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2010.12.4 속 사진

옛 동네가 생각난다. 내가 태어난 곳, 유소년기를 보내던 곳. 충청남도 천안시 구룡동. 동네 이름 '욕골' 희한한 이름이었다. 이름의 뜻은 모른다. 어릴적 친구들끼리 사람들이 '욕'을 잘해서, 혹은 '욕' 잘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럴꺼야 하며 애기했던 기억이 날뿐.  

사진처럼 동네에 있는 친구 집 처마밑에 앉아 햇빛 좋은 날 친구들이랑 놀았던 기억. 아련하다. 흙으로 지은 집에 시멘트로 외벽을 칠해 그 시멘트가 시간의 흐름에 의해 덕지덕지 떨어지던 그 벽에 기대어 앉아 놀던 기억. 때론 구슬치기를 때론 말뚝박기를. 그 때는 게임기, 놀이기구 없이도 맨손으로 때론 산에서 꺽은 나무 막대기로 잘도 놀았다. 

하지만 내 유소년기의 기억은 이런 동네 친구들과의 재미난 것만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좋지 않은 기억이 더 많은 편이다. 그래서 저 사진을 본 순간 좋은 기억보단 않 좋은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러나 나에겐 그런 '고향'이, '옛 동네'가 사라졌다. 이사를 한 후 매번 제사때마다 가긴 했다. 그때는 몰랐으나 얼마 전에 가보니 동네가 싹 없어졌다. 내가 살던 집터는 없어져 큰 유치원이 생겼고, 놀던 야산은 골프연습장이 생겼다. 근데, 동네 어귀에 있던 등나무는 아직 남아있었다. 근데 그 나무가 너무 작아 보였다. 정말 작아 보였다. 어릴적 동네 친구들이랑 그 나무에 모여 많이도 놀았는데, 그렇게 커보였던 나무가 지금 나에게 정말 작게 느껴졌다.

나이를 먹으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다. "이게 이렇게 작았나?" 나이먹음의 증거겠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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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진보라고 하는 이들은 조금은 더 고민하고 조금 더 독서하고 사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레토릭'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또한 그들의 허황된 '레토릭'에 반박을 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논리를 알아야 하지 않을까? 

목차는 이렇다. 

추천사│허무주의는 우리의 적이다 _ 우석훈
서문│그들에게 매혹당하지 않기 위하여

1장. 시간을 거꾸로 돌리려 했던 사람들 _ 지난 200년을 지배해온 반동 레토릭
역사적인 반동의 움직임과 세 가지 반동 명제
‘반동’이라는 말에 대하여

2장.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_ 역효과 명제
프랑스혁명과 역효과 명제의 등장
보통선거권, 정치학의 마지막 단어
빈민구제법과‘가난 창조’효과
‘의도하지 않은 결과’

3장. “그래 봐야 기존의 체제가 바뀌지 않을 것이다”_ 무용 명제
토크빌의 의문 : 프랑스혁명이 도대체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모스카와 파레토의 의문 : 보통선거권으로 과연 세상이 달라졌는가
복지국가는 ‘약속한 것’을 얼마나 가져다 줄 수 있는가
정말 쓸 데 없는 정책인가?

4장. “그렇게 하면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위태로워질 것이다”_ 위험 명제
민주주의는 자유를 위협할 것이다
복지국가는 자유와 민주주의 모두를 위협할 것이다
위험 명제에 대한 고찰

5장. 세 명제의 불편한 동거
수사학적 공격에 대한 명백한 증거
가장 영향력 있는 명제
양립 불가능한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논리는 어떻게 충돌하는가

6장. 보수에게서 배우는 진보 레토릭
행동하지 않는 것이 더 위험하다
역사는 우리 편
역효과 명제에 대한 대응 명제들

7장. 어떻게 새로워질 것인가
주장의 전환
민주주의에서 논쟁하지 ‘않는’ 법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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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등불, 사상의 은사. 그를 부르는 말들이다. 요즘 들어 흔히 말하는 시대의 '어른'들이 많이 돌아가셨다. 누구한테는 그렇지 않겠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예전에 사 놓았던 대담집 생각이 났다. 아직 읽지도 않았는데, 언젠가는 직접 사인을 받고 싶었는데 영영 그럴수 없게 됐다.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돌아가신분을 느껴봐야 겠다. 

기사는 오마이뉴스의 리영희 선생의 죽음에 관한 각각 다른 신문의 태도를 보여주는 기사이다. 뭐 당영한거지만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다. 기사를 스크랩해 놓는다.

오마이뉴스 2010.12.7  조중동, 리영희 선생 부고를 다르게 썼구나  

[주장] 부고기사에 드러난 <조선일보>의 이중성  

<중앙>, '색깔' 멀리하고 지식인의 삶 부각 
 
  
▲ 6일자 중앙일보 
ⓒ 중앙일보 PDF  리영희 

한 면을 모두 털어 전날 타계한 리영희 선생을 자세히 소개했다.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듯하다"는 한명숙 전 총리 반응까지 함께 전했다. '조중동'이란 표현에서 <중앙일보>를 빼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6일자 <중앙>이 그러했다.

