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것만이내세상

한 지붕 세 가족이 살 정도로 모여 살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가족 구성원들의 숫자도 작아지고 가족을 이루는 단위자체가 작아지다보니 가족도 빠른 속도로 파편화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일까. 혼자사는 것이 오히려 편한 세대들의 혼자 하는 혼술, 혼밥예찬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이미 가족이 주는 따뜻한 온도조차 차갑게 식어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사회 분위기에 편승하여 해체된 가족의 의미 찾기는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주제가 되어 가고 있다.
이병헌과 박정민 주연의 『그것만이 내 세상』도 해체된 가족의 현주소를 되돌아보게 하는 영화이다.

#예고없이_찾아온_만남
영화는 두 번의 만남에서 시작한다.

38세의 전직 복서 조하(이병헌)은 결핍의 결정체다. 술만 마시면 아버지는 조하와 엄마(윤여정)을 때렸다. 추운 겨울 아버지의 폭행이 극에 달한 날, 맨발로 집을 나간 엄마의 뒷모습만 기억하는 조하를 키운 건 8할이 분노였다. 자신을 버린 엄마와 자신을 때리기만 한 아버지를 향한 분노. 그런 조하에게 복싱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운명이다.

그러나, 몸이 알려 준 세상이 전부인 그에게 조금씩 절망이 깃든다. 복싱계에서는 이미 퇴물취급을 받기 시작한 나이가 되었고 몸 하나 편하게 누울 집조차 그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그의 앞에 작고 노쇠한 초라한 엄마(윤여정)와의 조우는 예고 없이 찾아오는 폭풍처럼 갑자기 이뤄진다. 그리고 혼란스러움에 비오는 거리를 배회하던 그를 무서운 속도로 치고 달아나는 자동차가 있었다.

깨어 보니 병원 특실이었고, 바로 호화저택에 초대되어 식사까지 얻어먹는다. 허나, 저택의 여주인은 복서인 조하를 상습협박범으로 몰아세운다. 성질대로 화를 내고 나오는데 조하의 눈에 슬픈 눈망울을 가진 여인(한지민)이 눈에 들어온다.


#울어 본 사람만이 같이 울어준다.

영화에는 결핍된 이들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결핍된 부분이 있지만, 이들에게는 그 결핍이 깊어도 너무 깊다. 중학교 때부터 먹고 살 걱정을 하고 살아야 했던 조하의 삶과 매일 남편에게 폭행당하던 엄마(윤여정)가 서번트 증후군을 앓는 자폐아를 키우면서 힘겹게 살아가는 삶의 단면들에서 아픔의 깊이를 가늠하게 한다.

극 중 모든 것을 가진 듯 보이는 피아니스트 한가율(한지민) 역시 3년 전 교통사고를 당해 한쪽 다리를 잃었다. 그 뒤로 피아노를 치지 않은 채 절망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결핍이 큰 사람이 있다면 오진태(박정민)라 할 수 있다. 보호자가 없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장애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우리의 잘못된 통념에서 온 잣대에 불과하다는 것을 영화의 엔딩 부분에 다가갈수록 깨닫게 된다. 엄마에게는 오진태가 살아가는 이유이며 조하에게는 '함께'의 의미를 알려줄 뿐만 아니라 피아니스트 한가율에게는 예술의 혼을 찾아준다.

사실 오진태가 한 일은 없다. 그저 피아노만 쳤을 뿐이다. 피아노 한 번 배운 적이 없지만, 유투브를 통해 들은 그대로 피아노만 칠뿐이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오진태가 그들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던 것은 어떤 연유였을까. 그것은 다름아닌 아픔이라는 공감이다. 이 영화가 관통하는 메세지는 아픔을 가진 사람은 함께 울어준다는 것이다.

배우들이 모두 아픔을 가진 사람의 눈동자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엄마 역의 윤여정은 너무도 폭삭 늙어서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것 같은 노쇠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아들 오진태만 보면 눈물이 차올라 반짝거린다. 조하 역의 이병헌은 시종일관 울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본다. 자신을 버리고 간 엄마에 대한 원망과 지금이라도 아들인 척 어리광 부리고 싶은 복잡한 마음이 시종일관 그를 괴롭힌다. 그래서 웃고 있어도 안 웃는 척 하고 울고 싶어도 울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곧 죽어가는 엄마 앞에서는 자신의 속살을 보이며 어린애 같은 울음을 터트린다. 엄마가 없어서 난 너무 아팠다고,

