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교대에 근무하시는 박승규 교수님의 논문들 최근에 재미나게 읽고 있다. 지리학의 필요성, 중요성 그러나 정반대의 현실에서 지리학이 지리전공자들이 해야할 일들에 관한 원론적인 차원의 그렇지만 아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글들이다. 교수님의 박사학위 논문을 엮은 <일상의 지리학>도 같은 맥락의 글인 것 같다. 다시 한번 읽어봐야 겠다.

 

며칠 후에 박승규 교수님을 뵐 기회가 있는데, 책에 사인도 받아야 겠다. 아래 글은 읽은 논문의 밑줄 친 부분들이다.

 

 

 

인정,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쓰여지지 않은 공간을 발견하다

- 지리학이 인문학인 또 다른 이유 -

 

1. 서론

 

지리학을 인문학이라 했다. 지리학이 인간의 삶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학문이라 했다. ···· 지리학은 일상적인 사물이나 공간을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학문이라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가 한 번의 기획으로 완성될 수는 없다. 한 번의 기획으로 완성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리학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마련된 한 번의 기획으로 지리학의 학문적 존재이유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너무 많다. ····

 

인간은 공간 위에 거주한다. 그렇기에 인간 개개인의 공간은 자아의 연장이다. ····

 

내가 존재했던 공간의 소멸은 나에 대한 망각을 재촉한다. 망각은 나를 잊게 한다. ···· 나의 기억을 망각하게 강요하는 것은 신체에 가해지는 폭력은 아니다. 하지만, 훨씬 더 근본적으로 나를 부인하게 한다. ····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떤 공간을 소비한다. 그 공간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았을 때 개인의 정체성은 강화된다. ···· 인정받지 못하고, 망각의 대상이 되는 것은 두렵다. 그렇기에 인간은 개별자로든 집단으로든 자기 보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해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지속적인 인정투쟁을 벌인다.

 

   

헤겔은 인간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 보았다. ···· 헤겔과 호네트는 인간이 자신을 알아가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고유한 발전을 위해 권리를 쟁취하려는 투쟁의 문제이다. ···· 동일시와 같음이 우선시 되는 사회가 아니라, 차이와 다름이 존중되는 사회에서 인정은 더욱 빛을 발한다. ····

 

인정 투쟁의 문제가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해가는 것의 다른 표현이라 한다면 그것은 공간의 문제이다. 공간은 인간의 정체성을 표현해주고, 인간 존재의 깊이와 밀도를 표현해주는 또 다른 차원이기 때문이다. ···· 인간 삶의 과정에서 일상 공간의 생산과 소멸은 삶의 생성과 변화를 그대로 반영한다. ···· 인정 투쟁의 문제는 인간 존재가 생산하는 다양한 공간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노두인 셈이다.

 

      

 

지리학에서도 인정과 관련된 논의가 있다. 지리학에서 다루는 인정은 다문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한다.(위 대구대 최병두 교수의 책 참고) ···· 다문화 현상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현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공간과 장소의 문제이며, 사물의 문제라는 인식을 공유한다. 나아가 다문화 사회에서의 공간성을 강조하기 위해 다문화 사회라는 개념 대신에 ‘다문화 공간’을 제안한다. ···· 그렇기에 인정의 문제는 또 다른 측면에서 인간과 공간의 관계에 대한 또 다른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이같은 문제의식을 토대로 본 논문을 작성하였다. ···· 철학적 개념으로서 ‘인정’을 이용하여 인간과 공간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 인정은 인간의 근원적 욕구이고, 인간의 근원적 문제이기에 이것을 통해 지리학이 인간의 근원적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밝힌다. 이를 위해 헤겔의 인정 개념을 살펴보았다. ····

 

  

 

정작 헤겔의 인정 개념은 주체-객체의 인간관을 전제하고 있어 상호인정 과정에서 상대방을 타자화 시키는 약점을 보인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서로주체성의 이념에 근거하여 나와 너의 만남을 통해 형성되는 인정 개념을 제시하였다.(서로주체성의 개념은 위 전남대 김상봉 교수의 책을 참고)···· 인정 개념을 이용하여 관성적으로 인식하던 지리인식과 공간에 대한 사유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이러한 논의는 궁극적으로 지난번 대학수학능력시험 사회탐구 영역 선택과목 개편과정에서 나타났던 지리학의 학문적 위기를 상기하면서 지리학의 학문적 존재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2. 인정, 인간 존재를 설명하다: 사회적 존재론에서 인간학적 존재론으로

 

1) 헤겔의 인정,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규정하다

 

헤겔은 인간이 자연이나 다른 인간과 관계를 맺을 때 두 종류의 의식을 갖고 있다고 한다. ···· ‘대상의식’ ···· ‘자기의식’ ····

 

헤겔은 이같은 인정 투쟁 과정을 「정신현상학」 ‘자기의식’장에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사례로 보여준다. ···· 이처럼 인정은 내가 인정받기 위해 나는 나와 동등한 자유로운 인격을 갖고 있는 상대방을 전제한 상태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헤겔에게 인정은 단순하게 인간 상호간의 인정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에게 인간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에 존재하는 사회적 존재이다. ···· 그렇기에 헤겔의 인정 개념은 공동체성을 토대로 하는 사회적 존재론에 근거한다. ····

 

2) 서로주체성의 인정, 인간의 본질에 대해 설명하다.

