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들고 교무실로 가다가 퍼뜩 며칠 전 선생님이 미술주임 선생님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이 그림들은 며칠 후 있을 지역 내 초등학교 미술대회 본선에 내보낼 사람을 뽑기 위한 거라는 걸.

나도 모르게 걸음이 느려졌다. 들고 있던 봉투를 열어 보았다.

세 사람의 그림이 들어있었는데 그 중엔 박계현이란 이름이 쓰인 그림도 들어있었다. 내 것은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내 그림은 여기에 뽑힐 정도가 못된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왜 그 순간 속에서 불길이 확 타올랐을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이들이 대부분 집에 돌아갔을 시간이어서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쓰레기 태우는 냄새가 매콤하게 났다. 교무실로 질러가느라고 그때 내가 막 쓰레기 소각장 옆을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봉투를 열고 박계현 이름이 적힌 그림을 꺼냈다. 그리고 쓰레기가 타고 있는 소각장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림에 불이 붙더니 금방 한쪽 끝부터 까맣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황급히 발길을 돌려 교무실로 향했다.

며칠 후 조회 시간. 선생님께서는 미술대회 본선에 학교 대표로 나갈 사람을 발표하셨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우리 반에서는 계현이가 뽑힌 것이다. 분명히 계현이 그림을 그날 내가 소각장에 던져 넣었고, 까맣게 타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보았는데. 그러니까 미술 주임 선생님께서는 계현이 그림을 보지도 못하셨을텐데 어떻게 계현이가 뽑힐 수 있는 거지?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누구에게 얘기할 수도 없었다. 워낙 그림을 잘 그리는 계현이니까 우리 반 누구도 계현이가 뽑힌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부터 계현이가 본선에 나가기로 다 정해져 있었던 건가? 나머지 아이들은 그냥 들러리로 그림을 그렸던 거야?’

혼자서 속이 바작바작 탔다.

계현이는 결국 학교 대표로 나간 본선 대회에서도 상을 받았고, 그때 그린 그림은 금빛 테두리의 커다란 액자에 넣어 교무실 바로 옆에 전시되었다.

미술뿐이 아니었다.

도형의 넓이에 대해 배우기로 한 수학 시간.

사각형, 삼각형의 넓이 구하는 방법에 이어 선생님은 이번엔 원의 정확한 넓이를 구할 수 있을까 물으셨다. 그 정도야 예습으로 이미 알고 있던 나는 반지름 곱하기 반지름, 그리고 곱하기 3.14 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우와 하는 아이들의 작은 함성에 잠시 우쭐하고 있을 때였다.

“원의 정확한 넓이는 구할 수 없어요.”

카랑카랑, 똑부러짐. 뒤를 돌아다보지 않아도 그건 계현이였다.

아이들의 눈이 모두 계현이를 향했다.

“왜 그렇지?”

선생님 얼굴에 갑자기 더 생기가 도는 것처럼 보인 건 나의 착각이었을까?

“원주율은 3.14라는 수로 딱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난 계현이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조차 없었다. 가슴 속에서 또,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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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2-07-30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현이는 못하는 것이 없네요?ㅎㅎ
더군다나 수학시간에 저렇게 똑부러지게 발표하다니~~
계현이는 영재끼가 있는 아이였군요.ㅋ
담임선생님과 과연 어떤 사이인지??

여긴 바람이 불어 좋긴 하지만,뜨끈한 바람이네요.ㅠ
더운 바람도 자꾸 쐬면 머리도 아프고 나른해지더라구요.
아~ 언제쯤 더위가 가실지?
더위 조심하세요.^^

hnine 2012-07-30 13:41   좋아요 0 | URL
지금이라면 담박에 영재로 발탁되어 따로 교육을 받았을지도 모르지요.
글속의 내(나영)가 계현이와 좀 더 오래 관계를 지속했더라면 계현이의 또 어떤 면을 발견할지 모르는데, 그러질 못하지요.

저도 더위 무척 타거든요. 땀을 많이 흘리는 체질이라서여. 요즘 너무 더워서 오늘은 아이 데리고 아파트 도서관 올라가 있다가 점심 먹으러 내려왔네요. 도서관은 시원하거든요. 이 더위 언제 가실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끝나긴 끝나겠지요? 책나무님도 오늘 하루 꿋꿋하게 잘 버티시길! ^^
 
스노우맨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7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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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인기가 대단하다.

