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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보 마음 - 문태준 산문집
문태준 지음 / 마음의숲 / 2018년 3월
평점 :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이렇게 시작하는 시 <가재미>. 문태준 하면 떠오르는 시이다. 1970년 김천 태생. 현재 한국의 대표적 서정시인의 한 사람이라고 할수 있는 그가 낸 산문집 <느림보마음>은 2009년에 처음 출판되었고 2013년 2쇄 출판을 거쳐 올해는 2판이 발행되었다.
산문은 저자의 성격을 어쩌면 시보다 더 직접적으로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는 것이므로 산문마다 읽는 사람에게 전달되는 느낌이 다른 재미가 있다. 감성과 느낌으로 충만한 글,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살아있는 글, 생에 대한 통찰과 의지가 느껴지는 글 등, 사람의 성격이 다양한 것처럼.
문태준 시인의 산문도 짐작하듯이 그가 쓴 시의 분위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사랑, 인간살이에 대한 사랑이 기본 바탕이 되니 따뜻하다. 애통하지 않으면서 따뜻하다.
책의 첫 페이지 작가의 말에서 그는 느린 마음에 대해 말한다. 살아오면서 내가 사랑했던 시간은 누군가의 말을 가만히 들을 때였고 뒤로 물러설 때였다고. 작은 자연이 되어 자연의 속도로 천천히 걸어갈 때였다고. 너무나 신속하고 더욱 신속하기 위해 애쓰는 세상에서 자연의 속도를 느끼고 딱 그 정도 속도로 걸어가고 싶은 저자의 마음에 금방 동화가 되는 걸 보니 우리는 신속해지기 위해 애쓰며 살고 있으면서도 천천히 가고 싶은 마음도 살아있었나보다. 잘 드러내지 않고 살고 있을 뿐이지. 이렇게 평소에 드러나지 않는 우리의 마음을 드러내보일 수 있는 것이 작가가 하는 일 아닐까. 그 형식이 시이든 산문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유난히 더웠던 어제, 땀 때문에 고생하지만 여름을 유독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쓴 그의 글이 유난히 더 눈에 들어왔다. 여름은 '자라나는 계절'이기 때문이란다.
여름은 우리에게 일념에 대해 말한다. 한결같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용기백배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
조금의 빈틈도 없는 계절이다. 전국의 선원에서 스님들이 하안거를 하는 모습 같다. 은산철벽을 무너뜨리며 여름은 나아간다. 여름은 헐후하게 하는 일이 없다. (339쪽)
하루 가운데 가장 아끼는 시간이 새벽이라고 하는데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나로서 반갑기 그지 없다. 아직 식구들이 일어나기 전 홀로 앉아 있는 시간. 도시에 살면서도 이렇게 다양한 새소리를 들을 수 있음에 놀라는 시간. 나와 세상이 맞대면 하고 있는 것 같은 시간. 생각을 하는 시간이 아니라 생각이 비워지는 시간.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있는 건 오로지
새날
풋기운!
운명은 혹시
저녁이나 밤에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올는지 모르겠으나,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그가 본문에 인용한 정현종의 시 <아침>의 일부이다. 운명보다 새기운이 우세한 시간 아침. 아침을 놓치고 사는 일상이란 그래서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저자가 시인이라서 다른 사람의 시를 인용한 부분이 적지 않고, 불교 방송에 적을 두고 있어서인지 옛 스님들의 일화도 종종 나온다. 그러나 과하지 않다. 저자는 무엇이든 과하게 할 사람이 아닐 것 같다.
의식을 깨우고 날 세워 살아야 하는 일이 많은 요즘이지만, 우리 마음 한구석에는 이렇게 따뜻하고 수용적이고 느리게 한숨 돌리게 하는 글이 그만큼 결핍되어 있다는 걸 이 책을 읽으며 확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