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어떤 교과서 관련 세미나에 갔다 현재 우리나라의 지리와 역사 교과서에 아프리카에 대한 역사 부분이 전무하다, 아프리카를 너무 제국주의적인 시선에 의해 피상적으로 보고 있다라는 내용을 들은 적이 있다. 나 또한 세계지리 수업을 할때 아프리카 부분에 대해서는 애기할 수 있는게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그때 서점에서 책한권을 산게  루프 판 다이크의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였다. 한동안 책 꽂이에 장식품으로 있었는데, 우연히 프레시안에 이 책에 대한 소개글이 있어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책들이 더 많이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한다. 

 

[철학자의 서재]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

"우분투, 당신이 있으니 제가 있습니다."  프레시안 2010.2.20

우분투! 우분투(Ubuntu)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말 중 하나인 반투어(Bantu language)의 인사말이다. 본래 인사말은 다른 이와 교감하고 공경을 나타내는 말이다 보니 '굿 모닝'이나 '안녕하세요'와 같이 매력적인 말이 많다.

그러나 우분투는 이런 매력적인 인사말 중에서도 유난히 우리의 귀를 사로잡는다. 물론 상대의 행복을 바라는 '굿 모닝'과 상대의 무탈을 기원하는 '안녕하세요'도 우리에게 미소를 간직하게 하기에는 충분하다. 하지만 '당신이 있으니 제가 있습니다.'라는 뜻을 가진 우분투의 겸허함은 유난히 서로를 따뜻하게 하는 인사말로 다가온다.

상대의 실존에 대한 공경과 사랑을 보내고 그로 하여금 나 자신을 확인하는 이 인사말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인사말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요즘 이런 인사말이 유난히 매력 있어 보이는 것은 인사말들이 가진 속뜻이 희미해져가고 그저 인사치레 정도에 그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서글픈 생각도 든다. 어느새 타인은 나를 있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으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우분투와 같은 말은 로맨티스트만의 용어가 되어 이 매력적인 인사말의 속뜻이 점점 낯설어져 가고 있다.

서구의 아프리칸 오리엔탈리즘

대항해(大航海) 시대가 시작된 후 아프리카를 접하는 서구의 시선은 서툴렀다. 익숙하지 않은 대상에 대한 서툰 접근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서투름은 폭력이 될 수 있다. 15세기 중엽 포르투갈 사람들이 제일 먼저 서부 아프리카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 뒤를 이어 다른 나라의 모험가와 선교사들이 먼저 들어오고 다음은 상인들, 그다음은 군대가 들어왔다. 1487년 바르톨로메오 디아즈가 폭풍우 곶을, 1497년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인류의 발상지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 곳곳을 '발견'했다.

그때부터 서구인들은 아프리카를 직접 손대 보지도 않고 곁눈질로만 해부하기 시작했다. 타인의 삶을 멋대로 해부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그 해부조차도 곁눈질로는 잘될 리가 없었다. 수만 년 전부터 이어져온 아프리카인들의 삶을 그들은 단 몇 년 만에 모두 파악했다고 자부했다.

16세기가 되자 아예 선교 거점을 마련하고서는 아프리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이 기억하고 간직하는 하는 것은 '넬슨 만델라' 하나뿐이다. 그러고 나서는 아프리카는 덥고 위험해 보여 가까이도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프리카에 대해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해왔다.

무엇보다도 자기들이 대충도 알지 못하는 갈등과 전쟁 특히 질병과 비참함에 대해 설명하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언제나 아프리카를 도와줄 각오가 되어 있다. 저쪽에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곳곳에 존재하는 비참함은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영화 <블랙호크 다운>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소말리아에서의 작전은 그곳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간섭의 비극적인 결과이다. 또 매년 쏟아지는 서구의 막무가내 지원은 아프리카를 발전시키기보다는 갈등의 씨앗이 되고 있다. 물론 선의의 지원이 많지만 거의 모든 아프리카의 빈국은 그들이 받는 지원금 이상의 부채와 이자를 그 지원국들에 갚고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서양의 입장에서 본 동양에 대한 비뚤어진 시선을 비판하는데 아프리카를 향한 오리엔탈리즘은 이보다 훨씬 더 일그러져 있다. 착취하든 지원하든 소위 선진국들은 항상 아프리카에 군림하려 든다.

한편, 아프리카가 북반구의 선진국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일그러져 있다. 유럽을 직접적으로 접해 본 적도 없는 대부분의 아프리카 사람들은 텔레비전과 전해오는 말에 의해 수많은 환상을 만들었다. 그 넘쳐나는 먹을거리와 풍요, 그 부유함의 한 조각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할 각오가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유럽으로 떠났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더욱 고약한 가난이었다.

이렇게 일그러진 시각은 타인의 존재를 긍정하는 상호 간의 관계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타자를 규정하는 데서 생겼다. 타인과의 관계가 상호간의 소통 없이 일방에 의해 규정된다면 이것은 오해와 폭력을 낳는다.

타자에 대한 인정은 평화의 시작이다 

 

▲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루츠 판 다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프레시안 

타인과 자신의 관계를 정립하고 그 존재를 이해하는 것을 여느 철학자들은 '인정(recognition)'이라 부른다. 헤겔은 인간의 자기의식은 현실 속에 살아있는 타자의 존재에 대한 반성을 통하여 완성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인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개인은 서로를 용납할 수 없고 적대적 관계가 된다. 따라서 이때 상호 간의 폭력이 난무하게 되고 우리 속의 수많은 '나'와 '너'는 오직 자신을 관철시키기 위해 다툴 수밖에 없다.

