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이의 음악 학원에서 일년에 한번씩 하는 발표회에 다녀왔다. 단체로 대여한 의상을 입고 다른 친구들과 함께 연주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또 여러 가지 생각이 밀려왔다.

1.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
내 아이보다 더 어린 친구들도 많았는데 저렇게 꼬물거리는 아이들을 알아듣게 설명하고 가르치시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을까.
언제였나. 내 잔소리 없이는 아이가 좀처럼 연습을 하려들지 않고 피아노에 흥미를 보이는 것 같지도 않길래 선생님께 아무래도 피아노를 당분간 쉬어야 겠다고 말씀드렸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아이가 그럴땐 하던 것을 그만두게 하는 극단의 조치보다는 연습을 잘 안하면 안하는대로, 좀 기다려주시면 어떨까요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 그 '좀 기다려주라'는 말씀은 지금까지도 종종 떠올리는데 특히 아이를 막 다그치고 싶을 때, 좀 기다려주시지요 하시던 선생님의 음성이 내 머리 속에서 울려오는 것을 느낀다. 그때 나의 짧은 생각대로 그냥 피아노를 그만 두었더라면?
발표회가 끝난 후, 정말 수고 많으셨다고, 설 연휴 잘 보내시라고, 말 주변이 없어 선생님께 이렇게 밖에 인사를 못드리고 왔다.

2. 또 하나의 생각.
나도 저렇게 피아노 발표회에서 떨리는 가슴으로 무대 뒤에서 차례를 기다릴때가 있었는데, 그게 수십년전이 아니라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 새 내 아이가 발표회하는 자리에 앉아서 구경하고 있다. 세월은 그렇게 간다. 나 어릴 때 발표회장에 가보니 다른 아이들은 엄마의 도움으로 얼굴에 화장도 하고 예쁜 드레스도 입고 왔는데 나는 청바지에, 면 티셔츠를 입고 무대에 올라갔다. 아무리 둘러봐도 나만 그랬다. 그런 행사때문에 한번 입고 말 드레스를 사주실 엄마가 아니셨으므로. 그렇다고 새옷을 사달라고 조를 나도 아니었으므로.
하지만 지금은 알것 같다. 네 옷을 보여줄 생각 말고 너의 연주를 보여주라고, 엄마는 그렇게 말씀하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날 발표회장에서 다른 아이들의 알록달록 새옷을 보시며 엄마도 마음이 안좋으셨을 것이라는걸, 그래도 겉으로 내색을 안하셨을 거라는 걸.
사실 난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우연히 동네에 피아노 교습을 하는 곳을 지나가다 본 후로 얼마나 피아노가 배우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엄마에게 바로 가서 나도 피아노 배우게 해달라는 말을 못했다. 기껏 용기내어 한다는 말이 '엄마, 누구누구도 피아노 배운대요...' 이 정도. 그렇게 소극적으로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의사 표시를 해오길 3년. 드디어 피아노를 배우게 된 것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이다. 그때 얼마나 하늘을 날을 듯이 좋았던지. 피아노 선생님께서 여기까지 쳐와라 하면 그 다음 페이지까지 혼자 연습해갔다. 그냥 좋아서 그랬다.  

3. 아이와 피아노
아이를 낳기 전부터, 아니 결혼을 하기 전부터,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아이에게 꼭 피아노를 가르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피아니스트가 되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중에 커가면서 음악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위안, 그것을 누리게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아이에게 '너도 피아노를 배워라.' 이러면서 피아노를 배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 입에서 먼저 "엄마, 나도 피아노 배우고 싶어요." 소리가 나오게 하려고, 그때 엄두도 나지 않는 형편에 무리해서 피아노를 집에 들여놓고 시간이 날때마다 내가 직접 피아노를 쳤다. 아이에게 '너 이리 와서 이거 들어봐.' 라고 하지도 않고, 그냥 나 혼자 놀듯이 즐기듯이 피아노를 쳐댔다.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배워와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으면 잘 듣고 있다가 피아노 칠때 그 노래도 쳤다. 아이가 옆에 와서 노래를 따라 부르고, 그러다가 피아노 건반을 뚱땅거려보고, 그렇게 거의 이년을 내 나름대로 흥미유발을 위한 기간을 둔 후 아이가 일곱 살이던 어느 날 백화점 윗층에 있는 극장으로 아이와 연극을 보러갔다가 시간이 남아 기다리던 중, 그 옆에 음악학원이 있는 것을 보고 아이에게 '저기 뭐하는데인지 한번 들어가볼까?' 하고 첫발을 들여놓게 된것이다. 지금 아이가 열한 살이니 피아노를 시작한지 벌써 4년이 되었구나...

