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스트가 되기 위한 공부의 첫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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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렉 다이크 지음, 김유신 옮김 / 황금부엉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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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리드 평전- 사랑과 열정 그리고 혁명의 투혼
로버트 A. 로젠스톤 지음, 정병선 옮김 / 아고라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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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아시아
아시아네트워크 엮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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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로 산다는 것
시사저널 전.현직 기자 23명 지음 / 호미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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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 위에 오른 밥상 - 건강한 사회를 위한 먹거리의 대반란
우석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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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첫번째 퍼즐, 도마 위에 오른 밥상

우석훈의 글들이 나에게 영감을 주고,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주고 있는데, 내가 읽은 우석훈의 저작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 <88만원 세대> ->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 -> <아픈 아이들의 세대> 순이었다. 그의 블로그를 들락날락 거리면서 '퍼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이제야 조금 알 것같다. 그의 <음식국부론 - 도마 위에 오른 밥상>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의 <음식국부론 - 도마 위에 오른 밥상>과 <아픈 아이들의 세대>가 현상들을 통해서 그 근원에 어떤 문제가 있는 지를 추측하게 하는 퍼즐 조각이라면, <한미FTA...>는 그 경향을 촉진할 수 있는 퍼즐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사실 정확한 인과관계는 아니고, 수십개의 조각으로 구성된 퍼즐의 조각조각을 통해서 그림을 그리는 것과 동형적이라 할 수 있겠다. <88만원 세대>가 그 결과물들이 그려내는 세상에서의 10대와 20대의 지금을 말한다면, <샌드위치 위기론 ...>은 지금의 기업들이 당면하는 '본질적' 위기에 대한 다시 바라보기가 될 것이다.

<도마 위에 오른 밥상>은 우리의 음식, 식단에 대한 이야기다.

우석훈이 가진 강력한 재능은 '박학다식함'이 신문 스포츠면 수준의 평이한 수준의 글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책은 10대도 읽을 수 있고, 가정집의 가사노동을 하면서 잠시 밖에 짬을 낼 수 없는 한국의 주부들도 읽을 수 있다. 이 책에서도 그러한 장점은 유감없이 드러난다.

'한살림'이나 'coop' 등의 생협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는가? 요 몇년 새, 주부들의 입소문을 통해서 퍼지기 시작한 운동의 결과물 들이다. '아픈 아이들'이 늘어나고 그에 대한 원인 조차 알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대응인데, 아토피가 그런 흐름들에 크게 기여했다. 난 아직 결혼을 하지도, 아이를 가져보지도 않았고, 아토피를 앓아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크게 공감할 수 있을 지 장담을 못하지만, 밤새 가려워 긁는 '티없이 맑은 아이'의 울음을 듣는 엄마가 아이 만큼 마음 아파했으리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우석훈은 '아빠들의 입맛'과 '엄마들이 차려주는 밥상'의 괴리를 이야기하는 데, 밖의 식당에서 조미료에 버무려져버린 음식을 먹어버릇하여 길들여진 입맛을 가진 아빠들이 집에서 "왜 이리 싱거워?"를 연발하면서 엄마들은 조미료를 더 넣기 시작하고, 그걸 같이 먹는 아이는 '조미료'가 주는 영향권에 그대로 포획되게 된다. 결과적으로는 그런 입맛을 가진 아이들이, 지속적으로 '얕은 맛'에 노출되고, 외식을 즐겨하게 되며, 설탕과 조미료로 가득한 식단을 추구하게 되며, 아토피가 아니더라도 '비만'에 노출되는 것이 지금의 우리 식습관이 만들어낸 사회의 모습이다.

된장이 한동안 천대받다가 '항암제'로 추앙받기 시작하였고, 김치가 '세계인의 식품'이 되었다. 둘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단순하다. 오랫동안 먹어왔기에 검증되었다는 점, 그리고 '발효'라는 혁신적인 맛의 기법에 의한 음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진보'에 대해서 매번 강변하지만, 기실 음식에 대해서 '보수'적인 것이 오히려 사회적인 혁신을 추동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음식 국부론

