사고를 정립해가는 과정을 유추하는 것이다이 과정에서 보수와 진보의 개인과 국가의 관계적 은유가 국가는 가정이라는 개념이다국가는 가정이라 규정할 때 국민은 자녀가 되고 정부나 정부의 수장은 부모가 된다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는 태도에서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이 나누어지는데 이때 엄격한 아버지 가정 모형이 보수적 사고를 자애로운 아버지 가정 모형이 진보라는 정치적 차이를 만든다고 한다이런 양육과정이 뇌신경 회로의 작동 방식에 영향을 주며 길들여진 은유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골자이다.

반면진보나 보수의 그 중간개념엄격하면서도 자애로운 모형의 사람들을 이중개념주의(biconceptualism)’ 소유자들로 정의하며이 이중개념주의를 지닌 사람이 진보와 보수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강조한다대부분의 선거의 승패는 사실 이중개념을 지닌 이들에게 있다스스로를 중도라 생각하는 이중개념 소유자들도 특정 사안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인 의견을 갖고 있다.

 

상당히 흥미롭게 읽히는 책이었다신문뉴스정치연예경제모든 부분에서 진보와 보수의 싸움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하지만스스로를 진보와 보수로 단정 지으며 모든 사람들을 이분법의 잣대로만 판단하려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도 사회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보수와 진보가 은유로 만들어진 프레임에 갇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같이 고민해 보았으면 한다서로에게 드리워진 은유의 장막이 걷혀야만 맨얼굴이 드러난다그때의 맨얼굴이 진짜 정치다.

 

*책속에서 

진리나 지식에 관한 한 은유는 중대한 퇴행으로 봐야 한다이 퇴행은 언어 자체의 퇴행이거나 은유적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퇴행이다-p043

 

도덕성은 정치의 아주 중요한 동력입니다더욱이 도덕성은 추상적인 개념즉 우리 마음이 은유적 사상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처리하는 개념이지요.-p063

 

보수주의를 뜻하는 conservatism은 언어적 기원이 손대지 않고 계속 그대로 두고 보존하거나 유지하는 것으로 번역되는 라틴어 낱말 conservare에서 나왔다정치적 보수주의는 전통적인 가치와 사회적 규범을 보호한다는 개념에 근거한다반면에 진보주의는 개념적으로 사회의 진보와 변화를 향한 긍정적 태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p087

 

보수적인 정책이 범죄자에게 더 엄격한’ 경향이 있고 진보적인 정책이 사회적 취약 계층에게 더 친절한’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p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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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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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이른젊다면 젊은 나이에 떠나간 시인 허수경누군가를 떠나보낸 슬픔은 아직도 우두커니 남아서 문득문득 가슴에 작은 불이 들어오곤 한다허수경 시인은 평생을 방랑자처럼 살았다자발적 방랑자를 꿈꾸었던 시인은 자신의 문학에 자신의 말을 담는 것으로 그 의미를 다했다자신의 그림자를 벗 삼아 시대를 걸었던 방랑자 시인 허수경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나 역시 무슨 말을 이 시대에 남기고 떠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는 허수경 시인의 방랑의 기록이다독일에서 고대 근동 고고학을 공부하면서 써놓았던 페이지를 읽는 일은 무척 쓸쓸했다마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경건한 수도자들과 같았고 단조롭고 관조적인 은율이 마음을 더욱 애상에 깃들게 하였다. 


그때나는 묻는다.

왜 너는 나에게 그렇게 차가웠는가.

그러면 너는 나에게 물을 것이다.

그때왜 나에게 그렇게 뜨거웠는가.

서로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때 서로 어긋나거나 만나거나 안거나 뒹굴거나 그럴 때,

서로의 가슴이 이를테면 사슴처럼

저 너른 우주의 밭을 돌아 서로에게로 갈 때,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럴 때,

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그럴 때,

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이 고맙다.