요즘 아이는 연습에 꾀가 나면 그런다.
"난 나중에 축구선수가 될건데 피아노는 못쳐도 될것 같아요."
"축구만 잘하는 축구 선수보다, 축구 선수가 피아노까지 잘 쳐봐, 얼마나 멋있니? 꺅~~"
"난 나중에 애완동물전문가가 될 거니까 피아노는 꼭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아요."
"피아노도 잘 치는 애완동물전문가, 얼마나 멋있어? 동물들 듣게 피아노를 쳐주면 동물들도 훨씬 기분이 좋지 않겠니? 식물들도 음악을 들려주면 더 잘 자란다던데."
이렇게 받아치고 있다. ^^  

-아래 사진은 아이가 다섯 살 때, 그러니까 흥미유도기간 중이던 어느 날. 내가 혼자 피아노를 치고 있자니 아이가 옆에 와서 아무 음이나 뚱땅거리고 있는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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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1-01-31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혜롭고 다정한 hnine님은 본받고 싶은 어머니에요. 다린이 머리의 집게가 재밌어요.^^

hnine 2011-01-31 09:50   좋아요 0 | URL
아이쿠, 별로 지혜롭지도 못하고, 다정했다가 안그랬다가 일관성이 없는 엄마인걸요.
다린이 머리 집게는 가끔 제가 저렇게 머리에 꽂고 있답니다 ㅋㅋ

sslmo 2011-01-31 0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hnine님께 한수 배워야 할 것 같은데요.
저희 아들은 유치원때 유치원에서 하루종일 보내고도 시간이 남아 피아노를 배웠었어요.
초등학교 체험학습때 드럼교실을 한번 가보고 홀릭하여 드럼을 가늘고 길게 배우고 있는 중이구요.(일주일에 한번,토욜날만~)
요즘은 기타에 홀라당 빠져 있는데요.
전 이제 그딴 거 보다 공부에 좀 흥미를 가져줬음 좋겠어요.

근데, 전에 빨간색 오리털 파카 때도 느낀 거지만 님 빨간색을 좋아하시는군요?^^

hnine 2011-01-31 09:55   좋아요 0 | URL
다린이도 레슨은 일주일에 한번 가요. 다른 날은 집에서 연습을 해야하는데 잘 안하려고 해서 탈이지요 ^^
드럼은 보기만 해도 그냥 한번 두드려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해요. 무슨 악기이든 한가지 정도는 친한 악기가 있으면 좋다고 생각해요. 운동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악기를 연주하는 것도 스트레스 해소에 큰 역할 하잖아요?

혜덕화 2011-01-31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들이 5학년때 쯤인가 피아노 학원 가기 싫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방학 때는 무조건 쉬게 해 준다고 약속을 하고 피아노 선생님께도 진도 위주로 나가지 않아도 되니까 좀 못 쳐도 기다려달라고 부탁을 했었어요.
이번 휴가 나와서도 "피아노가 너무 치고 싶었어요" 하면서 한 시간 정도는 피아노를 치더군요. 음악이 생활에 생기와 색채를 준다는 것을 군 생활에서 느꼈다고 하더군요.
다린이도 커서 음악이 주는 아름다움을 마음으로 느낄 때가 있을 거예요.

hnine 2011-01-31 10:22   좋아요 0 | URL
혜덕화님께서 먼저 기다려달라고 부탁하셨군요. 역시...^^
저는 성격이 급하고 얕아서, 금방 눈에 뭐가 안보이면 조급해하거든요. 그때 선생님의 기다려주라는 말씀이 저에게는 딱 맞는 처방이었던 것 같아요.
음악이 주는 위안이 참 커요. 아이가 피아노를 계속 했으면 하는 것도 그런 이유때문일거고요.

프레이야 2011-01-31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6년전 다린이!! 앞머리 빨간집게 ㅎㅎㅎ
저도 애들 어릴 때 장난으로 빨래집게로 머리 꽂아준 적 있어요.
감기몸살로 멍멍한데 1월의 마지막 날 아침 모자의 다정한 사진 보고 훈훈해져요.^^

hnine 2011-01-31 10:24   좋아요 0 | URL
아이쿠, 감기 몸살이시군요. 다른 것 없어요. 손하나 까딱하지 마시고 그냥 무조건, 쉬세요. 푹~
얼른 나으셔야할텐데...
저 빨간 집게, 제꺼랍니다. ㅋㅋ 여름에 워낙 땀을 많이 흘려서 이마에 땀띠날까봐 제가 다린이 머리에 꽂아주었는데 저때는 어려서 제가 해주면 해주는대로 가만 있더니 지금은 막 도망가요 ㅋㅋ

꿈꾸는섬 2011-01-31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유도기간..ㅎㅎ정말 흥미로워요.^^
아이들에게 무조건 해라가 아니라 흥미를 유발시켜야한다는 것 잊지 말아야겠어요.
아이 발표회 보고 아이가 많이 자랑스러우셨을 것 같아요.^^

hnine 2011-02-01 07:14   좋아요 0 | URL
억지로, 의무적으로 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 다른 것은 몰라도 피아노나 미술, 체육 같은 예체능 분야는 자신이 즐기면서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시작은 그렇게 했더라도 하다보면 어느 정도 엄마의 관여가 필요한 부분이 있긴 하더군요. ^^

sangmee 2011-01-31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난 발표회라는걸 나가본 기억이 없단다.
진득하니 뭔가 끝까지 해본 게 없는거 같아.
나갔어도 떨려서 제대로 못했을 듯...

hnine 2011-02-01 07:15   좋아요 0 | URL
누구나 떨리지. 나도 아마 지금 하라고 해도 떨릴 것 같은데.