이런한 음식 이야기에 끝에 '음식국부론'이라는 제목에 대해서 생각할 문제들을 던지는데, 미국의 농업형태, 축산형태에 대해서 알려주는 부분이다. 우리는 미국에 대해서 자유주의적인 방법에 의해서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는' 방식의 영농정책이, 그리고 축산정책이 집행되리라 생각하지만, 미국은 그들에게 '생계비 형태'의 보상을 통해서 농업을 육성하고 있다. 그리고 대규모 원조를 통해서 세계인의 입맛을 길들이고 그것을 통해서 수요를 창출하면서(대규모 곡류 메이저 기업들) 이익을 보전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농업을 버리는 정책의 연속이다. WTO 문제가 불거진 이후 10여년이 지나고 있지만, 농업은 언제나 '울며 징징대는' 귀찮은 존재였을 뿐, 그들에게 진정한 '시민권'과 '생산자'로서의 권리를 준적이 없으며, 가장 진보적이었던 정부는 "6헥타르" 즉 1만 5천평 이상을 가진 기업농 형태가 아닌 다른 농업 형태를 철수하는 기조로 농업을 집행했고, 그 결과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이제 곧 음식의 '안전'이라는 것이 쟁점이 될 텐데, 그 때 우리는 누가 만든 식재료를 가지고 음식을 만들어 먹어야 하는가? 농촌 공동화를 오히려 조장하는 현재의 풍토는 곧바로 '아픈 아이들의 세대'를 양산하게 할 수밖에 없다. 유기농을 먹여야 겠지만, 현재같은 농업공동화가 심화될 수록, 유기농 농산물의 국산비중은 줄어들 수밖에 없고, 유기농 농산물은 비싸질 수밖에 없으며, '하이엔드'화 될 수밖에 없다.

그의 저작들은 언제나 처음에는 '우울함' 그리고 '극한적인 절망'을 안겨주지만 대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빼놓지 않는데, 그렇기에 결론 부는 오히려 '마지막 기회'를 말하는 어느 정도는 희망적인 논조가 보인다. 또 그가 다른 사회과학자들과 다른 것은 지금까지 나왔던 솔루션들과 좀 다른 방식의 '공동진화'라는 시스템을 상정하는 대안들을 내놓는 다는 점이다.

그가 말하는 대안은 '생협'이다. 최소한의 '중간거래'를 차단하고 진정 믿을 수 있는 음식, 안전한 음식을 얻을 수 있는 대안으로서의 '생협'. 우리는 '생협'에 대해서 '먹물 좀 먹은 가방끈 여자들'의 '귀찮은 소비행태'로 이야기 하는 경우도 있고, 어쩌면 지금까지의 어떤 좌파들도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하지는 않는 듯하다. GMO에 대한 비판은 하지만, 그 대안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데, 우석훈의 강점이란 당장 쓸 수 있는 '정책'으로서의 '대안'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음식에 대한 선택은 언제나 '개인적'인 것이 된다. 내가 '아웃백'을 먹던지 아니면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된장찌개'와 '계란 후라이'를 먹던지는 언제나 내 선택일 것이다. 물론 내가 유기농을 사는 지 안 사는 지의 문제 또한 내 개인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대다수가 유기농을 먹을 수 있는 환경에 노출되게 하는 것과, 유기농을 소수의 백화점 특별 매장에서만 살 수 있는 환경에 대다수의 사람들을 처하게 만드는 것은, 사회적인 문제, 크게는 국가적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공동진화'해야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사실 '거대담론'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생각에 '디테일'을 읽어내는 능력이 떨어졌던 나에게 이런 우석훈의 저작들이 주는 힘이란 엄청난 것이고, Journalist가 되려는 계획에 있어서도 많은 소스를 주며, 어떤 방향으로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한 번쯤 다시 고민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다. 다시 한번 그의 저작들을 찬찬히 살펴 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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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의 열망과 절망 - 진보.개혁의 위기를 말하다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엮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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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민주화, 처절한 응징의 20년


민주화, 6월 항쟁, 5월의 광주, 등등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왠지 모를 뭉클함이 들지 않는가? 혹은 여전히 그 때 부르던 민중가요를 되뇌이지 않는가?

민주화의 상징이었던 6월 항쟁이 발발한 지 20년이 지났다. 문민정부를 거쳐 평화적인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룩되고, 또 한편으로 순수한 개혁세력(?)에 의한

정권이 성립되었고, 그 마지막 해수를 채워가고 있다.

민주화를 꿈꿨던 사람들이 바랬던 세상이 우리에게 과연 근접해 오고 있는가?

