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초부터 반장이라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거리를 두는 것 같던 담임선생님. 지금까지의 그 어떤 친구와도 달라 나를 사로잡은, 그래서 다른 친구들은 안중에도 없게 한 계현이. 두 사람에게서 한꺼번에 느낀 것은, 지금도 아무리 다른 표현을 써보려고 해도 '배신감'이라는 말보다 더 잘 표현해주는 말이 없다. 나의 마음 속 아주 깊은 곳에 남몰래 가지고 있던, 나만의 유리구슬이 일순간 산산조각이 났고, 깨진 조각들을 제대로 치우지 못해 그 이후로도 따끔따끔, 조각들이 내 마음을 찔러댔다.
그 날 이후 나는 더 이상 예전처럼 잘 웃고 잘 떠드는 아이가 아니었다. 혼자 멍하니 있거나 혹은 골똘히 생각하거나. 그렇게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아이들과 어울려 웃고 떠들고 장난치는 일에 심드렁해졌다.
4학년 교과는 3학년 때보다 훨씬 어려웠다. 별다른 준비 없이도 시험을 보면 되었던 3학년 때와는 달리, 4학년이 되자 시험을 대비한 공부라는 것을 해야 했다. 우리나라의 도 이름과 도청 소재지를 외우고 산맥 이름들을 외우고 강 이름, 평야 이름 등, 소위 외워야 할 것들이 생겨난 것이다. 시험을 위해 따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지금까지 내가 유지하고 있던 자리가 불안할 수도 있겠다는 것을, 나 스스로 알 것 같았다. 그나마 4학년 1학기 까지는 그래도 1등 자리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계현이가 아직 전학 온 후 적응 기간이었기 때문이었을까? 2학기 되고서 첫 시험에서 나는 1등 자리를 계현이에게 내주어야 했으니 말이다.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그녀에 대한 괜한 배신감 같은 것은 더욱 커져 갔다. 그 날 이후 반은 고의적이었던 나의 냉담함에 대해 그녀는 알아챘는지 아닌지,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 여전히 그녀 자리에는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이 몰려 들었다. 늘 인기 있는데 나 하나쯤 멀어진다고 신경도 안 쓰이겠지 생각하니 서글펐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내 속마음을 말하지 않은 채 가을을 맞고 겨울을 맞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때 나는 많이 큰 것 같다. 키는 얼마나 컸는지 모르겠지만 마음이 훌쩍 자랐다고 할까. 혼자 있는 시간을 나름대로 보낼 줄 알게 되었는데, 계현이가 있던 자리에 책읽기가 조금씩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시험 때마다 나는 계현이를 이기기 위해 기를 썼다. 교과서를 달달 외우고, 잠을 줄여가며 공부했다. 시험 보는 날은 그저 수업을 안 하는 날, 일찍 끝나는 날 정도였던 1년 전과 달랐다. 외우고, 또 외우고, 문제집을 몇 권씩 풀어보며 시험에 악착을 떨었다. 그것은 계현이를 이기기 위한 악착이었고, 산산조각난 내 자존심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은 악착이었다.
내가 그렇게 기를 썼음에도, 한번 빼앗긴 1등 자리는 다시 찾기가 힘들었다. 늘 몇 점 차이로 1등은 계현이, 나는 그 다음이었다. 그렇다고 계현이가 나처럼 그렇게 악착을 떨면서 시험공부를 하느냐 하면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이 세상엔 맘만 먹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구나 하는 것을,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겪으면서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미술 시간.
선생님은 우리에게 정물화를 그리게 할 준비를 하고 계셨다. 선생님에게는 휴식 시간, 우리들에게는 따분하기 짝이없는 시간. 그런데 그날따라 선생님은 교탁 위의 사과, 꽃병, 유리받침 등을 다른 때보다 좀 더 신경 써서 배치하신다 싶었다. 매번 그렇듯이 난 밑그림은 꼼꼼히 잘 그려놓고는, 막상 색칠을 급하게 하는 바람에 그저 그런 정도의 그림을 겨우 완성해서 낼 수 있었다. 쉬는 시간에 보니 담임 선생님은 우리가 낸 그림을 하나 하나 유심히 보고 계셨다. 그리고 그중 몇 개는 옆에 골라놓으시는 걸 보았다.
그날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하나 둘 교실을 빠져 나가고 있을 때였다. 아까 골라놓은 그림을 챙겨 교무실로 가시려다 말고 선생님께서 반장인 나를 부르셨다. 교무실의 미술주임 선생님께 가져다 드리라는 거였다. 선생님은 급히 다른 볼일이 있으셨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