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뉴스에 천안함 관련기사만 나오더니 선거 끝난 이후 거의 전무하다. 그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누군가에게는) 책이 하나 나왔다. 천안함 사건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다. 80년대 말 KAL 기 폭파 사건에 비견되는. 분위기도 정치적인 상황도. 누구는 이렇다 또 누구는 저렇다. 모두가 다 전문가가 되고 비평가가 된다. 나 또한. 그런 상황에서 사건에 관련된 내용들을 중립적인 단계에서 정리해주는 이 책은 사건의 실체를 조금 더 자세히 정확하게 보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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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8.7  천안함 ‘선체’는 건졌지만 ‘실체’는 못 건졌다  

‘천안함 사태’ 최초의 종합분석서…진상규명 둘러싼 전문가 글·좌담
합조단 설명에 제기된 의혹 검토…정치·외교·안보 파장과 해법 모색 

대한항공 폭파범 김현희의 일본 방문을 성사시키기 위해 애써온 일본 보수세력의 오랜 소망이 천안함 침몰 뒤 마침내 이루어졌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가해자로서의 일본보다는 원폭 피해자로서의 일본 부각에 더 열심인 듯한 일본 보수우익에게 북한의 일본인 납치사실 고백은 가해자 이미지 지우기와 일본 재무장을 위한 절호의 재료였다. 그렇게 해서 일본열도는 한동안 반북 캠페인으로 들끓었고, 일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최대 피해자들 중 하나인 북한은 졸지에 가해자가 됐다. 새로운 얘기가 더 나올 게 없는 김현희의 방일에 그토록 집착한 일본 보수세력 노림수는 인도주의 고취가 아니라 꺼져가던 반북 캠페인 불씨 되살리기가 아니었을까.

지난 3일 나카이 히로시 일본 공안위원장이 국회 답변에서, 방일한 김현희의 격에 맞지 않는 도쿄 헬리콥터 호화유람이 “한국 쪽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고 발언한 것은 실로 흥미롭다. 나카이 위원장의 답변이 비난여론을 의식한 임기응변의 면피용 헛소리일 가능성을 아주 배제할 순 없겠지만, ‘반북’이란 점에서 천안함 침몰을 북의 소행이라 규정한 이후의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 사이에 주고받기 식의 의기투합이 있었을 가능성을 나카이 발언은 강하게 암시한다. 천안함 사태는 ‘국치 100년’을 앞둔 한일 간의 미묘한 민족감정 앙금마저 반북 구호 아래 녹여버릴 만큼 그 파장이 강력했다.

5월24일 대국민 담화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어떤 나라도 천안함 사태가 북한에 의해 자행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게 됐다”며 북한 선박에 대한 남한 해상교통로 봉쇄, 남북 교역·교류 중단, 적극적인 대북 억제, 천안함사태의 유엔 안보리 회부 등을 선언했다. 이후 중국의 반발까지 부른 한·미 합동군사훈련이 대대적으로 실시되고 북·미, 남·북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에 따르면, 지난 10여년간 마련된 남북간 경제공동체 형성의 토대가 이로 말미암아 허물어지고 ‘북한 경제의 중국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으며, 이대로 가면 통일은 정말 물건너간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는 2009년 9월께부터 본격화한 북중의 동북경제권이 남·북과 북·미 관계 단절을 부른 천안함 사태 이후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지금 한반도에선 휴전선을 경계로 마치 세포분열 때 염색체가 분리돼 양극으로 이동하듯이 민족의 원심분리가 진행되고 있다. 김연철 교수에 따르면, 천안함 사태 이후 가속화되고 있는 북중의 동북경제권 형성은 중국의 정략적 대북 일방지원이라는 기존관념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절실한 쌍방 필요에 의해 구축되고 있는 강력한 경제융합이다. 남북을 해양과 대륙 양극단으로 쏠리게 만드는 한반도의 이런 양극분해와 한·미·일 동맹체제 강화라는 뉴라이트적 사태 전개를 일본 우익은 아마 반길 것이다.

그런데 천안함 침몰이 과연 북한 소행일까? 신냉전의 도래를 우려할 만큼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구도를 바꾸고 있는 남북 양극분해뿐만 아니라 반대의견을 불온시하고 금압하는 남쪽 내부의 준공안적 통치체제를 촉발하고 있는 천안함 사태의 진실은 무엇인가? 만일 북한 소행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나? 

 
<천안함을 묻는다>는 바로 그런 의문에 도전한다. 아마도 천안함 사태에 관한 종합적인 분석서로는 첫 책이 될 <천안함을 묻는다>는 사건 발생부터 지금까지 발표되거나 알려진 주요 사실들을 점검하고 설득력 있는 의문들을 제기해온 각계 전문가들 14명의 글과 좌담을 실었다. 사건이 일어난 지 넉 달이 훨씬 더 지났고, 그동안 남북관계를 비롯해 나라 안팎에서 그 사건 때문에 경천동지할 일들이 벌어졌는데도 우리는 아직 사건 초기단계에서부터 품어온 그런 의문들을 전혀 해소하지 못했다. 다국적 민간전문가들이 참여했다는 합조단 발표도, 그것을 토대로 한 대통령 담화도 그런 의문을 해소해주지 못했다. 천안함 공격의 주체도, 사과도, 재발방지 약속도 얻어내지 못한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은 오히려 정부의 북한 소행 주장의 근거를 한층 더 의심스럽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북한의 소행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천안함 사태가 북한에 의해 자행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게 됐다”는 대통령 담화와 이후 정책의 토대가 된 합조단 발표 내용의 허와 실을 따지고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하여 ‘북한의 소행이 아니다’가 아니라 ‘북한의 소행이라는 이제까지의 주장들은 근거가 없거나 박약하다’는 쪽으로 나아간다. 전문적 소양을 갖춘 이들의 논리적 분석을 통해 산만하고 혼란스러울 수 있는 숱한 주장들을 비중 있는 것 중심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것도 이 책의 미덕이다.

