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마이크롭 앤 가솔린 (Microbe and Gasoline) 입니다.

Microbe 라는 건 '미생물'이라는 뜻이지요. 키가 작고 소심한데다가 생김새까지 여자 같은 주인공 다니엘을 놀리느라 부르는 이름이지요.

Gasoline은 우리가 아는 자동차 기름 개솔린인데, 테오에게서 늘 자동차 기름 냄새가 풍긴다고 해서 놀리며 부르는 이름이랍니다.

그러니까 제목<마이크롭 앤 가솔린>은 영화속 두 주인공인 다니엘과 테오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방년 15세된, 아직 어른이 되기전의 어정쩡한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두 소년이지요.

 

2015년에 만들어진 프랑스 영화이고, 우리나라에선 2016년에 개봉했다는데 그때도 관심 영화로 찜해놓았다가 못보고 지나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 새벽에 결국 다운받아 보았어요. 제가 유독 요만한 나이의 주인공들이 나오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역시 이 영화도 제가 찾는 재미, 그러니까 굳이 파도일 필요없이 잔물결 같은 잔잔한 감동이 있고, 그 속에서 지나치기 쉬운 인생의 진실 한 자락을 펼쳐내 일깨워주는 영화였습니다.

 

 

 

 

 

포스터 속의 저 물건(?)은 다니엘과 테오 둘이서 만든, 집처럼 위장이 가능한 49cc짜리 자동차랍니다.

창문도 달고, 그 아래 화분까지 달아놓은 걸 보세요.

이걸 타고 둘은 어디까지 갔을까요. 물리적으로 나아간 거리보다 정신적인 성장의 길이기 더 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런 삐딱거림과 좌절, 무모해보이는 도전을 겪어내면서 성장할 수 있다면 그 당시엔 잠시 루저처럼 보일지라도 나중에 나약하고 유리멘탈 어른이 되지 않고 탄탄한 정신 근육을 지난 어른으로 커갈수 있는 바탕이 되지 않을까요.

그렇지 못했고, 그러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안타까울 뿐 입니다. 어른들이 그걸 가만 두고 보질 않아요.

 

거짓말하고 집을 나가 연락도 안되어 엄마 속을 그렇게 태우다가 어느 날 아침 천연덕스럽게 집으로 돌아와 식탁에 앉아 아침을 먹고 있는 아들 다니엘을 본 엄마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혹시 이 영화를 안보신 분들이라면 보기 전에 나라면 어땠을까 한번 상상해보고 영화를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노무 자식!!!" 하고 등짝부터 한대 쳤을까요? ^^

 

아무리 영화라지만 청소년들의 저런 시기를 민감하게 대처하지 않고 어느 정도의 너그러움과 이해로 받아들여주는 프랑스 사회, 그들의 부모들의 태도로 감상을 마무리하는 걸 보면 저는 어쩔 수 없이 대한민국의 부모된 사람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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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을 이틀 앞두고 당일치기로 강릉에 다녀왔다.

차례를 우리 집에서 모시는 입장에서 추석이나 설 연휴에 장보러 마트가는 것 외에 다른 어딜 간다는 건 꿈도 못 꾸고 살았는데 올림픽이 뭔지,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올림픽인데 당일로라도 보러 갔으면 좋겠다는 아들의 제안때문, 아니 '덕분'이었다.

평창에서 하는 경기는 밤 경기 밖에 표가 없어서 그날로 돌아와야 하는 우리는 강릉 경기장에서 저녁 7시에 하는 여자 스피드 스케이팅 표를 인터넷으로 구입하고 강릉으로 출발.

  

하늘이 잔뜩 흐려있건 말건, 다녀온 다음 날 하루는 앉을 사이 없이 차례 음식 몰아서 해야하건 말건, 일단 명절 연휴에 바깥 바람 쐬러 나간다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기분.

 

 

 

 

 

 

평창 휴게소, 강릉 휴게소 푯말을 보고 감격하는 내 자신이 참 딱하기도 했다. 난 그동안 창살없는 감옥에서라도 살아왔던 건가? 그런 감옥이 있다면 그건 아마 내 손으로 만든 감옥이겠지 라고 생각하니 괜히 더 억울하고 더 한심하고.