-고마웠다그 생애의 어떤 시간 (p131)



허수경 시인은 황폐한 서역땅 독일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노년의 공부는 힘들고 외로운 작업이었다가난한 코스모폴리탄의 삶을 살짝살짝 엿보면서 부와 명예보다는 가난한 독학생이 되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땅 속에 오래 잠들어 있던 수메르 문자를 번역하면서 허수경 시인은 무엇을 배우고 싶었던 것일까문득문득 궁금해지곤 한다무슨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나 역시도 공부를 놓지 못하고 있다이미 불혹이 넘었는데공부를 하는 것을 무슨 대단한 사치처럼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고할 일이 없는 사람이니까 공부를 한다는 말도 듣기도 하였다하지만공부를 하는 것은 아무 이유도 없이 시작한 것이었다뭔가 거창한 또는 대단한 이유가 있을 거라 기대하지만 공부를 하면서 몰랐던 것을 배우는 기쁨 하나 때문에 공부가 계속 이어져갔다세상에 배울 것은 너무도 많고 내가 아는 것은 정말 너무 작고 작은 일부라는 자각이 공부를 하게끔 만들었다허수경 시인도 그러했을까수많은 말 중에 자신만의 문학탑을 만들어 오로지 자신의 말’ 로 된 문학을 만들어가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그 소박한 소망이 너무도 숭고하여 타지의 외로움이 너무 사무치기에 책을 읽으면서 눈물이 왕왕 났다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라 자신의 그림자를 동무 삼아 걸어야만 했던 깊은 고독의 외길에서 잠을 자듯 조용한 죽음을 기다리며 그리움만 쌓여가는 시간의 더께위에서 춤을 추듯 하나씩 하나씩 풀어놓는 시인의 말말말...

 

낙엽비가 바람에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고독이 흘러넘치는 계절을 홀로 견디는 일은 왜 그렇게 쓸쓸한 것인지오랜 서랍장 속에서 케케묵은 기억들을 꺼내 들어서는 왜 그때는 그렇게 어리석었을까를 후회하기도 하며 왜 그때는 그토록 용감하였던 것일까 하며 자조를 하다가도 어떤 방법으로든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이제는 그땐 그랬지’ 라며 다시 시간을 되돌려도 변하는 것은 없다는 진실을 마주한다그럼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그제서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젊었을 때는 몰랐던 진정한 나의 모습을 나이가 들어 길고 긴 고독의 길에 접어들어서야 내면의 나와 악수할 용기가 생겼다고나 할까하나씩 하나씩 이야기를 꺼내 놓은 허수경시인의 이야기는 그래서 위안이 된다나의 시간을 덤으로 깨우며 내게도 남아있는 시간들은 얼마쯤 남아 있을까를 가늠해 본다나는 어디까지 왔을까잠을 자듯 조용한 죽음을 기다리는 삶 안에 나는 어떤 말을 남길 수 있을까후회와 미련이 점철된 삶에 나를 기억해 줄 나의 말그것이 허수경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문학의 본질이 아니었을까.

 

어떻게 살아야만 그 근원을 스스로 알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을까하는 거……상스러운 말그리고 그 말에 휘둘리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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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파더 1 브론크스 형사 시리즈
안데슈 루슬룬드.스테판 툰베리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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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 난무하는 세상그런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묘연하다도처에 널려있는 폭력 앞에서 사랑이나 평화라는 말은 너무 비현실적이고 무책임해 보이기까지 하다브레이크가 고장 난 채 과속하며 달리고 있는 자동차가 어쩌면 현대의 가족들의 모습이 아닐까그만큼 우리는 가족이란 목적과 의미를 상실한 채 무턱대고 달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아 반장과 부반장을 해왔고 늘 친구에게 둘러 싸여 있었던 막내가 최근 학교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학교에 여러 번 오가다보니 학교폭력이라는 것이 남의 이야기인줄 알고 있었는데 내 아이의 문제가 되고  보니 학교 폭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지를 새삼 느낀다. 가해자 부모들과 미팅을 하면서도 느꼈던 것은 학교 폭력이 왜 해결되기 힘든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매일 같이 또래들과의 노는 즐거움에 빠져있던 아이는 자신의 친구들이 좋은 친구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친구들을 멀리 하기 시작했다. 집단에서 이탈한다는 것은 그 집단에서 왕따가 될 각오가 있어야 한다.  아이와 친한 모든 친구들과의 관계를 교묘히 끊어놓았고 전혀 모르는 아이들에게조차 전화로 협박을 받는 일까지 있었다. 점점 고립되던 아이는 학교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현재는 학교와 가정에서 보호를 받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서 아이는 친구들과의 관계에 집중하던 것을 가족에게 쏟고 있다. 어쩌면 바람직한 현상이었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지능이 훨씬 높다. 그것도 나쁜 쪽으로는 더욱.  이제 더 이상 자신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는 아이에 대해 집단적인 따돌림은 교묘했고 치밀했다. 성인이라면 이미 자신들의 인생에 대한 플랜이 짜여져 있고 계획이 되어 있기에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겠지만 학교 폭력은 가정과 가정이라는 집단의 문제이기에 더욱 난제로 남겨진다.  게다가 어린 나이의 학교 폭력이라는 것은 정신이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이 한 행동에 대한 죄책감이 전혀 없다는 것이 또 하나의 큰 문제였다.  자신의 아이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과 신념으로 똘똘 뭉친 이들은 집단이었지만 피해를 당하는 내 아이는 혼자였다. 그럼에도 아이는 잘 이겨내고 있는 중이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가운데 읽게 된 범죄스릴러 더 파더 1.2』 는 상당히 의미깊게 다가왔다. 


