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심리학자로 살아 보니 - 대한민국 상처 치유 심리 에세이
이나미 지음 / 유노북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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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의 말이나 글이라면 혹시 지나간 세대의 일침으로 여겨질 때도 있겠지만 이 저자는 나보다 연배이긴 하나 나이 차이가 그리 많이 나지는 않는다. 최근에 나온 책이기도 하고, 신문 컬럼 등에 기고했던 글인지는 모르겠으나 근래 우리 나라의 정치, 사회 현상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정리한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어서, 평상시 사람들과 이런 내용들로 충분한 의견 토론의 기회가 없이 혼자 생각만 해오던 나로서는 내 생각과 공통점, 차이점들을 발견해가며 읽어가는 맛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세상 보는 눈도 깊어질 줄 알았는데 남들은 어떤지 몰라도 최소한 내 경우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예전에 그렇게 온 정신을 사로잡던 고민중 이제 더 유효하지 않은 것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나 그러면 뭐하나, 예전에 하지 않던 새로운 고민들이 나이와 함께 밀고 들어오는걸. 그중 대표적인 것이 노년의 삶의 가치를 어디다 두고 살아야 하나, 이것이다. 다람쥐가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은 어떻게 보람있게 살까 고민하더냐, 그냥 눈 떠지면 주어진 하루를 사는 것이다, 라는 어느 스님 말씀도 있었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다람쥐가 아니라 사피엔스이니 어쩌냐. 인생, 허무하지만은 않다는 쪽으로 마음을 몰아가려는 노력을 하다가도 이런 노력을 하고 있는 자체가 인생은 허무하다는 걸 증명하고 있지 않냐고 자문하는 하루, 한달, 일년. 그러다보니 이 책 중에서도 다음 구절이 눈에 쑥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노인들이 정신 치료를 받거나 상담을 받으려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젊은 의사들이 인생에 대해 뭘 알겠느냐는 생각으로 아예 치료를 거부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나이가 들면 정신분석을 해 봐야 별 소용이 없다고 프로이트가 토로한 적도 있다. 그러나 분석심리학자인 칼 융은 오히려 중년을 넘겨야 참된 자기 개성을 찾아간다고 강조한다. 외부와의 관계, 또 외부에 보여 주는 이미지에 집중하는 젊은 시절과 달리, 자신 안으로 깊이 들어갈 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융 심리학적 용어를 쓰자면 작은 자아 (ego)를 버리고 완성된 큰 자아 (self)를 지향하기 위한 정신의 축 (Egp-self axis)을 다시 회복해 보는 것이다.

노인이 되어 모두가 직면하게 되는 노화와 죽음의 문제인간의 현세적인 상황을 뛰어넘는 우주의 영원성에 대해 묵상하게 만든다. (56,57쪽)

 

이건 부의 정도와도 상관없고, 학식의 정도와도 상관없는 것 같다. 누구에게나 한번 쯤 주어지는 문제이고 죽을 때까지 지고 가는 문제가 아닐까. 이 문제는 인간의 영역이 아닌 영성의 영역에서 가치를 찾을 수 밖에 없다는 의견을 저자는 제시한다.

 

노년의 아름다움은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외모, 화려한 옷차림, 멋지게 꾸며 놓은 살림살이, 남들에게 과시할 만한 성취 같은 것을 훌쩍 뛰어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성의 영역에서 나와야 한다. (57쪽)

 

저자의 이 말을 특정 종교 여부를 뛰어 넘어 이해한다. 나는 인간의 이성으로 해결 안될 문제들을 붙잡고 있구나, 그래서 뒤늦게 종교에 귀의하는 사람들이 있는거구나 하는 생각.

남을 화나게 만드는 이들은 사실 자신에게 몹시 화가 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평소 내 생각과 같다. 남을 화나게 만드는 이들치고 행복하고 만족한 사람은 없다고. 본인이 혼자 불행하면 억울하니까 남까지 화나게 만들어 자신의 분노를 남에게 전가하려는 무의식적 소망에 휘둘리는 것이라고 했다. 내 경우엔 남을 화나게 만든다고 해도 내 속의 화가 조금도 해소 되지 않던데.

