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서재에 널부러져 있는 여러 글들을 읽고 있다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  2010년 10월에서 표시해 둔 부분이 있어 옮겨 본다. 웃기다 딱 1년 전에 읽은 글이다.  언제나 좋은 것들은 시간을 무시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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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잘 익어가는 것일까?

유용주


우기에 접어들었다

바람 거세게 불고 비 퍼붓다. 고맙다. 비 내리니 조용하다. 아랫집 여자 목욕탕 양은대야로 타일 긁는 소리 안 난다. 윗집 개새끼 짖지 않는다. 게이트볼장 술 취한 노인네들 출근하지 않는다. 모든 소음이 빗속과 바람소리에 파묻힌다. 빗속에서 절간처럼 고요해진 집이다. 도라지꽃이 피었다. 철모르는 코스모스도 피었다. 거센 비바람을 맞고도 꽃은 기어코 피어난다. 텃밭 주위에 나뭇가지가 함부로 부러져 나뒹군다. 부러져 봐야 멀쩡할 때의 고마움을 안다. 다시 이어 붙여 쓰려면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흐르겠는가. 큰비 그치고 잔비 온다. 사물들, 잠 깨어 기지개 켜다. 나는 얼마나 젖어 있으냐. 얼마나 부러졌느냐.


어두워지면 가로등 한꺼번에 들어오듯, 달맞이꽃이 피었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구의 배신을 섭섭하게 생각 마라. 원래 배신이란 없는 것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 어디 있겠느냐. 물 흐르듯 인연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고, 돌에 채어, 수초에 걸려, 나무뿌리 속으로 모래나 낙엽 속으로 새의 깃털 속으로 뿔뿔이 흩어질 뿐이다. 가엾는 허허바다로 스며들 뿐이다. 수평의 눈으로 보면 배신은 없다. 다만 자기 자신, 믿는 마음이 부족할 때 생기는 어리석은 병일 뿐이다. 쓸쓸하지만 어쩔 수 없다. 원래 인생이라는게 쓸쓸한 거다. 마음의 흐름을 그대로 따를 것! 흘러가는 대로 그대로 둘 것!


'새 소리는 어떻게 참지!'

이 무슨 시적인 얘기인가. 개 짖는 소리에 스트레스 받아 항의하는 내게 윗집 아저씨가 반문하는 소리다. 아뿔싸. 졌다! 완벽하게 졌다. 하긴 개는 짖는 것으로 존재감을 얻는다는 아랫집 젊은 개새끼도 있다. 새 소리와 개 소리가 인간 청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과학으로 분석한 적이 없는, 그 방면에는 무지에 가까운 내가 진 거다. 생활쓰레기를 폐드럼통에다 태울 때 항의하는 내게 '그러니 어척헌대유'하던 아주머니가 그나마 더 인간적이다. 숲이 좋아 이사 왔던 내가 땅을 치고 통곡할 판이다. 옮겨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아카시아 샘물을 너무 오래 먹었다. 꿀은 독이다. 달콤한 꿀에 취해 저 막무가내를 키웠구나. 뻔뻔함에다 거름 주었구나. 한 20년 글 써서 밥 벌어왔지만, 이런 무례는 처음이다. 오늘 졌다. 완벽하게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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