가해자  부모들은 자신들의 아이가 집단폭력을 가했다는 자체를 믿기 힘들어했다. 눈앞에서 거짓말을 태연히 하고 있는 아이의 말이 분명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를 두둔하였고 되려 선생님이 아이에게 거짓말을 시켰다며 선생님께 화를 내는 가해자의 부모들을 모습을 보며 극단적이고 이기적인 현대가족의 복사판을 보는 기분이었다. 눈앞에서 내 아이가 거짓말을 했다면 분명 잘못을 인정하게 하고 사과를 하는 것이 기본적인 교육임에도 그 부모들은 그러지 않았다. 거짓말을 두둔했던 것이다. 그것도 선생님의 탓을 하면서. 세상은 메아리다. 자신이 한 모든 것은 언젠가 자신에게 그대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미성숙한 성인들이 아이에게 거짓말을 가르치고 있었다. 


 사랑으로 아이를 키우는 말에는 아이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아이를 사랑하는 것에는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믿음도 필요하지만 사회인으로서 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해 주어야 하는 역할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곁가지도 잘라주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레오아빠가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지우린 가족이다

가족은 서로를 지켜주는 거야,-p146

 

가정폭력이것은 상상이상의 고통으로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다강한 연대와 소속감을 가지며 사회인으로 성장하기까지 가족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경우 정신적인 건강을 유지하기 힘들다현재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가정폭력은 아주 오랜 시간동안 축적되어 곪아서 어디서부터 메스를 대어 고름을 짜내야 할지 모르는 지경에 다다르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지만우리는 누구나 알고 있다소설보다 현실이 더 잔인하다는 것을가족범죄단 사건은 비단 유럽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니까.  스웨덴 전역을 충격에 빠뜨렸던 밀리터리 갱’ 사건이 이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다. 가족범죄단이었던 '밀리터리 갱'은 소설에서는 '특수부태'로 분했다. 

 

미움과 사랑은 한 가지 감정에서 출발한다문득 그런 생각이 확신을 만들어주는 소설이라고나 할까아버지 이반은 그러한 사람이었다. 자식을 사랑만큼이나 미워했다.아니면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거나. 반듯하고 조용하고 신중했던 맏이 레오에게 아버지란 닮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사랑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미워하면서도 가족이란 집단에 속했을 때는 누구보다 강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을 향해 폭력으로 소통하는 남자였던 아버지 이반은  레오가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죽도록 맞고 돌아온 날상대를 한 방에 제압하는  싸움법을 알려준다. 동생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맏이로서의 책임감과 동시에 아버지로부터 동생들과 엄마를 지키는 역할까지 해야 했던 레오에게는 아버지는 스승이면서도 적이었다. 이반은 아내가 도망치려 할 때마다 심하게 폭행을 가했고 아내가 가출하여 외할아버지 집으로 피신하였을 때에는  외할아버지 집을 불태워 버렸다. 모든 것을 아이들과  함께 했다. 가정폭력범과 방화범으로 교도소에 갔을 때만 빼고 아이들은 가정폭력에 오랫동안 길들여져 왔다. 감옥에 갔다 온 후, 더러움과 게으름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아버지의 아파트에 레오가 간 이유는 이반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 였다. 이반은 레오가 강도단 두목이 된 것은 까마득히 모른 채 그저 성공한 사업가 흉내를 내는 레오의 돈을 무덤덤히 받아들였다. 