자신의 입장에서 타인을 규정하려는 고약함이 누그러들지 않는 한 이러한 다툼은 계속될 것이다.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루츠 판 다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는 그동안 너무 쉽게 단정하고 규정한 타인에 대해 함께 반성하는 공간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책 서두에 나오는 아프리카 시 한편은 그들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상호 인정과 동떨어져 있는지 알게 해준다.

검정은 많은 색깔들을 갖는다,
우리가 찾는 빛깔은 검정.
검정은 아주 다채롭고
검정은 장님한테만 어둡게 보인다…….


종족에 따라 다르지만 아프리카인들은 검정색을 많게는 20여 가지로 구분한다고 한다. 그 동안 아프리카를 향한 외부의 시선은 참으로 서툴렀던 것 같다. 지리적, 종족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제국주의자들의 국경 나누기는 물론이고, 선교사들과 자원봉사자들의 서투른 접근은 그들 사회에 테러에 가까운 폭력이 되었다.

그들이 애를 태워가며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선교 활동을 했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야만을 버리고 문명을 선택하게 하겠다는 접근은 자신의 옷을 타인에게 억지로 구겨 넣고 만족해하는 우스꽝스러운 풍경이었다. 이런 폭력적인 교육후원은 아프리카 공동체를 붕괴시켰고 그들의 오랜 경험과 역사는 타인의 규정에 의해 단절되어버렸다.

원로들의 경험이 필요 없어지고 전통은 역사적 매개가 없이 단절되었다. 이 대륙은 겉보기에는 젊어졌지만 젊어진 것이 아니라 미숙해져버려서 유럽인들의 말대로 야만에 가까워져버렸다. 북반구에서 온 자칭 문명인들은 아프리카에서 영어와 서양의 역사를 가르치며 서구문물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었고 결과적으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공동체와 삶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부유하진 않았을지 몰라도 부족하지는 않았던 과거의 전통적 사회는 빈곤과 결핍의 사회가 되었다. 상호인정이 아닌 일방에 의한 규정은 이렇게 잔인하게 수많은 사람의 운명을 절망 속에 머물게 했다.

그러나 역사는 공평한 것인지 더 잔인한 것인지 폭력의 창끝은 유럽을 향했다. 아프리카를 야만으로 간주하며 자신들을 문명으로 자부하던 유럽인들의 독단은 '우리'와 '너희' 간의 상호 인정을 거부하고 타인에 대한 거부로 이어져 자신들의 삶의 공간을 세계대전의 무대로 만들고 말았다.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의 만행을 두고 역사 이래로 끊임없이 발전해온 인류가 이런 야만으로 빠져든 것에 대한 반성과 지탄을 했다. 스스로를 문명이라 자부하며 타인에 대해 야만으로 규정한 유럽이 스스로 전쟁과 학살을 자행한 것에 대해 그는 서구 문명이 자랑해온 계몽은 타인에 대한 지배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비판한다.

서구인들의 자신들에 대한 과신(過信)과 타인에 대한 무시는 자신들도 모르게 스스로를 폭력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타인에 대한 비인정은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 또한 야만의 상태에 빠지게 했다.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동질성이 아니라 공통성이다."

그간 서구 사회가 아프리카에 대해 곡해해온 것과 비슷한 모습이 한국 사회에서도 나타난다. 자신의 잣대를 상대에게 들이대서 자신에게 맞추려는 모습은 비단 서구가 아프리카에 보이는 모습만은 아니다.

보통 통일-비단 남북 간의 통일만 아니라-을 이야기할 때 '동질성'의 회복을 이야기한다. 같은 질을 회복한다는 말인데 얼핏 근사해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살면서 같은 질을 가진 사람을 한 번도 본적 없는 것은 내가 시골사람이어서는 아닌 듯하다.

보통, 사람의 질을 말할 때 '기질'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것은 기(氣)의 질을 의미한다. 하지만 부모님으로부터 같은 기(氣)를 물려받은 동기(同氣)인 형제간에도 그 기의 조합이 달라 기질이 다르게 나타는데 하물며 부모가 다른 타인에게 자신 같은 동질성을 요구하는 것은 참 잔인한 말이다. 상대에게 나와 같은 동질성을 요구하는 것은 타인에게 나를 강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서로에 대한 인정은 동질성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공통성을 찾고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분투가 타인의 존재를 통해 나를 확인한다고 해서 나를 타인 속에 넣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아프리카의 광활한 대지를 품지 못하는 생각이다. 타인과의 공통성 속에서 타인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차이를 존중할 때 비로소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우분투의 이념일 것이다. 하나의 조화로운 흐름을 이루는 통일에는 다름을 아우르는 통이(通異)가 동행해야 한다.

아마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의 숨겨진 또 다른 제목은 '처음 느끼는 다른 삶에 대한 관심'일 것이다. 타인의 삶을 쉽게 단정지어버리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다. 보통 "강아지" 하면 "멍멍", "고양이" 하면 "야옹" 하듯이 "아프리카" 하면 "우가 우가" 한다. 저자의 집필 의도는 이러한 오해에 대한 반발이다.

아프리카인들에게도 삶과 역사가 있고 따라서 사랑과 기쁨 그리고 슬픔이 있다. 비록 책에서는 아프리카에 대한 이야기만을 다루지만, 현대인이 가지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편견의 모습은 서구의 역사가 가진 아프리카에 대한 무지의 또 다른 모습이다. 우리 주변에는 항상 아프리카가 존재한다.

이 책은 아프리카를 예로 타인에 대한 인정에 대해 재미있게 접근하려 한다. 타인에 대한 인정은 타인이 나를 인정하게 하는 손잡음이다. 그 손잡음이 '너희' 속의 '나'를 '우리'로 만들고 나 밖에 있는 타인이 건강해야 나도 건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당신이 있으니 제가 있습니다. 우분투. 

/이원혁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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