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중 내가 제일 나 자신과 가까이 있는 느낌이 드는 때, 그래서 놓치고 싶지 않은 때가 새벽이라면, 감성이 제일 풍부해지는 때, 그래서 가끔은 피하고 싶어 지는 때는 해가 질 무렵인 것 같다. 보고 싶은 사람도 하나 둘 머리 속에 떠오르고, 가고 싶은, 하지만 실제 갈 확률은 별로 없는 그런 곳들이 머리 속에 줄줄이 떠오르는가 하면, 아주 오래 전 일들이 뜬금없이 생각나기도 한다. 내 머리 속의 주파수가 이상해지는 때.
오후 6시. 사진기를 가지고 나가고 싶어서 해 지기 전에 한바퀴 돌기로 했다.

오후 6시 20분의 햇빛이 이렇게 짱짱했다. 개나리를 보면 3월, 진달래와 철쭉을 보면 4월, 라일락을 보면 5월, 장미를 보면 6월, 배롱나무를 보면 한여름을 느끼고, 시퍼렇지만 감 열매가 커지고 있는 것을 보면 가을이 멀지 않았구나 짐작한다.
아파트 뒷쪽 담에 서서 장미가 햇빛 세례를 받고 있었다.

"나도 꽃이야."- 사철나무 꽃

마치 햇빛에 색이 바랜 것 같았던 꽃. 우리 아파트 건너편 아파트까지 진출하여 찍어왔다.

학교에서 교실 창문 틈으로 고개 내밀고 밖을 내다보는 소녀들 같다. 이제 이런 분홍색 좋다고 하면 나이들어가는 징조란 소리 들을까? 원래 좋아했는데.

우리 아파트 바로 앞 마당에서 발견한 딸기. 빨강의 보색은 파랑이 아니라 녹색 계열이라는 것을 다시 일깨워 주는 색의 대비.
도깨비방망이 같이 생긴 측백나무 꽃도 찍었는데, 촛점이 흐려서 올리지 않기로 한다. 이것 역시, 언뜻 보면 꽃인지 모르고 지나기 쉬운 모양인데, 다음에 더 잘 찍어봐야지.
7시 22분인데 아직도 밖은 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