환멸의 정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믿었던 이들에게 실망하는 것은 둘째치고 뒤통수나 맞지 않았으면 하는 경우는 발견하지 않았나??

아니 이 정도의 이야기도 굉장히 앞서가는 것일 수 있다.

오히려 이제 그러한 담론들이 '허무맹랑한' 소리에 처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건 아닌가?

막연한 진보에 대한 기대와, "역사는 진보한다"라는 믿음에 기대었던 이들에게 현재까지의 20년은 어쩌면 상실의 시대였을 수도 있고,

오히려 그런 진보적 담론들에 대해서 반대하거나, 혹은 이해하지 못했던 이들에게 이 20년은 철저한 학습효과를 통한 '부정'을 만들어 내는 기간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경향들을 정확하게 짚어내서 현장감 있게 펼쳐냈던 어떤 방법의 수단도 사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민주화 20년의 열망과 절망"은 이에 대한 처절한 현장 보고서다.

"이제 많은 이들에게 6월 항쟁은 기억을 통해서가 아니라, 활자와 다큐멘터리 필름을 통해 배워야 할 역사로 편입되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완성되지 않았다. 민주화 20년 동안 힘없고 소외된 자, 가난한 자들을 구원하고 민중을 위한 세상을 열겠다고 나섰던 사람들이 집권하고, 권력과 부와 명예를 얻고, 이 사회의 주류로 부상했다. 그런데 왜 새로운 사회를 향한 그때의 열정은 오히려 싸늘한 절망으로 식었는가? 그토록 목마르게 부른 민주주의가 왔는데 왜 아직도 가진 자는 더 많이 갖고, 없는 자는 더 가난해지고, 거리는 아직도 비정규직과 농민, 구조조정을 당한 자들로 넘쳐 나는가? 왜 처자식을 살해하고 자살하는 가장이 늘고 있으며, 굶주려 우유와 빵을 훔쳐 먹는 이들이 아직도 많은가?"(p.360)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부문의 치명적 단상들을 말로써, 그리고 현장의 모습으로써, 또한 지표로써 보여준다.

그리고 또한 그것들에 대한 대안들이 어떤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말해준다.

게다가 가감없이 진보를 비판하고, 어떤 면에서 문제점들이 발생하는 지 그 단면을 해부해 본다.

그 논쟁들의 축을 타고 지도를 그려보고 싶다.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역사적 맥락과, 철학, 경제적 배경이라는 것을 말이다.

어떤 거창한 담론보다 현실의 절절한 묘사가 더 강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저널리즘의 표본이다.!

p.s. 결론적으로 이 책은 최장집 선생이 말했듯, 민주주의는 결국 노동의 문제고 이 노동의 문제라는 것은 단순히 노사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질의 문제, 양극화의 문제, 전반적인 사회적 분위기의 문제가 된다. 고착화된 사회. 우리는 어떤 사회를 그릴까의 문제이기에 우리 사회의 단면을 살펴볼 수밖에 없는 거다. 그리고 그 중심에 노동의 문제가 있는거다. '노동의 정치적 위치'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밖에 없고, 고용이라는 것이 주는 정치적 파장, 비정규직이 주는 사회적 효과를 더 염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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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 미국 복음주의를 모방한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 그 역사와 정치적 욕망
김진호.최형묵.백찬홍 지음 / 평사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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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in 1907

작년이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 기념이었다고 한다(http://1907revival.com/). 어렸을 때 교회에서 불렀던 '부흥'이라는 노래가 생각이 난다.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 용서하소서 이 땅 고쳐 주소서

이제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이땅의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을 때
우리의 우상들을 태우 실
성령의 불 임하소서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오 주의 영광 가득한 새날 주소서
오 주님나라 이땅에 임하소서"

'부흥'은 왜 이루어져야 하는가? 천천히 생각하다보니, 가사가 끔찍하게 다가온다. 하나님께 오로지 회개하는 자에게 죄악의 용서가 있을 것이며, 우리들의 우상들에게는 성령의 불이 과감하게 선사될 것이며, '부흥의 불길'과 '진리의 말씀'과 '은혜의 강물', 그리고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는 그 주님나라가 다가오게 될 것이다.

철저하게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데다가, 부흥, 진리, 은혜, 성령이라는 것은 주에게서 나오는 것이기에 우리는 철저히 수동적 객체로 전락하게 된다. 이에 대항하면 '우상'과 같은 급이 되기 십상이다. 이런 노래를 부르고 있었구나.