'양(量)'보다는 '질(質)'에서 더욱 돋보였다. 그 제목부터 '이 땅의 메마른 사상 지평 넓힌 전환시대의 지식인'이었다. "<전환시대의 논리> 저자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별세했다"는 <조선>이나 <동아>와는 확실히 격이 다른 제목이었다.

그 내용에서도 <중앙>은 '색깔'을 멀리했다. 그보다는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부각하는 데 주력했다. 처음부터 "민주화운동사에서 이름 석 자로 통하는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라고 했으며 "기자·교수·사회운동가 등 여러 직함이 있지만 '지식인'이란 호칭이 어울리는 삶을 살았다"고 '못 박았다'.

"약한 펜으로 군사 독재의 '강한 벽'을 허무는데 앞장섰다"고 했는가 하면, "냉전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우상에 대한 이성적 해체를 시도했다"고, "우상 파괴자를 자임했다"고도 소개했다. 고인에 대한 평가에서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려고 한 점도 돋보였다.

"대한민국을 부정했다고 보는 이들은 그를 사회주의 옹호자로 몰아세운 반면, 그를 변호하는 이들은 대한민국을 건강하게 만든 계몽주의자로 자리매김했다"고 표현했다. 특히 사회주의 진영 붕괴 당시 '변절' 논란의 중심에 섰던 선생의 행적을 평가하는 다음 대목이 마음에 와 닿았다.

"보수 진영에선 운동권 대부의 '전향'으로, 진보 진영에선 '변절'로 몰아갔다. 양측 모두 자신의 정파적 이념 투쟁에 그를 활용할 뿐, 그가 보여준 지식인의 '지적 성실성'에 대해선 별다른 주목을 하지 않았다." 


<동아>, 부고 기사 색깔은 다소 진했지만 그래도...
 
  
▲ '다만' 인내는 거기까지였다. 부고기사가 실린 같은 날, 6일자 '횡설수설'란을 통해 이정훈 논설위원은 '종북 세력인 리영희 키즈'등 표현을 써가며 '색깔 본색'을 드러냈다 
ⓒ 동아일보 PDF  리영희 

이와 비교하면 <동아일보> 부고기사 '색깔'은 다소 진했다. "좌파 진영의 대표적인 사상가"란 표현부터 일단 눈에 띈다. "2000년 뇌중풍(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저술 활동은 자제했지만 사회 참여와 진보적 발언으로 여전히 좌파 진영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는 대목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래도 <동아> 역시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소개하는데 지면을 할애했다. 기사 첫 문장에서 고인을 "진보적 사상가이자 언론학자"라고 했으며, "해직과 투옥을 반복하면서도 소신 있는 권력 비판과 사회 비평으로 일관했던 고인"이란 설명과 함께 '사상의 은사'라는 <르 몽드> 표현도 함께 전했다.
 
그런데 <중앙>과 <동아>, 위 두 기사에 공통으로 나타나지 않는 '팩트'가 있다. 선생이 잠시 <조선일보>에 몸을 담았던 약력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선생이 겪었던 필화를 대표하는 사례 중 하나로 꼽히는 사례가 바로 <조선일보> 시절의 그것이었는데도 말이다.

선생은 1964년 <합동통신>에서 <조선> 정치부로 옮긴 지 얼마 안 돼,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제안 준비'란 기사를 썼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다. 이 필화를 두 신문 모두 전하면서도 <조선일보>란 매체 이름만 쏙 빼놓고 있다. 경쟁 매체가 부각되는 효과를 차단하기 위한 것일까? 

<조선>, 사실관계 틀리고 '지식인'이란 표현 하나 없어
 
  
▲ 6일자 조선일보 
ⓒ 조선일보 PDF  리영희 

그렇다면 세 신문 중 '당사자'라 할 수 있는 <조선>은 어떻게 전하고 있을까. 최소한의, 아니 '당사자'로서 기본적인 사실관계부터 잘못 전달하고 있다.

<조선>은 선생이 "1965∼1971년 조선일보와 합동통신 외신부장을 지냈다"고 전했다. 두루뭉술하고 이조차 틀린 것이다. 선생이 <합동통신>에서 <조선> 정치부로 옮긴 것이 1964년이고, <조선>을 떠나 다시 <합동통신>으로 돌아간 것이 1968년 7월이다.

선생의 '유엔 필화 기사'가 실린 것이 1964년 11월 21일 자 <조선>이었으니, 일종의 '자기 부정'이 돼버리는 셈이다. 물론 실수일 수 있다. 허나 한사코 선생에게 '지식인'이란 표현 하나 쓰지 않는 것은 다분히 고의적으로 보인다. 