상처는 상처다. 마음의 상처는 구체적인 언어로 다시 변환돼야 회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고 그렇게 소중히 잘 다루어져 회복된 상처와 고통은 에너지라고 했다. 

인공지능의 영역은 점차 늘어나고 사람이 필요한 영역은 점차 줄어갈 미래가 눈에 보이고 있지만, 인공지능보다 사람에게 우월한 영역이 공감과 상상력이고, 사람의 성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지 여부라고 한다. 지능을 뛰어넘는 것이 있다면 그건 창조적인 에너지가 있느냐 하는 것이라는 말은 사람에겐 아직도 정신이 중요하다는 말로 해석된다.

항상 행복하고 풍요롭게 이런저런 모임에 참석하고 아침저녁으로 연속극 꼬박꼬박 챙겨 보고 쇼핑하는 데 시간을 더 많이 쓰는 삶은 창조적이기 어렵다, 창조적이려면 외로워야 한다는 말에 공감, 아니 위로받았다고 해야하나? 그렇다고 늘 외로워야 한다는 말이 아닐 것이며, 고립된 생활을 한다고 모두 창조적이라는 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에 익숙하지 않고서는 창조적인 생각을 하기 어려운 것은 맞다고 생각한다.

앉아서 사유하며 보내는 시간이 많다고 해서, 좀 더 구체적인 예로, 앉아서 책만 많이 읽는다고 해서 정신적인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로 "노동은 영성의 지름길이다"라고 했다. 예전에 불가에서는 아무 의미없어 보이는 일 같지만 일정 시간 열심히 청소하는 것부터 하게 했고 간디, 테레사 수녀, 혜능조사, 성 프란치스코 같은 분들은 모두 몸을 아끼지 않는 근면성을 보여준 분들이라고 한다.

자신의 상처와 어두운 면을 외면하지 않고 직면하고 인정하여 잘 보살핌으로써 회복한 사람들이 있다. 자기 안의 어두운 면을 보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작은 자아를 뛰어 넘어 큰 자기로 나아갈 수 있고, 아픔을 웃음으로 이끄는, 진정 창조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런 사람에게서 뻗어나오는 따뜻한 기운, 곧 에너지. 물질적으로 더 갖고 외형적으로 더 갖춰서 뿜어나오는 것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저자의 책을 꽤 읽어왔지만 저자 본인의 얘기는 간혹 할지언정 가족 얘기를 풀어놓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에서는 간간히 저자 가족 얘기도 하고 있었다. 남들이 걷는 길은 꽃길, 내가 걷는 길은 가시밭길, 이렇게 오해하고 사는 사람들을 생각해서일까? 내 경우엔 내가 걷는 길이 꽃길이 아닌 것을 물론이고 남들이 걷는 길도 꽃길이 아니긴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으니 더 중증인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어도 말랑말랑한 뇌, 고무공 같은 사고 능력, 세포막같은 semi-fluidity를 잃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 저자의 글을 읽다보면 그가 그런 사람으로 사는 예시가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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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7-07-03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티비에서 성신제씨 스토리를 보았습니다. 나이 70 에도 여전히 새로운걸찾아서 시도하고 열정이 넘치더군요. 잘 지내시죠 나인님.

hnine 2017-07-03 12:36   좋아요 0 | URL
그분 저랑 나이를 바꾸셔야겠네요 ㅋㅋ 저는 70될려면 멀었는데도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고 있는데 말예요.
저는 고만고만 지낸답니다. 거의 매일 집안에서 두문불출하고 지내니까 제 친구들이 저보고 너 그러다가 치매온다고 걱정하기도 해요.
프레이야님 어찌 지내시는지도 궁금해요.
 
[전자책] 어차피 내 마음입니다 - 서툴면 서툰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지금 내 마음대로
서늘한여름밤 지음 / 예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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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란 말을 되도록 자제하려고 한다. 어느 날 문득 그말을 자주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 좋은 경우에 쓰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의 다른 말 아닌가. 어차피 내 할 일 입니다, 어차피 내 가족 입니다, 어차피 내 나라 입니다, 어차피 내 몫입니다...