 

···· ‘홀로주체성’ ···· ‘서로주체성’ ····

 

헤겔의 인정이 나와 너의 관계에서 상호인정의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하더라도 나와 너의 관계 방식 자체가 주체-객체 관계의 도식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면, 나와 너의 본질적 속성이 의미를 갖지 못한다. ····

 

부버(Buber)는 인간의 본질을 ‘사이존재’로 본다. ‘사이존재’란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의 신체와 다른 인간의 신체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을 말한다.

 

   

(마틴 부버의 책으로는 위 세 가지 책을 참고할 수 있을 듯 하다.)

 

이때 사이는 인간의 신체를 전제로 한다. 인간의 신체와 신체 사이의 빈 공간은 몸을 통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언어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실존적 만남의 과정에서 성립하는 그런 공간이다. ···· 내 몸이 있는 곳과 더불어 나와 함께 있는 타인의 몸이 존재하는 그곳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간다.

 

부버의 논의는 주체-객체로 이루어진 인간관을 극복하게 한다. ···· 그렇기에 그에게 상호인정의 문제는 나를 중심으로 하는 타자화된 너에 의해 이루어진다. 주체-객체의 인간관에서 빚어지는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부버는 내가 있던 중심에 너를 배치한다. ····

 

타자에 대한 인정은 그의 상황을 인정하고 그가 세계 속에 존재하는 방식을 존중한다. 반면에, 타자에 대한 부정은 타자의 세계를 점령하고 그의 시간과 장소를 새롭게 규정하며, 타자의 영혼과 타자의 생활세계를 말살하기 위한 구실로 기능한다. 그렇기에 서로주체성에 근거한 인정의 구조는 개인의 시간과 장소를 존중하고 배려한다. 자신의 시간과 장소를 새롭게 규정하도록 허락한다. 자신만의 공간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 자체를 두렵지 않게 한다.

 

3. 지리학, 인정을 통해 보이지 않았고, 들리지 않았고, 쓰여지지 않았던 공간을 발견하다

 

1) 지리학의 본질, ‘보이지 않는 공간’을 보이게 하다

 

지리학에서 다루는 보편적 공간 범주에서 벗어나, 우리 삶을 구성하고 있지만, 의미가 발견되지 않는 ‘보이지 않는 공간(invisible space)'에 천착해야 한다.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한다.”는 파울 클레(Paul Klee)의 말은 보이는 것을 떠받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의 의미세계를 열어준다. ····

 

Fruits on Red. 1930. Watercolor on silk. 61.2 x 46.2 cm. Stadtische Galerie im Lenbachhaus, Munich, Germany.

(내가 좋아하는 클레의 그림 중 하나다.)

 

클레에게 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화가가 자신의 경험세계에서 일어나는 삶의 현실성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삶의 근원적 장소는 화가와 세계가 만나는 ‘사이영역’이다. 클레가 말하는 사이영역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무의식과 의식, 인간과 자연, 주관과 객관과 같은 양극이 역동적으로 교차하는 영역이다. 화가는 삶의 현실성을 산출하는 양 극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가는 사람이다. ····

 

클레의 말에 동의한다면, 지리학자는 중요한 공간과 그렇지 못한 공간, 보이는 공간과 보이지 않는 공간 사이 영역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 지리학은 일상 공간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면서 어느 하나의 가치체계를 대변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익숙하고 낯익은 공간에서 벗어나 불편하고 낯설은 공간에 대해서도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영국 사람들에게 안개는 일상이다. 안개 없는 일상을 생각하기 어렵다. 하지만, 영국 사람들이 안개를 발견한 것은 터너(Turner)의 풍경화를 통해서이다. ···· 예술가의 그림이 우리에게 익숙한 현상을 새롭게 발견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주듯이, 지리학자는 우리 일상을 구성하는 공간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 ····

 

인간과 공간의 관계는 우리 삶의 생성과 변화의 과정에서 진화해 간다. 새로운 공간의 등장과 부침은 새로운 지리인식의 필요성을 부각시키고, 새로운 인간과 공간의 관계에 대한 인식의 필요성을 요구한다. ····

 

지리학도 예술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인간 삶을 구성하지만, 보이지 않았던 공간에 대한 발견은 지리학의 본질에 충실한 것이다. ····

 

공간이 지리학자만의 독점적 대상일 수는 없지만, 공간을 통해 지리학이 세상과 소통하려 한다면, 지리학은 지금과는 다른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가야 한다. 우리에게 조금 더 익숙하고 낯익은 공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쾌적하지 않은 공간에 대해 언급한다. 작고 초라한 공간을 세상에 드러낸다. 우리 삶에서 늘 필요한 공간이지만, 정작 지리학자들에게 연구 대상이 되지 않았던 그런 공간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인간 존재가 생산하는 다양한 공간에 대해 ‘철학하기(philosophiren)’를 시작해야 한다.