하늘바람 2011-01-31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님은 근사한 엄마 같아요
님 문자 감사합니다
사실 요즘 마음의 여유가 참 없어요
마음이 힘들고 그걸 내색않고 살아가야 해서 힘들고 그러네요
감사합니다 님

hnine 2011-02-01 09:16   좋아요 0 | URL
근사하긴요, 근사한 엄마란 책이나 영화 속에만 있는 것 같아요. ^^
하늘바람님, 형제 자매가 있는 것도 아니고 혼자서 다 감당하시려니 더 힘드시지요. 저희 아버지도 계속 심장약을 드시고 계신터라 지속적으로 복용하는 심장약의 영향을 좀 알고 있어요. 어머님 드시는 약에 와파린이 들어가 있었군요. 그게 혈액응고방지제 거든요. 아무튼 위험한 고비 넘기신 것 같으니 다행인데 이제서야 겨우 물을 드신다니, 앞으로 계속 잘 지켜봐드려야 겠어요. 그런데 하늘바람님 힘드셔서 어째요.

bookJourney 2011-01-31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린이 너무 귀여워요. ㅎㅎ
분위기 만들어주고, 기다려주시는 엄마~ 정말 대단해요. 존경스럽습니다. >.<
다린이 머리의 집게를 저희 큰 녀석에게 꽂아주고 싶어요. 이마에 어찌나 여드름이 많이 나는지 .. ^^;;

hnine 2011-02-01 07:20   좋아요 0 | URL
사실 저 머리집게보다 더 효과적인건 헤어밴드인데... ㅋㅋ
한참 성장기때에는 정말 앞머리만 좀 내리고 다녀도 금방 이마에 뭐가 나더라고요. 그거 가리려고 머리를 더 내리고 다니게 되고, 저도 그랬던 기억이 있네요.
기다리는것, 어렵고도 중요한 일 같아요.

무스탕 2011-01-31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전히 엄마의 욕심으로 제 아이들도 피아노건 바이올린이건 뭔가 악기를 다룰줄 알아서 나중에 커서 힘들때 음악으로 위로를 받을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제 두 아들녀석들은 음악이든 악기든 관심이 없네요. 아.. 이건 정말 슬퍼요 ㅠ.ㅠ
나중에 노래방가서 탬버린 흔드는걸로 위로가 될런지..

hnine 2011-02-01 07:23   좋아요 0 | URL
지성이와 정성이가 악기보다 더 좋아하는 것이 있을 거예요. 저도 궁금해지네요 ^^
노래방 가서 탬버린 흔들어본지 정말 정말 오래되었어요.

비로그인 2011-02-01 0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 첫머리 가볍게 읽다가 중간지점에서는 좀 뭔가 울컥..
그리고 다시 뭔가 말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사진에서는 묘하게도 조용히 웃게 됩니다.

ㅎㅎ 그런데 저 앞머리의 집게.. 지난번 hnine님 결혼식 에피소드에 이어 두번째로 재밌는 무엇이네요 ㅋㅋ

hnine 2011-02-01 07:24   좋아요 0 | URL
웃음을 드릴 수 있다면 전 좋지요.
저 머리 집게 지금도 제 책상 서랍속에 있어요. 제가 주로 이용하지요. 청소할 때나 음식할 때 머리 자꾸 흘러내려 귀찮을 때요.^^

2011-02-01 04: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01 0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02-01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알라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는데, 3년만에 안 하려고 해서 관뒀어요.
너무 스트레스를 받더라구요. 저는, 예전에 배운 피아노 다시 배우고 싶어요.
그래서 강습을 알아봤는데, 강습료가 15만원 넘게? ㅠㅠ. 제 교육비가 너무 많이 들어가서
포기했어요... 혼자 다시 해볼까봐여~ 아아.... 악기 하나 연주하는 분들 너무 부러워요.

나인 언니, 즐거운 설 연휴 되세요.

hnine 2011-02-01 14:02   좋아요 0 | URL
그렇게 배우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 저도 중학교 올라가고 나니까 치기 싫어지더라고요. 어차피 취미로 할꺼라 생각하니 의욕이 떨어지기도 했고요. 그런데 그때는 엄마가 그만두지 못하게 하셔서 계속 쳤어요. 일단 시작했으면 전공을 안하더라도 어중간한 정도에서 그만두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때까지 쳤지 뭡니까.
코알라가 언젠가는 다시 배우고 싶다고 말할지도 몰라요. 엄마가 치는 것을 보면 마음이 달라질지도 모르고요.
즐거운 설 연휴...(는 기대도 안해요 ㅠㅠ)마녀고양이님이 제 몫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