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20대란 무엇인가? 무엇을 하였는가? 그 누구처럼 "새로운 세계를 향해 뛰쳐나가고 싶은 열망에 싸여 있었"던가? 난 무엇을 했는가? 그래서 난 아직도 미숙한가 보다. 아직 늦지 않았으려니 한다. 지금부터라도 나 자신을 '미운오리새끼'가 아닌 오리 그 이상의 '존재'로 인정하고 헤쳐나갈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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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8.13 무너지면서 가을은 오고…우리는 미숙했습니다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⑦
» 무너지면서 가을은 오고…우리는 미숙했습니다
책읽고 철학하고 논쟁하였습니다
내 살 네 살 베이는 것 아니면
만나지 말자고 하기도 했습니다
술취해 사고치던 ‘문청’ 미운오리들
우리는 퇴폐적 낭만주의자였습니다
문학모임 이름을 안데르센의 동화 제목인 <미운오리새끼>(The Ugly Duckling)로 하자고 제안한 사람은 신동인 선배였습니다. 그는 같은 과 1년 선배였고 실질적으로 모임을 끌어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글을 쓰고, 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철학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싶은 사람은 그림 이야기를 하자고 했습니다. 신 선배는 모임을 시작하면서 세 가지 방향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일체의 형식을 배제하자는 무형식주의, 사상의 깊이를 다지기 위한 독서와 토론, 그리고 철저한 산문정신, 이 세 가지였습니다.
작품을 쓰기 이전에 문학과 철학 서적을 읽고 토론하고 생각의 깊이를 다지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신 선배는 다른 문학서클에서 글 쓰는 문청들을 보며 “너희는 똥만 누우려 하는 놈들이고, 우리는 밥 먹는 놈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뱃속에 들어찬 게 있어야 나오는 것도 있는 법인데, 든 것도 없이 내놓으려 하니 힘이 드는 거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수천 년 동안 우리는 물고기 대가리와 빵부스러기를 찾아 다녔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살 이유를 가지고 있다. 배우고 발견하고 자유롭게 될 이유를 가지고 있다. 삶을 위한 의미와 더 높은 목적을 찾고 추구하는 갈매기보다 더 책임 있는 자가 누구겠는가?” 조너선 리빙스턴 시걸의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글이었지만 첫 번째 문학 토론 주제로는 아주 매력적이었습니다. 이 갈매기의 입을 통해 이야기되는 자유는 에리히 프롬의 ‘~으로부터의 자유’와 ‘~을 향한 자유’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고, 사르트르가 실존주의 개념으로 이야기한 자유, 그리고 차라투스트라의 초인, 카뮈적인 반항에 대한 의미로 넓혀져 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과 인간과의 문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로 넘어갔습니다.
도스토옙스키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우리는 신 선배의 독서 양과 폭에 압도되고 말았습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악령> <백치>를 이야기할 때면 연신 술만 마셔야 했습니다.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의 이름이 그 선배의 입에서 쉬지 않고 쏟아져 나와 주눅이 들곤 했습니다. 키르케고르와 사르트르와 카프카와 플라톤으로 이어지는 논쟁은 해를 넘기면서도 계속되었습니다. 저는 장용학과 손창섭과 최인훈 등 국내 소설로 방향을 틀면서 논쟁에 참여하였지만 마지막엔 술로 만신창이가 되어 끝나는 날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무슨 어설픈 검객이라도 된 것처럼 저자거리에서 친구들을 만나면 논쟁을 하려고 대들었습니다. “내 살 네 살 베이는 것 아니면 만나지 말자”고 하기도 했습니다.
흔들리면서 가을은 온다.
칼을 보여 다오, 친구여
그대 칼의 눈부심을 보여 다오.
그대가 벤 것을 보여 다오.
무너지면서 가을은 온다.
한 손에 칼을 들고
쓰러뜨린 것들 앞에 서서 돌아보던
풀 하나 흔들리지 않는
벌판을 보여 다오.
무너뜨리기 위하여 가을은 온다.
가을에는
내 살 네 살 베이는 것 아니면
만나지 말자, 가을에는
벌판이 아니면 만나지 말자.
무너지지 않는 한 가을은 가지 않는다
이 가을 한 자루 칼이 되어
네가 오너라, 친구여.
