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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0월
평점 :
<샤덴프로이데> . 즉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이죠. 모름지기 신문은 그런 감정을 존중하고 북돋워야 해요. -p218
우리는 수많은 음모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들의 일대기는 더욱 흥미롭고 신비한 이야기들이 많다. 광해군이 대역이 있다는 상상으로 영화가 만들어지듯이 한 번쯤은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의혹과 음모로 느껴질 때가 많다. 뇌가 넘치도록 끊임없이 정보를 주입해야 하는데다 가짜 뉴스를 만들기 쉬워진 인터넷 환경에서 진실과 거짓을 걸러줄 수 있는 필터기능의 언론이 필요한 세상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제0호』 의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다. 대필 작가 콜론나는 글 쓰는 재주를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이름이 아닌 타인의 이름으로 소설을 발표하고 번역 일을 통해 입에 풀칠만 하고 산다. 그가 능력이 있으면서도 ‘대필 작가’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독일어를 할 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일어 번역일 때문에 학사학위를 받지 못하였고 그 덕에 그는 평생을 대필 작가로 먹고 살아야 했다는 설명이 있다. 추리소설을 써달라는 이에게 자신의 문체로 타인의 이름을 빌어 소설을 발표한다. (타인의 이름으로 발표된 소설의 문체가 자신의 문체임을 볼 때마다 콜론나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런 그의 능력을 높이 산 시메이 주필은 <한 저널리스트의 회상록>이라는 책을 집필해 달라고 한다. 물론 시메이의 이름으로. 그렇게 6명의 기자와 한 팀이 되어 책을 집필하기 시작하는데 어느 날, 무솔리니의 죽음을 추적하던 브라가도초가 살해당하면서 책집필은 취소된다. 브라가도초가 말하고 싶었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소설은 주역이었던 이들을 조역으로, 조역이었던 이들을 주역으로 내세우며 왜곡된 현실을 비춘다. 대필 작가로 살았던 이의 삶, 무솔리니의 대역으로 살았던 이의 삶, 세계 뉴스의 헤드라인만 뽑아서 고치는 형태로 쓰는 신문기자들의 삶은 공기 중에 부유하는 먼지처럼 우리가 주목하지 않는 부차적인 삶들이다. 그렇게 소설은 세 가지의 왜곡된 이들의 삶에서 권력 이데올로기에 지배받는 허상의 메커니즘을 그린다. 첫 번째 왜곡은 대필 작가로 50년을 살아온 작가의 삶이다. 두 번째 왜곡은 로마의 부활을 꿈꾸었으나 히틀러와 손잡고 잔인한 독재자였던 무솔리니의 최후이다. 카톨릭의 나라에서 교황청의 막강한 권력배경으로 무솔리니의 대역이 존재했으며 광장에서 총살당하는 그 순간의 무솔리니는 대역이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왜곡은 창간하지 않을 신문을 만드는 신문기자들이다. 이 세 가지의 왜곡을 통해 에코는 실질과 다른 허상이 지배하는 현실세계를 신랄하게 풍자한다.
혜경궁 김씨가 이재명 부인이라는 뉴스가 언론사마다 보도가 된다. 온라인에서 설왕설래하며 치열한 댓글싸움을 보기도 하였고, 뉴스를 거짓으로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세상은 온통 음모투성이인 것만 같다. 이재명에게도 무솔리니 같은 대역이 있거나, 소설의 주인공처럼 글을 대신 해주는 사람이 존재했던 것일까? 어쨌거나 우리는 보이는 것이 전부인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어느 날 갑자기 유병언이 살아있다는 속보가 터지고 내 남편이 사실 여자였다는 사실을 뉴스를 통해 만나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게 느끼게 할, 허구속의 현실이라는 묘한 오버랩을 느끼게 해주는 소설이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분이 누구더라? 그래, 진리란 그런 거야. 사람들이 무언가를 더 폭로하면 다 거짓말처럼 보이게 하지.-p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