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문제, 사회의 문제, 신자유주의의 문제, 자본주의의 문제... 문제 투성인 사회이다. 세계화를 애기하며 다국적 세계자본의 국내 자본시장 잠식을 문제삼으며 무분별한 자본의 흐름을 방기하는 친자본적 정부를 질타하고 있다. 규제를 애기하며 신자유주의를 비판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들은 그렇게 문제시하는 '세계화'된 사회에서의 신자유주의에 의해 천박한 자본주의에 의해 희생되는 팔레스타인의 아이들에 대해, 북한의 힘없는 민중에 대해, 굶주린 아프리카의 아이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가?
가끔 세종문화회관 앞 거리를 걷다보면 거리에서 'save the children'같은 국제적 비영리단체에서 나와 회원가입 및 관심을 촉구하는 행사를 하는 경우를 본다. 나나 대부분 지나가는 행인들은 핸드폰에 책에 음악에 옆 사람과의 대화에 또는 귀찮아서 무관심으로 지나쳐 버리기 일쑤다. 나 또한 그러니 어쩌라 말 하기는 낯뜨거운 일이다.(그래도 몇몇 사회단체에 기부활동은 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사회문제에 뛰어든다면 그것도 어찌보면 재미없으며 사회에 또다른 문제를 불러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다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누군가 하겠지하는 마음을 누구나 한다면, 고종석씨가 말하는 "낙관주의는 인류의 의무"가 어쩌면 "무관심은 인류의 의무"로 변해 세상이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비관적 시나리오가 현실로 다가오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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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2011.1.5 인류가 과연 21세기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21세기의 첫 10년이 흘렀다. 인위적으로 새긴 시간의 금에 무슨 별다른 뜻이 있으랴마는, 그래도 새로운 연대는 희망과 동행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인류가 새 세기를 맞으며 막연히 품었던 희망은 지난 10년간 속절없이 무너진 모양새다. 9·11 사건을 빌미로 삼은 서남아시아 지역의 전쟁은 지난 10년 내내 포연을 멈추지 않았고, 그 포연이 마침내 한반도에서까지 피어올랐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요약될 10년간의 경제 질서도 크고 작은 금융위기를 낳으며 인류를 불안으로 몰고 있다. 계급과 문화(종교)와 국가 이성은 그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지난 10년을 갈등의 한가운데로 밀어붙이는 열정의 기원이었다. 그것들은 때로 나란했고, 때로 교차했다. 부유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계급적 소속을 잊고 인종주의자가 되었으며, 이슬람 전제국가의 지배계급은 서방 기독교 세계의 지배계급과 거래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것은 혼돈이었다. 그 혼돈 속에서 피아의 구분, 적과 친구의 구분은 쉽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이상적인 세계의 모습은 그런 피아의 구분, 적과 친구의 구분이 사라진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그 세계는 우리 시야 안의 가까운 앞날에는 올 것 같지 않다. 아니, 영원히 오지 않을 것도 같다. 그것이 근원적으로 인간이라는 종의 진화 단계와 관련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이상적 세상이 오기 전에 인류는 제 욕망들을 발산하는 과정에서 멸종할 수도 있다. 우리의 배려가 자신이나 직계가족 바깥으로까지 번지는 법은 거의 없다. 이웃의 슬픔은 우리의 무관심 속에 용해되거나 심지어 기쁨의 원료가 되기까지 한다. 아니 이 말은 정확하지 않다. 자신이나 가족이 의제(擬制)라는 과정을 통해 동심원을 그리며 집단으로, 지역으로, 국가로 번지기는 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우리'와 '그들'의 구별은 엄연하다. '형님 예산' 에피소드는 그 구별의 천박한 일단이다.
지구 식량 자원이 넉넉해도 세계 도처에 굶는 이들이 수두룩하듯, 대한민국 경제력이 그 주민 집단 모두를 넉넉히 먹여 살릴 수 있어도, 우리 주위에는 굶는 아이들이 지천이다. 휴전선 북쪽에서 굶는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연평도에서 죽은 이들을 그저 '운 나쁜' 사람들로 여기거나 '우리'들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한 선전도구로 삼을 뿐,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 평화 체제를 만들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게다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은 몇 곱으로 멀어진다. 팔레스타인의 일상적 죽음들과 제3세계의 어린이 노동이 애달파 내가 피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었던가. 세계화는 사정없이 진행되지만, 우리는 세계시민이 되지 못했다.
세계화는 진행되지만, 우리는 세계 시민이 되지 못했다
월스트리트의 최첨단 금융업이든 한국의 원시적 대부업이든 파리아(천민) 자본주의라는 점에서는 매한가지다. 이 파리아 자본가들이 단기적 '먹튀'에 집착하는 것은 대중의 분노에 따른 사회 불안정 때문이지만,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나누어 대중과 화해할 생각이 없다. 위키리크스가 최근 폭로했듯, 미국의 세계 경영 역시 또 다른 의미에서 천민적이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선양했던 시민적 자유는 그 후손들의 손에서 무자비하게 훼손되고 있다. 청와대의 대포폰이나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 삼성SDI의 노동자 불법 도청을 그 위에 포개는 것은 자연스럽다. 게다가 4대강 사업이라니.
물론 생태근본주의자들의 이상주의적 실천은 아마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고, 그것이 꼭 바람직한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생태계에 대한 인간의 폭력은 이미 도를 넘어섰다. 이른바 4대강 사업은 인간의 정신 나간 탐욕이 낳은 참혹한 풍경이다. 박테리아에서 유인원에 이르기까지 지구 생태계의 구성원 모두가 궁극적으로 인간의 형제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리고 인류가 지구 생태 역사상 결코 있어본 적 없는 잔혹한 포식자라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 모두가 적어도 조금씩은 생태주의자가 되어야 할지 모른다.
과학 소설이나 에세이들은 흔히 먼 미래를 그린다. 그러나 인류가 과연 21세기라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인류가 지난 10년간의 행태를 계속한다면, 쉬이 긍정적인 답을 내놓기 힘들다. 그러나 낙관주의는 인류의 의무다. 노예에서 농노로의 변화가 발전이었다면, 농노에서 임금노동자로의 변화가 발전이었다면, 우리는 또 다른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계급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구속되지 않은 세계시민으로의 발전을, 지구 만물의 너그러운 맏이로의 발전을.
고종석 (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