피아니스트 한가율도 그렇다. 대사는 많지 않지만, 궁궐 같은 저택에 눈에 물기를 머금고 의족 때문에 절름발을 걸으며 절망 가운데 서있는 모습은 그녀의 고독이 얼마나 큰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영화의 많지 않은 대사는 오히려 그들의 아픔을 더 도드라지게 하는 장치다. 그 아픔때문일까. 삶에서 불편함이 가장 많은 사람이면서도 오진태의 피아노는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전해준다. 그가 연주하는 음악에는 어떤 사회적인 위선이나 가식이 들어있지 않다. 감동과 사랑과 위로와 용기와 희망이 음악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오진태역을 한 배우 박정민의 피아노 연주는 실화다.그래서인지 막귀인 내게도 너무 아름답게 들린다. 최고의 장면)

울어본 사람은 함께 울어줄 줄 안다. 마찬가지로 아파 본 사람은 타인의 아픔도 볼 줄 안다.

한 집에서 밥을 먹는 사이를 식구食具라 한다. 서로 다른 아픔을 가지고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뒤늦게 식구가 된 이들은 밥을 먹으면서 현실이라는 문제를 같이 겪게 되면서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영화에서 밥 먹는 장면을 볼때 기분이 가장 좋았다. 밥을 먹는다는 것이 식구라는 하나의 울타리를 만들어주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이해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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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인문
#누구나_자신을_파괴할_권리가_있다

가끔 자신만이 옳다고 강요하는 사람을 보면 참 신기하다. 노벨 경제학자 수상자인 대니얼 커너먼은 우리의 생각이 합리적인지 비합리적인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의 이면에 존재하는 타당한 이유, 그럴만한 이유가 존재하는 가능성을 떠올리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문제점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존재는 의식적 주체로서, 다른 여러 가지 부분들에 의해 좌우되는, 오직 ‘일부’에 불과하다. 선택과 결정 또한 우리의 경험에 의한 무의식에 의해 이뤄진다. 우리가 결정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

그렇기에 어떠한 일을 판단할때는 좀더 넓은 시각으로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자신만의 생각이 옳다 간주하여 다름을 틀림으로 단정하고 공격하는 것은 이기적일 뿐 아니라 스스로 심각한 확증 편향에 사로잡혀 있음을 인정하는 꼴이다. 인간의 생각은 합리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의 세계를 깨뜨릴수록 또 다른 세계에 눈을 뜰 수 있다. 마치 싱클레어가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고 하였던 것처럼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의 생각을 돌아볼 줄 아는 것도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이 또한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나는 이제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
나 역시도 타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고도, 노력하지도 않은 채 떠나보내는 인연들이 얼마나 많은가. 돌이켜보면 그렇게 깨진 관계와 인연들이 부질없는 나의 자존심과 고집에 의한 것임을 깨닫곤 하지만 결국 선택의 여지없이 세상과 나 사이 벽을 높게 쌓으며 안으로 안으로만 침참해 가게 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은 늘 사랑이라는 열린 이름으로 다가온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사랑은 가능하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혼자 남겨져도 사랑은 찾아온다. 차디찬 질감의 한파를 몰고오는 봄의 노크에도 기어이 녹고 마는 은빛의 강가에서 겨우내 쌓은 벽도 언젠가는 허물어질 것을 기대하며 지금의 추위를 견뎌보곤 하는 것이다.

그러니 합리적이지 않은 것은 누구나 같다. 그러나 타인에게 삶을 강요하거나 간섭하는 것은 오지랖에 불과하다. 누구나 자기 삶을 마음대로 할 자유가 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프랑수아 사강이 말하였듯이 강요보다는 사랑의 언어가 우리들에게는 필요하다. 얼음은 차가운 바람에 녹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햇살에 자신의 속살을 내보이며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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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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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에게는 과거가 없고,
불행한 사람에게는 과거만 있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중에서


행복한 사람에게는 과거가 없다기 보다는
과거를 생각할 이유가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매일을 살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며 사는 것만이
우리가 누려야할 최고의 삶이라는 가정하에 말이다.

