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2010.8.21  고은...외로운 짐승처럼 당신 뒤를 좇았습니다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⑧ 

그처럼 술과 허무의 바다에
빠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황홀한 방랑을 참회한 그는
문학이란 밀실 속에 숨는 것이
부도덕하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한 마리 외로운 짐승 같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내 절망을 주체하지 못해 나도 내 몸을 어두운 밤 골목이나 노을 물든 강둑, 바람 부는 산기슭 어디에 마구 팽개쳐 버리고 싶은 날들이 있었습니다. 끝없이 술을 마셔대고 노래를 부르고 비틀거리며 다시는 깨어나고 싶지 않은 날들이었습니다. 가난이 싫고, 세상이 싫고, 내가 싫고, 내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싫은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무렵이었습니다. 제가 고은이란 이름을 만난 것은.

그는 자신을 구름의 아들이라 했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그는 문둥이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죄 저지르고 하수도 맨홀을 열고 들어가 암흑과 악취에 지쳐서 죽고 싶었고, 카바레에서 어서 옵쇼 보이가 되고 싶었고, 넝마주이가 집게로 집어 가는 넝마가 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되고 싶었습니다. 구름처럼 한 세상을 떠돌거나, 머리 깎고 산에 들어가 이 참혹한 세상과 결별을 하거나,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서 벗어나 바람처럼 떠다니고 싶었습니다.

“내일 모레쯤 쓰러지면 / 귀여운 승냥이 새끼 / 내 살을 뜯어먹어라 // 오늘 개울물에 씻은 여윈 팔다리”

“미안하다 / 미안하다 // 나 같은 것이 살아서 국밥을 사먹는다”

“나 같은 것이 살아서 중얼거리는 것을 용서하기 바란다. 그보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용서해 주기 바란다. 저 6·25사변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죄악이다. 왜 나 같은 것도 태어나서 살고 있는가를 시골 지경리 3일장 장터에서 파는 20원짜리 허드레 순대국밥이라도 사먹으면서 알고 싶다. 그러다가 파장 장터의 쓰레기 더미에 내던져져서 쓰레기와 더불어 어디론가 실려 가버리고 싶다.”

이런 글을 읽고 며칠씩 술을 마셨습니다. 저도 그렇게 팽개쳐지고 싶었습니다. 수없는 밤을 자학하고 절망하다 고꾸라졌습니다.

“1975년 1월부터 1년 동안 소주 1천 병을 폭음했다. 이 계산은 소설가 이문구가 했다.” 이런 그의 약력을 들으며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다고 하며 술을 마셔댔습니다. 문학의 치기가 문학 그 자체라고 생각하던 저는 퇴폐적 낭만주의자였습니다.

그가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하려다 일본 선원에게 구출되어 살아나거나, 음독을 기도하거나, 수면제 오십 알을 먹고 눈 덮인 정릉 골짜기에 쓰러졌다가 살아 나오기를 거듭하면서 허무주의의 바닷가를 들락거릴 때 저도 비릿한 바닷내음을 흘리며 그 주위를 떠돌았습니다. 허무주의가 문학 그 자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니 허무와 황음과 절망으로부터 문학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고은이란 이름이 쓰여 있는 책을 닥치는 대로 찾아 읽었습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성 고은 엣세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가난한 이를 위하여> <환멸을 위하여> <세속의 길> <역사와 더불어 비애와 더불어> <이름 지을 수 없는 나의 영가> 등등의 책들과 <피안감성> <해변의 운문집>에 실려 있는 시들을 읽었습니다.
 

내 당신을 처음 본 것은
당신이 목숨의 그림자 풀어 물에 던지며
물 끝 그 너머로 끝없이 떠나기만 하던
허무의 바닷가에서였습니다
나는 그때 움푹 패인 당신 발자국 주위를 떠돌던
비릿한 바닷내음 중의 하나였습니다

당신이 먼지 두터운 세상 이 아수라의 한복판에
절망을 진흙처럼 매달고 어둠 속을 걸어갈 때
나도 내 얼굴 한 쪽의 그늘을 지우지 않은 채
당신의 뒤척이는 발소리 뒤를 몰래 따라 가곤 했습니다

- 졸시 <산>부분

그렇게 그의 뒤를 따라가던 어느 날. 저는 상당히 큰 혼란과 마주쳐야 했습니다. 그것은 1978년에 나온 <진실을 위하여>때문이었습니다. 거기엔 이런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 좀 더 까놓고 말한다면 오늘의 작가는 문학을 내던져버릴 줄 알아야 한다… 문학이 너무 문학적이어서는 안 된다.(…) 오늘은 정치가 문학이고 사회가 문학이다. 존재의 심연, 사물의 본질, 영원의 광명… 이런 것들이 무슨 잠꼬대란 말인가.