중요한 것은 진상규명이다. 사실보도의 육하원칙을 천안함 사태에 적용하면 우리는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천안함을 침몰시켰는지 모른다. 오직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무엇’, 곧 천안함이 침몰당했고 46명의 아까운 젊음이 희생당했다는 사실뿐이다.

“무기력하고 무리한 외교를 감추기 위한 무력시위로 보일 뿐”이라는 한·미 합동군사훈련이 실시되고 있는 지금도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외부폭발 때문인지, 그 경우에도 어뢰인지 기뢰인지, 좌초 때문인지 침수절단이나 피로파괴 때문인지조차 아직 모른다.

또 설사 엔진 급정거로 함정 스크루가 휠 수 있다는 합조단 주장을 어느 정도 수긍한다 하더라도 천안함 스크루가 엔진 급정지로 그렇게 흠집이 나고 심하게 휘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으며, 무엇보다 관성에 의해 날개가 휘었다면 지금 모양과는 반대방향으로 휘어야 한다. 합조단이 과학적이고 결정적인 증거라며 내놓은 ‘1번’ 매직 글씨의 어뢰 추진체가 북한제이고 또 그날 천안함을 침몰시킨 바로 그 문제의 어뢰 잔해인지를 둘러싼 과학자들 간의 알루미늄 흡착물과 매직 잉크 공방은 계속 진행중이며 외부 전문가들 이의제기에 대한 합조단의 설명이 오히려 더욱 의문을 키운 면도 있다. 증거 왜곡이나 날조 의혹까지 받고 있다. 이른바 버블제트와 물기둥, 충격파 등을 둘러싼 공방에서도 합조단의 입지는 공고하지 못하다. 중국과 러시아가 왜 그렇게 나오겠는가.

이런 의혹과 사건의 실체 규명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책은 거기에만 매달리진 않는다. 부실한 근거를 토대로 서둘러 정치적 효과를 노리는 바람에 자기 덫에 갇힌 외교와 남북관계 및 국방개혁 좌절 등 천안함 사태가 야기한 정치·외교·안보상의 파장을 다루고 어떻게 그 덫을 빠져나와야 할지 그 출구와 해법도 모색한다. 필자들은 이명박 정부가 천안함 사태 이전부터 이미 길을 잘못 들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사건의 진상규명과 함께 평화체제 수립 쪽으로 남북관계의 틀을 새로 짜고 외교안보정책의 방향도 거기에 맞춰 전환하라고 촉구한다. 더 늦기 전에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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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묻고 있나

정보 왜곡·은폐 왜?…해외조사단은 누구?

이 책은 엮은이 강태호 기자 외에 권혁철 <한겨레> 기자,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김연철 인제대 교수, 김종대 군사전문지 <디앤디 포커스> 편집장, 박선원 한국미래발전연구원 연구실장, 서재정 존스홉킨스대 교수,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이사, 이승헌 버지니아대 교수, 이태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정현곤 세교연구소 상임기획위원, 최문순 국회의원, 황준호 <프레시안> 기자 등이 필자 또는 좌담자로 참여했다.

당국의 천안함 사태 조사는 이들이 보기에 출발부터 잘못됐다. 당국은 정보와 조직을 독점한 채 목표 범위 밖의 것들은 철저히 배제하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은 선택적으로 왜곡 과장함으로써 결국 총체적인 불신을 자초했다.

사건 발생 직후 참여연대는 사건 전후 일지와 교신 및 항적 기록 등 4개 분야 16개 항목의 관련정보 공개를 청구했으나 국방부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기뢰 매설에 관한 간략한 설명자료 외에는 모두 군사기밀이라며 비공개 처리했다. 그 뒤 12개 분야 정보공개를 다시 청구했으나 언론에 이미 공개된 4가지 외엔 모두 비공개라는 통보를 받았다. 군은 이처럼 진상규명에 필요한 기초정보들을 거의 독점한 채 거짓말과 말 바꾸기를 계속했다.

열상감시장치 동영상은 아예 없다고 하다가 전역자 등의 제보와 비판이 잇따르자 그때마다 말을 바꾸고 동영상을 추가 공개했다. 천안함 생존자들은 한 차례 기자회견에 등장한 뒤 몇 주씩 집체교육을 받게 하는 등 극도의 통제를 받았다. 최문순 의원이 6월24일 공개한 자료 덕에 생존자들이 물기둥도 화염도 보지 못했고, 백령도 초병이 봤다는 건 물기둥이 아니라 섬광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는데도 유엔에는 그 초병이 100m 높이의 물기둥을 목격했다는 엉터리 진술이 이미 제출된 뒤였다.

