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설연휴도  다 지났다. 언제부터인가 왠지 모르게 명절이 즐겁지않은 듯 하다. 나이먹음에 증거이겠거니 한다. 나도 예전에는 구정, 신정이란 단어를 무심결에 사용했다. 다들 그렇게 말을 하니 그것이 맞는 말인줄 알았다. 하지만 구정, 신정이란 단어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양력 초하루와 우리들이 사용했던 음력 초하루를 구분하기 위해서 만든 용어 였단다. 그 사실을 안 다음부터는 신정은 그냥 1월1일이고 구정을 그냥 설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과거사 청산이란 거창하게 일본의 백배사죄와 배상금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내재되어있는 이런 사소한 용어, 습관 부터 바꾸는 것이지 않을까 한다. 아래는 한겨레신문 기사내용이다.  

1926년 서울 북촌 일대의 설 풍경

식민지의 우울함이 자욱했던 당시, 총독부의 양력 사용 강요에도 조선인은 여전히 설을 쇠고 있었다. 거리에는 갈비·꿩·귤·술떡 등 가지각색 세찬을 이고지고 다니는 남녀노소로 장터를 이루었다. 북촌의 한 떡국집은 초하룻날에도 문을 열어 타향살이하는 하숙생들의 외로움을 달래주었는데…  

서울이 근대의 바람을 맞아 도시화로 치닫고 있던 1926년, 그 해 2월14일치 <동아일보> 5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서울 북촌의 거리에는 수일 전부터 갈비, 꿩, 귤, 술병, 기타 가지각색의 세찬을 혹은 이고 혹은 지고 다니는 남녀노소로 때 아닌 장터를 이루어오는 한편으로 귀여운 딸과 어린 아들의 손을 잡은 부녀들이 혹은 옷전으로 혹은 신가게로 혹은 구둣방으로 사랑하는 자녀들의 설빔에 분망하다.”  

여기에서 ‘세찬’(歲饌)이라 함은 설날에 먹는 음식을 가리킨다. 그런데 나열된 세찬 중에서 꿩이 왜 들어 있을까? 꿩고기는 조선시대에 쇠고기보다 국물을 만드는 데 훨씬 많이 쓰인 고기 재료였다. 꿩을 사냥하는 일을 놀이로 했던 양반들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는 소보다 꿩고기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래서 육고기가 필요하면 닭보다 꿩이었고, 쇠고기보다 꿩고기였다. 하지만 식용을 위해서 소를 키우기 시작하는 20세기에 들어와서 야생의 꿩고기보다 쇠고기가 떡국 국물을 만드는 데 더 자주 이용되었다. 

떡국을 만들려면 먼저 가래떡이 필요하다. 가래떡은 원래 멥쌀가루를 익반죽해서 만든 떡을 여러 번 쳐서 손으로 문어다리같이 굴려 빚어 길게 만든다. 19세기 초반에 나온 <열양세시기>에서는 이 가래떡을 ‘권모’(拳模)라고 불렀고, 1840년 전후에 쓰인 <동국세시기>에서는 ‘백병’(白餠)이라 불렀다. <동국세시기>에 나오는 떡국 만드는 과정은 매우 자세하다. “흰떡을 엽전과 같이 잘게 썰어서 간장국에 섞어서 쇠고기와 꿩고기와 고춧가루를 섞어 익힌 것을 병탕(餠湯)이라 한다”고 적었다. 그런데 고춧가루를 떡국에 넣은 점은 지금과는 다르다. 아마도 꿩고기의 냄새를 없애기 위해서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1926년 설날의 세찬으로 꿩이 등장한 이유 역시 떡국의 국물을 내는 데 여전히 꿩고기가 으뜸이라고 여겼던 당시 서울사람들의 입맛 때문이었다.  

세찬으로 등장하는 갈비는 예나 지금이나 쇠고기의 갈비로 조리한 음식이다. 갈비는 조선 후기만 해도 왕실에서 우육(牛肉) 먹기를 금지시켰기 때문에 권세가가 아니면 먹기 어려웠다. 하지만 1920년대 초반이 되면 지금의 서울 낙원동 일대에 숯불에 구운 갈비를 냉면과 함께 판매하는 선술집이 생겼다. 하지만 그 가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갈비는 설날과 같은 명절이 되어야 일부 가정에서 특별음식으로 먹을 수 있었다. 귤도 조선시대에는 궁중에 진상하던 과일이었지만, 일제 강점기 이후 제주도에 개량 귤이 재배되면서 그 사정은 달라졌다. 비록 지금과 같이 흔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돈만 있으면 귤 구입이 가능했다.  