<중앙>이나 아니 적어도 <동아>와 같은, 고인을 지칭하는 그 어떤 수식어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다 못해 <연합>등 거의 모든 매체에서 쓴 '사상의 은사'란 표현도 찾아볼 수 없다. 그야말로 '무색무취'다. 그저 '드라이(dry)'하게 쓴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 'UN 필화‘로 신문 압수 소식 등을 전하고 있는 1964년 11월 21일자 조선일보 
ⓒ 조선일보 PDF  리영희 

그렇게만 보기 어렵다. 2004년 <조선>이 발행한 <조선일보 사람들>은 '조선일보를 거쳐간 사람들'에 대한 '그들' 스스로의 평가가 가장 잘 담겨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조선>은 선생의 지식인적인 풍모를 다양하게, 또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일단 유별나게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는 평가가 눈에 띈다. "반공 이데올로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북괴'라는 말 대신 '북한'이라고 쓰자고 주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대담한 주장이었다"는 평가가 이어진다. 결코 '친북'이나 '종북'이란 표현은 쓰지 않는다.

또 "지면도 좁은데 왜 정치기사만 1면 머리에 가느냐? 국제 관계 기사나 사회부 기사도 그 자리에 갈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주장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일하는 외신부장이었다고 했고, '티티(텔레타이프라이터)'가 토해 놓는 기사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정보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고도 표현했다.

"정부 자료실을 뒤지며 북한과 공산권 관계 자료를 찾고, 각국 대사관을 다니며 중국의 신화통신 등 서방의 통신사와는 다른 시각에서 나온 정보도 섭렵했다. 외국 책과 잡지도 많이 읽었다. 그 당시 외신부원들은 부장이 영어와 일어로 된 책을 한 아름 사 들고 들어오는 장면을 종종 목격했다."

선생의 부고기사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생생한 '경험담'이다. '당사자'로서 그들 스스로 기록한 지식인으로서 리영희 선생의 면모다. 비록 생각이 다른 사람이었지만, 고인에게 '지식인'이란 표현이 아깝지 않음을, 적어도 <중앙>이나 <동아>보다는 잘 알고 있을 거란 뜻이다.

선명한 이중성, <조선일보>은 어떤 신문인가
 
  
▲ <조선> 시절 리영희 선생 
ⓒ <조선일보 사람들>  리영희 

그럼에도 <조선> 부고기사는 '인색했다'. '지식인'이란 표현 하나도 아깝다는 투로 일관했다. <중앙>만큼은 아니더라도 <동아>정도의 수식어조차 선생에게 선사하지 않았다. 게다가 자사와 직결된 기본 사실조차 틀리는 '무성의'도 함께 선보였다. 왜?

<동아>처럼 좌파 색깔을 입히기에는 선생의 <조선> 이력이 부담스러웠을 게다. 그렇다고 <중앙>처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랬다가는 수많은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칠 것이 뻔하니까. '어제'와 '오늘' 사이에서 <조선일보>의 이중성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우익신문이라면 <동아>처럼 썼어야 한다. 보수신문이라면 <중앙>처럼 자유주의의 미덕을 보여줬어야 한다. 그러니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조선>은 무슨 신문인가? 적어도 보수지는 아니다. 리영희 선생 부고기사를 통해 드러나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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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욕으로 좋을 듯 하다. 아이들에게 비판적 사고력을 키워주는 교재로써. 

목차를 보니 이렇다. 

1장 언어: 말에 숨겨진 진짜 뜻을 생각한다
이런 말들에 당신은 넘어간다
말과 글의 진실을 캐내는 20가지 논리 도구

2장 숫자: 숫자로 생각하되 함정을 조심한다
숫자 공포증을 치유하는 10가지 비법
숫자에 약한 사람들을 위한 확률과 통계 강의

3장 경험: 기억은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기억한다
내가 정말로 본 것은 무엇인가?
나는 내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비판적 사고에 약이 되는 6가지 심리학

4장 과학: 과학을 과학적으로 의심하고 성찰한다
당신의 지갑을 지켜내는 3가지 과학 실험법
과학을 과학답게 만드는 과학적 생각법

5장 미디어: 누구를 위한 보도인지 꼼꼼하게 따진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미디어는 우리를 어떻게 선동하는가?
미디어에 비판적으로 접근하기 위한 31가지 전략

나오는 글
옮긴이의 글
부록: 독립 매체
주석
참고문헌
찾아보기 

특히나 "3장 경험: 기억은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기억한다" 부분에 흥미가 간다. 나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인간들이 자기의 '기억'이 곧 '사실'인양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나 학교에서 아이들을 대하는 교사들의 태도에서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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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전공자도 아닌 처지에 평론집이 가당키나 하겠냐마는. 관심이 간다. 

한겨레신문 최재봉 문학기자의 소개 기사 글에 이런 글귀가 있다. "최일남의 산문을 읽는 일은 그의 고향 전주의 콩나물해장국을 모주 한잔 결들여 먹는 맛에 견줄 법하다. 읽는 이의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고 편안하게 달래 준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고 나서 다시 보면 세상은 그래도 살 만하다는 위안과 믿음을 곱씹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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