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신문 2011.2.25 정의란 무엇인가 2.0
하버드대의 마이클 샌델 교수는 지난해 우리에게 정의란 무엇인가를 질문했다. 이제 그 질문은 한 차원 더 발전해야 한다. ‘무엇이 (지구적) 정의인가’라고 말이다. 샌델 질문의 틀은 주로 한 나라 안에서의 정의이다. 그리고 우리는 때로는 사정이 너무 절박해서, 때로는 사고의 시야가 너무 편협해서 오랫동안 대한민국 틀 안에서의 정의만을 주로 문제삼았다. 하지만 이제 정치적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세계적 석학인 낸시 프레이저 뉴스쿨대 교수는 <지구화 시대의 정의>란 책에서 정의란 결코 한 나라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전세계가 긴밀히 연결되고 상호 의존하는 지구화의 세상에서 우리는 대한민국 사람이면서 동시에 이집트인, 리비아인일 수밖에 없다. 당장 우리는 리비아 사태로 주유소 기름값과 점심값을 심각하게 계산하고 있다. 하지만 토머스 프리드먼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의 표현처럼 중동은 그저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주유소가 아니다. 단지 토건 건설을 위해 존재하는 부지도 물론 아니다. 우리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파병을 가지고 지렛대로 사용되는 도구도 결코 아니다. 그곳은 우리와 같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는 삶의 공동체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석유체제에의 달콤한 중독이 의도하지 않게 카다피가 저지르는 리비아판 광주학살의 무기로 전환된 연결 고리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정의를 국내의 틀로 국한한 것은 지구적 정의를 국가나 초국적 엘리트들의 특권으로 간주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의란 일반적으로 동등한 참여를 의미하는데 우리는 너무 많은 권한을 그들에게 부여해왔다. 이해관계 당사자인 우리가 지구적 정치의 목소리를 위임한 결과의 성적표는 그리 좋지 않다. 난 과거 보스니아 인종학살의 사태 속에서 그들의 한계를 생생히 기억한다. 미국과 유럽의 정부 엘리트들은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계산하거나 여론의 눈치를 보며 주저하다가 학살의 만행에 너무 늦게 개입하고 말았다.
중동의 독재자들과 밀월을 즐겨온 미국과 유럽의 특권층 엘리트들은 지금도 너무 무기력하게 사태에 개입하고 있다. 정권교체 대상인 이라크 후세인을 상대로는 그토록 쉽고 집요하게 강제한 비행 금지구역조차 합의안을 만들어내기가 너무 어렵다. 한동안 제국으로의 부상에 으스대던 중국 정부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릴까봐 조용히 걷거나 충혈된 눈으로 인터넷을 응시하고 있다. <슈피겔>은 지금의 사태를 ‘서구의 무기력증’이라 불렀는데 그건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더 엄밀하게는 국가와 초국적 엘리트들에 의해 지구적 정치가 결정되는 공정하지 않은 제도의 무기력이다.
지금의 중동 민주화 혁명은 긴 문명의 흐름으로 보면 미국 주도의 패권적 안정과 시장만능주의, 그리고 석유중독의 지구적 거버넌스가 새로운 체제로 이행하고 있는 신호탄이다. 이미 미국의 패권은 쇠퇴했고 이제 아무도 시장만능주의 거버넌스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리고 석유중독체제는 보수 엘리트들조차 그 유용성을 의심하고 있다. 그 긴 이행의 결과가 좀더 부드러운 네트워크 제국의 질서가 될지, 아니면 좀더 자유롭고 동등한 세계시민들의 지구적 민주공화정이 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지구적 정의를 향한 초국적인 촛불시민들의 네트워크만이 좀더 바람직한 후자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초국적 공론의 장은 이후 세계시민적인 지구 제도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으로 진화되어야 한다.
2012년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지구적 민주공화국에 대한 관심을 미루어놓는 순간 어느 날 지구적 정의는 우리에게 값비싼 비용청구서를 내밀 것이다. 그때 가서 중동재단을 만들거나 봉사단을 파견하자며 부산을 떨 여야 정치권의 모습이 훤히 보인다. 올해와 내년은 한국 사회에 지구적 정의란 무엇인가의 화두와 성찰, 그리고 실천이 단단하게 뿌리내리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한다.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미국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