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아픈손가락

아픈 손가락

방문에 손가락을 찧었다.
너무 아파 눈물이 날 정도였다.
그 아픔은 언제인지 모를 날과 닮았다.
이렇게 아프도록 사랑했던 격정의 날들이,
오랫동안 세월에 갇혀 꺼내지 않아
켜켜히 쌓이기만 한 먼지구덩이에
마치 숨 한번 크게 후우욱 불면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수많은 먼지더미들처럼
떠올랐다 점멸해 간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아픈 손가락같다.
너무 아프지만 베에낼 수 없고
아픔이 지나면 기억만이 퇴적되어
슬픔과 체화되듯이
당신은 강한 통증을 몰고와
내면에 침잠해가는 아픔의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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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대의만큼이나 사랑도 중요하다.
#콜로니아 #엠마왓슨 #다니엘브륄
#영화

잠 못 이루는 밤에 영화처럼 시간 보내기 좋은 미디어는 없다. 오랜만의 영화고 해리 포터 소녀였던 헤르미온느가 선택한 영화가 의외로 정치적인 소재의 영화라는 사실이 살짝 흥미로와 선택하였다. 엠마 왓슨의 간헐적인 사회적 이슈가 다른 여배우와는 달리 소신 있고 여성의 사회적 참여를 이끄는 활동을 지지해 왔으니 어쩌면 정치소재의 영화는 그녀의 배우로서 지향점이나 다름없기도 할 것이다. 그런 기대 때문인지 영화를 다 보고는 엠마 왓슨이라는 배우가 멋지게 성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소름끼치도록 군사정권의 사회를 데칼코마니처럼 보여주고 있는 칠레의 현실은 우리나라의 독재정권시절을 쉽게 떠올리게 한다. 민주사회를 지향하며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젊은이들은 밤마다 집회를 열고 데모를 하고 전단지를 흩뿌리며 혁명을 꿈꾼다. 다니엘 브륄은 독일인으로 이들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하기 위해 온 외국인이다. 포스터를 만들어주며 혁명 전단지는 모두 다니엘이 만들고 있고 혁명군 사이에서 실질적인 브레인역을 담당하고 있다.

스튜어디스인 레나는 휴가를 맞이하여 칠레에 있는 연인 다니엘을 만나러 가고, 짧은 재회에서도 서로의 사랑이 견고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레나와 다니엘은 거리로 나가 사진도 찍고 칠레의 분위기를 만끽하려 하지만, 혁명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잡혀 가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자 다니엘과 레나는 조용히 도망가려 한다. 

하지만, 다니엘이 몰래 사진 찍는 장면이 군인들에게 발각되면서 정체모를 차에 실려 간다. 돌아오지 않는 다니엘을 찾아다니다가 우연히 콜로니아라는 종교공동체에 다니엘이 잡혀갔다는 말을 듣게 되고 레나는 봉사자로 자원하여 찾아간다. 그곳에서 레나는 억압과 통제에 길들여져 광적인 신도가 되어 버린 이들과 하루 종일 막노동에 가까운 농사일을 견뎌내며 연인 다니엘만을 찾아다닌다.


사이비종교공동체인 콜로니아 교주인 폴 쉐퍼는 어린 남자아이들을 성적으로 학대하며 무조건적인 복종을 위해 사람들에게 최면알약을 먹인다. 감금과 학대와 착취, 서로를 감시하게 만들고 가족적 유대관계를 두려워해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를 철저히 관리 감독한다. 폴 쉐퍼의 권력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권력과 맞먹는 것이기에 콜로니아에서 살아가고 있는 신도들은 무조건적인 복종에 길들여져있다. 랑시에르의 자발적 복종이란 말처럼 이들의 복종에는 길들여짐 외에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삶이다. 게다가 폴 쉐퍼는 콜로니아 신도들의 노동력 착취를 통해 얻은 수익으로 독재정권에 무기를 상납하고 있었기에 칠레에서 그와 대적할 수 있는 이는 전무한 상태였다.

이렇게 정치와 연대한 폴 쉐퍼의 지하실에는 반국가 혁명자들이 숱하게 끌려와 고문하는 장비들이 있었고 그곳에 다니엘까지 끌려왔던 것이었다. 구타와 전기고문 등 수많은 폭행으로 망가질대로 망가진 다니엘은 뇌까지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 저능아가 된 다니엘. 누구나 죽어나가는 곳에서 저능아가 되었기에 그나마 목숨을 건지게 된다. 그렇게 다니엘은 겨우 살아남았다.

레나는 노동에 혹사당하며 비정상적인 종교행위를 강요받으며 고통의 나날을 보내면서도 다니엘을 만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우연히 마주한 다니엘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다.