나보다 연세 많으신 분들이 하시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여행은 가슴이 떨릴때 해야지 다리가 떨릴때 하면 아무 소용 없다고. 몸이 건강할때, 다니는 것이 힘에 부치지 않을때 하라는 얘기다.

 

 

 

좌석에 앉아서 경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면서 찍어본 경기장 전경.

 

 

 

 

훌륭하다!

 

 

우리 좌석 옆에 네덜란드 응원단이 많이 와 있었는데, 단체로 감귤색 옷을 입고 있어 눈에 확 띄었다. 등 뒤에 새겨넣은 저 사람이 누굴까 궁금했는데 궁금증은 경기가 시작하면서 바로 풀렸다. 이번에 네덜란드에서 출전하는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선수인데, 강력 우승 후보였나보다. 그런데 경기 중반까진 이 선수가 1위이다가 최종적으론 네덜란드 출신 다른 선수가 올림픽 신기록을 기록하면서 1위를 하고 이 선수는 4위에 그쳤다. 2, 3위는 모두 일본 선수가 차지, 우리 나라에서 출전한 김현영, 박승희 선수도 열심히 했으나 등위에 들지는 못했다. 열심히 해준 우리 선수에게도, 또 우승한 다른 나라 선수에게도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내주었다.

 

 

 

 

 

 

 

트랙을 다 돌고 모든 선수들이 한 바퀴를 더 돌면서 인사를 한다.

그때 찍은 우리 나라 김현영 선수.

 

 

 

 

바깥쪽 트랙을 돌고 있는 선수가 박승희 선수.

 

트랙의 직선 코스와 코너에서 선수의 손놀림, 발 동작 등 몸 자세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금메달 획득한 네덜란드 선수.

우리가 앉은 좌석이 네덜란드 응원단 좌석과 가까이 있어서 앞에 와서 국기 들고 답례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찍을 수 있었다.

 

 

보는 대상이 그 무엇이든 현장에서 직접 보는 것은 기운과 의욕을 덤으로 준다. 잡념과 망상을 잊게 해준다.

 

경기를 다 보고 셔틀을 타고 주차장으로 와 집으로 향하는 시동을 건지 4시간 넘게 달려 집에 도착한 것은 다음 날 새벽 2시.

 

1988년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을 개최할때 나는 대학교 4학년. 온 나라가 올림픽으로 들썩 거렸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스포츠에 대해 잘 모르고 잘 못하는 나는 별로 즐기지 못했었다. 그저 무사히 잘 끝나기만 바랐던 기억이 있는데 나이 오십이 넘어 본 이번 2018년 올림픽은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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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8-02-18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tv로 본 나와 다르게 현장에서 본 후기를 보니 더 생생하네요!!♥
현장에서 느끼는 기운은 대단할 거 같아요. 감동도 더 크고 찐하게 오래 기억되겠어요. 덕분에 설 준비하는 손길도 즐거웠을 듯...^^

hnine 2018-02-18 11:50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tv로 보는게 더 가까이서 자세히 볼수는 있겠지만 현장에서 받는 그 기(氣)는 따라올 수 없는 것 같아요. 연극, 무대, 시장, 여기에 이제 스포츠 경기장을 더해야겠어요 삶의 의욕이 떨어질때 가보면 좋을 곳으로요.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딴 생각 할 여지를 안주거든요.