어차피 내 마음입니다. 물론 저자가 어떤 의미로 붙인 제목인지는 안다. 끝까지 내가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해주어야 할 내 마음이라는 뜻일 것이다.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지내고 나면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을, 겪고 있는 동안 담담하기란 참 어렵다. 계획대로 가던 길을 수정해야 할땐 마치 일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일이 일어난 양, 잘못이라도 저지른 양 자책하고 분석하고 후회하면 안된다 스스로 억누르기도 한다. 하지만 계획을 수정해야할 일은 살아가다 보면 몇번이고 있을 것이고 그게 곧 사는 과정이라는 걸 나도 이제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심리학을 전공해서 전공분야에서 전문가의 길을 걷게 되리라 생각했다가 궤도 수정. 주위의 걱정. 그것보다 더 한 자기 반성 모드. 정체성 흔들림. 그러다가 그림 일기라는 것을 쓰게 되었고, 이 책이 만들어지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저자가 꼭 심리학을 전공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자기 마음을 다독이고 일으켜 세우는 능력이 있는 사람 같다. 이렇게 생각해보고 저렇게 생각해보는 융통성, 저절로 생겨나는 자신감이라기 보다 만들어가고 다져가는 자신감. 투덜거리리고 걱정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만 그게 어느 선 넘어가지 않게 되돌리는 능력. 어차피 내 마음이라고 하기 보다 기특한 내 마음이라고 불러주었으면 좋겠다.

덧붙이고 싶은 말 첫째. 이 모든 능력이 지금의 남편, 즉 남자 친구를 만나고서 갑자기 일어난 일은 아니었기를 바란다. 남자 친구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공감은 갔으나 그가 해주는 듣기 좋은 말. 영향은 물론 받았겠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정도는 아니었으면. 남자 친구 아니었어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기를.

둘째, 그림보다 글이 낫다. 심심하지 않아 좋긴 하지만 내용에 크게 보탬이 되지 않고, 그림과 같이 있는 글씨는 너무 작아서 보기에도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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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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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시작하자마자 사피엔스가 인류 진화 과정에서 가장 나중에 출현하여 현생하는 종이 아니라고 하는데서부터 충격이었다. 최종 진화종이 아니라 다른 Homo 속의 종들과 공존했다가 최종적으로 선택된 종이라니. 600쪽 가까이 되는 분량을 읽으면서 지루할 새가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아마 이런 작은 놀람이 계속 터져주었다는 것이다. 내용도 그렇고 도무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글쓰기, 고리타분하지 않은 역동적 표현. 내용과 문장이 아무리 뛰어나도 번역이 제대로 그것을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책은 그 점에서도 아쉬움이 없었다.

 

역사의 진로를 형성한 세개의 혁명은 다음 세가지였다.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

인지혁명이 70,000년전, 농업혁명이 12,000년 전에 발생한데 비해 가장 나중 일어난 과학혁명은 불과 5백년전. 그리고 이 과학혁명은 어쩌면 역사의 종말을 불러오거나, 아니면 완전히 다른 것을 새로이 시작하게 할지 모른다. 이 세 혁명이 인간에게, 그리고 책의 후반부에 가면 생태계의 다른 생물들에게까지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하는 것이 이 책의 주제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는데, 더 나아가 진짜 궁극적으로 알고 싶은 것은 사피엔스의 미래가 아닐까 한다. 미래를 예측해보는 것이 역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며 유발 하라리의 의도도 그것이 아닐지.

