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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자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5
앙드레 브르통 지음, 오생근 옮김 / 민음사 / 2008년 9월
평점 :
근래에 집에 싸르트르의 <시지프스의 신화>를 세권이나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다시 들춰보는 기회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사실주의에 대해 조금 더, 아주 조금 더 이해를 하게 되나보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엔 어쩌다 이 책을 고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앙드레 브르통의 <나자>는 사실주의에 반기를 들고 나선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초현실. 현실과 현실 너머의 세계가 만나는 곳이다. 상상력과 환상의 세계이며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 곳, 현실에서 다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려는 실험의 세계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라는 이 책의 첫 페이지 첫 문장도 다른 작가나 철학자들의 물음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는 위의 질문에 바로 이어 말한다. 이런 질문은 왜 내가 어떤 영혼에 사로잡혀 있는가를 아는 것으로 귀착되는 문제가 아닐까 한다고.
내 존재를 객관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들, 어느 정도 확고하게 나를 나타내 주는 것들로 생각되는 내 모습은, 삶의 어느 순간 전혀 알 수 없는 활동을 함으로써 무효화되면서 그 진정한 영역을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게 나라고 믿는 것들이 있다면, 그래서 가끔 이건 나답지 않다고 여겨지는 순간이 있다면 (우리 보통 그렇지 않은가?) 작가의 다음 말을 들어보자.
나 자신에게 나의 모습을 미리 상정하기 때문이고 시간과 타협할 이유가 전혀 없는 내 사유의 완성된 형태를 선행성의 차원에서 자의적으로 설정하기 때문이며... (12쪽)
그건 우리가 그렇게 설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미리 말하자면 무의식의 영역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알기 위한 작가의 노력의 방식은 다음과 같다.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여러 가지 취향, 내가 어떤 대상에 대해서 느끼는 친근성, 내가 빠져 드는 매력, 나에게 발생하는 사건들, 오직 나에게만 발생하는 사건들을 넘어서, 또 내가 실천한 수많은 행동, 나만이 체험하게 된 감정들을 넘어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나의 차별성이 무엇이고,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나는 부단히 노력하겠다.
내가 이 차별성을 인식하는 정도가 얼마나 분명하냐에 따라서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무엇을 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세계의 운명에 대해 나만이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메시지가 무엇인가의 문제가 밝혀질 수 있지 않을까? (12, 13쪽)
작가는 이 작품에서 '나'라는 화자가 되어 자기의 실제 경험을 서술하고 있다. 소위 자동기술이라는 방식으로서, 머리를 써서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당시 상황에서 자기의 느낌과 떠오른 것들, 경험한 것을 오직 자기의 감정에 충실하여 기술하는 방식이다. 이 작품이 있게 한 그의 경험이라는 것은 1926년 10월 4일 파리의 어느 거리에서 '나자 (Nadja)'라는 이름의 여자를 우연히 만나 10월 13일 마지막 만나기까지의 경험이다. 이처럼 날짜, 만난 장소, 방문한 장소까지 글, 사진, 그림까지 동원하여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가 나자를 처음 만나던 날의 상황과 느낌을 적은 부분을 발췌하여보면 다음과 같다.
지난 10월 4일, 그야말로 할 일이 없고 매우 침울한 오후가 계속되던 날들 가운데 어느 저녁 시간에, 나는 마치 그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나만의 비결이라도 있는 것처럼 라파예트 가를 서성대고 있었다. (...)
나는 옷차림이 매우 초라한 한 젊은 여자가 내 쪽으로 한 열 걸음쯤 떨어진 지점에서 오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녀 또한 나를 보고 있거나 이미 본듯 했다. (...)
나는 주저하지 않고 모르는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다행히 그녀는 미소를 지었는데, 그것은 너무나 신비스럽고 마치 자초지종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미소였다.
저 눈 속에 스쳐가는 범상치 않은 빛은 무엇일까. 어떻게 저 눈 속에는 어두운 고통의 빛과 밝은 자부심의 빛이 동시에 비칠 수 있을까? (65-67쪽)
나도 궁금해졌다. 어두운 고통의 빛과 밝은 자부심의 빛이 동시에 비치는 눈빛이란 어떤 모습일지. 고통과 자부심, 어두움과 밝음이 동시에 말이다.
10월 5일, 6일, 7일, 이들은 계속 만나서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듣고 상대방을 알아가고 상대방에게 나를 설명하고 책과 그림에 대해 말하고 그림을 그리고 저녁을 먹는다.