 

2) 공간에 대한 ‘하얀 글쓰기(e'criture blanche)’ 우리 사회 모순과 부조리를 고발하다

 

우리 삶터로서 공간의 의미는 다층적이다. 이질적이고 균열적인 공간 조각의 퍼즐을 맞추어야만 우리 삶터의 의미를 완성한다. 파편적인 공간 조각을 통해 인간과 공간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이야기(narrative)’를 통해 가능하다. 각각의 공간에 담겨져 있는 이야기는 그 공간에 거주하고 있는 인간에 대해 말해준다. 자기 자신과 집단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공간과 장소에 퇴적되어 있는 일상적인 이야기의 편린들이다. ····

 

지리학의 학문적 존재이유는 이처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부조리한 모습과 권력에 기울어져 있는 이념적 지형을 바로잡는 것이다.

 

바르트(Barthes)는 ‘하얀 글쓰기(e'criture blanche)’를 통해 현실의 모순을 들추어내고, 본질을 회복하려 한다. ····

 

바르트의 이같은 생각은 지리학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지리학은 ‘하얀 글쓰기(e'criture blanche)’를 통해 우리 사회에 감추어져 있던 공간을 찾아내야 한다. 우리가 당연시해왔던 공간의 범주를 벗어나, 새로운 공간 범주를 발견해야 한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쓰여지지 않은 이야기를 갖고 있는 공간은 우리 주변에 퍼져 있다. 푸코(Foucault)가 ‘분산의 공간(space of dispersion)’이라 명명한 이같은 공간은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 공간이다. ····

 

‘하얀 글쓰기(e'criture blanche)’를 통해 언어의 원형을 회복하려 했던 바르트의 생각처럼, 지리학에서도 ‘하얀 글쓰기’를 통해 인간의 일상적인 삶의 문제에 관심 갖던 지리학의 모습을 회복하고자 한다. ····

 

지리학은 세상과 소통할 준비가 되어 있다. 세상과 소통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다면 지리학의 역할이 미진했을 수 있다. 그렇기에 새로운 공간을 발견하고, 인간과 공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주면서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지리학이 세상에 필요한 학문이며,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 우리 사회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근원적 인식의 틀을 제공할 수 있음을 보여줄 수 있다.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인문학이 지리학임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4. 인문학으로서 다시 시작하는 지리학의 부활

 

크리스테바(kristeva)는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우리가 지켜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정신적 공간이라 말한다. 정신적 공간이 인간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신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신적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항을 ‘다시 시작하는 부활’이라는 뜻으로 되살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

 

 

(책을 찾아보니 쥘리아 크리스테바의 '반항' 개념과 관련된 책이 <반항의 의미와 무의미>란 제목으로 나온 책이 있다. 그러나 크리스테바 하면 <사랑의 역사>가 아닐까 한다. 사진의 책은 새로 나온 개정판이고 집에 초판이 있는데, 다른 책과 같이 읽으려다 아직도 읽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는 읽겠지 한다.)

 

지리학을 새로운 관점에서 인식하고 바라볼 수 있는 담론 생산은 크리스테바가 언급하는 반항의 연장선에 있다. 통념적인 지리인식에 대한 반항을 통해 다시 부활하기 위한 것이다. 단순하게 과거의 영화를 부활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학문으로서 지리학의 전통을 복원하면서도 변화하는 인간과 공간의 관계에 대해 설명할 수 있도록 진화하기 위한 반항이다. ····

 

지리학이 자신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지 못하고, 학문적 존재이유를 설파하지 못한다면, 미래의 모습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공간은 하나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세상을 인식하는 기본전제이다. 공간은 인간의 본질적 기원에 맞닿아 있는 근원적 요소이다. 그렇기에 공간을 대상으로 하는 지리학은 인간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본질적이고 근원적 차원에 천착할 수 있다. 이것을 통해 지리학은 세상과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는 미래의 유토피아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는 것은 다양한 의미를 소거시킨다. 여러 개의 해답을 갖고 차이와 다름에 대한 인정을 통해 인간과 공간의 관계에 대해 보여주고, 말하고, 쓸 수 있는 학문이 지리학이길 바래본다.

 

-끝-

 

대한지리학회지 제46권 제6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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