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만에 아이 어렸을 때 찍어놓은 비디오를 보았다.

2001년, 아이 낳고 딱 4주 쉰후 나는 일터로 복귀한 상태였고, 아이는 이웃집에 맡겨놓고 다녔었는데 아이를 돌봐주시던 분이 둘째를 임신하시는 바람에 우리 아이 봐주는 일을 못하시게 되자 남편이 하루종일 집에서 아이를 돌보아야 했던 시기가 있었다.

우리집은 대학에서 제공하는 가족기숙사. 우리집은 1층이었다. 처음엔 1층이라 좀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도 했는데 선택의 여지가 없어 그냥 살기로 했다. 아이 데리고 오르락 내리락 하지 않아 그건 편하겠다 싶기도 했고.

그때 찍은 비디오를 지금 유심히 보니 예전에 지나쳤던 것이 눈에 들어온다.

아이가 집 바로 앞의 흙 마당에서 노는데 신발은 물론 신지 않았고 아직 못 걸을 때라 무릎으로 온 마당을 헤짚고 기어다닌다. 기어다니면서 흙을 쥐어 만져보고, 모래 있는 곳까지 기어가서 모래를 쥐어 보고, 물론 입에도 넣어보고 (남편이 얼른 쫓아와 이것만은 못하게 한다), 나무를 손으로 만져보고, 이게 뭔가 고개를 쳐들어 보고, 솔방울을 보더니 집어서 이리 저리 보더니 던져 버린다.

잔디를 손에 한웅큼 쥐어서 뽑으려고 한다. 큰 돌, 작은 돌, 이리 저리 만져본다. 땡볕이라 아이 머리와 얼굴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지만 아이는 열심히 기어다닌다. 의자를 발견하더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낑낑대며 그 위에 올라가려 애쓴다. 아마 아이가 그러다 떨어질까봐 남편은 옆에서 눈을 안떼고 바라보고 있었으리라. 마침내 의자 위로 올라간 아이는 아무리 아기지만 나름대로 성취감이라는걸 느꼈을까?

그 당시 아이의 일상이다. 마루 문 하나 열고 나가면 바로 이런 너른 마당이 펼쳐져 있었으니까. 이건 우리 집 마당이 아니라 기숙사 여러 동이 함께 공유하는 공간이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마치 우리집 정원인양 맘껏 누린 셈이다. 10분 정도 되는 이 대목을 보는 동안, 아이는 참 여러가지를 스스로 배우고 경험해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옆에서 가르쳐주지는 않았지만 그냥 아이를 자연에 풀어놓고 아이가 하는대로 지켜보기만 했을 뿐인데 아이는 스스로 이것 저것 만져보고 느껴보고 시도해보는 것이다.

아이에게 물질적으로 잘해주진 못했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환경이었다고 스스로 위안삼아본다. 나는 출현하지도 않은 비디오를 보면서.

 

 

 

 

 

 

요즘 찍은 사진이다. 농구, 수영, 스케이트, 축구...남자애들은 왜 그렇게 몸 움직이는 일을 좋아하는걸까. 힘들지도 않나?

 

 

 

 

 

이런 개 키우고 싶은게 아이의 꿈이다. 우리 집 강아지 (시쭈)가 들으면 서운할거다.

다른 집에서 이 개를 보고 흥분하여 자기 개인양 데리고 달리고 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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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3-04-26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가 온몸으로 자연을 체험하던 순간이었네요. 어쩐지 경이롭게 보여요.

hnine 2013-04-26 19:14   좋아요 0 | URL
그때는 그냥 생활이고, 대안없는 시간 보내기였는데, 지금 보니 다르게도 보이네요. 그럴줄 알았으면 그때 좀 더 너그럽고 긍정적으로 현실을 보는건데 그랬어요. 부족한것만 마음에 불만으로 담고 보낸게 후회스러워요.

sangmee 2013-04-26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애기 때 비디오 보고 뭉클 했지?
지금도 많이 자랐다 싶은데,
앞으로 2~3 년 사이에 엄청난 성장을 할걸~

hnine 2013-04-26 21:15   좋아요 0 | URL
엄청난 성장을 해주길 ^^
요즘 you tube에 동영상 만들어 올리는데 취미가 붙었어.

파란놀 2013-04-26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 나날 아이가 아주 좋은 터전에서 지냈군요.
이 기운 잘 몸이 기억할 테니
앞으로도 씩씩하게 잘 크리라 믿습니다.

hnine 2013-04-26 21:16   좋아요 0 | URL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가끔 산들보라 노는 모습 보며 제 아이 어릴때를 떠올리곤 한답니다.

