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 기술의 발달과 세계화의 흐름에 따라 지구는 평평해진다고 한다. 지역적 특성도 희미해지고, 그래서 지리학은 존재의 필요가 없다고 한단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과연 그럴까, 난 지리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 반대로 지리학의 중요성은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향후 10년 이내로 지리학의 위상은 더욱 강화될 것이라 믿는다.
한국경제 2009.11.5
누가 세계를 평평하다고 하는가.
부유한 중심부는 ‘가장 평평’하지만 가난한 주변부는 ‘가장 울퉁불퉁’하다.”
하름 데 블레이 미시건주립대 지리학과 교수는『공간의 힘』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세계화로 여러 지역이 유기?통합적이고 평등해져 간다는 의미에서 ‘세계는 평평(flat)하다’(토머스 L. 프리드먼)고들 하지만, 그래도 ‘세계는 여전히 울퉁불퉁하다’는 것이다.
전작『분노의 지리학』에서 세계의 문제들을 지리학적 시각으로 분석한 그는 이번 책에서 세계의 중심부와 주변부를 오가며 국가와 개인, 자원과 종교 등을 입체적으로 펼쳐 보인다.
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구
21세기에도 여전히 세계는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뉘며 국가도 수도권과 지방으로 나뉘어 있다. 단일 문화권의 경계를 넘는 이주가 활발하다고는 하지만 지구촌의 70억 인구 중 68억 명은 평생 모국에서 살아간다. 그는 “거의 모든 문제가 지리적 장벽에 좌우된다”면서 “세계 인구의 15%가 사는 중심부의 연간 소득이 전 세계의 75%나 되는 현실”을 지적한다. 북미와 유럽, 동아시아 같은 나라들의 부는 갈수록 늘어가는 반면 아프리카 등 빈국들의 부는 줄어들기만 한다.
실제로 ‘중심국가’들은 외형상 문을 활짝 열어두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현재의 특권을 잃지 않으려고 애쓴다. 중심으로 들어오려는 이주민들을 온갖 방법으로 막는다. 그 ‘가장자리의 끝’에서 세계 인구의 85%가 세계 총 소득의 25%에 매달려 살아간다.
도시와 시골의 편차도 그렇다. 세계의 절반인 도시 인구는 나머지 절반의 시골 인구가 소비하는 것보다 10배나 더 많이 소비하고 있다. 나라나 개인별로 보면 불균형은 훨씬 더 심각해진다. 미국인들의 평균 자원 소비량은 방글라데시인들의 30배에 달한다. 특정 자원에 한정시켜 봐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루 평균 생수 소비량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네 배 이상이다. 그래서 그는 “미국 도시사회의 소비양상이 전 세계에 적용된다면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네 개의 지구가 더 필요하다”고 꼬집는다.
“지구는 문화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아직 울퉁불퉁한 땅이며, 그 구획은 수많은 이들을 속박하고 있다. 공간의 힘과 인간의 운명은 여러 면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상대적으로 부유한 세계 중심부의 여러 국가들은 자신들의 풍요로운 영역에 더 가난한 세계인들이 진입하는 것을 막으려 벽을 세우고 있으며, 이로써 대조를 더욱 극명하게 하고 충돌의 불씨를 제공하는 중심부-주변부 구분을 강화하고 있다.”
울퉁불퉁한 곳곳은 극심하게 아프다
‘울퉁불퉁한 세계’의 극단적인 단면은 질병 등 생사와 직결된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말라리아 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열대열 말라리아는 열대 아프리카에서 발생한다. 이 말라리아는 중남미나 아시아, 태평양 섬들에서 생기는 말라리아보다 훨씬 위험하다. 그런데 큰 문제는 이들 지역의 말라리아 퇴치 전략마저 실행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주변부 사람들이 여러 풍토병과 전염병의 이중고를 겪지만 그 지역에서 수련 받은 의료진은 더 높은 임금을 주는 중심부로 건너가고 있다.
그가 제시한 지도를 보면 1990년대 말 멕시코에서는 말라리아 고위험 지역이 꽤 넓게 펼쳐져 있지만 미국 남부에서는 말라리아가 50여 년째 발병하지 않았다. 모기 때문에 생기는 뎅기열도 주변부인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지역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저위도 지역의 100개 이상 국가의 인구 25억명이 뎅기열의 위험에 직면해 있다. 더욱이 해마다 뎅기열에 걸리는 인구 5000만명 중 대다수가 아동이다. 그야말로 ‘극심한 울퉁불퉁 현상’이다.