장미가 어떻고 국화가 어떻다는 말인가. 산의 놀이 어떻고 바다의 비밀이 어떻다는 말인가. 헤어진 임이 어떻다는 말인가. 천 년 동안 해 온 것을 아직도 그것만 한단 말인가.”

“ 이제 우리는 떠도는 자의 꿈을 벗어나서 머무는 자의 현실로부터 그 현실이 담고 있는 많은 절망과 희열을 통해서 진실을 계발해야 하는 것이다. 중생 없이 무슨 부처이며 무슨 보리이며 무슨 선의 선지식인가. 무슨 자비인가.(…) 나는 많은 지난날의 떠돌이 체험을 가지고 있다. 그런 황홀한 방랑과 편력이 나 자신을 길러 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추억을 현실에 반조했을 때 나는 깊은 참회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황홀한 방랑과 편력이 길러낸 사람이 이제 그 방랑을 접겠다니? 참회하고 있다니? 저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저의 시정신은 아직도 떠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머무는 자가 되기엔 절망이 컸고 방황을 멈추지 못하고 있는 힘겨운 내 영혼으로는 사회와 정치와 현실의 크기는 너무 무거웠습니다. 그런 제게 그는 밀실에서 나와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나는 문학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폐소에 들어가 숨어버리는 일을 가장 부도덕하다고 본다.” “그들에게 한 사람을 더 수용할 만한 정신의 면적도 갖춰져 있지 않은 극악한 소승주의나 이기주의만이 드러난다면 그런 현상은 사회와의 삶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 부도덕한 상태에 바탕을 둔다.”

“문학은 저 혼자의 밀실에서 나오는 생산품이기는 하지만 그것의 진실을 표명하기 위해서는 모든 민중적 고난을 만나서 그 자신도 거기에 명예롭게 동참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나야 한다. 겪어야 한다. 여러 사람의 진실을 자기화해야 한다.(…) 그리하여 한 달에 3만원 벌이도 못되는 영세근로자들의 아픔도 알아야 한다. 엄청난 건물들의 중심가를 번영의 상징이라고 보지 않고 폐허라고 믿는 것이 시인의 일인 것이다.”

저는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책 한 권을 다 읽으며 곳곳에 밑줄을 긋고 의문부호를 찍고 그리고 코피를 흘렸습니다. 제가 그의 뒤를 따라온 것은 이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의 허무와 허무에서 건져 올린 반짝이는 언어들이 좋았던 것입니다. 폐결핵을 앓는 그의 시적 자아와 곁을 지키고 앉아 있는 누님의 실크빛 연애가 좋았던 것입니다.

비록 “벌레 한 마리도 위로하지 못하고 살아왔”지만, “소루쟁이 풀 한 포기 위로하지 못하고 살아왔”지만, “이 세상을 돌아다 볼 때 / 가장 쓸쓸하여서 / 나는 이 세상을 떠나기 싫”( 고은 <눈물 한 방울> 중에서)은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이 갈등하고 많이 괴로워했습니다. 어떤 날은 괴로워 담뱃불로 팔뚝을 지지며 몸부림쳤습니다. 그 흔적은 지금도 왼팔, 손목시계 밑에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처절한 심정으로 그의 뒤를 따라가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해 후였습니다.
 

그렇게 거친 들판과 물살을 넘어
여기까지 당신을 따라왔습니다
크고 작은 언덕과 구릉도 함께 왔고
목이 갈라지도록 포효하던 짐승은 짐승대로
햇빛을 향해 달려가던 나무는 나무대로 당신 곁에
모였습니다. 저도 목마른 한 촉의 풀잎으로
당신의 골짜기 한 비탈에 몸을 내렸습니다.

- 졸시 <산>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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