나 역시 재미있게 읽긴 했으나 600쪽이 넘는 분량임에도 며칠만에 읽어제낄 정도로 재미있는 건 아쉽게도 아니었다. 행간에서 어떤 의미와 상징을 찾고 싶어하는 성향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작품 <7년의 밤>을 읽을 때와 비슷했다. 재미있는 이야기, 대단한 서사력에는 감탄했으나, '감동'까지 주지 못했다는 아쉬움.

형사들은 하나같이 하드보일적이다. 그게 불만이라기 보다는 작가들만큼이나 그들이 그리고 있는 형사들의 캐릭터도 다양할 수 있을텐데 왜 그리 다 비슷비슷한지. 차라리 미스 마플, 포와로, 홈즈, 뤼팡 등, 예전 추리소설 속의 형사 혹은 그 역할자들의 성격은 뚜렷이 구별되는데 요즘 나오는 소설 중의 형사들은 모리스 경감이나, 이 책의 해리 홀레나, 내게는 그저 비슷비슷한 캐릭터로만 느껴지니.

연쇄살인, 어릴 때 지울 수 없는 충격과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얽힌 심리적 원인, 뜻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범인으로 밝혀지는 단계가 일단 선행되고, 알고보니 그가 범인이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다음에 진짜 범인이 드러나면서 문제 해결. 이것도 비슷.

이 책을 읽으며 제일 높이 산 것은 작가의 치밀함이다. 이런 사람의 머리속은 과연 얼마나 복잡할까. 이런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하는 동안 일상적인 다른 결정들을 할수는 있을까? 더구나 이만한 분량을 머리 속에 담고 있는 동안 말이다.

작가는 별 생각 없었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 책에서 살인 동기라는 것도 너무 구시대적이라는 생각이다. 그것도 그 방면에 비교적 개방적이라고 하는 북유럽 국가를 배경으로 하면서 말이다.

한마디로 재미는 있었다. 그런데 감동까지는 좀 모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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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2-07-28 0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서든 삶에서든
감동이 가장 큰 대목이라고 느껴요

hnine 2012-07-28 08:14   좋아요 0 | URL
감동이란, 마음이 움직였다는 뜻이니까요.
전 재미보다 감동을 더 높이 치는 편이라서...^^
 

 

아이가 할머니 할아버지와 2박 3일로 여행을 가고 없었던 이달 초.

남편과 내가 찾은 곳 마곡사이다.

결혼 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몇번 째 갔는지 모른다.

남편이 한때 머물던 곳이었기 때문.

점심 먹으러 들어간 ㅌㅎ식당.

아이와 함께 왔을 땐 아이 위주로 메뉴를 정하느라 못먹어봤던 산채비빔밥을

여유있게 먹고,

남편은 그곳에서 부침개를 부치시는 아주머니에게

예전에 계시던 분 안부를 묻는다.

가끔 밥도 공짜로 주고 그랬다고.

남편은 여기만 오면 옛날 얘기.

아이가 동행할땐 걷기 힘들까봐 많이 못돌아봤는데

이날은 거의 2시간을, 마곡사 주위의 여러 암자들과 동네까지 둘러보고 왔다.

 

 

 

 

마곡사의 예쁘고 키작은 담. 그리고 그 아래 친구들.

 

 

 

 

 

 

 

7월초, 제일 많이 피어있는 꽃은 사진 속의 나리꽃 원추리와 개망초였다.

 

 

 

 

애기밤이 크고 있었고, (지금은 다 컸을까?)

 

 

 

 

걷고 또 걷고,

 

 

 

 

드디어 그곳까지.

 

 

 

 

사람은 보이지 않고 마당에 저 막대기가 혼자 서 있었다.