책읽는나무 2018-02-18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직접 가서 보셨다니 부럽습니다^^
열기가!! 열기가!!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 합니다.
모든 경기가 마찬가지지만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경기들이에요.
선수들 다치지 않고 경기 잘 치뤘음 좋겠어요^^

hnine 2018-02-18 19:09   좋아요 0 | URL
직접 눈 앞에서 벌어지는 경기를 정말 오랜만에 보았지요.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또 언제 열릴지 모르느데 한번 가서 보고 싶다는 아들의 말에 남편이 두말 않고 나서더라고요. 오전에 근무를 마치고 점심도 간단히 먹고 출발했답니다. 자고 오지는 못해도 경기 시작전에 근처 구경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바람이 그날 너무 많이 불어서 행사장도 다 폐쇄가 되었지요. 저녁도 경기장내 스낵 코너에서 간신히 요기만 했어요.
참가한 선수들 기록 차이가 대부분 1초 내외더라고요. 그 짧은 시간의 차이로 금메달부터 10위권 까지 차이가 나는 걸 보니 더 안타깝기도 하고 더 대단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정말 좋은 경험이었어요. 운전하는 남편이 힘들었고 세사람이 움직이느라 티켓 값이 장난 아니었지만요 ^^

서니데이 2018-02-18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릉 아이스아레나 에서 직접 보셨군요. 부럽습니다.
사진을 보니 선수가 잘 보이는 가까운 쪽에서 관람하신 것 같은데요.
실제로 보고 오셔서 더 좋으셨겠어요.
오늘로 연휴 마지막 날이네요.
즐거운 연휴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hnine 2018-02-18 19:14   좋아요 1 | URL
아들이 가고 싶다고 안했으면 저나 남편이나 생각도 안했을 일을 벌이고 말았지요 ^^
덕분에 아주 좋은 시간이었답니다. 그것도 명절을 코앞에 두고 말이예요.
이제 연휴 마지막날 밤이 되고 나니, 비로소 본격적인 2018년이 궤도에 오른 느낌이네요. 심기일전! 1월1일 스타트가 좀 미진했다면 진짜 본격적인 출발을 해볼 기회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아요. 경기장에서 보니까 잘못된 출발로 인해 (false start 라고 하더군요) 다시 출발하도록 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제가 계획해놓은 일들이 대개 3월에 시작하기 때문에 저는 좀 더 여유를 부릴려고요 ^^
서니데이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nama 2018-02-18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살 없는 감옥같은 ‘직장‘이라고 생각했는데요.^^
네덜란드 사람들은 오렌지색을 선호해서 축구팀도 오렌지색을 사용한다나요. 발음이 비슷한 오렌지공인가 하는 실존 인물이 네덜란드 독립에 지대한 공을 세워서 그렇게 됐다고 하는데...여기까지만 알고 있어요.
스포츠는 역시 현장에서 즐겨야 되는가 봐요.
다리가 떨릴 날이 금방 옵니다. 가슴이 떨릴 때 부지런히 다니면 다리가 떨리는 날이 도래해도 덜 억울할가요?

hnine 2018-02-18 19:23   좋아요 0 | URL
직장도 아니고 내 집이 감옥이라는 생각이 들지 몰랐어요. 이제는 맘만 먹으면 언제고 나서면 되는데, 힘들게 뭘 가나, TV로 걸어서 세계속으로 보면 되지...이렇게 게으름 부린 제 탓인데, 같이 가자고 안해주는 남편 원망만 하고 있다니까요 ㅠㅠ
아, 네덜란드 사람들이 오렌지색을 선호하는군요! 몰랐어요. 그것도 처음엔 프랑스 사람들인줄 알았어요. 국기가 비슷해서요. 프랑스 국기가 세로로, 네덜란드 국기는 같은 삼색이 가로로 있다는걸 혼동했지 뭡니까.
nama님 덕분에 제 호기심이 더욱 발동. 검색해보니 Oranje-Nassau가문이라고 나오네요. 스페인으로부터 네덜란드 독립에 공을 세운 가문이라고요. 저는 우연히 이번에 단체복으로 채택한 색이 오렌지색인줄 알았는데 이런 배경이 있는 줄이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2018-02-18 1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8-02-18 19:30   좋아요 0 | URL
아~ 고맙습니다. 평소에도 워낙 오자 만발인 제 페이퍼이긴 하지만 덕분에 금방 고칠 수 있었어요. 이렇게 자세히 읽어주시다니, 고맙기도 하고 감동이네요.
명절 준비 앞두고 지레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어요. 일도 일이지만 친정 아버지 생각도 나고 해서요. 그런데 하루 바람쐬고 오니 금방 기분이 나아지네요. 아들은 하루 정도 묵으면서 더 구경하고 싶어했지만 저는 당일치기로 다녀온것만 해도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요.
사진은 더 찍긴 했는데 사람들 얼굴이 너무 뚜렷이 나온것들이 많아서 저것만 올렸어요. 그리고 뭐 더 대단한 사진들도 아니고요 ^^
고맙습니다~~
 
