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65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석희 옮김 / 프레스21 / 199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남아있는 나날>, <우리가 고아였을 때>, <녹턴>, <나를 보내지마> 에 이어 다섯번째로 읽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이다.

맨부커상을 받은 <남아있는 나날>이 발표된 것이 1989년이었고 이 작품은 그로부터 6년 뒤인 1995년에 나왔는데 6년 만에 발표한 소설이 그 이전 작품과 이리 다를 수 있을까.

이야기는 가상의 국가, 가상의 도시 한 호텔에 라이더라는 피아니스트가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가상의 국가와 도시라고 했지만 읽다보면 어느 나라를 나타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긴 하다). 며칠 후에 있을 '목요일 밤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도 그냥 목요일 밤의 행사라고만 했을 뿐 어떤 목적의 행사인지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라이더 조차도 어떤 성격의 행사인지 정확히 모르고 있다. 아무튼 이 라이더라는 피아니스트가 할 일은 이 호텔에 투숙해있다가 행사에 참석하여 연주를 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호텔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그에게 뭔가 부탁을 하고 하소연을 하고, 자기들의 사정을 라이더가 해결해주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래서 라이더의 일정과 계획은 계속 미뤄지고 잊혀지고 불확실해진다. 라이더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는 어릴 때 라이더를 연상시키는 소년도 있고, 예전에 같은 학교를 다녔던 친구들도 포함되어 있으며, 아들에게 집요한 기대를 거는 부모와 그 아들도 있다. 이들이 모두 라이더의 과거 속에 존재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만나는 사람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과거에 가본 적 있는 장소, 건물, 사물에도 적용되는데, 그렇다면 라이더가 이 도시에 도착하여 겪는 일들은 모두 라이더의 과거와 어떻게해서든 관련이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짐작을 하기 시작한 것은 111쪽의 다음 내용을 읽고서였다.

호텔지배인의 아들인 슈테판이 부모님의 결혼 생확이 순탄치 않은 것을 회복시키는데 자기의 피아노 연주 실력이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죄책감과 불안에 싸여 있고, 그래서 여러 사람 앞에서 성공적인 연주를 하는 모습을 부모님 앞에 보여주고자 하는 강박, 부담을 묘사한 부분이다. 마치 심리학적 분석이 들어가야 할 내용으로 읽히기도 했고, 작가가 이런 슈테판의 심리를 어떤 목적으로 이 소설 속에 넣었을지, 앞으로 전개될 내용에 대해 어떤 전조가 되는 것인지 궁금하고 기대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라이더가 가졌던 과거의 한 단면일 수도 있다는 짐작을 처음 하게 만든 대목이다.

311쪽에는 보리스가 예전에 자기가 살던 집이라며 라이더를 데리고 간 곳의 구조가 라이더 자신이 예전에 살던 집과 같음을 발견하는 대목이 나온다. 라이더는 보리스에게 과거 어린 시절 자기의 모습을 투영시키는 것이다. 보리스가 자기의 아들이었다가, 과거의 어린 자신이었다가,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방식. 작가는 1, 2권, 거의 800쪽에 걸쳐 계속 이런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현실을 넘어서는 (책 뒤의 김석희 번역가는 '초현실적'이고 '실험적'이라고 했다) 서사에 더하여 또 주목할 것은 이 작품에서 이용되고 있는 '상징'이다. 베를린 장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콘서트 홀 주위의 그 장벽은 콘서트 홀이 눈 앞에 있는데도 사람들의 자유로운 접근을 막는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그것을 구경하러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되고 있다는 아이러니. 히틀러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막스 자틀러는 공포의 대상이자 증오의 대상이면서 숭배와 찬양의 대상으로 그려진다. 멋모르고 기자들 요구에 의해 이 자틀러 기념관 건물 앞에서 사진을 찍히고 마는 라이더는 이 일로 인하여 사람들로부터의 기대를 받는 신분에서 눈치를 봐야하는 입장으로 급락하게 된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답답함이 극치에 이를 정도로 라이더는 우유부단함과 사람들로부터의 인정욕구에 휘둘려 자기의 원래 목적을 자꾸 잊는다. 이것은 2편중에 나오는 구스타프의 행동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의 박수와 기대때문에 멈춰야할 시점을 놓치고 능력을 넘어서는 범위까지 보여주려는 우를 범한다. 라이더의 경우엔 자기의 원래 목적이 방해받는 데에는 사람들의 사정을 들어주느라 시간적으로 자꾸 미뤄지는 것 외에도, 콘서트홀까지 가는 길을 자꾸 잊어버리는 것도 원인의 하나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면서 계속 불안해한다.

믿고 있던 가치가 흔들리고, 물리적인 벽과 정신적 경계가 무너지고, 급변하는 정세와 상황. 포스트 모던으로 상징되는 이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통과하되 길을 잃은 심정이 된 우리들이 바로 이 작품 속 라이더인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모르는 제3자에게 자신의 불안을 해결해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걸고 하소연함으로써 오늘을, 또 내일을 버텨나가는 작품속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들인 것 같기도 하다.

 

 

 

 

= 내가 읽은 것은 구판이고, 현재는 민음사에서 새로운 표지로 나오고 있는데 (아래), 번역자를 비롯하여 내용은 동일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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