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유산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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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읽은 그의 소설 <에브리맨>도 죽음으로 시작하더니 자전적 에세이라는 이 책도 역시 죽음에 관한 책이다. 우리 나라엔 2017년에 번역되어 소개되었지만 원래 1991년 나온 책이니 나온지 꽤 된 셈이다.

미국의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필립 로스가 1933년생이니까 올해로 여든 넷. 이 책에서 그의 아버지가 죽음을 선고 받은 나이와 비슷한 나이에 이르렀다.

안면마비로 시작된 그의 아버지의 증세는 뇌종양, 그것도 악성 대형 종양으로 밝혀지고 어떤 치료 방법도 별로 낙관적이지 않다는 선고까지 듣게 된다. 살아나도 힘들게 버티는 날들만 남아있을 것이라는.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더욱' 힘들어질 수 도 있으니 희박한 가능성을 가지고서라도 수술을 하겠는지 결정하라는, 의사의 절망적이고 솔직한 소견에도 아버지는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어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나빠져가는 몸 상태로 인해,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을 받아들여만 하는 아버지를 찾아간 저자는 방에만 처박혀 있지 말고 같이 산책을 하자고 제안하는데 아버지는 방의 커튼을 다 내린채 괜찮다며 혼자 있고 싶어하는 대목이 나온다.

줄여서 옮겨 본다.

"자, 스웨터를 입고 운동화를 신으세요. 아름다운 날이라 이렇게 안에만 앉아 있을 수는 없어요. 커튼까지 다 내리고 말이에요."

"나는 안에 있어도 괜찮아."

그 순간 나는 아버지에게 네 단어, 그전에는 평생 아버지에게 해본 적이 없는 네 단어를 내뱉었다.

"제가 하라는 대로 하세요."

그것은, 그 네 단어는 먹혔다. 나는 쉰다섯이고 아버지는 여든일곱이 다 되었고, 때는 1988년이다.

"제가 하라는 대로 하세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아버지는 그렇게 한다. 한 시대의 끝이고, 다른 시대의 새벽이다. (94쪽)

필립이 아버지에게 말한 네 단어란 아마도 Do as I say 정도이겠지. please 도 없는 그야말로 명령문.

자식이 부모에게 지시와 명령을 듣던 시기를 살다가 거꾸로 자식이 부모에게 지시를 하는 때, 해야만 하는 때가 온다. 부모가 자식에게 의존해야하는 시기가 왔다는 뜻이다.

혼자 걷기도 힘들어지고 백내장으로 잘 보이지도 않게 된 아버지가 어느 날 아들 집 화장실에 혼자 갔다가 온 화장실 바닥이며 벽, 변기, 수건에까지 똥으로 범벅이 되게 해놓은 것을 아들 필립이 뒤늦게 발견하고 그것을 치우며 필립은 생각한다. 그것이 나의 유산이라고. 돈이 아니라, 어떤 특정 물건이 아니라, 똥이.

유산이란 부모가 남기고 가는 모든 것이다. 원해서 남겨주고 가는 것도 있지만, 원하지 않아도, 받고 싶지 않아도 남겨주고 가는 것, 물려 받게 되는 것들도 모두 포함되는 것이다.

후반부에 오면 역시 생명연장장치 이용에 대한 동의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죽음의 시간이 가까와오고 더이상 비참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아버지의 얼굴은 움푹 파이고 망가진 가운데 저자는 아버지의 얼굴에 입술을 갖다 대고 간신히 마지막이 될 말을 속삭인다. "아버지, 보내드릴 수 밖에 없겠어요." 라고.

 

나는 진즉부터 이 책이 읽고 싶으면서도 아직도 수시로 밀고 들어오는 슬픔과 아픔 때문에 손에 책을 잡기까지 시간이 꽤 흘러야했는데, 정작 읽어보니 작가는 비교적 감정 표현에 지나치지 않았고 (절제를 잘 했고), 작가도, 그리고 그의 아버지도 바탕에 유머와 재치가 번뜩이는 사람들이어서 책 내용이 너무 어둡고 처지기만 하진 않았던 것 같다.

 

2012년에 이미 이제 더이상 글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 필립 로스.

작가로서, 그동안 써온 작품들로 만족을 하기란 얼마나 쉽지 않았을까. 새로운 걸 더 쓰기보다는 정리하고 회고하며 시간을 보내겠단다.

그동안 살아온 날들로 만족을 하기란 또 얼마나 쉽지 않을까. 어느 시점이 오면 욕심을 줄이고, 가진 것을 내려놓고, 삶을 단순화하며 마무리하겠다는 결심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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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2-13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기가 쉽지는 않겠어요.
가끔 사람은 왜 자식을 낳고자 하는 걸까를 생각해 봅니다.
아무래도 죽을 때 외롭지 말라고 그런 건 아닌가 싶기도 한데
자식의 입장에선 좀 버겁기도 하겠죠?
이런 책 읽으면 남의 얘기 같지 않고 될 수 있으면
저만치 밀어두고 싶기도 해요.

hnine 2018-02-13 19:29   좋아요 1 | URL
자식이 있으면 죽을때 덜 외로울까요? 오히려 더 생에 미련이 남을까요. 저도 아직 안겪어봐서 모르겠네요 ^^
저도 저만치 밀어두고 있었는데 눈에서 멀어져도 머리 속에선 지워지지 않더라고요. 결국 읽고 말았는데 생각만큼 그렇게 무겁진 않았어요 (stella님도 읽으셔도 좋을 듯). 오히려 작가의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아버지를 보는 아들의 입장이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담담하고 절제도 잘 하고, 절망적인 순간에도 서로 농담도 주고 받는 여유를 보이기도 하고, 그렇더라고요.
필립 로스도 노벨상후보로 매년 거론되는 작가이니만큼 이 사람 작품들도 읽어볼 가치는 있는 것 같아요. 섬세하다기 보다 뭐랄까, 더 폐부를 찌르는 스타일이라고 할까요? 저도 이게 겨우 두권째 읽는 것이라서 잘은 모르겠지만요.

stella.K 2018-02-14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립 로스. 좋은 작가죠!

서니데이 2018-02-15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 즐거운 설연휴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