2013-04-27 0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27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13-04-27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농구하는 다린이 모습 멋진걸요~~~
놀이터에서 기어다니며 놀았던 다린이 상상하니 웃음이 납니다. 얼마나 귀여웠을까~~~
그렇게 추억은 살아가는 힘이 되지요^^

hnine 2013-04-27 10:41   좋아요 0 | URL
놀이터가 따로 없었지요. 눈 깜짝할 새에 저만치 가있고, 흙 집어다 입에 집어 넣고, 남의 밭에 들어가고, 못하게 하면 떼 쓰며 울고...ㅋㅋ
아이들 어릴 때 생각하면 참 재미있기도 하고, 언제 이렇게 컸나 싶고, 그렇지요. 규환이도 아기때 활달했을 것 같은데, 보림이는 얌전하고...
추억이 살아가는 힘이 되는거 맞아요. 그런데 추억은 아주 가끔만 떠올리고 싶어요. 제가 나이드는거 확인시켜주는 것 같아서요 ^^

icaru 2013-04-27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사진 너무 좋네요~ 웃음이 저절로 지어지는
근데, 우리 나라가 아닌 것만 같은 풍광이네요~ ㅎㅎ

hnine 2013-04-27 14:19   좋아요 0 | URL
사진은 남편이 찍었답니다. 저는 저 사진에서 개가 정말 멋있어요. 허스키스 라던가.
icaru님을 잠시라도 웃게 해드렸다니 저도 기분 좋아요.
우리 나라가 아닌 것만 같은 풍광이지요? ^^

프레이야 2013-04-27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인님 오랜만에 인사 드려요. 봄날 잘 지내고 계시죠^^ 전 아이들 비디오를 안 찍어뒀다는 생각이 이제야 드네요. 그저 제 기억 속에만 있는데 찍어뒀으면 아이가 지금 커서 자기모습을 보고 좋을 거 같아요. 님의 페이퍼를 보니 다린이가 다감하고 시적인 아이인 게 당연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잘 자라고 있네요. 우리의 아이들 모두 그래야겠죠. 왠지 므흣~

hnine 2013-04-27 17:47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저도 저때 비디오는 커녕 디지털 카메라도 없었어요. 사진 공부하고 있던 남동생이랑 올케가 와서 찍어주었지요. 그때 동생 부부는 아직 아이가 있기 전이었고 다린이를 무척 예뻐했거든요. 지금도 고맙게 생각된답니다.
다린이는 말씀하신 것 처럼 남자아이인데도 무척 감성적이고 눈물도 많고, 남편은 그게 못마땅한 것 같은데 딸 없는 저는 그게 싫지만은 않네요 ^^
건강하게 잘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요즘 별로 그렇지를 못해서요.

LovePhoto 2013-04-28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당시 하루하루의 광경들이 지금도 눈 앞에 선한........
손 한 번 뻗으면 다시 그 자리랑 시간에 닿을 것만 같은.....

hnine 2013-04-28 19:17   좋아요 0 | URL
다 네 덕분이지...
 

버블 (Bubble), 2005

 

스티븐 소더버그라는 감독 이름만 눈에 익을 뿐, 출연하는 배우들은 이름도 얼굴도 모두 낯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배우들에게 이 영화가 모두 첫 출연작이기 때문인데 소더버그 감독이 그렇게 의도하고 캐스팅했다고 한다.

 

미국 오하이오 주의 작은 마을. 인형 공장에서 일하는 마샤는 늙어서 거동을 못하는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평범한 중년의 여자이다. 나이로는 거의 아들뻘인 직장 동료 카일과 그나마 친하게 지내는데 카일은 사람들과 잘 사귀지 못하고 사람 많은 곳에 가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그나마 마샤의 수다를 들으며 가끔 짧은 대꾸만 할뿐 말도 거의 없는 20대의 청년. 이들은 자기들이 하루 종일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인형들과 닮아있다. 아무 표정이 없다는 점에서.

 

어느 날 이 공장에 딸을 혼자 키우고 있는 미혼모 로즈가 새로 들어오고 로즈와 카일은 조금씩 가까와져 가려는데, 이것을 지켜보는 마샤는 기분이 묘하다.

 

70분 정도의 길지 않은 영화이고, 영화 전문가가 아닌 내가 보더라도 이 영화 정말 돈 안들이고 찍었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하지만 소더버그라는 감독의 이름을 또한번 머리 속에 새겨놓게 하는 계기가 될 정도 되는 영화이다. 배우들 그 누구의 표정과 말투에서도 지금 이것이 영화라는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영화가 아니라 실제 이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는 느낌이 나게 한다. 그러면서도 배경이나, 감독이 보여주는 컷을 통해 이들의 마음 '속'을 관객에게 스물스물 전달시키는건 감독의 능력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 나라에서도 지난 2006년에 개봉되었다는데, 보통 극장과 비디오 출시 사이에 간격을 두게 하는 '홀드백'제도에 반기를 든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그녀는 왜 로즈를 그렇게 했을까? (스포일러가 될까봐 이렇게만 쓴다)