1도씩 조금이라도 나아져야만 행복한 삶이라는 주문은
과거를 유용하지 않은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물론 굳이 과거를 되돌아보며 과거에 발목이 잡혀 살아가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긴 하다.
지나버린 과거를 생각하느라 생의 쳇바퀴를 멈추려 한다면 불행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삶을 덮쳐버릴 것이다.
그렇기에 과거는 불행한 사람의 전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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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많음이 젊음보다도 더 나은 선생이 될 수 없고 어쩌면 그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나이 먹는 과정에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아무리 현명한 사람이라도 인생의 과정에서 절대적 가치가 무언가를 배우지 못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실제로 늙은이들은 젊은이들에게 줄 만한 중요한 충고의 말을 갖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험은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들의 인생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러한 실패가 개인적인 사유 때문이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들은 자신들의 쓰디쓴 경험에도 불구하고 다소의 신념이 남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예전처럼 젊지 않다.

-월든 24p

나이가 든 사람과 젊은 사람이 어울리면 젊은 사람 손해다.
나이가 지혜나 가치의 척도가 되지 않듯이 젊은 사람의 생기와 열정은 오히려 나이 든 사람이 따라갈 수 없는 무엇이 있다. 내 경험에도 나이 든 사람에게 지혜로운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젊은 사람들을 견제하며 자신의 영역이 침범당하는 두려움에 발톱을 드러내는 나이 든 사람들을 보아왔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월든을 읽다 이 구절에 무지 공감하였다. 형광테이프라는 것이 있어 책에 표시를 했더니 깔끔하게 그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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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_납치하다 #류시화
#인문 #찰스_레즈니코프

한동안 류시화의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에 빠져 읽었는데 신간 [시로 납치하다]역시나 너무 좋다. 문장마다 감동으로 스며든다. 이름 모르던 위대한 시인들의 삶과 쓴다는 것의 의미를 반추해본다.
쓰기는 누군가에게는 생과 사의 사투를 벌이는 일임을.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하루 종일 일한 후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하루 종일 일한 후 나는 지쳤다.
이제 나의 일을 해야 할 날이
하루 더 사라졌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천천히, 천천히 나의 힘이 되돌아왔다.
그래, 밀물은 하루에 두 번 차오르지.
- 찰스 레즈니코프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하루 종일 일한 후> (류시화 옮김)


뉴욕 브루클린의 유대인 거주 지역에서 자란 소년이 있었다. 부모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이민 온 세대였다. 아버지는 모자 공장을 운영했지만 곤궁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시를 쓴 소년은 시인 하이네와 괴테가 법률을 전공했다는 이유만으로 로스쿨에 입학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뉴욕주 법정 변호사로 취직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글을 쓸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후 모자 판매와 재판 기록 정리로 생계를 이어 가며 시집을 자비 출판했다. 그러나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 대공황이 닥치고, 가업인 모자 공장이 문을 닫았으며, 직장도 잃었다. 주급 25달러를 벌기 위해 매일 시간제로 일해야 했다. 폴 오스터가 『굶기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그를 예로 들 정도로 늘 허기가 졌다. 그럼에도 계속 자비 출판으로 시집을 냈다. 독자도 비평가도 무관심했다.

그렇게 이 무명 시인은 60세가 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시를 썼다. 생계비 버는 일에 하루를 보내고 물 먹은 솜처럼 피곤했었지만, ‘하루에 두 번’ 밀물이 차오른다는 걸 믿었다. 어떤 상황에도 실망하지 않았다. 자신의 시가 언젠가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리라는 걸 알았기 떄문이다. 백화점에서 구매 담당자에게 삼품 견본을 보여 주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대기실 의자에 앉아서 시를 썼다. 60대 후반이 되어서야 세상이 그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것이 시인 찰스 레즈니코프의 생애(1894~1976)이다. 그의 사후, 자비 출판했던 시집들이 꾸준히 재출간되고, 객관주의 시인으로서의 명성이 확고해졌다. 자신의 인생 자체를 객관화시켜 시의 주제로 삼았기 때문에 객관주의 시인으로 불리지만, 삶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자신의 삶인데도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짧은 시이지만 이보다 더 절묘할 수 없다. 그는 삶의 헛된 희망에도 속지 않았지만 섣부른 절망해도 속지 않았다. 그렇다 ‘하루에 두 번’ 틀림없이 밀물은 차오른다. 그때 우리 영혼은 비상하고, 의지가 솟고, 짧은 시간이지만 가슴 뛰는 일에 몰입한다. 평생을 무명 시인으로 보냈으나 레즈니코프의 시에는 분개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다. 생계비를 버느라, 그리고 ‘밀물이 들어올 때’는 창작에 몰두하느라 자신의 작품이 세상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폴 오스터가 지적했듯이, 레즈니코프에게 있어 시는 세계를 표현하는 하나의 양식이라기보다 세계 안에 존재하는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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