 

진화와 멸종. 반대의 사건으로 볼 수 도 있겠지만 이 책을 읽다보니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생각으로  바뀌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 변화가 없는 평형 상태에서는 진화도 멸종도 없겠지만 생명체가 있는 계에서 이런 상태가 가능할리는 없을 것이고, 기존에 없던 변화에 시기를 맞아 어느 종은 진화의 길을, 다른 어느 종은 멸종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인 셈이다. 나아가, 진화가 꼭 발전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과학 서적에서보다 더 실감나게 이 책을 읽는 동안 알게 될 줄 몰랐다. 예를 들어 소는 진화적 관점에서 보면 역사상 가장 성공한 종 가운데 하나지만 동시에 지구상에서 가장 비참한 동물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종교의 발생과 의의. 인간에게 종교가 왜 필요하고 종교는 인간에게 무엇을 주었나. 인간은 왜 종교라는 것이 없어서는 안되었던가에 대한 그의 설명은 분명했다. 농업혁명으로 인해 모여사는 인간의 집단 크기가 커졌고 이런 구조를 유지시키 위해 역할을 한 것은 종교와 돈과 제국주의. 이중 취약한 구조에 초월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은 종교 말고는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취약한 구조로 인류의 질서를 유지시켜야 했던 인간. 거기까지만 얘기하면 인간은 그야말로 취약한 인간에서 끝났겠지만 기어이 초월적이고, 도전을 불허하는 종교라는 체계를 탄생시킨 이상 인간은 취약하지 않다. 유태인으로서 일신교를, 기독교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저자의 시각에 또 놀람.

 

밈 (meme)이라는 용어를 막연하게 알듯 말듯했는데 (이것은 즉 모르고 있다는 말), 유기체의 유전자와 대응하여 설명한 저자 덕분에 깨끗하게 머리 속에 정리할 수 있었다. 문화적 구성요소라는 정의만큼 새로왔던 것은 유전자가 유기체 진화의 기반이 되듯이  밈 역시 문화적 진화의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즉 복제의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문화의 진화라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 내 머리 속에 그것이 유전자와 같은 구성요소를 기반으로 복제되고 진화가 된다는 설명에 또 하나의 눈이 열리는 느낌.

 

근대 초기 유럽이 제국주의로 세력을 뻗쳐갈 당시 아시아의 대국이랄 수 있는 중국이나 페르시아는 왜 그러지 못했는가? 중국이나 페르시아가 세력 확장에 실패하게 된 원인은 영국이나 스페인 등의 유럽 제국주의 국가에 비해 기술적 낙후성도, 역사가 짧아서도 아니었다. 바로 현대과학과 자본주의에 대한 잠재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명쾌한 설명. 중국도 다른 대륙으로 세력 확장을 위해 배를 보내어 시도는 하였으나 그야말로 시도에 그치고 말았다. 유럽의 스페인이나 영국이 우리는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인식하고 새로운 대륙을 개척하러 갈때 그곳의 정복뿐 아니라 그곳에 대해 배워오기 위해 군사들 뿐 아니라 여러 분야의 학자들을 동참시킨데 반해 중국은 땅을 정복할 생각만 했지 새로운 곳에 대해 뭔가를 배워올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배에는 군사들이 전부. 이런 사고의 차이는 유럽에서 현대 과학과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게 하였고 자본의 축적을 불러왔다.

물론 이것이 유일한 답은 아니겠지만 결론이 무엇이든 그것을 유추하는 과정과 근거의 논리성과 통찰력에 설득 당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주의를 넘어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그것으로 인간의 역사가 얼마나 대대적인 변화를 겪어 왔는지, 페이지를 넘겨가도 흥미진진한 내용은 계속 된다. 부자가 소비의 주체가 될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 부자는 자신의 수익을 비생산적인 활동에 낭비하지 않고 투자하여 확장하는데 쓰고, 오히려 부자가 아닌 계층이 소비에 열올린다. 소비가 미덕이라며, 부자들의 부를 더 쌓아주는 것에 목숨 거는 것이다. 더 기막힌 것은 이것이 자본주의가 굴러가게 하는 근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로 엄청난 에너지를 사용해오고 있고 그러다보면 곧 에너지가 고갈될 것을 염려했지만 그런 일은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새로운 형태의 에너지를 개발해 낼 것이므로) 정작 더 위협적인 것은 생태계의 전환이라는 주장을 위해 근거로 제시하는 것들을 읽어보면 저자가 과학적인 지식도 상당히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책의 마무리로 저자는 당연히 사피엔스가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생명공학, 인간성, 행복, 삶의 의미 운운하며 마친 것은 단순히 <운운>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고 본다. 행복, 삶의 의미 등은 그가 앞에서 실체 없이 개념만 있는 것이라고 하던 것들이 아닌가. 생물학적 행복, 화학적 행복, 계산된 행복 등을 언급하며 실체없는 행복을 실체화 하려고 하는건 사피엔스가 종말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실체없는 것들이 결국 물질적 실체들 위에 있을지도.