 

 

 

 

복슬강아지 같이 생기지 않았나요? 그것도 두 마리 ^^

 

 

 

 

 

앞으로 분명히 또 가게 될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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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2012-07-27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쁜 복슬강아지를 키우는 곳이었군요. 그것도 두 마리 씩이나!! ^^

hnine 2012-07-27 23:05   좋아요 0 | URL
무스탕님도 그렇게 보이세요? 눈 다 덮고 있는 삽살이 같기도 하고요. 혼자면 외로울까봐 두 마리! ^^

순오기 2012-07-27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 속엔 나리꽃이 아니라 원추리가 보이는데요.^^
마곡사~~ 가보고 싶어지네요.

hnine 2012-07-27 23:08   좋아요 0 | URL
에고, 깨갱~~
나리꽃이랑 원추리랑 정말 헛갈려요.
이참에 도감 보고 공부를 좀...
저는 사실 마곡사보다 갑사 분위기가 더 좋아요. 마곡사는 너무 풍요로와 (?)보여서요 ^^

2012-07-28 0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28 0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07 1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07 16: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늘바람 2012-07-28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네요 전 한번도 못 가본 곳이지만
어저면 가도 그냥 흘려보았을지도 모르는 것을 섬세히 잡아주신 님 덕분에 저도 찬찬히 봅니다

hnine 2012-07-28 15:44   좋아요 0 | URL
동학사, 갑사, 마곡사는 저희 집에서 가까운 사찰 3종 세트라고나 할까요 ^^
분위기가 조금씩 다르지요. 절을 분위기 보고 가느 건 아니지만요.
결혼 전엔 어머니 따라서 하늘바람님도 잘 아시는 관음사 종종 다녔었답니다.

책읽는나무 2012-07-28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강아지 같아요.ㅋㅋ
한마리는 엎드려 있고,뒤에 한 마리는 등을 뒤집어 간지럽다고 앞다리,뒷다리 흔들면서 웃고 있는 것같아요.ㅎㅎ
마곡사..아! 겨울에 마곡사를 들러볼까? 하다가 바빠서 그냥 지나친 바로 그절이로군요.
이름이 눈에 익었다 싶었어요.
절내 경치도 보여주지 그러셨어요?
춘마곡,추갑사 맞죠?
몇 달 뒤엔 갑사도 다녀오셔서 꼭 보여주세요.
감히 갈 수 없는 곳이라 궁금하네요.^^

hnine 2012-07-28 15:46   좋아요 0 | URL
그지요? 강아지...^^
백범 김구 선생님이 잠시 피신 와계시던 곳이라고 해서 더 많이 알려졌지요.
절내 경치도 많이 찍어 왔는데 예전에 몇번 올리기도 했고 그래서...^^
춘마곡 추갑사라는 말이 있지요. 말씀하시니 갑사도 곧 또 가봐야겠네요.
갑사가 집에서 좀 더 가깝거든요.

프레이야 2012-07-28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아라. 올망졸망 정겨운 풍경들이네요.^^
지팡이 하나 포착한 시선에도 찡긋~

hnine 2012-07-28 15:48   좋아요 0 | URL
올망이 졸망이들이지요 ^^ 제가 키가 작아서 그런지 쭉쭉빵빵한 나무들, 예를 들면 메타스퀘이어 같은, 그런 풍경보다 이렇게 올마졸망 자잘한 것들 볼때 더 정감이 가네요.
지팡이가 있는 것 보니까 사람이 드나들긴 하는 것 같은데 저 날은 아무 인기척이 없었어요. 사진은 안 올렸지만 바로 옆의 헛간 같은 건물은 다 무너져 있었고요.
 
독립연습 - 서른이 넘으면 자기 마음에 책임을 져야 한다
황상민 지음 / 생각연구소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언젠가 TV에 출연한 저자를 본 적 있다. 내가 본건 주로 특강 형식의 프로그램이었는데 외모에서 받는 인상은 구수하고 따뜻하고, 재미있게 얘기 잘 풀어나갈  타입으로(만) 예상했는데 의외로 강연의 내용은 꽤 날카롭고, 뜻을 완곡하게 전달하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아보여 이름이 기억에 남아있었다.

며칠 전 서점에 갔다가 그가 낸 책이 눈에 뜨이길래 몇 페이지 들추어 읽어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 리뷰의 제목으로 삼은 '상처는 핑계다'라는 제목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보통 심리학을 한다는 사람들은 내면에 숨겨져 있는 상처, 즉 성장 과정에서 받은, 자신도 모르고 있는 상처를 찾아내고 어루만지고 치유하고 용서해야 현재의 문제들이 해결된다고, 상처, 상처, 상처...에 대해 설명하려 드는데 이 저자는 한마디로 "상처 핑계 그만 대"라고 말하고 있다니.