아버지의 유산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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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읽은 그의 소설 <에브리맨>도 죽음으로 시작하더니 자전적 에세이라는 이 책도 역시 죽음에 관한 책이다. 우리 나라엔 2017년에 번역되어 소개되었지만 원래 1991년 나온 책이니 나온지 꽤 된 셈이다.

미국의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필립 로스가 1933년생이니까 올해로 여든 넷. 이 책에서 그의 아버지가 죽음을 선고 받은 나이와 비슷한 나이에 이르렀다.

안면마비로 시작된 그의 아버지의 증세는 뇌종양, 그것도 악성 대형 종양으로 밝혀지고 어떤 치료 방법도 별로 낙관적이지 않다는 선고까지 듣게 된다. 살아나도 힘들게 버티는 날들만 남아있을 것이라는.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더욱' 힘들어질 수 도 있으니 희박한 가능성을 가지고서라도 수술을 하겠는지 결정하라는, 의사의 절망적이고 솔직한 소견에도 아버지는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어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나빠져가는 몸 상태로 인해,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을 받아들여만 하는 아버지를 찾아간 저자는 방에만 처박혀 있지 말고 같이 산책을 하자고 제안하는데 아버지는 방의 커튼을 다 내린채 괜찮다며 혼자 있고 싶어하는 대목이 나온다.

줄여서 옮겨 본다.

"자, 스웨터를 입고 운동화를 신으세요. 아름다운 날이라 이렇게 안에만 앉아 있을 수는 없어요. 커튼까지 다 내리고 말이에요."

"나는 안에 있어도 괜찮아."

그 순간 나는 아버지에게 네 단어, 그전에는 평생 아버지에게 해본 적이 없는 네 단어를 내뱉었다.

"제가 하라는 대로 하세요."

그것은, 그 네 단어는 먹혔다. 나는 쉰다섯이고 아버지는 여든일곱이 다 되었고, 때는 1988년이다.

"제가 하라는 대로 하세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아버지는 그렇게 한다. 한 시대의 끝이고, 다른 시대의 새벽이다. (94쪽)

필립이 아버지에게 말한 네 단어란 아마도 Do as I say 정도이겠지. please 도 없는 그야말로 명령문.

자식이 부모에게 지시와 명령을 듣던 시기를 살다가 거꾸로 자식이 부모에게 지시를 하는 때, 해야만 하는 때가 온다. 부모가 자식에게 의존해야하는 시기가 왔다는 뜻이다.

혼자 걷기도 힘들어지고 백내장으로 잘 보이지도 않게 된 아버지가 어느 날 아들 집 화장실에 혼자 갔다가 온 화장실 바닥이며 벽, 변기, 수건에까지 똥으로 범벅이 되게 해놓은 것을 아들 필립이 뒤늦게 발견하고 그것을 치우며 필립은 생각한다. 그것이 나의 유산이라고. 돈이 아니라, 어떤 특정 물건이 아니라, 똥이.

유산이란 부모가 남기고 가는 모든 것이다. 원해서 남겨주고 가는 것도 있지만, 원하지 않아도, 받고 싶지 않아도 남겨주고 가는 것, 물려 받게 되는 것들도 모두 포함되는 것이다.

후반부에 오면 역시 생명연장장치 이용에 대한 동의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죽음의 시간이 가까와오고 더이상 비참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아버지의 얼굴은 움푹 파이고 망가진 가운데 저자는 아버지의 얼굴에 입술을 갖다 대고 간신히 마지막이 될 말을 속삭인다. "아버지, 보내드릴 수 밖에 없겠어요." 라고.