종교가 부추기는 분쟁과 고립
공간의 힘은 어떤가. 그는 “공간의 힘은 세계지도 위에서 건강과 질병, 부와 가난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땅 위에서는 장벽과 바리케이드, 순찰대와 감시관들에 의해 확인된다”고 표현한다. “일부 학자들이 오늘날을 이주의 시대라고 부르지만 우리 중 절대다수는 태어날 때와 같은 정부와 언어·자연·종교?의료 환경 속에서 삶의 마지막 날을 맞는다. 이주에 대한 제약이 유연해지기보다 더욱 강화돼 세계를 평평하게 하기는커녕 더욱 울퉁불퉁하게 만들고 있다.”
종교의 근본주의도 지역민들의 운명을 바꿔놓는 요소다. 그에 따르면 지리적 이동이 잦아져 다른 종교인들과 만나기 쉬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만나봐야 충돌만 가속할 뿐이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슬람교와 다른 신앙 간의 충돌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에서 기독교 근본주의, 인도에서 힌두교 민족주의가 부상하고 있다. 평화롭다고 알려진 불교에서조차 정통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다.
“지역인의 절대다수가 태어나고, 더 많은 이동인들이 출발하는 영역은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 영역이다. 그들이 만날 때쯤이면 그 중 상당수가 자기 종교의 내부충돌, 그리고 종교간 분쟁을 이용하는 근본주의자들의 부추김에 의해서 근본주의화돼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다른 종교가 우세한 지역에 강제와 개종을 통해 자기 신앙을 심으려 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이미 조밀한 문화적 모자이크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며 세계를 그들 종교의 경전에 나온 것과 같은 대격변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지리 장벽을 높이는 언어 문화
지리적 장벽은 문화 영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따뜻하고 습기 찬 저위도 지역에는 소집단별로 언어를 갖기 때문에 언어의 종류가 많다. 뉴기니 섬에서 쓰이는 언어는 900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2000개다. 이에 반해 고위도의 유럽 국가 언어는 200개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두 세가지가 우세하다.
그의 지적대로 근대화 과정의 제국주의와 현대의 문화적 제국주의에 떠밀려 토착 언어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한 나라에서도 표준어 장려 정책으로 지방 사투리가 없어져 간다. 문화를 담는 그릇인 언어가 사라지니 문화의 다양성까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언어 문제의 이면은 더욱 심각하다. 그는 “영어가 정부, 행정기관, 상업, 고등교육의 수단인 세계 공용어로 자리잡으면서 속국의 국민들 중 영어에 능통한 이들은 행정과 정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면서 이를 “언어적 위계에 새롭고 결정적인 층이 하나 더해진 것”이라고 비판한다.
ps : 저자의 위의 글은 우리나라 근현대 역사에 딱 들어맞는 통찰력을 보여준다. 개화기 영어 천재로 불리운 윤치호의 근대화론이나, 미국 유학후 한국에 돌아온 이승만의 정치 인생, 한국전행 후 '통역정치' 그들이 정치, 행정 분야의 요직에 자리를 잡고 또 그들의 후손들이 그 자리를 이어잡으면서 영어를 잘 해야지만이 출세할 수 있는 헤게모니를 잡을 수 있는 한국의 구조가 만들어진것이다. 그것들이 현재 '영어 광풍'이라고 하는 모습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고 단순 비판만 하면서 영어 필요없다. 필요있는 사람들만 영어 하면되는거 아니냐 하는 식의 현실안위적이 시각 또한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전 강준만 교수가 칼럼(강준만의 '영어 광풍의 합리성'이란 몇년 전 칼럼(http://blog.aladin.co.kr/mramor/1410200). )에서 썼듯이 '영어광풍'에 대한 합리적이 이해와 대처가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한다.
“이는 식민지 정부가 토착민들의 영역에 통제권을 행사할 때 그들이 왕의 대리자 역할을 하며 통치자들을 위해 일했기 때문이다. 이제 세금징수원에서부터 학교장에 이르기까지, 대금업자에서 우체국 직원에 이르기까지, 이득은 영어권에 있다.”
세계를 평평하게 만드는 실천 노력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의 희망은 ‘장벽 낮추기’다. 그 대안은 우리도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가 ‘중요한 건 효율적인 실천’이라고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부국들이 빈국에 제공하는 원조는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은’ 것이며, 빈국이 자력 소생할 기회를 걷어차지 않도록 해야 하고, 주변국 사람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기후 문제 등에 대한 책임감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그는 당부한다.
『공간의 힘』은 오바마 대통령이 2008년 대통령 선거와 1월 취임식 사이에 꼭 읽어보았으면 하는 책의 하나로 추천됐다. 세계가 결코 평평하지 않다는 것을 지리학과 문화사회학의 렌즈로 촘촘하게 비춰주는 역작이다.
고두현 (한국경제 기자) 2009.11.5
하름 데 블레이
미시건 주립대학 지리학과 교수로, 『분노의 지리학(Why Geography Matters)』을 비롯해 30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협회의 평생명예회원이자, 미국 ABC TV 프로그램 ‘굿모닝 아메리카’의 지리학 에디터로서 7년간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