술병은 술떡을 가리킨다. 다른 이름으로 기주떡, 기주병, 기증병, 벙거지떡이라고도 불렸다. 멥쌀가루에 막걸리를 넣고 부풀려 찐 술떡은 보통 한여름이 되어야 발효가 잘되기 때문에 한겨울에 먹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근대적인 기술이 도입되면서 한겨울에도 술떡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동국세시기>에서는 설날의 대표적인 떡으로 팥시루떡을 꼽았다. “멥쌀가루를 시루에 찌는 중에 삶은 붉은팥을 켜로 까는데 멥쌀가루의 두께는 시루의 크기를 보고 정한다. 혹은 찹쌀가루를 켜로 넣어 찌기도 한다. 이것을 증병(甑餠)이라고 부른다. 이것으로 새해에 귀신에게 빌기도 하고, 초하루와 보름 또는 아무 때나 귀신에게 빌 때도 올린다”고 했다. 하지만 집에서 쉽게 만들 수 있었던 팥시루떡과 달리 그 부드럽고 달콤한 맛 덕분에 1926년께는 서울 종로의 가게에서 세찬의 하나로 팔렸다.  

비록 식민지의 우울함이 자욱했던 1926년 서울이었지만, 음력 설날을 앞두고 서울의 북촌 일대는 분주한 명절 대목의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섣달그믐날까지도 고무신 가게나 포목점 중에서는 밤늦게까지 준비 못한 고객을 기다렸다. 하지만 설날 초하룻날이면 종로의 대부분 가게는 문을 닫았다. 이에 비해서 양력설을 지내는 일본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지금의 명동과 충무로 일대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전방마다 문을 열고 회사마다 사무를 보며 나막신 신은 학생들이 학교 시간을 맞추느라 숨이 턱에 닿도록 달음질을 한다”고 했다.  

근대 이전에 일본 역시 조선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달력인 음력을 사용했다. 하지만 1867년에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하면서 근대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서양 역법을 채용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공식적인 달력으로 조선인도 그들처럼 양력을 사용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미 양력으로 바뀐 세상에서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에게 음력설날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하지만 서울에 유학을 와서 북촌 일대에서 하숙을 하던 조선인 학생들에게는 명절 설날에도 학교를 가야 하는 고달픔이 있었다. 물론 떡국을 먹는다는 생각은 상상도 못할 일.  

그런데 지금의 북촌 한옥마을 근처에 당시 떡국집 한 곳이 문을 열어 화제가 되었다. 앞의 <동아일보>에는 ‘지방학생 위해 떡국집은 개점’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초하룻날 떡국이 팔릴 것 같지 아니하여 화동(花洞) 어떤 떡국집 주인에게 물어보았더니 ‘서울에 집이 있는 사람이야 누가 오늘 같은 날 떡국을 못 먹겠습니까마는 오늘 떡국을 먹지 못하면 까닭 없이 섭섭하다 하여 부모를 떠나 시골서 올라온 학생들의 주문이 하도 많기에 이렇게 문을 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닙니까 하숙집에서 떡국까지 끓여 주는 집이 어디 쉽습니까’ 하며 말을 한다.”  

이렇듯 조선총독부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1926년 즈음에도 조선인은 여전히 음력설날을 쇠고 있었다. 당연히 설이란 이름도 신문에 떳떳하게 등장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이 되면 설이란 이름이 신문 지상에서 사라진다. 심지어 떡국을 먹지 말자는 캠페인이 벌어지기도 했다. 쌀밥 먹기도 어려운데 왜 아깝게 떡국을 먹느냐는 주장이었다. 이 모두 전쟁에 미쳐버린 일본제국주의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로부터 적어도 1980년대 초반까지 설날은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네 달력에서 떳떳하게 자리를 잡지 못했다. 자연히 떡국이나 술떡을 세찬으로 판매하는 가게도 지금은 없다. 그 대신 제상에 가득한 차례음식에 온갖 빛나는 음식들이 설날 아침의 식탁을 채운다. 사시사철 각종 음식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1926년 떡국집에서 간신히 설음식을 얻어먹던 하숙생의 애틋함이 그리운 이유는 무엇일까.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민속학) 한겨레, 2010.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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