그녀가 내게 무엇을 요구하건, 그 요구를 거절한다는 것은 몹쓸 짓이라고 할 만큼 그녀는 순수하고 지상의 모든 관계로부터 자유로웠으며 생활에 별로 집착하지 않았다. (91쪽)
나자에 대해 작가가 무엇을 어떻게 느꼈는지 계속 서술하고 있지만 쉽게 공감이 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다음으로 넘어가는데 방해로 느껴지지 않은 것은, 꼭 공감해야한다는 법은 없으며 작가도 그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위에 말한 작가 자신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본다면 작가는 이런 자기 감정이 일반적인 대중들에게 속속들이 공감되기를 바랐겠겠는가?
만남은 10월 13일까지 계속되었고, 10월 13일 나자는 과거의 어떤 자기 경험을 뜬금없이 꺼냈느데 그 순간 작가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다.
그녀가 뜬금없이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그 순간 나의 마음은 그녀에게서 영원히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끔찍한 사건을 그녀가 빈정거리는 투로 이야기함으로써 내가 느끼게 된, 절대로 회복 불가능한 감정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은 후에 더 이상 눈물을 흘릴 수 없다고 생각될 만큼 오랫동안 울었다. 나자를 더 이상 만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그녀를 만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울었다. (117쪽)
그녀는 그에게 여러 개의 추상적인 그림을 그려 선물했고, 이 날이 나자와의 마지막 만남이 된다. 이 그림들은 책 속에 그대로 실려 있으며 그는 마치 나자를 다시 보듯이 그림 속 이미지를 해석하려고 노력한다.
이후 작가는 나자가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는 소식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지만 그것이 얼마나 속물적 바보들에 의한 결정인지 토로하며 괴로와한다.
상식을 벗어나는 비정상적인 행위가 공공장소에서 자행되면, 그 순간부터 객관적으로 입증되고 불법적인 성격을 갖게 되는 그 행위는 다른 그 어떤 행위보다도 몇 천 배 더 끔찍한 구금의 원인이 된다. 내가 보기에 모든 종류의 감금은 임의적인 것이다.
인간에게서 자유를 박탈해도 되는 이유가 있는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들은 사드를 가두었고 니체를 가두었고 보들레르를 가두었다. 밤에 불쑥 찾아와 당신이 저항할 수 없는 강제력을 동원하거나 별별 수단을 다 써서 구속복을 입히는 방법은, 경찰이 당신의 호주머니에 권총을 슬며시 집어넣고 위협하는 방법이나 다름없다. (144쪽)
그는 논리의 창살을 '가장 가증스러운 감옥'이라고 하면서 자유와 광기와 큰 기쁨을 누리지 못하도록 충동을 억누르는 장치에 대해서 쓰고 있다.
논리 대신 그는 무엇에 의지하고 싶은 것인가?
다시 한번 말하겠는데, 무의식의 존재만을 인정하고 싶고, 무의식만을 믿고 싶고, 내 눈 속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빛의 한 점, 그 어둠의 덩어리에 부딪히지 않도록 나를 이끌어 주는 빛의 한 점을 내 스스로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무의식의 드넓은 방파제를 한가로이 거닐고 싶다. (160쪽)
나자의 존재는 바로 이것이었구나 싶었다. 그를 이끌어주는 빛의 한 점. 그는 그 빛의 한 점을 뚫어지게 바라보듯이 나자를 바라보고 싶었구나. 그래서 나자의 입에서 뜬금없이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가 나왔을때 그의 마음에서 의도치 않던 변화와 실망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구.
책의 맨앞 <뒤늦게 전하는 말>(후기를 대신하는 말)에서 작가는, 여러 해가 지난 후 책이라는 형식 안에서 글을 다시 다듬으려고 하는 작업은 이미 사소한 사건들을 일정한 방식으로 서로 유기적인 관계로 재구성하게 하고 객관적인 진술이 되게 하여, 순전히 감정에 의존하여 쓴 글과는 구별되게 한다면서, 인간의 삶 속에서 주관성과 객관성은 일련의 경쟁 관계에 놓였다가 결국 그 싸움에서 아주 쉽게 곤란한 상태에 빠져 버리는 쪽이 대체로 주관성이라고 했다.
그래서 객관성을 폄하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변함없이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오류투성이일지라도 주관성 속에 글이 머물러 있는 것이지마는, 좀 더 정확한 표현에 이르게 하기 위해 객관성에 대해 사소한 배려를 해야겠다고 결심하였음을 밝히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