미국 정부에 보낸 조사보고서는 400쪽짜리였으나 자국민과 국회에 보낸 건 3~4쪽짜리 발표문이었다. 그리고 어뢰피격설에 의문을 제기한 박선원·신상철씨, 김용옥 교수 등과 이정희 국회의원까지 명예훼손이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소·고발당했고 인터넷에서 정부 발표에 의문을 제기한 사람들 중에도 공안검사 수사대상이 된 이가 적지 않았다. 유엔에 정부 발표에 의문을 제기하는 서한을 전달한 참여연대는 총리 등 정부 여당 관계자들로부터 공개적으로 힐난당하고 보수단체 회원들의 폭력적인 항의에 시달렸으며, 검찰 공안1부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했다.

민군합동조사단 조사위원 47명 중 민간인은 25명이었으나 순수 민간인은 8명이었고 나머지는 군 또는 정부 관계기관 및 연구소 소속이었다. 방위산업체 인원을 빼면 민간인 수는 더 줄어든다. 그나마 이들 민간인에겐 어뢰피격을 전제하고 그 외의 모든 다른 가능성을 처음부터 배제한 채 항적기록이나 열영상장비나 해군지휘통제시스템 동영상 등의 기초정보조차 제공하지 않았다. 또 해외조사단도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조사단에서의 역할과 권한은 무엇인지 등도 전혀 밝히지 않았다.

김종대 편집장은 감사원 감사는 군의 대비태세 문제 및 무기력을 지적했으나, 그것도 어뢰피격, 북 잠수정 침투를 기정사실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미리 맞춰 놓은 채 진행함으로써 오히려 객관성을 해쳤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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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경희대 전중환 교수의 '오래된 연장통'을 재미나게 읽었다. 전중환 교수는 대한민국에서 진화심리학을 전공한 1호 교수라고 한다. 그만큰 대한민국에서의 진화심리학은 그 뿌리가 아주 얕다고 볼 수 있다. 꾸준히 이 분야에 대해서 연구한만큼 대중들에게 쉽고 재미나게 진화심리학에 다가갈 수 있는 책인 것 같다. 난 개인적으로 이 책으로 읽으면서 좀더 자세히 이 분야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으 가졌다. 그리고 스티븐 핑커의 '언어 본능'과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만들어진 신' 같은 책들도 하루 빨리 읽고 싶어진다. 방학때 이 중에 한권이라도 꼭 읽어봐야 겠다.  

ps : '이기적 유전자'는 와이프가 가지고 있었는데, 책이 보이지 않아 이 책 어디 있나?하고 물었더니 모른단다. 버렸나?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한테 책 내용을 물어보란다. 그래서 내가 "책 내용이 뭐냐?"라고 하니 "인간의 유전자는 이기적이고 또한 그것은 인간의 DNA에 새겨져 있다"가 끝이란다. 너무 간단한가? 어찌보면 그게 다인지도 모르겠다. 읽어보고 판단해볼 일이다.

 

 

한겨레신문 2010.8.7  골수 좌파이론가의 웅변 ‘신은 위대하다’  

기독교 망친건 사랑없는 자본주의
‘무지와 광기어린 무신론’ 꼬집어
“종교는 오만하게 볼 대상 아니다”  

 

영국의 저명한 문학비평가·문화이론가 테리 이글턴(사진)이 쓴 <신을 옹호하다>는 제목만 보면 특별할 게 없는 책 같다. 종교인·신앙인이라면 신을 옹호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 이 책의 포인트는 부제 ‘마르크스주의자의 무신론 비판’에 있다. 통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무신론자=유물론자’로 통하는데, 마르크스주의자가 무신론을 비판하고 신을 옹호한다는 사실이 이 책을 눈에 띄게 만든다. 지은이 이글턴이 마르크스주의자이자 기독교인이다. 그는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계 노동계급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이 원초적 환경이 그대로 그의 정신세계의 뼈대가 된 셈이다. 이 책에서 이글턴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걸고 무신론을 비판한다. 2008년 4월 미국 예일대에서 했던 특강이 이 책의 바탕이 됐다. 

 

이 책의 또다른 포인트는 이글턴이 비판하는 대상이 명성에서 이글턴에 결코 뒤지지 않는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와 저널리스트 크리스토퍼 히친스라는 사실이다. 두 사람은 정치적 스펙트럼상 ‘진보적 자유주의’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도킨스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고 조지 부시의 이라크 전쟁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히친스도 헨리 키신저를 베트남·캄보디아 민간인 학살의 전범으로 재판에 부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키신저 재판>을 썼다. 이 두 사람은 강경한 기독교 비판자라는 점에서도 유사한데, 도킨스는 2006년 <만들어진 신>을 출간했고, 히친스는 2007년 <신은 위대하지 않다>를 펴냈다. 두 사람은 여기서 기독교가 저지른 잘못과 종교가 지닌 불합리성을 가차없이 성토했다. 얼마나 강력하게 비판했던지 “반종교적 광기를 내뿜는 도킨스 앞에서는 종교재판소장이 무기력한 자유주의자로 보일 지경”이다. 2001년 9·11테러 이후 맹렬해진 미국 안 기독교 근본주의 창궐에 대한 비판의식이 이런 종교 비판으로 나타났던 것일 터인데, 이글턴은 이들보다 더 급진적이고 좌파적인 관점에서 두 사람의 종교 비판이 지닌 문제점을 반비판한다. 
   