정말 혐오스러운 캐릭터가 폴 쉐퍼인데 아마 세계적으로 공통된 사이비종교 교주가 빙의한 것처럼 연기가 너무 자연스러웠다. 이렇게 영화는 풍자와 재연을 완벽하게 ‘콜로니아’라는 사이비종교의 단면을 잘 살려냈다. 억압과 착취에 무표정한 얼굴을 한 여인들, 종교집회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열광하는 광신도들의 모습, 교주를 향한 맹목적인 복종, 서로를 감시하고 미워하게 만들며 어린아이들의 냉소적인 표정들이 현실 사이비종교집단의 표정들과 오버랩 된다. 

그 안에 부와 권력으로 편제된 사회에서 약자에게는 한없이 가혹하고 강자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자가 되는 룰을 이 영화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런 기계적 구조 속에서 다니엘이 살아남는 방법으로 선택한 저능아 역은 가혹함을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정상인의 범주를 벗어나는 행위이기에 살아남기가 가능했다. 저능아 흉내를 내며 머릿속으로는 콜로니아의 약도를 그려가며 혁명가의 기질을 발휘해 사진까지 찍어놓은 다니엘은 탈출할 기회만을 노린다. 


우여곡절 끝에 레나와 다니엘은 탈출에 성공하지만 이미 모든 분야에 걸쳐 있던 폴 쉐퍼는 독일대사관까지 이들을 따라온다. 권력자들은 이 둘을 칠레에서 떠나지 못하게 방해를 하지만, 결국 레나와 다니엘의 기지로 무사히 떠나고 콜로니아의 비리역시도 전 세계에 밝혀지게 된다. 영화를 통해 기득권층과 공권력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며 이들과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새삼 우리의 역사에서 떠올려 볼 수 있다. 지금의 자유는 수많은 혁명가들의 피와 눈물의 결실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권력자들의 통제와 억압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대의만큼이나 사랑도 중요하다는 것을, 레나와 다니엘을 통해서 보게 되었다. 이들의 노력에 의해서인지 이후 17년후 칠레 독재정권은 막을 내린다. 폴 쉐퍼는 도망다니다 83세에 징역 33년을 선고받고 5년후에 사망하였다. 아직 이 영화를 못 만나보았다면 이 여름이 가기 전에 꼭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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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너를 사랑하네♬
세상에 너뿐이네♬
소리쳐 부르지만♬
저 대답없는 노을만 붉게 타오르네♬

#자작시
#머리카락아래서

머리카락아래서

저녁 어스름길
바람이 뺨을 스치며
머리카락을 앞으로 넘기운다.
머리카락이 베일처럼
나를 가리우고 바라보는 세상
사람을 딱 머리카락으로
가리운 얼굴로만
만났으면 좋겠다.
너무 좋아도 보이지 않고
너무 싫어도 보이지 않게
살짝만 베일을 쓰면
난 더 잘 살았을지도 모른다.
민낯을 보이는 일은 그래서 부끄럽다.
가끔씩은 머리카락을 내리우고 살리라.
너만이 내 사랑의 전부인 것을 들키지 않게

https://youtu.be/oJIWY9W5W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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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나는둔감하게살기로했다
#와타나베준이치

불혹의 정점에서 내 마음 근육을 만져본다. 얼마나 단단해졌을까? 세상살이의 경험이 많아질수록 마음에도 근육이 생겨 이제 웬만한 일에는 놀랄 일도 없을 것 같건만 여전히 상처받는 체질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같은 일을 겪어도 툴툴 털어버리고 일어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같은 해에 불의의 사고로 자식을 잃은 친구 둘이 있는데 한 친구는 일상의 복귀를 쉽게 하는 반면 다른 한 친구는 여전히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간다. 한 친구는 둔감하고 한 친구는 민감한 걸까?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사람이란 존재자체가 워낙 복잡하고 다양한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그렇기에 단면적인 부분으로 사람을 판단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둔감한 부분과 민감한 부분이 부분적으로 섞여 있다고 봐야 한다.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 첫 페이지에 둔감력 체크리스트가 실려 있다. 체크를 해보니 예민함이 꿈틀대는 씨앗이 좀 있다고 한다. 내가 예민한 부분은 사람들이 무언가에 불편해 할 때 그 원인을 쉽게 눈치 채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둔감하다는 소리는 잘 듣지 않는다. 하지만 둔감한 부분은 베개만 대면 곧바로 잠 잘 정도로 무척 깊이 잘 잔다. 게다가 청각이나 시각, 후각 등 어느 면에서나 뛰어난 부분이 전혀 없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스트레스를 안고 있으며 소심한 편이라 마음 쓰이는 일이 있으면 고민을 며칠 내내 하곤 한다.

성격이 극과 극인 두 딸을 보면 둔감함 성격과 민감한 성격의 차이를 더 극명하게 느낄 수 있다. 큰 아이는 소심하고 예민하여 친구들과 문제가 생기면 견딜 수 없어 한다. 관계가 한 번 틀어지면 회복하는 방법은 없이 전전긍긍하며 시간을 보내는 편이다. 반대로 작은 아이는 감정에 있어서는 무척 둔감하다. 관계가 틀어지면 자신이 먼저 다가가 화해하고 사과하며 고민자체를 하지 않는다. 언젠가 큰 아이가 그런 둘째 아이한테 ‘ 너는 친구가 너의 뒷담화를 하고 다닌 걸 알면서도 먼저 사과할 수 있어?’ 그랬더니 작은 아이는 ‘ 뭐 어때! 나도 하는데 ’

아이들을 보면서 나 역시도 관계에서의 소심함과 민감함을 벗어나려 노력하는데 그런 성격조차도 타고나는 것이 반이니, 그저 작은 아이의 둔감함이 부러울 따름이다.

