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들고 교무실로 가다가 퍼뜩 며칠 전 선생님이 미술주임 선생님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이 그림들은 며칠 후 있을 지역 내 초등학교 미술대회 본선에 내보낼 사람을 뽑기 위한 거라는 걸.

나도 모르게 걸음이 느려졌다. 들고 있던 봉투를 열어 보았다.

세 사람의 그림이 들어있었는데 그 중엔 박계현이란 이름이 쓰인 그림도 들어있었다. 내 것은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내 그림은 여기에 뽑힐 정도가 못된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왜 그 순간 속에서 불길이 확 타올랐을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이들이 대부분 집에 돌아갔을 시간이어서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쓰레기 태우는 냄새가 매콤하게 났다. 교무실로 질러가느라고 그때 내가 막 쓰레기 소각장 옆을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봉투를 열고 박계현 이름이 적힌 그림을 꺼냈다. 그리고 쓰레기가 타고 있는 소각장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림에 불이 붙더니 금방 한쪽 끝부터 까맣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황급히 발길을 돌려 교무실로 향했다.

며칠 후 조회 시간. 선생님께서는 미술대회 본선에 학교 대표로 나갈 사람을 발표하셨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우리 반에서는 계현이가 뽑힌 것이다. 분명히 계현이 그림을 그날 내가 소각장에 던져 넣었고, 까맣게 타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보았는데. 그러니까 미술 주임 선생님께서는 계현이 그림을 보지도 못하셨을텐데 어떻게 계현이가 뽑힐 수 있는 거지?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누구에게 얘기할 수도 없었다. 워낙 그림을 잘 그리는 계현이니까 우리 반 누구도 계현이가 뽑힌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부터 계현이가 본선에 나가기로 다 정해져 있었던 건가? 나머지 아이들은 그냥 들러리로 그림을 그렸던 거야?’

혼자서 속이 바작바작 탔다.

계현이는 결국 학교 대표로 나간 본선 대회에서도 상을 받았고, 그때 그린 그림은 금빛 테두리의 커다란 액자에 넣어 교무실 바로 옆에 전시되었다.

미술뿐이 아니었다.

도형의 넓이에 대해 배우기로 한 수학 시간.

사각형, 삼각형의 넓이 구하는 방법에 이어 선생님은 이번엔 원의 정확한 넓이를 구할 수 있을까 물으셨다. 그 정도야 예습으로 이미 알고 있던 나는 반지름 곱하기 반지름, 그리고 곱하기 3.14 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우와 하는 아이들의 작은 함성에 잠시 우쭐하고 있을 때였다.

“원의 정확한 넓이는 구할 수 없어요.”

카랑카랑, 똑부러짐. 뒤를 돌아다보지 않아도 그건 계현이였다.

아이들의 눈이 모두 계현이를 향했다.

“왜 그렇지?”

선생님 얼굴에 갑자기 더 생기가 도는 것처럼 보인 건 나의 착각이었을까?

“원주율은 3.14라는 수로 딱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난 계현이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조차 없었다. 가슴 속에서 또,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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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2-07-30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현이는 못하는 것이 없네요?ㅎㅎ
더군다나 수학시간에 저렇게 똑부러지게 발표하다니~~
계현이는 영재끼가 있는 아이였군요.ㅋ
담임선생님과 과연 어떤 사이인지??

여긴 바람이 불어 좋긴 하지만,뜨끈한 바람이네요.ㅠ
더운 바람도 자꾸 쐬면 머리도 아프고 나른해지더라구요.
아~ 언제쯤 더위가 가실지?
더위 조심하세요.^^

hnine 2012-07-30 13:41   좋아요 0 | URL
지금이라면 담박에 영재로 발탁되어 따로 교육을 받았을지도 모르지요.
글속의 내(나영)가 계현이와 좀 더 오래 관계를 지속했더라면 계현이의 또 어떤 면을 발견할지 모르는데, 그러질 못하지요.

저도 더위 무척 타거든요. 땀을 많이 흘리는 체질이라서여. 요즘 너무 더워서 오늘은 아이 데리고 아파트 도서관 올라가 있다가 점심 먹으러 내려왔네요. 도서관은 시원하거든요. 이 더위 언제 가실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끝나긴 끝나겠지요? 책나무님도 오늘 하루 꿋꿋하게 잘 버티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