» 테리 이글턴 문학비평가·문화이론가 

그렇다고 해서 이글턴이 도킨스와 히친스의 모든 비판을 다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이) 기존 종교에 대해 퍼붓는 비난 중 아주 많은 부분이 지극히 옳은 소리며, 종교의 문제점들을 그토록 설득력 있게 제시한 데 대해서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 마땅하다.” 문제는 이들이 종교에 관해 어이없을 만큼 무지한 상태에서 열변을 토한다는 데 있다. 이글턴은 “<영국 조류도감>을 어쩌다 좀 들여다봤다고 해서 생물학의 심원한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을 갖추었다고 착각하는 사람의 오만”이라고 비판한다. 또 두 사람의 신학 이해가 소박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걸 안타까워하면서, “어떤 소설에 대해 재미있는 부분도 있고 무서운 부분도 있는데 끝에 가서는 무척 슬프다는 식의 평을 해놓고는 문학비평가를 자임하는 사람과 비슷하다”고 꼬집는다.

그렇다면 이글턴이 생각하는 신은 어떤 존재인가. 그는 통상의 기독교 비판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신을 제시한다. “예수가 ‘아버지’라고 일컫는 이 존재는 심판자가 아니고 가부장도 아니며 비난하는 자도 아니고 초자아도 아니다. 그는 사랑하는 자이고 친구이며, 함께 비난받는 피고이고 우리를 비호해주는 변호사다.” 그렇다면 심판자·비판자 하느님은 누구인가. 지은이는 그 존재가 바로 사탄이라고 말한다. “사탄은 이를테면 못되게 구는 힘센 왕초로 해석된 하느님이다.”

지은이는 마르크스주의자답게 예수 그리스도를 사회주의 운동 창시자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린다. 예수는 “성경에서 ‘아나빔’이라 부르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과 연대한” 죄로 “고문받고 처형당한 정치범”이다. “로마는 정치범만을 십자가에서 처형했다. 바울의 서신에서 아나빔은 세상의 보잘것없는 인간들을 뜻한다. 사회에서 버림받은 인간 쓰레기, 그러나 하느님 나라로 알려진 새로운 형태의 인간 세계에서는 주춧돌 구실을 할 사람들이다.” 예수는 이들을 대표하는 존재다. 그리하여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굶주린 사람의 배를 채워주고 이민자를 환영하며 아픈 이들을 찾아가 돌보고 부자들의 횡포로부터 가난한 사람들과 고아와 과부를 보호하는 문제다.” 

이글턴은 자본주의가 기독교와 잘 어울릴 것 같지만, 실상 자본주의야말로 그 본질상 무신론적이라고, 그것도 “한결같이 나쁜 방향으로 무신론적”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 옹호자들이 경건한 태도로 뭐라고 주장하든 간에, 현실에서 드러나는 물질적 행태와 거기에 내재된 가치관과 신조들은 신을 부정한다.”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려면 이 무신론적이고 사랑 없는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해야만 한다.  

이글턴은 도킨스와 히친스가 19세기 계몽주의자·합리주의자들의 단순한 이성주의에 입각해 종교를 미신으로 보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철학자 찰스 테일러가 <세속의 시대>에서 한 주장을 받아들여 “‘인류의 역사가 진행되면서 과학적 증거가 꾸준히 축적된 결과로 세계에 대한 종교적 관점이 패퇴했다’는 닳고 닳은 신화, 경이로우리만큼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신화”를 단호하게 반박한다. 이런 신화 속에서 “‘믿음의 시대’는 ‘이성의 시대’ 앞에서 장렬하게 전사한다.” 그러나 자기 한계를 알지 못하는 이성이란 또하나의 극단, 일종의 자기도취일 뿐이다. 도킨스와 히친스는 “우리가 신화와 미신의 해로운 유산을 떨쳐버리기만 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런 주장 자체가 신화다.” 지은이는 도킨스와 히친스의 종교 비판에 맞서 이렇게 선언한다. “종교는 오만하게 거부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끈질기게 해독해야 할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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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에 토요일마다 연재되는 도종환 시인의 기사를 모아 본다. 처음에는 별로 당기지 않는 기사였는데, 한번 읽어보니 사람을 확 빨아들이는 기사였다. 그의 어린 시절의 고난이 나에게는 하나의 교훈으로 다가온다. 8월 7일 기사를 시작으로 예전 기사들도 하나씩 스크랩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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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 8.7  내 어린날의 결빙…추위는 사람을 끈질기게 했습니다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⑥ 

대학 3학년 봄 ‘미운오리새끼’라는 문학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손가락질받는 존재라는 불온함과 언젠가 백조가 되리라는 상승의지가 잠재되어 있었습니다

가난했기 때문에 고독했습니다. 가난하다는 것과 고독하다는 것은 물론 별개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십대가 된 저는 가난했기 때문에 고독하게 살았습니다. 가난했기 때문에 남들과 잘 어울리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가난은 내 성격을 점점 내성적이고 폐쇄적인 곳으로 끌고 갔습니다. 옆집에 사는 동기와도 별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고,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침 스쿨버스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도 말을 잘 하지 않았고 고개를 숙인 채 시선을 내리깔거나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집에 오면 잘 나가지 않고 방에만 틀어박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같은 어려운 책이나 이상의 소설을 읽고 있는 저를 볼 때면 아버지는 ‘암사내처럼 어째 저 모양이냐’고 한숨을 쉬셨습니다.

