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읽고 있다. 예전엔 몰랐던 우리나라 소설의 재미를 뒤늦게 느끼고 있다. 지금 이 느낌을 예전에 알았더라면...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지금처럼 소설이 재미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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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 9.4 윤흥길 소설 ‘완장’ 일독을 권함
총리 후보와 두 장관 후보의 사퇴로 일단락된 청문회를 지켜보는 동안 줄곧 소설 한 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윤흥길의 1983년작 장편 <완장>이었다.
![](http://image.aladin.co.kr/product/35/14/cover150/8972752223_2.jpg)
주인공인 임종술은 뚜렷하게 하는 일 없이 낚시로나 세월을 축내다가 제가 낚싯대를 드리웠던 저수지의 감시원에 임명된 뒤 새로운 삶에 눈뜨게 된다. “노란 바탕에 파란 글씨로 새긴 ‘감독’을 세 개의 빨간 가로줄이 좌우에서 받들고 있는 비닐 완장”이 새 삶의 근거요 명분이었다.
삼십여 평생 동안 완장 찬 이들에게 쫓기기만 했던 종술에게 제 팔을 감싼 완장은 신천지를 약속하는 차표 한가지였던 것. 완장을 찬 그는 “그리하여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다.”
자고 나면 새로운 잘못과 의혹이 불거져 나오는데도 “죄송하다”와 “기회를 달라”만을 앵무새처럼 되뇌는 이들의 심사는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물건일까. 시쳇말로 쪽팔리는 건 순간이지만 권력과 이권은 영원하다는 것 아니었을까. 그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갈구한 ‘기회’가 지난 잘못을 뉘우치고 국민을 위해 봉사하기 위한 것이 아님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다. <완장>의 주인공처럼 알량한 벼슬을 믿고 군림하고 착복할 기회를 그들은 노렸던 것 아니겠는가.
완장을 팔에 두른 뒤 종술의 위세와 행패는 자심해진다. 오죽하면 동네 후배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올 정도다. “소문으로 듣기는 더러 들었어도 성님 그 완장 유세가 이렇게 대단헌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소!” 종술에게 완장의 쓰임새는 권력욕을 충족시키는 데에만 있지는 않았다. 그는 읍내 술집 작부 부월이를 공략하는 데에도 완장을 앞세운다. 완장을 찬 뒤 그가 식구들한테 행패도 덜 부리게 되면서 완장은 집안의 평화와 안정 역시 가져다 준다.
그럼에도 종술의 완장을 불안한 눈길로 지켜보는 이가 없지 않았으니 어머니 운암댁이 대표적이다. 운암댁에게는 삼십 년 전 전쟁통에 완장을 차고 설치다가 횡사한 남편의 기억이 상기도 생생했다. 이 여인에게 완장은 권력의 표지가 아니라 불행의 얼굴이었다. 완장을 믿고 날뛰던 남편의 비극적 최후를 잊지 않고 있기에 운암댁은 완장에 대해 이렇듯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완장은 원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만석꾼의 권력을 쥔 진짜 주인은 언제나 완장 뒤편 안전한 곳에 숨어 있었다.”
어리석은 종술은 그걸 알지 못했다. 시답잖은 권력욕에 취한 그는 분수를 모르고 저수지 소유주인 최 사장 일행의 낚시를 가로막고 나서면서 자신의 파멸을 재촉한다. “완장허고 상장(喪章)허고 맞바꾸자아! 죽어서 구신으로 남어서라도 내 저수지 내가 지킬란다아!”라며 날뛰던 종술은 결국 부월과 함께 밤도망을 놓는 처지로 몰리거니와, 그가 벗어 놓고 간 완장의 최후는 무릇 완장으로 상징되는 권력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힌다.
“수많은 구경꾼들이 돌팔매처럼 집어던지는 경멸에 찬 눈초리, 낄낄거리는 웃음을 홈빡 뒤집어쓴 채로 완장은 물문을 향해서 흘러오고 있었다.”
<완장>을 떠올린 것은 사실 청문회가 있기 전, 유인촌 장관과 신재민 차관이 주도해 온 문화 정책의 갖은 파행상을 목도하면서부터였다. 신 후보자가 낙마한 자리를 두고 하마평이 무성한데, 그 자리에 누가 앉든 우선 <완장>을 한번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