 

호모데우스를 안 읽을 수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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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7-06-22 0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이 다시 읽고 싶어지는 리뷰네요^^ 호모데우스도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겁니다!

hnine 2017-06-22 08:18   좋아요 2 | URL
저도 제가 읽은 책에 대해 다른 사람이 쓴 리뷰 찾아 읽어보기 좋아해요. 더 와 닿더라고요 ^^
호모데우스도 꼭 읽어보겠습니다. 읽으신 분이 추천해주시니 의욕이 배가 됩니다.
 

 

별 생각 없이 콕 찍어서 본 영화가 의외로 괜찮아 그것만해도 만족스러운데,

다 보고 나서 검색해보니 이미 이 감독의 영화를 이전에도 두 편이나 봤다는 것을 알았다.

별 생각없이 콕 찍어 보았다는 영화는 이것 

 

 

 

 

영화 다운로드 사이트에서 이 영화 고를때, 포스터 제목 위의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일루셔니스트> 이런 것 찬찬히 챙겨보지도 않았다.

그저, '이 영화 뭔가 특이해보여! 봐야겠다!' 이것이 전부.

제목의 벨빌은 동네 이름이고, 제목의 세쌍둥이가 주인공은 물론 아니다.

영화 내내 딱 한번 웃는, 자전거 타기가 유일한 행복인 외로운 소년 챔피온 (이름이 챔피온입니다 ^^), 그리고 그의 할머니인 마담 수자가 주인공.

사람은 아니지만 영화 내내 등장하는 개도 주인공으로 넣어주고 싶다.

어느 나라 영화냐 하면 무려 4개국. 벨기에, 캐나다, 프랑스, 영국 합작 영화.

감독이 실뱅 쇼메.

아마 위의 영화를 모르는 분이라도 이 감독이 만든 아래 두 영화중 최소한 한 편은 눈에 익을 것이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일루셔니스트> 두 편 모두 아주 괜찮은 영화.

이 두 편의 영화도 그러했지만 <벨빌의 세 쌍둥이> 를 보면서도 우리 나라에서도 이런 류의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회의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무거울 수도 있는 주제를 가볍게, 눈요기거리 화면 하나라도 더 만드는데 급급하기 보다 느리게 진행되어도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담은, 결핍과 상실이라는 인생의 주제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견딜수 있게 해주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전달해주는, 그런 영화.

획일화되고 통제된 사고 방식의 사회, 교육, 문화 환경에서는 나올 수 없을 영화란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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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terguy 2017-06-06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영화 소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hnine 2017-06-06 09:40   좋아요 0 | URL
눈을 즐겁게 하는 오락성은 조금 떨어질지 몰라도 추천해드릴수 있는 영화거든요.
자전거 타기가 유일한 즐거움이었던 소년이 나중에 기계 조작에 의해 아무 느낌없이 페달을 굴리며 초췌해져 가고 있는 모습에서는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 감독이 정말 그런 의도였는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의미를 찾아가며 보는 재미가 있어요.
waterguy님도 기회 되시면 한번 보세요~~

stella.K 2017-06-06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런 영화가 있었네요.
저도 가끔 프랑스 만화 영화 보곤 하는데
확실히 뭔가 다르더라구요.
물론 밑은 두 영화 보기도 했구요.
세쌍둥이 한번 챙겨 봐야겠습니다.^^

hnine 2017-06-06 21:00   좋아요 1 | URL
영화 다운 로드 사이트 리스트에 이전에 본 영화 (질리 홉킨스) 바로 옆에 있던 영화랍니다. 그래서 눈에 들어왔지 저도 듣도 보도 못한 영화예요.
혹시 보시다가 중간에 세 할머니가 식사로 뭘 먹는지 보고 놀라지 마시기를~ ^^
 
한낮의 우울 -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 우울의 모든 것
앤드류 솔로몬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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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환자는 정상인에 비해 진실을 보는 눈이 더 날카롭다" (Sigmund Freud; Mourining and Melancholia)

 

 

저자 자신이 우울증을 경험했지만 그것이 꼭 어머니의 자살 직후에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슬픔을 극복한 후 느닷없이 시작되었다.

