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등불, 사상의 은사. 그를 부르는 말들이다. 요즘 들어 흔히 말하는 시대의 '어른'들이 많이 돌아가셨다. 누구한테는 그렇지 않겠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예전에 사 놓았던 대담집 생각이 났다. 아직 읽지도 않았는데, 언젠가는 직접 사인을 받고 싶었는데 영영 그럴수 없게 됐다.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돌아가신분을 느껴봐야 겠다.
기사는 오마이뉴스의 리영희 선생의 죽음에 관한 각각 다른 신문의 태도를 보여주는 기사이다. 뭐 당영한거지만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다. 기사를 스크랩해 놓는다.
오마이뉴스 2010.12.7 조중동, 리영희 선생 부고를 다르게 썼구나
[주장] 부고기사에 드러난 <조선일보>의 이중성
<중앙>, '색깔' 멀리하고 지식인의 삶 부각
▲ 6일자 중앙일보
ⓒ 중앙일보 PDF 리영희
한 면을 모두 털어 전날 타계한 리영희 선생을 자세히 소개했다.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듯하다"는 한명숙 전 총리 반응까지 함께 전했다. '조중동'이란 표현에서 <중앙일보>를 빼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6일자 <중앙>이 그러했다.
'양(量)'보다는 '질(質)'에서 더욱 돋보였다. 그 제목부터 '이 땅의 메마른 사상 지평 넓힌 전환시대의 지식인'이었다. "<전환시대의 논리> 저자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별세했다"는 <조선>이나 <동아>와는 확실히 격이 다른 제목이었다.
그 내용에서도 <중앙>은 '색깔'을 멀리했다. 그보다는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부각하는 데 주력했다. 처음부터 "민주화운동사에서 이름 석 자로 통하는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라고 했으며 "기자·교수·사회운동가 등 여러 직함이 있지만 '지식인'이란 호칭이 어울리는 삶을 살았다"고 '못 박았다'.
"약한 펜으로 군사 독재의 '강한 벽'을 허무는데 앞장섰다"고 했는가 하면, "냉전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우상에 대한 이성적 해체를 시도했다"고, "우상 파괴자를 자임했다"고도 소개했다. 고인에 대한 평가에서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려고 한 점도 돋보였다.
"대한민국을 부정했다고 보는 이들은 그를 사회주의 옹호자로 몰아세운 반면, 그를 변호하는 이들은 대한민국을 건강하게 만든 계몽주의자로 자리매김했다"고 표현했다. 특히 사회주의 진영 붕괴 당시 '변절' 논란의 중심에 섰던 선생의 행적을 평가하는 다음 대목이 마음에 와 닿았다.
"보수 진영에선 운동권 대부의 '전향'으로, 진보 진영에선 '변절'로 몰아갔다. 양측 모두 자신의 정파적 이념 투쟁에 그를 활용할 뿐, 그가 보여준 지식인의 '지적 성실성'에 대해선 별다른 주목을 하지 않았다."
<동아>, 부고 기사 색깔은 다소 진했지만 그래도...
▲ '다만' 인내는 거기까지였다. 부고기사가 실린 같은 날, 6일자 '횡설수설'란을 통해 이정훈 논설위원은 '종북 세력인 리영희 키즈'등 표현을 써가며 '색깔 본색'을 드러냈다
ⓒ 동아일보 PDF 리영희
이와 비교하면 <동아일보> 부고기사 '색깔'은 다소 진했다. "좌파 진영의 대표적인 사상가"란 표현부터 일단 눈에 띈다. "2000년 뇌중풍(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저술 활동은 자제했지만 사회 참여와 진보적 발언으로 여전히 좌파 진영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는 대목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래도 <동아> 역시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소개하는데 지면을 할애했다. 기사 첫 문장에서 고인을 "진보적 사상가이자 언론학자"라고 했으며, "해직과 투옥을 반복하면서도 소신 있는 권력 비판과 사회 비평으로 일관했던 고인"이란 설명과 함께 '사상의 은사'라는 <르 몽드> 표현도 함께 전했다.
그런데 <중앙>과 <동아>, 위 두 기사에 공통으로 나타나지 않는 '팩트'가 있다. 선생이 잠시 <조선일보>에 몸을 담았던 약력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선생이 겪었던 필화를 대표하는 사례 중 하나로 꼽히는 사례가 바로 <조선일보> 시절의 그것이었는데도 말이다.
