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중반을 갓 넘긴 시인의  "세상은 툭하면 발길로 나를 걷어차곤 했다"라는 말은 왠지 공감이 간다. 나도 한때 왠지 모를 왜 세상은 나에게 이럴까?하는 식의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나도 이제 30대 초반이 되면서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생각도 조금씩 행동도 조금씩 변하는 듯 하다. 그게 좋은건지 나쁜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변하지 말아야할 열정과 고민은 꼭 변하지 않았으면 한다. 어찌보면 요즘 젊은 사람들(뭐 나도 젊지만)은 너무 무사인일주의인 듯 하다. 모르기때무에 대들고 치고 받고 해야할 일도 그냥 그냥 뭐 좋은데로 넘어가는 듯하다. 나도 그러는 듯 하다. 도종환 시인의 젊은날 고독과 고민을 통해 나도 오늘 하루 내 젊은 20대 중반 부품 꿈을 안고 왔던 첫 발령 받은 때를 생각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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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8.27  세상은 툭하면 날 걷어찼고, 난 강가에 앉았습니다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⑨ 

사범대학 졸업 뒤
시골 읍에서도 한참 걸리는
고등학교로 발령받았습니다
세상 외로움과 절망을
신부님이 달래줬지만, 그로 인해
더 시골로 쫓겨가야 했습니다

사범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그해 삼월에 발령을 받았습니다. 보은읍에서도 오구니재를 넘어 버스로 한 시간 가까이 가야 하고, 옥천읍을 나오려 해도 한 시간이 걸리는 옥천군 청산면 청산고등학교로 첫 발령을 받았습니다. 스물네 살. 아직 문학청년인 젊은 나이에 고등학교 국어선생 노릇을 시작한 것입니다.

하루에 여섯 일곱 시간씩 계속되는 수업에 몸은 지치고, 마음은 어두운 골목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수업시간에 박두진의 시를 가르치다가 박두진 시인이 쓴 <바다의 영가>라는 시를 읽어줄 테니 들어보라고 해 놓고는 “아, 바다가 죽으면 가슴도 죽는다”라는 대목에 이르러 그만 울컥 눈물이 솟아 창밖을 쳐다볼 때도 있었습니다.

고3 학생들과는 불과 다섯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개중에는 한 살 아래인 학생도 있어서 하숙방으로 찾아와서는 “선생님 술이나 한잔하시지요?” 하는 녀석도 있었습니다. 동생 같은 녀석들한테 술 한잔을 몰래 사주기도 했는데, 소문이 학교로 흘러 들어가 곤란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혼자 술집에 들러 술 한잔하거나 소주병 들고 강변에 나가 술 마시고 들어오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런 날은 한밤중에 깨곤 했습니다. 서정주 시인은 <문>이라는 시에서 “밤에 홀로 눈뜨는 건 무서운 일이다/ 밤에 홀로 눈뜨는 건 괴로운 일이다/ 밤에 홀로 눈뜨는 건 위태한 일이다”라고 했는데 한밤중에 깨어 무섭고 괴롭고 위태한 불면의 날을 보내곤 했습니다.

제자들과의 관계는 미숙한 대로 그럭저럭 헤쳐 나가는데 문제는 교사들과의 관계였습니다. 준비가 덜 된 채 학교에 나온 탓에 초임인데도 고분고분하지 못하고 말도 가려 할 줄 몰랐습니다. 문학청년의 치기와 객기가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도 있었습니다.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술상을 엎어버릴 때도 있었고, 쏟아지는 빗발 속에서 포효하며 울다가, 옷을 진흙바닥에 팽개쳐버리고는 다음날 입고 갈 옷도 없고, 일어나지도 못해 출근을 하지 못한 날도 있었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어떤 것이든 직업 자체는 모두가 자신에게는 까다롭고 불만스럽지 않을까 하고 숙고해 보라”고 했습니다. “더 큰 자유를 내세울 수 있는 직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의 내부가 크고 넓어서 진정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위대한 사물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직위란 없다”고 했습니다. 더 위로가 된 것은 그다음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고독은 그런 속에서도 당신에게는 의지와 고향이 될 것이며 그 고독으로 해서 당신은 자신의 길을 발견할 것입니다.” 릴케의 이 말을 공책에 옮겨 적었습니다. 그리고 더 고독하게 가기로 했습니다.

그곳에서 박 신부님을 만난 것은 참 다행이었습니다. 진초록 어둠이 내리는 유월 저녁 퇴근길이었습니다. 박 신부님은 성당에서 학교 쪽으로 올라오고 있었고 나는 학교에서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스쳐지나가던 신부님이 저에게 불쑥 한마디 말을 던지셨습니다. 서로 인사를 나눈 적이 없는 사이였는데 신부님은 “절망하지 맙시다” 하는 말을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던 길로 가셨습니다. 나는 방금 들은 말을 곱씹으며 검고 긴 사제복을 입고 걸어가는 신부님의 뒷모습을 한참 쳐다보았습니다.  