 

 

 

 

 

 

 

 

 

 

이들의 무표정 속에서 외로움과 고독, 소통하고 싶어하는 간절함을 읽는 것은 나 뿐 만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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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3-04-21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형 만드는 사람도
인형도
모두 아름다운 얼굴이 되도록
새로 거듭나면 참 즐거우리라 생각해요...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서든...

hnine 2013-04-21 18:21   좋아요 0 | URL
이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 따로 한동안 생각했어요. 왜 인형공장이 무대가 되어야 했을까. 저 인형들에 카메라를 머물게 하면서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보는 동안의 재미와 몰입도 중요하지만 보고난 후에 이렇게 생각거리를 남겨주는 영화들이 있지요.

Jeanne_Hebuterne 2013-04-21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티븐 소더버그!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잎 이후(맞나? 맞군) 에린 브로코비치로 탈바꿈했던 그 사람이로군요! 두번째 컷의 여배우의 표정은 정말 저 감독의 페르소나인가 봐요. 다른 영화 속에서도 소더버그의 배우들은 종종 저런 표정을 짓곤 했지요. 팀 버튼 영화 속의 조니 뎁이 늘 길잃은 표정을 하는 것 처럼요. 저 텅 빈 허공에의 질주같은 영화가 무척 궁금하게 만드는 페이퍼, 잘 보고 갑니다.

(종종 저런 표정이 필요해요. 생활에서든 꿈속에서든.)

hnine 2013-04-21 18:24   좋아요 0 | URL
저 사실은 같은 제목의 다른 영화를 찾고 있던 중이었어요. 미래의 생명공학 기술과 관련된 자료로서 '버블'이라는 다른 영화가 있거든요. 그러다가 이 영화를 발견하게 되어, 원래 찾던 영화는 아직 안보고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답니다.
감독의 페르소나 말씀을 하시니 앞으로 영화 볼때 감독의 페르소나가 어느 배우, 어느 장면, 어느 표정에 나타나있나 찾아보게 될 것 같네요.
이런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참 멋진 일이예요.
저런 표정을 저는 아마 자주 할 것 같은데, 저 무표정 속에 사실 많은 표정이 담겨있을것 같군요.
 

 

 

 

어느 새 마흔 하고도 뒷줄


저녁종 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는 그림을 그린

화가의 마음 한자락 밟아본 것 같고,
남이 보기에 부족한 것 없이 다 가진 것 같은 어느 시인이

자신은 다른 어떤 명칭보다 시인 누구라고 불려지고 싶다고 하는 말이

허세가 아닌 진심으로 귀에 들어오고,
10, 100 까지 채우기 위해 조금만, 조금만 더 힘을 내기보다

9, 99 쯤 되었을때 내려와야지 마음 돌리는 나를 본다.
20, 30대에는 그려지지 않던 나의 모습.


50대가 되고 60대가 되면

또 어떤 나의 모습을 만나게 될지.
숨어 있는 그 모습

살짝, 기대해도 되겠지

그런 기대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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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0 0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3-04-20 07:00   좋아요 0 | URL
요즘은 더욱 더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는데, 어제는 그래도 다른 날 보다 잘 잤습니다. 라디오에서 제가 신청한 곡이 나오는 걸 듣고 기분 좋게 잠이 들어 그럴까요? ^^
예전에 상상도 못하던 모습을 하고 있는 저를 가끔 발견할때, 그 순간이 어떤 가르침의 순간이 되는 것 같아요. 현재 눈에 보이는 것, 현재 예상할 수 있는 것에 너무 자만하지 말라는.

세실 2013-04-20 0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비가 조용히 내리는 아침입니다. 주말에는 왜 더 일찍 깨는지.....ㅎ
매일 아침 내려놓기를 기도속에 기억하지만 참 쉽지 않아요.

hnine 2013-04-20 06:57   좋아요 0 | URL
세실님 (나가시는 뒷자락을 잡으며...^^),
지금 비가 오나보죠? 창밖을 내다보니 정말 바닥이 젖어 있는 듯 하네요.
내려놓기, 꽉 채우지 않기, 저도 일상의 모든 것에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일부러 의도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랍니다. 의도적으로 하려고 할때는 안되던게, 그냥 나이를 먹어가면서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래도 아직도 멀었습니다. 고집과 아집 덩어리거든요.
 

 

 

 

 

 

 

느티나무

 

 

 

 

 

 

 

 

네 껍질 누른 빛 나서

누티, 느티라고

 

 

 

늦게 태가 난다고 해서

늦티, 느티라고

 

 

 

늘 태가 난다고 해서

늘티, 느티라고

 

 

 

뭐가 맞아

껍질 누른 느티야

늦게 태가 나는 느티야

늘 태가 나는 느티야

 

 

 

느티가 듣고 웃는다

그 많은 잎

살살 흔들어주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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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3-04-17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느티나무는 어떤 이름으로 불러 주어도
다 너그러이 웃으면서 받아들여 주는구나 싶어요.