선생은 1964년 <합동통신>에서 <조선> 정치부로 옮긴 지 얼마 안 돼,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제안 준비'란 기사를 썼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다. 이 필화를 두 신문 모두 전하면서도 <조선일보>란 매체 이름만 쏙 빼놓고 있다. 경쟁 매체가 부각되는 효과를 차단하기 위한 것일까?
<조선>, 사실관계 틀리고 '지식인'이란 표현 하나 없어
▲ 6일자 조선일보
ⓒ 조선일보 PDF 리영희
그렇다면 세 신문 중 '당사자'라 할 수 있는 <조선>은 어떻게 전하고 있을까. 최소한의, 아니 '당사자'로서 기본적인 사실관계부터 잘못 전달하고 있다.
<조선>은 선생이 "1965∼1971년 조선일보와 합동통신 외신부장을 지냈다"고 전했다. 두루뭉술하고 이조차 틀린 것이다. 선생이 <합동통신>에서 <조선> 정치부로 옮긴 것이 1964년이고, <조선>을 떠나 다시 <합동통신>으로 돌아간 것이 1968년 7월이다.
선생의 '유엔 필화 기사'가 실린 것이 1964년 11월 21일 자 <조선>이었으니, 일종의 '자기 부정'이 돼버리는 셈이다. 물론 실수일 수 있다. 허나 한사코 선생에게 '지식인'이란 표현 하나 쓰지 않는 것은 다분히 고의적으로 보인다.
<중앙>이나 아니 적어도 <동아>와 같은, 고인을 지칭하는 그 어떤 수식어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다 못해 <연합>등 거의 모든 매체에서 쓴 '사상의 은사'란 표현도 찾아볼 수 없다. 그야말로 '무색무취'다. 그저 '드라이(dry)'하게 쓴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 'UN 필화‘로 신문 압수 소식 등을 전하고 있는 1964년 11월 21일자 조선일보
ⓒ 조선일보 PDF 리영희
그렇게만 보기 어렵다. 2004년 <조선>이 발행한 <조선일보 사람들>은 '조선일보를 거쳐간 사람들'에 대한 '그들' 스스로의 평가가 가장 잘 담겨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조선>은 선생의 지식인적인 풍모를 다양하게, 또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일단 유별나게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는 평가가 눈에 띈다. "반공 이데올로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북괴'라는 말 대신 '북한'이라고 쓰자고 주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대담한 주장이었다"는 평가가 이어진다. 결코 '친북'이나 '종북'이란 표현은 쓰지 않는다.
또 "지면도 좁은데 왜 정치기사만 1면 머리에 가느냐? 국제 관계 기사나 사회부 기사도 그 자리에 갈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주장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일하는 외신부장이었다고 했고, '티티(텔레타이프라이터)'가 토해 놓는 기사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정보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고도 표현했다.
"정부 자료실을 뒤지며 북한과 공산권 관계 자료를 찾고, 각국 대사관을 다니며 중국의 신화통신 등 서방의 통신사와는 다른 시각에서 나온 정보도 섭렵했다. 외국 책과 잡지도 많이 읽었다. 그 당시 외신부원들은 부장이 영어와 일어로 된 책을 한 아름 사 들고 들어오는 장면을 종종 목격했다."
선생의 부고기사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생생한 '경험담'이다. '당사자'로서 그들 스스로 기록한 지식인으로서 리영희 선생의 면모다. 비록 생각이 다른 사람이었지만, 고인에게 '지식인'이란 표현이 아깝지 않음을, 적어도 <중앙>이나 <동아>보다는 잘 알고 있을 거란 뜻이다.
선명한 이중성, <조선일보>은 어떤 신문인가
▲ <조선> 시절 리영희 선생
ⓒ <조선일보 사람들> 리영희
그럼에도 <조선> 부고기사는 '인색했다'. '지식인'이란 표현 하나도 아깝다는 투로 일관했다. <중앙>만큼은 아니더라도 <동아>정도의 수식어조차 선생에게 선사하지 않았다. 게다가 자사와 직결된 기본 사실조차 틀리는 '무성의'도 함께 선보였다. 왜?
<동아>처럼 좌파 색깔을 입히기에는 선생의 <조선> 이력이 부담스러웠을 게다. 그렇다고 <중앙>처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랬다가는 수많은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칠 것이 뻔하니까. '어제'와 '오늘' 사이에서 <조선일보>의 이중성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우익신문이라면 <동아>처럼 썼어야 한다. 보수신문이라면 <중앙>처럼 자유주의의 미덕을 보여줬어야 한다. 그러니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조선>은 무슨 신문인가? 적어도 보수지는 아니다. 리영희 선생 부고기사를 통해 드러나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