저도 답답할 때는 방을 나와 무심천 둑을 걸었습니다. 하류 쪽으로 걸어가다 강둑이나 논가에 앉아 노을을 바라보았습니다. 잿빛 구름에 엉긴 채 능금빛으로 타오르는 노을은 고독할 때 시간을 보내기에 좋은 무대였습니다. 노을을 보며 네로의 손에 의해 불타는 도시 로마를 떠올렸습니다. 다 태우고 난 뒤에 그 위에 새로 세우고 싶은 도시를 그려보았습니다. 고흐의 불타는 밀밭을 생각하는 동안 교회당 종소리가 들려오고 새떼가 날아갔습니다. 화전민의 아들이 되어 보고도 싶고, 타히티를 가 보고 싶기도 하고, 붉은 포도주 한 잔을 생각했습니다. 양귀비 꽃 속에 묻혀 샤갈의 <마을 위의 여인>처럼 떠다니고 싶고, 비발디의 <사계> 제3악장 가을, 그 선율 속의 불의 축제를 생각했습니다. 뒤돌아볼 틈도 없이 불꽃처럼 살다 가는 예술가들의 짧은 생을 생각했습니다.

미운오리새끼와 알리샤와 제롬을, 카추샤의 그 남자를, 베르테르를, 히스클리프를, 레기네와 키르케고르를 생각하고 건드리면 터져버릴 것 같은 시로 꽉 차 있는 시인을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꼼짝 않고 노을을 바라보는 동안 작은 청개구리가 무릎 위로 올라와 같이 앉아 있곤 했습니다. 사람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노을은 머리 뒤통수로부터 시작한 어둠에 야금야금 갉아 먹히고 있었습니다.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렇게 이어지는 박두진 시인의 시 <도봉>을 떠올렸습니다. 올 때처럼 <이사도라>의 음률을 그늘진 휘파람으로 따라 부르며 돌아왔습니다. 

벌목을 하다 잠시 쉴 때면 자작나무에 등을 기댄 채 떨어진 자작나무 껍질 주워 편지를 쓰곤 했다 자작나무 껍질은 희고 얇아서 마음의 몇 조각을 옮겨 적기에 알맞았다 백 년에 이백 여 리씩 녹으며 후진하는 빙하가 남긴 영토를 따라 우리는 북쪽으로 올라갔다 야크와 순록과 여우가 먼저 올라갔고 늑대의 발자국을 따라 우리가 그 뒤를 따랐다

빙하기로부터 시작한 내 어린 날의 결빙이 언제 풀어질지 그때는 짐작할 수 없었다 월세 이천 원짜리 쪽방에 기거하는 동안 연탄불이 자주 꺼졌다 손도끼로 침엽수 도막을 잘게 부수어 십구공탄에 불을 붙이는 동안 삶은 매캐했고 문짝도 없는 부엌에서부터 일찍 어두워졌다 내가 눕는 윗목에는 그릇의 물이 바로바로 얼었고 내 몸도 밤새 달그락거렸다

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늘 그렇듯 나는 말이 없었고 한 마을에 사는 친구와도 졸업 때까지 두세 마디 짧은 말밖에 주고받지 않았다 말을 할 때도 눈을 내리깔거나 시선을 피하는 것은 영하의 숲에 사는 이들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추위는 사람을 느리지만 끈질기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흑야는 길었고 일찍 진 해는 늦게 떠올랐다 수렵을 그만둔 아버지도 정착할 곳을 정하지 못한 나도 각각 우울하였다 보드카는 추위를 이기기에 좋았다 고독한 늑대 한 마리 멀리서 측은하게 나를 바라볼 때도 있었다 그때 고독한 것들에게 보낸 자작나무 엽서는 어느 숲과 바람 속을 떠돌고 있을까 생각하는 저녁이면 어둠과 칼바람이 친구처럼 찾아와 오래 곁에 머물곤 했다

