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부산 여중생 살해사건의 피의자인 김길태가 잡혔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라고 그가 잡힌 곳은 경찰의 코앞이었다. 여론의 분노에 화답하듯이 경찰은 그를 압송하는 과정에서 ‘이례적으로’ 얼굴을 공개하였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피의자의 얼굴이 공개된 것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이참에 경찰은 흉악범에 한해서 국민들의 ‘알 권리’ 차원에서 얼굴을 공개하는 가이드라인을 준비중이다. 여기에 인권의 이름으로 반대하였다가는 아마 국민의 몰매를 맞을 것이다. 논리는 간단하다. 인권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짐승’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피의자에게는 법이 정한 절차 안에서 범죄가 확증되기 전까지 보호되어야 할 권리가 있다는 ‘무죄추정의 원칙’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닌 짐승의 얼굴은 공개하여도 된다는 것을 뒤집으면 인간의 얼굴은 자의가 아니라면 공개할 수 없고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존중되어야 하는 규범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얼마 전에 있었던 중학생들의 벌거벗은 졸업식 ‘세리머니’를 생각해보자. 그 사건에 많은 사람들은 요즘 청소년들의 폭력에 대해 개탄하였지만, 정작 눈여겨봐야 했던 것은 아이들이 자신이 누구를 괴롭히는 것을 남들이 보라고 버젓이 인터넷에 올렸다는 사실이다. 자신들이 때리는 학생들의 얼굴과 성기까지 몽땅 다 공개하였다. 비옷에 마스크까지 쓰며 자신들의 얼굴을 가렸지만 피해자 학생들의 얼굴이 공개되는 순간 자신들도 공개된다는 것은 모르는 타조들처럼 말이다. 그전에 한 무리의 대학생들은 중국에서 해부 실습을 하면서 시체를 농락하는 것을 인터넷에 자랑삼아 올렸다.

우리는 이미 자의건 타의건 성행위까지를 포함하여 내가 살아가며 하는 모든 것을 24시간 전시하고 생중계 방송하는 것을 권장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한 개그 프로그램에서 꼬집었듯이 연애를 하는 것도, 음식을 먹는 것도, 여행을 가는 것도 오로지 인터넷에 올리기 위해서이다. 남에게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들이다. 거울에 끊임없이 내 얼굴을 비추는 것처럼 미디어에 담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다. 이처럼 자의에 의해서건 ‘알 권리’라는 이름의 타의에 의해서건 우리는 보여주기 위해서 살고, 보기 위해서 살아간다. 프랑스의 한 철학자는 이런 우리 사회를 ‘동물원이 된 사회’라고 일컫는다. 우리 서로 서로가 동물원에서 동물을 구경하듯이 자신을 전시하고 남을 구경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는 존중되어야 할 얼굴 따위는 애초에 없다. 몇몇 철학자들에 따르면 얼굴은 인간만이 가진다. 인간만이 얼굴을 통하여 타인에게 감정을 일으키고 그에 대한 윤리를 요청한다. 따라서 더 이상 윤리적 호소를 하지 못하는 얼굴은 얼굴이 아니라 구경거리에 불과한 짐승의 머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모두 구경거리가 된 짐승의 머리를 달고 사는 인간들에 불과하지 않은가?

진보적 결정을 내린 판사와 일제고사 성적조차 ‘알 권리’의 이름으로 전시되는 세상이다. 그런데도 ‘흉악범’의 얼굴을 공개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가지고 수선을 떠는 것은 우리 모두가 이미 동물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감추고 여전히 우리 사회에 인권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양 떠드는 알리바이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인권’은 모든 것이 공개되는 시대에 예외적으로 빠져나간 모 언론사 사주의 이름처럼 지켜야 할 ‘명예’가 있는 아주 극소수만이 누리는 호사가 되었는데도 말이다.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한겨레신문 201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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