결국 그날 그 책을 구입하고 말았다.

김연아 선수의 교생 실습에 대한 발언으로 한참 오르내리더니, 엊그제인가는 어떤 방송에 초대되어서 역시 거침 없는 발언으로 신문에 기사화 된 것을 보았다.

이 책에서 역시 그는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상담을 받으려 그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마음을 묻는단다. 자기가 앞으로 무엇을 했으면 좋을지. 이에 대해 그의 답은 간결하다. 그걸 왜 나에게 물어?

물론 상담자로서 그렇게 무 자르듯 한마디로 말하지는 않았겠지만 결국 요점은 그거란 얘기다. 자기의 결정에 대해, 자기의 미래에 대해, 다른 사람의 의견을 구하는 많은 경우 그 이유는, 혼자서 그 책임을 지기가 버겁기 때문에, 나중에 결과가 뜻하지 않게 나왔을 때 그 책임을 자기 혼자 다 떠맡는 것이 미리 두려워서인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적어도 그것에 동의한다. 다른 사람의 조언을 구할때 조언의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주체인지 모를 정도로 처음 부터 끝까지 타인이 자기를 위해 결정해주기를 바라는 경우를 나도 종종 본다. 혼자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들.

대학생들 중에도 방학 특강을 하나 들어도 꼭 그것을 함께 들을 친구를 찾아 함께 등록을 해야하고, 동아리를 들어도 누군가 함께 들 사람부터 찾는 것을 특히 우리 나라 학생들의 경우에 많이 본다. '독립'도 연습이 필요한데. 그냥 주어지는게 아닌데. 주어진 기회를 우리가 내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지금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다 어릴 때 어떤 상처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그 원인을 발견한 것에 의의를 두어야 하는데, 그것이 앞으로도 자기의 미래를 결정할 수 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해버리고 마는 우리의 심리 그 이면을 냉정하게 볼줄 알아야 한다.

어릴 때 상처가 지금의 나를 넘어, 앞으로의 나까지 좌지우지 할 것은 아니듯이,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사실, 만족스러운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 이유를 내 자신이 아닌 내 주위 환경에서만 찾아내려고 하면 안될것이다.

어릴 때 엄마가 집에 안계셨기 때문에, 맏이로 자랐기 때문에, 집안이 풍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로부터 정신적 학대를 받았기 때문에, 차별하는 선생님 때문에...등등. 그런 이유들이 사소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더 이상 질질 끌려가지 말자는 것이다. 누구로부터 위로받고 다독임 받음으로써 해소되길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위로하고 다독이고 털고 일어나자는 것이다.

 

한가지, 이 책을 읽으며 슬며시 든 생각은, 아무리 옳은 주장이고 생각이더라도, 모든 현상과 심리를 너무 거기에 맞춰 설명하려 하고, 그 관점으로만 보려고 하는 위험은 우리가 늘 경계해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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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2-07-29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채기도 웃음도 모두
사람들 스스로 살아내는
좋은 사랑이 되겠지요

hnine 2012-07-29 14:03   좋아요 0 | URL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일은 각자의 몫인 것 같아요.
저도 그렇고 우리 대부분은 원인을 자신 외의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 언제부터인가 생긴 것 같은데, 저자에 의하면 그렇게 된 데에는 뜻밖에도 심리학 특히 프로이트 심리학이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도 한 몫 한다고 하는군요.
 

 

학기초부터 반장이라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거리를 두는 것 같던 담임선생님. 지금까지의 그 어떤 친구와도 달라 나를 사로잡은, 그래서 다른 친구들은 안중에도 없게 한 계현이. 두 사람에게서 한꺼번에 느낀 것은, 지금도 아무리 다른 표현을 써보려고 해도 '배신감'이라는 말보다 더 잘 표현해주는 말이 없다. 나의 마음 속 아주 깊은 곳에 남몰래 가지고 있던, 나만의 유리구슬이 일순간 산산조각이 났고, 깨진 조각들을 제대로 치우지 못해 그 이후로도 따끔따끔, 조각들이 내 마음을 찔러댔다.