-졸시 <빙하기> 전문 

아버지는 도시락 대신 소주병 하나를 싸들고 일을 나가셨고, 정착할 곳을 찾아 추운 땅으로 옮겨 다니는 우리의 겨울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저는 자주 우울하였습니다. 그러나 빙하기를 사는 동안 추위는 사람을 끈질기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겨울방학 때는 저도 아버지처럼 노동을 했습니다. 담배재건조장에 나가 담배가마니를 지어 나르는 동안 하루에 장갑 한 개가 다 닳아 없어지곤 했습니다. 십오 명이 한 조가 되어 30톤 정도를 지어 나르면 일당 육칠백 원을 벌었습니다. 담배가마니를 까마득하게 실은 리어카를 끌고 커브를 돌다가 무게를 이기지 못해 허공에 붕 뜬 채 리어카 체대에 스무 살 청춘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세상이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위선과 가식과 기만과 차별에 구역질 날 때도 많았습니다. 시시포스처럼 절망적인 노동을 끝없이 되풀이해야 하는 형벌을 받은 우리의 생이 미웠습니다. “계란과 같이 자체로서 충만해 있으며 산맥과 같이 변화가 없고 정말 자기가 생각하고 선택한 대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고 남들로 해서 마네킹처럼 허깨비처럼 움직이고 있을 뿐인 자기 기만의 세계, 부정이나 시간성이 없고 가능하지도 않고 필연적도 아니며 설명할 수도 없고, 근거도 없으며 우연적이고 부조리하며 아둔하고 불투명한 세계” 그런 세계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런 세상을 향한 불만을 쏟아놓을 수 있는 통로, 세상을 향한 야유 그리고 반항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었습니다. 이런 불만을 해결해 보려는 노력을 사르트르는 ‘자유’라고 불렀습니다. 사르트르의 자유는 의식과 동의어라고 했습니다. 의식은 지각한다는 것으로 혼돈스러운 사물들 사이에서 하나의 형태를 잘라내고 거기에 어떤 의미를 준다는 것입니다. 어렵기 그지없는 사르트르의 철학과 소설 <구토>를 읽거나 사르트르에 관련된 자료를 공책에 옮겨 적으며 저는 “불만이 있다는 것은 어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내포하며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자유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데,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 되어야 할 존재, 제 스스로 제 자신을 만들어 나가야 할 존재이다”라는 데 밑줄을 그었습니다. “인간에겐 자유가 있고 자기의 인생을 선택할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 인간에겐 이미 주어진 어떤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은 자기의 인생을 자기가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라는 말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헤르만 헤세는 “인간은 누구나 자연의 단 한번의 귀중한 실험이다. 모든 인간의 생애는 자기 자신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길이다. 그것은 크고 넓은 길을 찾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고, 작고 좁은 오솔길의 암시이기도 하다. 어떠한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된 적은 없다. 그러나 누구나 다 자기 자신이 되려고 애를 쓰고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을 헤세는 알이라고 하는 세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새에 견주어 이야기합니다. 그 새는 신 곁으로 날아가는데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라고 했습니다. 아프락사스는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의 결합, 환희와 전율의 병존, 가장 신성한 것과 가장 추악한 것의 뒤섞임, 티 없는 순결성 속에 남아 있는 죄의 냄새 그것들이 결합한 이름이라는 데 우리들의 눈은 멈추어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스무 살을 넘긴 지 몇 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고독과 불만과 구토를 창조와 자유와 파괴로 옮길 수 있는 길이 문학이라는 걸 우리는 직감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미운오리새끼’라는 문학모임을 만든 것은 대학 3학년 봄이었습니다. 이런 날것 그대로의 이름 속에는 서툴고 미숙하고 반항적인 우리들의 모습에 대한 시니컬한 해석이 들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눈총 받고 손가락질받으며 사는 존재, 아무도 눈여겨보아주지 않는 존재라는 의미와 ‘새끼’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자조와 경멸의 언어, 불온한 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쪽에는 언젠가 백조가 되어 푸른 하늘을 날게 될 것이라는 상승의지도 잠재되어 있는 이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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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돌잔치도 있고 천안 고향에 볼 일도 있고 해서 오랜만에 혼자 전철로 이동을 했다. 전철 안에서의 독서는 참으로 좋다. 전철안에서 본 토요일자 한겨레 신문 기사를 몇개 옳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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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 8.7  이토록 병리적인 열정

이것은 이상한 이야기다. 루소는 그의 <고백록>과 그 속편인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젊은 날 저지른 죄 하나를 반복해서 고백하는데 내용은 이렇다. 그는 17살 되던 해인 1728년에 이탈리아 토리노의 어느 귀족 저택에서 집사로 일한 적이 있다. 어느날 그는 리본을 하나 훔쳤는데, 그 사소한 절도가 발각되자 그는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녀 마리옹이 자신을 유혹하기 위해 그 리본을 주었다는 식으로 상황을 날조한다. 그런데 훗날 루소의 고백이 묘하다. “내가 원한 일을 그녀가 했다고 고발한 것이었다. 그녀가 리본을 주었다고 한 것 말이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리본을 주려는 것이 원래 내 의도였기 때문이다.”  

이언 매큐언의 뛰어난 소설 <속죄>에서도 유사하게 이상한 거짓말이 나온다. 상상력이 풍부해 장차 작가가 되기를 꿈꾸는 13살 소녀 브리오니에게는 대학생 언니 세실리아가 있다. 방학을 맞아 낙향한 세실리아는 마찬가지 이유로 낙향한 고향 친구 로비와 연인 관계로 발전하려는 중이다. 그런데 문제는 브리오니가 언니의 연인인 로비를 사랑한다는 것. 미묘한 긴장이 흐르던 그 무렵의 어느날 밤에 브리오니의 사촌 롤라가 괴한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브리오니는 특유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어처구니없게도 로비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수십년에 걸친 비극의 시작치고는 너무 즉흥적이다.