 

나는 진즉부터 이 책이 읽고 싶으면서도 아직도 수시로 밀고 들어오는 슬픔과 아픔 때문에 손에 책을 잡기까지 시간이 꽤 흘러야했는데, 정작 읽어보니 작가는 비교적 감정 표현에 지나치지 않았고 (절제를 잘 했고), 작가도, 그리고 그의 아버지도 바탕에 유머와 재치가 번뜩이는 사람들이어서 책 내용이 너무 어둡고 처지기만 하진 않았던 것 같다.

 

2012년에 이미 이제 더이상 글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 필립 로스.

작가로서, 그동안 써온 작품들로 만족을 하기란 얼마나 쉽지 않았을까. 새로운 걸 더 쓰기보다는 정리하고 회고하며 시간을 보내겠단다.

그동안 살아온 날들로 만족을 하기란 또 얼마나 쉽지 않을까. 어느 시점이 오면 욕심을 줄이고, 가진 것을 내려놓고, 삶을 단순화하며 마무리하겠다는 결심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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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2-13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기가 쉽지는 않겠어요.
가끔 사람은 왜 자식을 낳고자 하는 걸까를 생각해 봅니다.
아무래도 죽을 때 외롭지 말라고 그런 건 아닌가 싶기도 한데
자식의 입장에선 좀 버겁기도 하겠죠?
이런 책 읽으면 남의 얘기 같지 않고 될 수 있으면
저만치 밀어두고 싶기도 해요.

hnine 2018-02-13 19:29   좋아요 1 | URL
자식이 있으면 죽을때 덜 외로울까요? 오히려 더 생에 미련이 남을까요. 저도 아직 안겪어봐서 모르겠네요 ^^
저도 저만치 밀어두고 있었는데 눈에서 멀어져도 머리 속에선 지워지지 않더라고요. 결국 읽고 말았는데 생각만큼 그렇게 무겁진 않았어요 (stella님도 읽으셔도 좋을 듯). 오히려 작가의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아버지를 보는 아들의 입장이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담담하고 절제도 잘 하고, 절망적인 순간에도 서로 농담도 주고 받는 여유를 보이기도 하고, 그렇더라고요.
필립 로스도 노벨상후보로 매년 거론되는 작가이니만큼 이 사람 작품들도 읽어볼 가치는 있는 것 같아요. 섬세하다기 보다 뭐랄까, 더 폐부를 찌르는 스타일이라고 할까요? 저도 이게 겨우 두권째 읽는 것이라서 잘은 모르겠지만요.

stella.K 2018-02-14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립 로스. 좋은 작가죠!

서니데이 2018-02-15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 즐거운 설연휴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강렬하고 독설같은 느낌의 시가 어디 최영미 시뿐이랴마는

어쩐지 그녀의 시는

그 독설이 독설로만 읽히지 않고

그동안 표현되지 못하고 가슴 한 구석에 숨어있던 어떤 감정을

있는지조차 의식 못하고 있던  내 감정을

시인이라는 그녀의 눈부신 능력은

이렇게 시로 구체화시켜 놓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했다.

 

위의 책들은 그동안 직접 구입해서 읽은 최영미시인의 시집과 산문집이지만

구입하지 않은 그녀의 다른 책들도 (잘 알려지지 않은 소설까지)

도서관에서 빌려서 다 읽어왔다고 생각한다.

 

2005년 11월에 출판된 시집 <돼지들에게>를 그해 12월에 구입하여 읽었는데

시집에 수록된 시들이

첫 페이지의 시 <돼지들에게>를 포함해서

포괄적 대상이라기보다

어떤 구체적 대상을 비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돼지, 여우, 진주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누구를) 가리킬까

생각하며 읽게 만들었다.

지금 읽었다면 담박에 알았을텐데.

 

 

 

 

 

언젠가 몹시 피곤한 오후,

돼지에게 진주를 준 적이 있다.