 

그 날 이후 나는 더 이상 예전처럼 잘 웃고 잘 떠드는 아이가 아니었다. 혼자 멍하니 있거나 혹은 골똘히 생각하거나. 그렇게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아이들과 어울려 웃고 떠들고 장난치는 일에 심드렁해졌다.

 

4학년 교과는 3학년 때보다 훨씬 어려웠다. 별다른 준비 없이도 시험을 보면 되었던 3학년 때와는 달리, 4학년이 되자 시험을 대비한 공부라는 것을 해야 했다. 우리나라의 도 이름과 도청 소재지를 외우고 산맥 이름들을 외우고 강 이름, 평야 이름 등, 소위 외워야 할 것들이 생겨난 것이다. 시험을 위해 따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지금까지 내가 유지하고 있던 자리가 불안할 수도 있겠다는 것을, 나 스스로 알 것 같았다.  그나마 4학년 1학기 까지는 그래도 1등 자리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계현이가 아직 전학 온 후 적응 기간이었기 때문이었을까? 2학기 되고서 첫 시험에서 나는 1등 자리를 계현이에게 내주어야 했으니 말이다.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그녀에 대한 괜한 배신감 같은 것은 더욱 커져 갔다. 그 날 이후 반은 고의적이었던 나의 냉담함에 대해 그녀는 알아챘는지 아닌지,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 여전히 그녀 자리에는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이 몰려 들었다. 늘 인기 있는데 나 하나쯤 멀어진다고 신경도 안 쓰이겠지 생각하니 서글펐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내 속마음을 말하지 않은 채 가을을 맞고 겨울을 맞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때 나는 많이 큰 것 같다. 키는 얼마나 컸는지 모르겠지만 마음이 훌쩍 자랐다고 할까. 혼자 있는 시간을 나름대로 보낼 줄 알게 되었는데, 계현이가 있던 자리에 책읽기가 조금씩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시험 때마다 나는 계현이를 이기기 위해 기를 썼다. 교과서를 달달 외우고, 잠을 줄여가며 공부했다. 시험 보는 날은 그저 수업을 안 하는 날, 일찍 끝나는 날 정도였던 1년 전과 달랐다. 외우고, 또 외우고, 문제집을 몇 권씩 풀어보며 시험에 악착을 떨었다. 그것은 계현이를 이기기 위한 악착이었고, 산산조각난 내 자존심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은 악착이었다.

내가 그렇게 기를 썼음에도, 한번 빼앗긴 1등 자리는 다시 찾기가 힘들었다. 늘 몇 점 차이로 1등은 계현이, 나는 그 다음이었다. 그렇다고 계현이가 나처럼 그렇게 악착을 떨면서 시험공부를 하느냐 하면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이 세상엔 맘만 먹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구나 하는 것을,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겪으면서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미술 시간.

선생님은 우리에게 정물화를 그리게 할 준비를 하고 계셨다. 선생님에게는 휴식 시간, 우리들에게는 따분하기 짝이없는 시간. 그런데 그날따라 선생님은 교탁 위의 사과, 꽃병, 유리받침 등을 다른 때보다 좀 더 신경 써서 배치하신다 싶었다.  매번 그렇듯이 난 밑그림은 꼼꼼히 잘 그려놓고는, 막상 색칠을 급하게 하는 바람에 그저 그런 정도의 그림을 겨우 완성해서 낼 수 있었다. 쉬는 시간에 보니 담임 선생님은 우리가 낸 그림을 하나 하나 유심히 보고 계셨다. 그리고 그중 몇 개는 옆에 골라놓으시는 걸 보았다.