하나는 실화고 다른 하나는 픽션이다. 그러나 스스로도 이해 못할 행위를 하고 평생 속죄 의식을 치르는 인물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둘은 닮았다. 루소는 <고백록>을 써서 앞부분에 그 이야기부터 먼저 털어놓아야 했고, 브리오니는 자신 때문에 불행에 빠진 연인들을 소설 속에서나마 구원하기 위해 생을 바쳐 한 편의 소설을 써야 했다. 정신적으로 미숙한 나이에 저지른 그 행위는 어떤 면에서 이상한가?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죄가 없을 뿐 아니라 내가 호감을 갖고 있었고 심지어 사랑하기까지 한 사람을 음해하고 무고했다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이 사례들은 때로 어떤 음해와 무고의 이면에는 대상에 대한 병리적인 열정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나는 정신의학자가 아니어서 그 원인과 증상에 대해 확신을 갖고 논변할 처지가 못 된다. 다만 오늘날 이와 유사한 종류의 병리적인 열정에 가장 손쉬운 타깃이 있다면 그것은 연예인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예컨대 최근에 가수 정지훈씨가 영화배우 전지현씨와 연인 관계임을 ‘특종’ 보도하면서, 그 폭로가 마치 공익을 위한 공헌이라도 되는 양 의기양양해하던 어느 기자를 보고 나는 경악했다. 끔찍한 것은 그 일이 그저 스토킹에 가까운 사생활 침해일 뿐이라는 당연한 사실이 아니라 기자의 그 집요한 열정이었다.

말하자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최근 ‘학력위조’ 혐의가 있다며 그룹 ‘에픽하이’의 멤버 타블로(이선웅)씨를 추궁하고 있는 소수 누리꾼들의 열정은 유례가 없어 보일 정도로 뜨겁다. 해당 학교 부학장의 공식 확인조차 의심스럽다고 매도되는 형편이다. 이쯤 되면 이것은 사실 확인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병리학의 문제다. 설사 그들의 주장이 모두 사실로 드러나 타블로씨의 삶 전체가 거짓임이 밝혀진다 하더라도 이 열정은 여전히 병리적이다. 공익에 직결되는 더 많은 의혹들 중에서 왜 하필 이 사안이 이토록 뜨거워야만 했는가 하는 문제는 고스란히 남을 것이고, 그 은밀한 해답은 타블로에게 있다기보다 다른 쪽 편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ps : 궁금해서 찾아봤다.  

병리 病理 : 병의 원인, 발생, 경과 따위에 관한 이론.
병리학 病理-學 : 병이나 기형(畸形)의 형태나 기능을 조사하여 그 성립 원리와 본질을 연구하는 학문. 의학의 한 분야로, 병리 해부학·병리 화학·비교 병리학·실험 병리학·병리 생리학 따위가 있다.
기후병리학 氣候⌒病理學 : 질병을 자연환경과 관련하여 연구하는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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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한겨레신문 기사를 스크랩해 놓는다. 서울의 과밀한 인구밀도에 관한 기사이다. 강원도의 190배라고 하니 남한 전체의 산술적인 인구밀도도 문제지만 서울의 과밀화는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이다. 뭐 나도 거기에 한 몫하고 있으니... 

찾아보니 작년에도 비슷한 기사가 있어, 같이 스크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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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8.5  서울 인구밀도 ‘강원의 190배’  

1㎢당 1만6586명…부산 11년째 감소세 
 

» 국내 인구밀도 현황 
 
수도인 서울로 인구가 몰리는 현상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서울의 인구 밀도는 강원도의 190배에 이르고, 제2도시인 부산도 해마다 인구 밀도가 줄고 있다.
5일 통계청이 국토해양부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한 ‘지역별 인구 및 인구 밀도 자료’를 보면, 올해 서울의 인구 밀도는 1㎢당 1만6586명으로 전국 시도 가운데 가장 높은 것으로 추정됐다. 이어 부산(4497명)과 광주(2893명), 대전(2806명), 대구(2750명), 인천(2591명) 등의 차례였다. 서울의 면적은 전체 국토의 0.6%에 불과하지만,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5분의 1가량인 1003만9000여명이 몰려 있다.

서울의 인구 밀도는 2007년 1㎢당 1만6565명, 2008년 1만6574명, 2009년엔 1만6582명 등으로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서울과 인천, 경기를 합해 수도권 전체로 추계한 인구 밀도는 1㎢당 무려 2068명에 이른다.

가장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은 강원으로 1㎢당 87명에 그쳤다. 이는 서울 인구 밀도의 190분의 1에 불과한 수준이다. 경북(136명)과 전남(142명), 충북(199명)도 1㎢당 인구 밀도가 200명을 밑돌았다. 정부 관계자는 “외환위기를 거친 2000년 이후 서울 및 수도권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면서 서울에 인구 밀집 현상이 가속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심지어 우리나라 제2의 도시인 부산조차 2000년 이후엔 인구 밀도가 낮아지고 있다. 2004년 1㎢당 4742명이었던 부산의 인구 밀도는 올해 4497명으로 떨어졌다. 