참 어여쁜 나무입니다..

hnine 2013-04-17 14:00   좋아요 0 | URL
사는 집 가까이에 저런 나무가 있으면 든든할 것 같아요. 그래서 이야기 속에도 느티나무가 많이 등장하는가봐요.

2013-04-18 04: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18 05: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19 0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Turtle in Paradise (Paperback) - 2011 Newbery
Holm, Jennifer L. / Yearling Books / 2011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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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뉴베리 아너상을 받은 작품이다. 뉴베리 상을 받았다면 우리 나라에서도 앞다투어 번역 출판이 되는 모양이다. 그건 아마 출판하면 잘 읽힌다는 것을 의미할 텐데, 아무리 문학성이 뛰어나고 상징과 의미가 담겨있다 해도 읽기 너무 어렵거나 지루하다면 이렇게 앞다퉈 출판되지는 않을 것이다. 뉴베리 상을 받은 작품들은 대개 그 재미도 보장된다. 이 책도 그러하다. 

다른 집 가정부 일을 하는 엄마와 함께 뉴저지 주에 사는 열한 살 소녀 터틀. 거북이라는 뜻의 터틀이라고 이름을 붙여준 사람은 다름 아닌 엄마이다. 겉 껍질이 딱딱하다는, 즉 웬만한 일에도 꿋꿋이 잘 버티는 딸의 성격을 말하는 것이다.

영화 '애니'의 주인공인 셜리 템플을 싫어하고, 그런 건 다 헐리웃 영화에나 나오는 주인공이며 해피 엔딩은 헐리웃 영화 단골 주제라며 믿지 않는 터틀에 비해 엄마는 우리 인생의 어느 대목에 이르면 항상 해피 엔딩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말 번역본의 제목이 <우리 모두 해피 엔딩>인 것은 이런 대목을 반영한 것 같다.

새로 어렵게 가정부 자리를 얻어 간 집에서 아이를 싫어한다. 할 수 없이 엄마는 터틀을 멀리 엄마의 고향이자 이모가 살고 있는 키 웨스트라는 바닷가 마을로 터틀을 보낸다. 엄마가 열심히 일해서 좋은 집을 구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며. 엄마의 편지보다 일찍 도착한, 처음 보는 조카를 본 이모는 이미 자기 아이만 해도 넷이나 되어 황당하기만 하고, 터틀은 터틀 대고 넷이나 되는 사내 아이들과 부대끼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이름 처럼 쉽게 절망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텨낸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도 작가는 지루하지 않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감각으로 재미있게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그러다가 그쯤에서 터틀이 할머니 집 낡은 피아노 속에서 우연히 보물지도를 발견하게 되고 아이들끼리 그 지도를 보고 배를 훔쳐 보물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가 삽입되면서 절정에 달하는데. 위기의 순간이 해결되고, 터틀의 엄마 말처럼 그야말로 해피 엔딩으로 책이 끝나나 싶은 순간에 반전의 마무리. 끝까지 독자에게 키를 넘겨주지 않고 작가가 이야기의 주도권을 잡고 나가고 있다.

과연 '해피 엔딩'이란 어떤 결말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을 보는 관점에 따라 해피 엔딩 따위는 영화에나 있는 것일 수 있고, 또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책 제목의 '파라다이스'가 보물을 발견한 그 장소가 아니라 결국 터틀과 엄마가 정착하는 엄마의 옛 고향이듯이.

 

우리 나라 학생이라면 고등학생 정도의 영어 실력이면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래는 2012년에 나온 우리 나라 번역본인데 제목도 표지도 원서와 다르다.

 

 

 

 

 

노인들은 대부분 짜증을 잘 낸다. 그럴만 하다. 죽을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기분이 좋을 수 있겠는가? (76쪽)

 

엄마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사는건 헐리웃 영화와 같은 것이라서 어느 대목에나 즐거운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말이다.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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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3-04-16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 실력 없는 전 님이 참 부러워요
멋지고요

hnine 2013-04-16 12:36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 오랜만이어요! 위의 책은 번역본도 나와있어요. 한번 읽어보세요. 열한살 밖에 안되는 여자 아이가 영화 '애니'의 주인공을 아니꼽게 생각하는 장면이 귀엽기도 하고 안스럽기도 하고 그랬어요. 제목의 '파라다이스'는 다른데 있지 않고 바로 내가 지금 있는 곳이라는 메시지도, 흔한 주제 같지만 감동적으로 그린 것도 작가의 역량인 것 같아서 고개 끄덕여졌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