 

좋아라 날뛰며 그는 다른 돼지들에게 뛰어가

진주가 내 것이 되었다고 자랑했다.

하나 그건 금이 간 진주.

그는 모른다.

내 서랍 속엔 더 맑고 흠 없는 진주가 잠자고 있으니

 

(중략)

 

그가 가진 건

시장에 내다 팔지도 못할 못난이 진주.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감으로나 쓰이라지.

떠들기 좋아하는 돼지들의 술안주로나 씹히라지.

 

(중략)

 

나의 소중한 보물을 지키기 위해 나는 피 흘리며 싸웠다.

때로 싸우고 때로 타협했다.

두 개를 달라면 하나만 주고,

속이 빈 가짜 진주목걸이로 그를 속였다.

그래도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도망쳤다.

나는 멀리,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갔다.

친구에게 빌린 돈으로 기차를 타고 배에 올랐다.

그들이 보낸 편지를 찢고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그 탐욕스런 돼지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늙고 병들어, 자리에서 일어날 힘도 없는데

그들은 내게 진주를 달라고

마지막으로 제발 한 번만 달라고 ......

 

 

 

= 최영미, 시 <돼지들에게> 일부 발췌 =

 

 

 

 

 

13년이 지난 지금

 

바뀐게 없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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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2-10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부지런히 읽으셨군요.
저는 그 유명하다던 <서른 살 잔치...>도 읽지 못했어요.ㅠ

hnine 2018-02-10 20:52   좋아요 0 | URL
제가 편집증 증세가 좀 있나봐요. 한번 마음에 들어오면 그 사람 것은 다 찾아 읽어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
최영미 시인에 대해서는 할말이 많지요. 위에 <시대의 우울>이라는 산문집은 아마 스무번도 더 읽었을거예요.
stella님도 그렇게 애정하는 작가가 있지 않으세요? ^^

stella.K 2018-02-11 19:37   좋아요 0 | URL
와우, 20번?! 대단하심다.
다 꿰고 계시겠내요.
없는 건 아니지만 두 번 이상 읽는 경우는 많지 않죠.
애정한다고 해도 꼭 그 작가의 책을 전작하게 되지도 않고.
김훈이나 신영복님 같은 분은 애정하죠.

아, 알라딘엔 독서 고수들이 넘 많아 저 자신 부끄러워질 때가 많습니다.
h님은 그중 숨은 고수십니다.
존경함다.ㅠ^^

hnine 2018-02-11 23:21   좋아요 1 | URL
스무번도 더 읽은 이유가 뭐냐하면요, 그때 제가 국외에 있었는데 한국말로 쓰여진 책은 딱 그 책 한권 가져갔거든요. 그래서 한국말 책이 그리우면 그 책만 줄기차게 읽는 수 밖에 없었답니다. 물론 책 내용이 좋게도 했고요. ^^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65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석희 옮김 / 프레스21 / 199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남아있는 나날>, <우리가 고아였을 때>, <녹턴>, <나를 보내지마> 에 이어 다섯번째로 읽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이다.

맨부커상을 받은 <남아있는 나날>이 발표된 것이 1989년이었고 이 작품은 그로부터 6년 뒤인 1995년에 나왔는데 6년 만에 발표한 소설이 그 이전 작품과 이리 다를 수 있을까.

이야기는 가상의 국가, 가상의 도시 한 호텔에 라이더라는 피아니스트가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가상의 국가와 도시라고 했지만 읽다보면 어느 나라를 나타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긴 하다). 며칠 후에 있을 '목요일 밤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도 그냥 목요일 밤의 행사라고만 했을 뿐 어떤 목적의 행사인지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라이더 조차도 어떤 성격의 행사인지 정확히 모르고 있다. 아무튼 이 라이더라는 피아니스트가 할 일은 이 호텔에 투숙해있다가 행사에 참석하여 연주를 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호텔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그에게 뭔가 부탁을 하고 하소연을 하고, 자기들의 사정을 라이더가 해결해주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래서 라이더의 일정과 계획은 계속 미뤄지고 잊혀지고 불확실해진다. 라이더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는 어릴 때 라이더를 연상시키는 소년도 있고, 예전에 같은 학교를 다녔던 친구들도 포함되어 있으며, 아들에게 집요한 기대를 거는 부모와 그 아들도 있다. 이들이 모두 라이더의 과거 속에 존재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만나는 사람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과거에 가본 적 있는 장소, 건물, 사물에도 적용되는데, 그렇다면 라이더가 이 도시에 도착하여 겪는 일들은 모두 라이더의 과거와 어떻게해서든 관련이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짐작을 하기 시작한 것은 111쪽의 다음 내용을 읽고서였다.