-졸시 <가을 평야>전문
새로운 세계를 향해 뛰쳐나가고 싶은 열망에 싸여 있었지만, 그러나 아직 대학교 3학년인 우리는 미숙하고 서툴고 어설프기 이를 데 없는 문학청년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고독하고 순진한 낭만주의자들이었습니다. 신 선배의 여동생이 중학교 사환으로 있었는데 그 학교 등사기를 몰래 빌려 직접 철필로 쓰고 롤러로 밀어 문집을 찍었습니다. 문집 두 번째 호 머리글에다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미운오리새끼. 태어나서 같은 오리들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엄마 오리에게까지 마움을 받게 된 못생긴 오리새끼는 분명한 목소리로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저는 기어이 넓은 바깥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어요.’ 애초부터 획일적 일상은 우리들의 쾌적한 보금자리가 못 되었다. 모든 사람을 안전하고 간편한 항로로 인도하는 나침반 구실을 하던 인습은 안일한 거점을 제공해 주는 대가로 그 획일적 일상의 늪 안에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며, 우리들의 내적 신세리티의 말살을 강요하는 집념 깊은 폭군이었던 것이다. 왜 살아야 하는가 하는 ‘존재이유’를 배워야 했었다. 우린 우리 스스로가 불러들인 불안과 절망과 니힐 앞에 끊임없이 방황하고 모색하고 고민하면서 그 앞에 좌절할 줄 모르는 견고한 ‘자아’를 간직하여야 한다. (…) 미운오리새끼! 지금 우리의 계절은 가을이다. 우린 가을까지 흘러온 어린 나무들이다. 숲의 나뭇잎들이 누렇게 물들고 고동색으로 타며 바람이 심하게 불면 나뭇잎은 빙그르르 돌면서 하늘로 올라간다. 미운오리새끼가 처음 맞는 가을에 그랬듯이 백조의 나라를 동경해 보자. 그리고 우리, 자기의 모든 것을 생명의 가장 안쪽 깊숙한 곳에 침잠시키고, 죽은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것일 뿐인 가을 나무의 생리를 배우자. 길이 좁아 찾는 이가 적다는 생명의 좁은 문-그곳이 우리가 갈 길인 것이다.”
그 길을 우리끼리 갔습니다. 의욕만 앞선 채 선장도 스승도 없이 휘청거리며 갔습니다. 차가워오는 광활한 가을 하늘을 우리끼리 막막하게 날아갔습니다. 그러나 미운오리새끼는 현실에선 오리일 뿐이었습니다. 일상에선 무능하고 나사못 하나 만들 줄 아는 재주도 없는 문청이었습니다.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시인은 추방되어도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애초 미운오리새끼는 자기를 오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백조가 아니라 그냥 못난 오리로 사는 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살다 죽어 호숫가를 스치는 바람이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이 술 마시게 했습니다. 술 때문에 사고도 많았고 실수도 잘못도 셀 수 없었습니다.
신 선배의 여동생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중단하고 어린 나이에 힘든 직장생활을 했는데 대학생인 우리는 그 동생에게 돈을 빌려 술 마시곤 했습니다. 문학이란 이름으로 용서받기엔 참 철없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오빠들이었습니다. 술값이 없어 학생증이나 시계를 맡기는 일은 숱하게 많았고, 어울려 다니던 후배의 아버지가 사준 고급 가죽점퍼를 술값 대신 잡히고 온 날도 있었고, 선배가 타고 다니던 자전거를 맡기고 술 마시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어떻게 술값을 마련할까 하다가 법대를 다니던 외사촌 형이 법이 바뀌어 쓸모없이 되었다고 밀쳐둔 형법 민법에 관한 책을 외가에서 가지고 나와 책가방에 넣고는 후배들과 술집으로 몰려갔습니다. 술집주인이 방을 드나들 때마다 마치 고시에 떨어져 속상해 술 마시는 것처럼 상황을 꾸며대고는 대취하도록 마셨습니다. 그리고 나올 때 ‘이 책 없으면 난 죽는다, 오늘 이걸 맡기고 가는데 꼭 찾으러 오겠다’고 하고는 술집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는 그 집을 에돌아 다녔습니다.
그해는 해마다 치르던 학생회장 선거가 폐지되고 학도호국단이 만들어져 학생회장과 학생회 간부들을 학교에서 임명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마침 학도호국단이 학보사 기자인 후배를 건드린 일이 생겼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는 학도호국단 사무실로 몰려가 사무실 집기와 책상을 다 뒤집어엎어 놓고 나온 일도 있었습니다. 술이 취해 봉걸래를 어깨에 메고는 세상을 다 청소하겠다고 소리치며 다닌 날도 있었고, 필설로 다 형용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며 살았습니다.
절제되지 않은 감정의 덩어리를 안고,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으로 무작정 가고 있었습니다. 퇴폐적 낭만주의자가 되어, 세상과 유리된 채, 광활한 길을 우리끼리 감동하고, 우리끼리 눈물 흘리며 가고 있었습니다.
도종환 시인, 그림 이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