정형외과 의사였던 와타나베 준이치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둔감한 사람들이 사회에서 성공하는 경우를 예를 들어 ‘둔감함은 신이 주신 최고의 재능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예민한 사람들이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일들이 둔감한 이들에게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상처 또한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상황에서 민감한 사람과 둔감한 사람의 다른 반응을 보면 오히려 둔감함이 삶에 보탬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둔감함은 건강에도 영향을 미치며 일상에서 받는 스트레스도 민감한 사람에 비해서 적기 때문에 당연히 피가 돌고 있는 혈관 역시도 건강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오장육부와 마음이 민감한 친구와 함께 밥을 먹으면 맛있게 식사했다는 생각보다는 반찬투정과 깨작대는 모습에 도리어 밥맛을 잃은 적도 많다. 그 친구의 미식평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평소 식사태도로 봐서 소화기관이 제대로 작동될 리가 없는 것은 자명한 일, 위장병을 달고 사는 친구였다. 조금만 둔감해도 위장병은 치료가 가능하다 생각하는 것은 민감이 병인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감정이나 감각이 둔한 사람이 당연히 스트레스가 덜 할 수도 있겠지만, 책에는 둔감한 사람이 모든 부분에서 유연한 태도를 갖고 있다하지만,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한다. 둔감하면서 일을 잘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사회생활에서 보면 둔감한 사람은 업무에도 같은 태도인데다가 둔함으로 인해 좋은 평을 받지 못한다. 그래도 둔한 사람이 마음이 편하고 상처를 덜 받는다는 말에는 십분 공감한다. 책을 읽으면서 나 역시 둔감이라는 마음 근육을 좀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몇 자 정리해 보았다. 불혹이후의 삶을 이전보다 덜 상처받고 살려면 자발적 둔감력을 키워야 할 것 같다.

내가 알면 좋지 않은 일을 굳이 알려하지 말 것,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면 애써 생각하지 말 것,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면 그냥 잊을 것.
이건 어쩌면 살아가야할 생존전략인지도.^^


친구나 직장 동료들이 험담을 하거나 괴롭히는 일은 우리 주변에서 생각보다 많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기분 나쁜 말을 듣더라도 예민하게 대처하지 마세요.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느긋하고 차분하게 생각하면서 상대방이 왜 질투하는지 헤아리고,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느끼세요. 둔감하고 아량있는 마음가짐은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됩니다.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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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읽다가
#속물에대하여

현대사회에 있어서는 고독은 나일론재킷이다.
고독은 바늘 끝만치라도 내색을 하면
그만큼 손해를 보고 탈락한다.
원래가 속물이 된 중요한 여건 하나가,
이 사회가 고독을 향유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속물이 된 후에 어떻게 또 고독을 주장하겠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속물은 나일론 재킷을 입고 있다.
그러니까 이 재킷을 입고 있는 사람은,
이 글 제목대로 ‘거룩한 속물‘
즉 고급 속물의 범주에는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은
저급 속물이지 고급 속물은 아니다.
고급 속물은 반드시 자기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고급 속물이란 자폭을 할 줄 아는 속물,
즉 진정한 의미에서는 속물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아무래도 나는 고급 속물을 미화하고 정당화시킴으로써 자기 변명을 하려는 속셈이 있는 것 같다.
이쯤되면 초고급 속물이라고나 할까.
인간의 심연은 무한하다.
속물을 규정하는 척도도 무한하다.

-김수영 전집 1에서 -


‘거룩한 속물들‘이라는 김수영의 글을 읽다가
김수영이 참 재밌는 시인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 단락이 제일 재밌는 것 같다.
속물론을 주창하던 김수영에게
원고청탁이 들어왔는데
이른바 ‘속물론‘을 써달라 하니
김수영이 하는 말이
과거 자신이 순수한 문학을 하고 있을 때는
자신의 속물론에 귀기우려주지 않더니
완전무결한 속물이 되자, 속물론을 써달라는 말에
너무 잔인한 부탁을 받았다고 한다.
속물이 속물을 평가할 때
속물은 이미 자신에 대한 변명거리와
속물론을 미화하려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속물이라는 걸 아는 한
초고급 속물이라는 해석은 정말 재밌는 표현이다.
자폭을 할 줄 아는 자
자기를 아는 자는
초고급 속물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저급 속물이다.
결국 인간은 모두 속물이지만
자기를 아는 인간과
자기를 모르는 인간으로 구분될 뿐이다.
그냥 폭풍공감이 되는 건
나 역시도 자폭하는 속물이며
초고급 속물을 지향하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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