 

한겨레신문 2009.12.14  서울 인구밀도 뉴욕 8배·도쿄 3배  

OECD중 최악…“과밀해소 필요”

서울의 인구밀도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선진국 대도시들 가운데 가장 높아 균형발전 정책을 통한 지방으로의 인구분산이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의 인구밀도는 오이시디 국가 대도시들의 2배에서 10배에 이르는 초고밀도였으며, 서울과 인구밀도가 비슷한 도시들은 대부분 한국보다 훨씬 소득이 낮은 개발도상국의 도시들이었다.  

 


14일 <한겨레>가 국토연구원의 인터넷사이트인 ‘세계도시정보’(ubin.krihs.re.kr)의 통계를 분석해 보니, 인천·수원 등을 포함한 서울권역의 인구밀도는 1㎢당 1만6700명으로 30개 오이시디 국가의 제1도시들 가운데 1위에 올랐다. 서울시만으로 계산하면 1만7219명으로 인구밀도는 더 높아졌다. 이는 2위에 오른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8400명)의 2배이며, 인구밀도가 가장 낮은 룩셈부르크의 10배가 넘는 수준이다.

서울의 인구밀도는 오이시디 국가의 제1도시 가운데 미국 뉴욕(2050명)과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2100명)의 8배, 이탈리아 로마(2950명)의 5배, 프랑스 파리(3550명)와 독일 베를린(3750명)의 4배, 일본 도쿄·요코하마(4750명)와 영국 런던(5100명)의 3배에 이르는 것이다.

인구가 500만명 이상인 거대도시 43곳 가운데서도 서울의 인구밀도는 7위였다. 서울보다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는 방글라데시 다카(13만2550명), 인도의 뭄바이(2만9650명)와 콜카타(2만3900명), 파키스탄 카라치(1만8900명), 나이지리아 라고스(1만8150명), 중국 선전(1만7150명) 등 개발도상국의 도시들이었다. 서울 다음은 대만의 타이베이(1만5200명)와 인도 첸나이(1만4350명), 콜롬비아 보고타(1만3500명) 등이었다. 500만명 이상의 도시 43곳 가운데 오이시디 국가의 도시는 12곳이었는데, 인구밀도 상위 20위 안에는 서울 하나였다. 30위권 안에도 서울(7위)과 멕시코시티(24위), 터키 이스탄불(27위), 일본의 오사카·고베·교토(30위) 등 4곳만 포함돼 있었다. 나머지는 모두 30위권 밖이었다. 

 

한겨레신문 2009.12.14  부산 인구밀도 높아봤자 서울의 3분의1도 안된다 

서울 ㎢당 17219명…부산 4722명
울산시 인구밀도보다 16.3배나 커 
 
 
소설가 이호철이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소설을 <동아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한 것은 1966년 2월의 일이다. 지난 8월 서울시가 발간한 ‘서울통계연보’를 보면, 당시 이 소설가가 ‘만원’이라고 선언한 서울의 인구는 고작(?) 379만3천명에 불과했다. 이는 지금 부산의 인구보다 20만명이 많은 수준이었다. 40여년이 흐른 지금, 서울의 인구는 1045만명을 넘어섰다. 평균적으로 따져 10년마다 광주 인구보다 23만명이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든 셈이다.
통계청의 ‘인구밀도’ 자료를 보면, 2007년 기준 서울의 인구밀도는 1만7219명으로 조사됐다. 이는 부산, 대구, 인천 등 전국 6대 도시의 4배~17배에 이르는 규모다. 서울 다음으로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인 부산은 4722명으로 서울의 1/3에도 미치지 못했다. 대구와 광주는 각각 2842명과 2840명으로 서로 비슷한 수준이었고, 그 다음은 대전 2757명, 인천 2690명, 울산 1052명 순서였다.

서울의 과밀화는 서울을 넘어 경기·인천의 추가적 인구집중을 불렀다. 대통령 직속 기구인 지역발전위원회가 ‘2008 이명박 정부 지역발전정책 연차보고서’에서 통계청 자료를 인용해 밝힌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인구비중 추계’를 보면, 1960년 전체 인구의 20.8%에 불과했던 수도권의 인구는 2005년 48.2%로 꾸준히 상승했다. 반면, 비수도권의 인구는 1960년 79.2%에서 2005년 51.8%로 떨어졌다.

이에 따른 사회적 비용은 한 해 30조원에 이른다. 한국교통연구원이 지난해 공개한 ‘전국 교통혼잡 비용 산출과 추이 분석’ 자료를 보면 2007년 서울의 교통혼잡 비용은 7조320억원이었고, 인천, 수원을 합한 교통혼잡 비용은 무려 14조5천억원에 이르렀다. 전국 교통혼잡 비용이 25조6480억원임을 감안하면, 수도권 세 도시의 교통혼잡 비용은 전체의 57%에 이르는 것이다. 또 수도권은 교통혼잡 비용 외에 매년 대기오염 개선에 10조원, 환경개선에 4조원이라는 과밀 비용도 지불하고 있다. 변창흠 세종대 교수(행정학)는 “수도권 과밀화에 따른 불균형한 국토 이용을 개선하고, 수도권과 지방이 고루 잘 살기 위해서는 행정도시와 혁신도시가 주축이 되는 국가 균형발전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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