 

이반은 자신이 되고 싶었던 모습을 갖춘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레오는 자신이 결코 닮고 싶지 않았던 모습을 가진 한 남자를 보았다.-p180

 

레오를 쫓던 형사 브론크스에게도 레오와 같은 트라우마가 있었다아버지의 폭력에 지쳐 아버지가 잠든 사이 아버지를 죽인 형과 형이 아니었으면 자신이 죽였을 것이라는 무서운 자책감속에서 살아가는 형사이다브론크스에게도 가족이란 깊은 상처였고 타인을 사랑할 줄 아는 법을 배우지 못한 탓에 사랑하는 여인을 눈앞에 두고도 떠나보내는 성장만 했지 성숙하지 못한  상처투성이의 남자다은행털이범 레오를 본 순간, 본능적으로 이끌린 것은 어쩌면 둘은 오랫동안 폭력에 길들여진 상처받은 영혼의 동질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메아리이다범죄자가 된 아들을 보는 아버지 이반도 여느 아버지처럼 아픔을 느꼈다그러나자식에 대한 사랑법을 몰랐던 아버지 이반은 다시 레오의 범죄에 가담하는 것으로 어긋난 부성애를 보여준다레오가 자신을 괴롭히던 하세를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폭력을 행사했을 때하세의 아버지가 레오의 집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병원에서 생사를 오가는 아들을 대신해 찾아온 하세 아버지에게 이반은 위협을 가하며 폭력을 행사한다. 그것이 아버지 이반이 할 수 있는 소통의 방법이였고 사랑법이었다. 어쩌면 레오가 자신인 행사한 폭력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하였더라면 레오의 미래는 보다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하는  안타까움이 드는 장면이 기억이 난다. 


더 파더 1.2를 읽으면서 사회에 만연한 폭력이 어쩌면 일그러진 현대의 가족사랑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를 고민케 하는 소설이다. 며칠 전 뉴스에  '어차피 망한 인생 돈이나 훔쳐서 폼 나게 살자' 라며 고가의 차를 수십 대 훔친 청소년들이 검거되는 사건이 있었다.  자포자기의 삶희망도 꿈도 없는 청소년들의 근원적인 문제는 가장 큰 울타리가 되어 주어야 가족들이 청소년들을 범죄자로 몰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현대가족의 역할을 되돌아보게 되는 그런 소설이었다. 부모로 산다는 것, 그것은 정말 얼마나 큰 과업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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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별

나는 늘 기다렸다.
깊은 밤 어두운 하늘을 보며
살별이 떨어져 내리기를,
가슴에 흘러들기를,
이승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그리움처럼 그를 기다렸다.
-오정희 [비어있는 들]중에서


오정희 소설에는 순우리말이 많이 나온다.
혜성이라는 말보다 살별은 낯설지만
무언가 오염되지 않는 순수함을 연상하게 한다.
순우리말을 이처럼 아름답게 사용하는 작가의 책은 처음본다.
순우리말도 그렇지만 문장의 묘사가 압도적으로 뛰어나다.
지난 해 오정희컬렉션이 나오자마자 구입하여
읽고 또 읽고 했던 이유가
배울 것이 많은 문학책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서평을 써야할 차례임에도
그냥 이렇게 읽기만 해도 좋다.

✔살별의 뜻(네이버 지식사전 참조)
태양계에 속하는 여러 행성들은 대개 작은 점이나 원형의 빛을 내고 있지만 어떤 별들은 빛나는 긴 꼬리를 끌고 움직이기도 한다. 이런 별들을 ‘혜성(彗星)’이라고 하는데, 우리말로는 ‘살별’ 또는 ‘꼬리별’이라 한다. 살별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76년을 주기로 하늘에 나타난다는 ‘헬리혜성’을 들 수 있다. 살별은 흔히 별똥별이라고 하는 유성과 다르다. 유성은 우주 공간의 먼지 덩어리가 지구의 대기권 안으로 들어와서 빠른 속도로 낙하하며 공기와 마찰하면서 내는 빛인 반면, 살별은 그 자체가 하나의 행성으로서 일정한 주기로 태양의 둘레를 도는 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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