그러곤 성당을 찾아갔습니다. 처음 성당이라는 데를 들어가 보는지라 그냥 가기는 쑥스럽고 사홉들이 소주 큰 병을 사들고 가 사제관 신부님 방에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문학 철학 종교를 넘나들며 신부님과 밤늦도록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야기를 했다기보다 제가 지적인 허세와 오만함에 들떠 혼자 떠들어 대면 신부님은 대개 말없이 들어주시곤 하였습니다. 제가 윤동주 시인의 이야기를 꺼내며 그가 얼마나 순수한 삶을 살고자 했던 시인인지 이야기하면, 신부님은 정치적 저항과 시대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제가 고은 시인의 시를 좋아한다고 하면 신부님은 고은 시인이 최근에 쓴 시라고 하며 전단에 있는 시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시는 여성노동자들이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다 구사대 남자들이 던진 똥물을 뒤집어쓰고 처참하게 서 있는 사진 옆에 있었습니다. 
 
» 세상은 툭하면 날 걷어찼고, 난 강가에 앉았습니다. 그림 이철수 

저는 제 절망도 주체하지 못하여 헤매고 있었는데 신부님은 술에 취해 돌아가는 저에게 김지하의 시집 <황토> 복사본 또는 김지하의 옥중 양심선언문 이런 것들을 손에 쥐여 주셨습니다. 어떤 날은 술병을 들고 찾아가면 시국을 위해 단식을 하고 계셨고, 성당 마당에는 검은 지프차가 서 있기도 했습니다.

“시인은 헤매는 양임을 명심하라. 목자가 아니다. 시인은 헤매는 동안에 가장 많은 일을 한다. 헤매라.” 저는 그런 최인훈의 소설 구절에 더 빠져 있던 때라 신부님이 주시는 팸플릿과 각종 자료들보다는 성당에서 빌려온 책 중에 나오는 <염소의 기도> 한 구절이 더 좋았습니다. “주님/ 제가 살고픈 대로 살게 놔두세요// 얼마 되지 않는 소탈한 자유와 황홀경/ 이름 모를 꽃들의 이상한 맛/ 그게 필요해요.”

우리에 갇힌 양보다 헤매는 양, 길들여지는 가축보다는 산기슭을 떠도는 염소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그해 겨울 후배와 둘이 시화전을 하느라 문화원 화랑에 있다가 누가 와서 신문에 보니 인사발령이 났더라고 하는 바람에 학교로 갔습니다. 학교를 옮기겠다고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저도 조금 놀랐습니다. 그런데 교감선생님은 자신도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으니 교육청에 전화를 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학교에 나와 있던 다른 선생님들도 무슨 이유일까 하고 다들 의아해했습니다. 저는 제가 학교생활에 충실하지 못한 점이 있어서 그렇겠지 하고는 교육청에도 알아보지 않은 채 짐을 싸들고 더 작은 시골학교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박 신부님과 자주 만나는 것이 좌천의 원인이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안내면 소재지인 현리에서 중학교가 있는 인포리까지는 삼십분 이상을 걸어야 했습니다. 어둠이 뭉턱뭉턱 내려와 산 위에 턱턱 걸터앉는 모습을 보며 혼자 하염없이 걷는 날이 있었습니다. 혼자 소주병을 들고 장계리 강가에 앉아 어두워질 때까지 술을 마시고는 강물에 빈 병을 던지곤 했습니다. 외로웠습니다. 
 

십 리를 걸어 인포리에 도착했으나
마음을 누일 봉놋방은 없었다
오리를 더 걸어 강가에 이르렀으나
거기도 물소리뿐이었다
거친 붓자국이 선명한 하늘은 먹물빛이었다
귀퉁이에 남은 하늘색도 회색에 가려 희미했다
붓질을 한 이는 보이지 않고 먹물만 흘러내려
산허리를 덮었다 툭 툭 던져 놓은
육중한 고독의 덩어리처럼 보이는 산자락 끝에
아주 작고 흐릿하게 나는 서 있었다
오는 동안 벌판에는 가등 하나 없었다
이십대 중반을 갓 넘긴 나이여서 나도
서툴기 짝이 없었으나
세상은 툭하면 발길로 나를 걷어차곤 했다

그때마다 이젠 끝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등불도 노새도 없이 넘어야 할 벼룻길만 앞에 있었다
안주 없는 찬 소주를 혼자 마시곤
빈 병을 강물에 던질 때면 강물이
잠깐 몇 방울의 눈길을 내 쪽으로 던져주곤 했다
오늘도 어둠이 내리는 광막한 하늘 아래
혼자 눅눅하게 젖고 있는
또 다른 내가 어디엔가 있으리라
홀로 찬 술을 마시며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 이 있으리라

입술이 팽팽하게 모여 건너야 할 강 쪽을 향해
마음보다 먼저 돌출해 있는 걸 자신도 모른 채
오래 강가에 앉아 있는 이 있으리라

- 졸시 <인포리> 전문 

첫 번째 직장 생활부터 시작된 어긋남, 좌천당하고 쫓겨나는 생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십칠 년간 교직에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제 손으로 이동희망내신서를 써 보지 못한 채 떠돌고 쫓겨나게 되는 일의 시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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