이처럼 우울증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점이 많고, 생각보다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것을 알게된 저자는 잡지사에 특집 기사를 투고한 것이 계기가 되어 우울증에 대한 책을 본격적으로 써볼 것을 제의한 출판사의 요청에 따라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 사람의 전공이 무엇인가, 읽으면서 저자 소개 다시 들춰보기를 몇번을 했을 정도로 그는 여러 분야에 걸쳐 마치 해부하듯이 우울증을 파헤치고 분석하고 정리해놓았다.

참고문헌과 주석 리스트만 70여쪽, 본문이 650쪽이 넘는 이 두툼한 책을 읽으며 과연 나는 무엇을 얻고 싶은 것일까.

"이 고통에 이른 것을 환영하노라. 그대는 이것으로부터 배움을 얻으리니" (오비디우스) (59쪽)

 

우울증을 정도에 따라 두가지로 나누면 경증 우울증과 중증 우울증이 있다. 경증 우울증을 이루는 것이 삶의 덧없음과 한계에 대한 예리한 인식이라면 중증 우울증은 붕괴의 원인이 되는 정도의 우울증을 말한다. 그렇다면 중증은 아니더라도 경증 우울증으로 부터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울증이란 과연 삶을 갉아먹는 벌레 같은 것인가. 한번 빠지면 평생 헤어나오기 어려운 늪, 올가미 같은 것일까. 우울증은 결국 자살이나 그에 준하는 상태로 가는게 맞는가. 우울증은 극복될 수 있는 것일까.

우리 모두 특정한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우울증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과 싸울 능력도 있는 것이고, 끔찍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인생에서 성공을 거두며 사는 경우도 있고 가벼운 우울증에도 완전히 망가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지 않은가.

우울증에서 벗어났다고 할때 재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사랑, 통찰력, 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조급함을 버리고 꾸준한 노력과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울증은 유전자에 의한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다른 대부분의 질병과 마찬가지로 유전적 요소도 분명히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일반적인 우울증의 경우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비율은10~50%라고 한다). 하지만 우울증의 요인들은 오랜 세월에 거쳐 대개는 평생 동안 누적된 것이라고 하는게 맞다 (75쪽).

우울증 약을 복용하는 것은 치료를 위해 필요한 과정 중 하나이며, 약물치료를 중단하면 1년 이내 재발률이 80%, 약물 치료를 하면 회복률이 80%라고 한다 (123쪽).

전체 열두장 중 두 장에 걸쳐 저자는 실제 이용되고 있는 여러 가지 치료 방법에 대해 자세하게 조사하여 정리해놓았다. 네가지 그룹의 항우울제는 물론이고 ECT (electroconvulsive therapy), 수술, 최면 요법, 아프리카 줄루 족의 민속적 요법에 이르기까지, 어떤 방법이 최적이고 최선인지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어떤 치료 방법이든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다는 것은 다른 질병의 치료 방법들과 마찬가지 이다. 치료 방법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좋은 치료사를 만나는 것이라고 하는데 좋은 치료사를 찾으려면 우선 여러 치료사들을 만나볼 것을 저자의 경험에 바탕하여 권하고 있다.