호텔지배인의 아들인 슈테판이 부모님의 결혼 생확이 순탄치 않은 것을 회복시키는데 자기의 피아노 연주 실력이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죄책감과 불안에 싸여 있고, 그래서 여러 사람 앞에서 성공적인 연주를 하는 모습을 부모님 앞에 보여주고자 하는 강박, 부담을 묘사한 부분이다. 마치 심리학적 분석이 들어가야 할 내용으로 읽히기도 했고, 작가가 이런 슈테판의 심리를 어떤 목적으로 이 소설 속에 넣었을지, 앞으로 전개될 내용에 대해 어떤 전조가 되는 것인지 궁금하고 기대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라이더가 가졌던 과거의 한 단면일 수도 있다는 짐작을 처음 하게 만든 대목이다.

311쪽에는 보리스가 예전에 자기가 살던 집이라며 라이더를 데리고 간 곳의 구조가 라이더 자신이 예전에 살던 집과 같음을 발견하는 대목이 나온다. 라이더는 보리스에게 과거 어린 시절 자기의 모습을 투영시키는 것이다. 보리스가 자기의 아들이었다가, 과거의 어린 자신이었다가,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방식. 작가는 1, 2권, 거의 800쪽에 걸쳐 계속 이런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현실을 넘어서는 (책 뒤의 김석희 번역가는 '초현실적'이고 '실험적'이라고 했다) 서사에 더하여 또 주목할 것은 이 작품에서 이용되고 있는 '상징'이다. 베를린 장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콘서트 홀 주위의 그 장벽은 콘서트 홀이 눈 앞에 있는데도 사람들의 자유로운 접근을 막는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그것을 구경하러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되고 있다는 아이러니. 히틀러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막스 자틀러는 공포의 대상이자 증오의 대상이면서 숭배와 찬양의 대상으로 그려진다. 멋모르고 기자들 요구에 의해 이 자틀러 기념관 건물 앞에서 사진을 찍히고 마는 라이더는 이 일로 인하여 사람들로부터의 기대를 받는 신분에서 눈치를 봐야하는 입장으로 급락하게 된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답답함이 극치에 이를 정도로 라이더는 우유부단함과 사람들로부터의 인정욕구에 휘둘려 자기의 원래 목적을 자꾸 잊는다. 이것은 2편중에 나오는 구스타프의 행동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의 박수와 기대때문에 멈춰야할 시점을 놓치고 능력을 넘어서는 범위까지 보여주려는 우를 범한다. 라이더의 경우엔 자기의 원래 목적이 방해받는 데에는 사람들의 사정을 들어주느라 시간적으로 자꾸 미뤄지는 것 외에도, 콘서트홀까지 가는 길을 자꾸 잊어버리는 것도 원인의 하나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면서 계속 불안해한다.

믿고 있던 가치가 흔들리고, 물리적인 벽과 정신적 경계가 무너지고, 급변하는 정세와 상황. 포스트 모던으로 상징되는 이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통과하되 길을 잃은 심정이 된 우리들이 바로 이 작품 속 라이더인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모르는 제3자에게 자신의 불안을 해결해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걸고 하소연함으로써 오늘을, 또 내일을 버텨나가는 작품속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들인 것 같기도 하다.

 

 

 

 

= 내가 읽은 것은 구판이고, 현재는 민음사에서 새로운 표지로 나오고 있는데 (아래), 번역자를 비롯하여 내용은 동일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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