그날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하나 둘 교실을 빠져 나가고 있을 때였다. 아까 골라놓은 그림을 챙겨 교무실로 가시려다 말고 선생님께서 반장인 나를 부르셨다. 교무실의 미술주임 선생님께 가져다 드리라는 거였다. 선생님은 급히 다른 볼일이 있으셨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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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2-07-26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부하라는 그 어떤 잔소리보다 경쟁자 하나가 최고였네요.
친구가 멀어짐을 느낄 때 그 쓸쓸한 뒷자리가 참 아프고 허전하지요.
그 느낌이 잘 살아나네요
계현이와의 관계가 계속 흥미진진 궁금해지네요

hnine 2012-07-26 10:12   좋아요 0 | URL
솔직히 저 자신은 경쟁상대가 생겼다고 저렇게 악착 떨며 공부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아무튼 저 이야기 속 아이는 그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

날이 무척 더운데 더위 조심하시고, 냉방병도 조심하시고요. 저는 온몸에서 물이 다 빠져나간 느낌이랄까, 얼굴이 오늘따라 조글조글해보입니다 ㅠㅠ

프레이야 2012-07-26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현이와 좋은 라이벌이 되었군요. 좋은 건가 아닌가는 좀 두고봐야 알려나요.^^
날씨가 굉장해요. 진짜 이렇게 더운 여름이면 얼굴 피부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요.
자외선차단제도 안 바르고 다녔더니 오늘따라 얼굴색이 이상해 보여요.ㅠㅠ
선풍기바람도 뜨듯하네요.ㅎㅎ

hnine 2012-07-26 20:25   좋아요 0 | URL
사진으로 보는 프레이야님은 피부가 뽀샤시~하시길래 늘 화장 곱게 하고 다니시려니 했어요. 자외선차단제도 안 바르고 다니는 건 저 처럼 막나가는 (ㅋㅋ) 아줌마만 저지르는 일인줄 알았는데...^^
저는 지금 다린이 데리고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려고요. 아이스크림보다 거기 가면 잠시나마 좀 시원하니까요.
오늘 밤은 편히 잘 주무세요.

책읽는나무 2012-07-28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물화에 뭔 비밀이 있는 것인지??
흥미진진하네요.
친구와의 라이벌 관계는 참~~ㅋㅋ
저는 주인공아이처럼 문제집을 몇 권씩 풀면서 외울정도로 범생이는 아니었지만,
전학온 제단짝 친구와는 성적에서 약간 라이벌 관계가 있어서 완전 빠져들면서 읽었어요.
결국 제가 친구에게 무릎 꿇었지만요.ㅎㅎ
전교 1등하는 아이들은 이상하게 술렁술렁 노는 것같아 보이던데 성적이 잘 나와요.
저도 그걸 참 신기하게 생각했더랬죠.그리곤 그런 아이들은 시험을 볼적에 약간의 신기(지금 생각하니 신기란 일종의 찍기신..그러니까 찍신? 이겠죠?ㅋ)가 있지 않을까? 뭐 그런 합리화를 시키니까 바로 이해가 되더라구요.ㅋ
헌데,정말 계현이의 정체가 궁금해 죽겠네요.
이런 것은 연결해서 읽어야 하는뎅~~ㅠ

썬크림 안바를 정도시라면 님이 진정한 말로만 듣던 피부미인이신게로군요?
저도 요몇년전부터 도저히 거울을 보고 있을 수 없어서 썬크림 바르기 시작했어요.
정말 못봐주겠더라구요.ㅠ

hnine 2012-07-28 15:54   좋아요 0 | URL
계속 읽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실제와 허구를 막 섞어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재미가 나름 있네요.
그 친구가 그림을 정말 잘 그렸던건 사실이고요. 초등학생 그림솜씨라고 다른 선생님들이 믿어주지 않아서 뽑히지 않은 적도 있었으니까요. 제가 그래서 지금도 그림 잘 그리는 사람들을 보면 예사로 안보여요.
정말 공부 잘 하는 애들은 노는 것 처럼 보이는거 맞아요 ㅋㅋ 그런 아이들은 몰입을 잘 하더라고요. 그리고 뭐가 중요한지를 잘 파악하고요.
'신기'라고 표현하신게 재미있어요. 정말 그런게 있어보이지요 ^^

화장을 안하면 이제 정말 정말 못봐줘요. 그리고 저는 얼굴에 뭘 바르면 아직도 답답해서 호흡도 제대로 안되는 느낌이 막 든답니다. 저는 아마도 피부호흡에 많이 의존하도록 태어났나봐요 ㅋㅋ 그래서 썬크림보다 차라리 무거워도 양산을 들고 다니지요. 그리고 썬크림은 어떤 성분이 들어있길래 바르면 얼굴이 허옇게 떠보이는지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