우울증 치료 방법을 개발하는데 어려움은 예상하다시피 우울증이 일어나는 동안 뇌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현상들은 아직 외부 조작으로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울증의 의학적 치료에 대한 연구가 신경전달물질에 집중되는 이유도, 신경전달물질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나마 외부 조작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울증의 발병율은 성별, 계층, 나이에 따라 골고루 분포하지 않다는 특징이 있다. 여성이 남성보다 우울증에 많이 걸린다는 것은 호르몬의 든든한 (!) 배경이 있다는 생물학적 이유 외에도 사회적인 차이도 있다. 즉 남성보다 여성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하는 경우가 더 빈번하고, 산후우울증, 남녀 성 역할 차이 등 사회적인 압박을 더 받고 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정신 질환은 오랫동안 남성들에 의해 정의되어 왔다는 점도 주목하자). 하지만 미국 대학생의 경우 최근엔 남녀 우울증 발병율 차이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보고도 있다고 한다.

어린이의 우울증 치료는 곧 부모의 치료가 수반된다는 것과 어린이 우울증은 성장, 성격 발달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 노인 우울증은 발견이 쉽지 않은데 (당연시 하는 경향때문에), "감정실금"이라는 용어가 등장! 감정의 조절 기능 장애로 사소한 일에도 웃거나 울기만 하는 상태를 말한다. 우울증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말은 곧 사람들의 수 만큼 다양한 우울증이 존재한다는 뜻도 될 것이다. 모든 우울증이 유일하다는 것. 그래서 환자들의 케이스 얘기를 읽다보면 아무리 읽어도 중복된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중독와 우울증 사이의 관계도 빠뜨릴 수 없다. 둘 중 어떤 것이 원인이고 어떤 것이 결과인가. 아니면 서로 독립적으로 걸리는 것인가. 둘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중독 하면 도파민, 우울증 하면 세로토닌. 이렇게 알려져 있는게 일반적이고 이 둘이 각자 독립적인 수용체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수용체 이전, 혹은 이후의 어떤 단계에서 얽혀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알콜 중독자에게 항우울제를 투여하면 알콜을 끊기가 더 쉬워진다는 최근 연구 결과들도 있다고 하지만, 여기서 최근이란 이 책이 출판된 2004년일테니 지금은 얼마나 더 업데이트 된 결과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자살에 대한 것이 한 장 (chapter), 그것도 다른 장에 비해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이라는 것이 오히려 의외다. 실제로 자살 성향은 우울 성향과 독립적으로 취급되는 것이 맞다고 저자는 쓰고 있다. 그저 공존할 뿐이라고. 우울증의 심각성과 자살 가능성 간에는 커다란 상관 관계가 없음에도 왜 이 둘이 독립적으로 진단되지 못하고 서로 중복되는 것일까 물음으로 시작한다. 앨버레즈라는 수필가는 삶을 통해서는 점차적으로 무디어질 수 밖에 없는 고통을 귀신을 쫓아내듯 몰아내려는 시도가 자살이라고 했고, 쇼펜하우어는 삶의 공포가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는 순간 인간은 삶에 종지부를 찍는다고 했다.

지루할까봐 그랬을까? 우울증의 역사가 책의 앞부분이 아니라 중반 이후에 한 장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전혀 지루하지 않게 읽혔다. 우울증을 지칭하는 말이 지금은 Depression (디프레션)이지만 이것은 19세기 중반부터 쓰였고 이전에는 Melancholia (멜랑콜리아)라고 했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울증의 역사, 그것을 어떤 시각으로 보았고 우울증 환자들을 사회에서 어떻게 처우하고 치료해왔는지 설명해놓았다. 이 책의 제목 <한낮의 우울>은 원제는 <한낮의 악마>, The Noonday Demon 인데 이것은 성경 시편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자신이 있는 곳을 싫어하고 타인을 혐오하고 경멸하고 나태하게 만드는 한낮의 악마" 라고.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중세는 우울증을 신과 관련지어 도덕적으로 설명했다면 르네상스기는 우울증이란 곧 심오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 미화하였으며, 그런 경향은 17세기에도 계속 되다가, 모든 것을 과학과 이성으로 설명하려는 18세기에는 우울증과 정신장애자를 가혹하게 대접하였다. 18세기 말, 낭만주의가 들어서면서 우울증을 수용하는 분위기로 전환되었으며 19세기는 원인별, 증세별, 분류의 시대. 20세기는 중요한 두가지 운동이 일어났는데 우울증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는 정신분석학과 생화학적 설명을 하려는 정신생물학이다. 현재 (역시 이 책이 쓰여진 2004년 상황) 정신의학계에서는 이 간극을 메우려는 노력이 이루어지는 중이라고 한다.

뒷장에 빈곤과 우울의 관련성에 관한 내용은 그야말로 우울하게 한다. 그럼에도 극복한 사례들이 있다는게 놀라울 정도. 빈곤층을 대상으로 우울증 검진을 하는 것은 광부들 대상으로 폐기종 검진하는 것과도 같다고 했다.

우울증에 관한 진화론적 설명들도 충분히 일리있고 재미있다. 결국 이기적인 댓가가 발생하니까 우울증도 유발한다는 것인데 모든 경우에 적용되지는 않겠지만 설득력 있다.

마지막 장의 제목은 희망. 리뷰의 시작에 인용한 프로이트의 "우울증 환자는 정상인에 비해 진실을 보는 눈이 더 날카롭다"는 말과 같은 맥락으로 셀리 테일러는 가벼운 우울증을 지닌 사람들은 정상인들에 비해 자신과 세계와 미래를 정확하게 보는데 그들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정신 건강을 증진시키고 실패의 충격을 완화시키는 <환상>이라고 했다. 즉 우울증 환자들은 세상을 너무도 명료하게 보기 때문에 맹목성이라는 선택적 이점을 상실하고 마는 것이라고 (639쪽).

저자는 우울증을 긍정적으로 이용한 여러 가지 예를 들어보이며 (저자 입장에서 그랬어야 했을 것이다) 생산적 우울증이라는 얘기도 한다. 이 모든 긍정적인 예는 우울증을 잘 치료하고 극복했거나 최소한 극복하는 중인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건 어쩔까. 저자도 말한다 나는 우울증이 지나간 뒤의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누구도 우울증 체험중인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역시 A winner takes it all 인가.

쇼펜하우어의 "인간은 둔하고 무딘만큼 만족을 느낀다", 테네시 윌리엄즈가 행복에 대해 정의해 달라고 하자 "무감각"이라고 대답했다는 말에는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이 방대한 책을 쓰면서, 아니 쓰기로 결정했을때 저자는 자기의 프라이버시는 포기했다고 봐야할 것 같다. 자기의 우울증이 어떻게 시작, 진행되었는지, 어떤 방법들을 시도했는지, 그리고 자기 가족에 관한 이야기까지, 모두 공개해놓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쓰는 동안에도 그는 우울증 에피소드를 겪어야 했다고 한다. 왜 아닐까. 이런 방대한 내용과 분량의 책을 쓴다는 것이 어디 보통일인가. 이런 댓가만 있다면야 우울증도 충분한 보상이 될 수 있다는 예를 그가 보여주었다.

 

 

 

 

 

그가말하는 그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고 싶어 찾아본 영상. 책에 소개된 내용들과 많이 겹친다.

 

 

https://www.ted.com/talks/andrew_solomon_depression_the_secret_we_share?utm_source=tedcomshare&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tedspread

 

 

 

https://www.ted.com/talks/andrew_solomon_how_the_worst_moments_in_our_lives_make_us_who_we_are?utm_source=tedcomshare&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tedsp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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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7-06-19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테네시 윌리엄즈가 행복에 대해 정의해 달라고 하자 ˝무감각˝이라고 대답했다는 말~~~˝

동의하게 되는 말이군요. 예민하면 할수록 불행해질 수 있으니까요.
아무리 근심이 있어도, 남들이 공포가 느껴지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자신만은 무감각할 수만 있다면
불행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런 사람은 불면증도 없겠지요.

hnine 2017-06-20 19:42   좋아요 1 | URL
살아있으면서 무감각할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진 않고, 결국 테네시 윌리엄즈의 대답은 <행복이란건 없다>와 같은 급의 말이구나 생각했지요.
행복이란 그냥 어느 한 순간의 느낌인 것 같아요. 그래서 오래갈 순 없는 것, 오래 가지려고 해도 안되는 것.
이 책도 참 정성과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간 책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