2002년 월드컵에서 "Again 1968"의 카드섹션을 기억하는가? 똑같은 구호가 작년 한동안 교계에서 설파되었었다. 평양대부흥운동에 대한 글들을 읽다보니, 이 부흥이나 노래속의 '부흥'이나 결국 비슷한 의미라는 생각이 든다.

Again 1907도 결국에 끔찍한 과거로의 복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례한 者들의 크리스마스> - 무엇이 무례한가?

지금까지 여남은 권의 책들을 읽어왔고, 한국 교회에 대한 나름의 생각틀을 통해서 그것들을 소화해 왔고, '역사적 예수론'이라는 대안적인 이론틀로써 '기독교인'으로서의 나를 어떻게 정립할까 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한국 교회에 대한 비판으로 꼽을 수 있는 책들은, 오강남의 <예수는 없다>(http://blog.aladin.co.kr/hendrix/1857177)와 류상태의 책들(http://blog.aladin.co.kr/hendrix/1713606, http://blog.aladin.co.kr/hendrix/1857014),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의 <무례한 복음>(http://blog.aladin.co.kr/hendrix/1836958) 정도였는데, 이 책 <무례한 者들의 크리스마스>는 그 중에서 가장 심층적으로 벼려진 책이라고 볼 수 있다.

도대체 무엇이 무례하다는 이야기인가? 저번의 <무례한 복음>에서의 '무례한'이 다른 나라의 민중들에게 '제국주의적'이고 '일방적'인 방식으로 전해지는 복음의 수식어였다면,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이하 크리스마스)에서의 무례한은 1)내부적으로 성서무오류의 근본주의 2)사회에 강요하는 보수주의 3)'비정치성'을 가장한 정치교회의 3가지 층위로 정리할 수 있다.

이 3가지 층위는 서로 엉켜서 서로 강화하며, 타자에 대한 배타성을 더욱더 드러낼 수밖에 없고, 더 강고하게 '병리적 현상'으로서의 교회를, 그리고 '권력장치'로서의 교회의 이빨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한국교회의 '무례함'의 계보학

이러한 한국교회의 '무례함'은 역사적인 것이다. 허나 이것은 '정통'에서 뿌리내려서 올곧게 내려온 산물이 아니라, 사회의 갖가지 현상들이 뒤엉켜진 것이었다. 이 '역사성'을 생각해 보자. 초기 선교사가 들어왔을 때, 선교사들의 입장이라는 것은 '제국주의적'인 것에 다름 아니었다. 민중들은 수탈과 '전쟁' 그로 인한 기근으로 인하여 교회를 찾았으나, 이에 대해 선교사들을 위시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탐탁치 않게 여겼다.

절박한 민중의 간구라는 것에 대답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었고, '예수쟁이'를, 그리고 교회의 '신도'를 통한 '기독교化'를 바랬던 선교사들은 그들의 사회적 요구라는 것에 대답하지 않았고, 오로지 '예수이름으로' 기도하고, '내밀한' 차원에서의 하나님 섬기기를 바랬다. 정치적, 사회적 환경에 더욱더 극한으로 이르렀을 때, 민중들은 교회를 찾았고, 교회의 지도자들은 똑같이 '기독교화'를 바라게 되는 데, 그것들이 마주쳐 일어난 사건이 '평양대부흥운동'이었던 것이다. 극한의 심리적 위축은 '간구하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찾게 되고,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개개인에게 있어서 이것이 '심리적'인 평안을 얻게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생활의 변화나, 정치적인 유의미한 변화, 혹은 사회적인 개혁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한편에서는 '억눌린자'의 펼쳐짐이 아닌 '억눌린자'를 골방-기도방으로 내미는 결과만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바람을 탄 평양의 기독교가 한국의 주류 기독교가 되었다. 이후에도 일제-식민치하의 엄혹한 현실은 '주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이들에게 더더욱 악조건을 만들었고, '신사참배'라는 불행이 그들에게 닥쳐왔다. 사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가장 온전한 답을 제시할 수는 없겠지만, 이들은 꿋꿋히 기도했다. 적극적 '대항'보다는 소극적인 '저항'으로 버틴것이다. 교계 지도자들 중 많은 이들이 잡혀들어가 순교를 당했고, 이러한 경험은 그들에게 트라우마가 되었으며, 그러한 트라우마는 치유되지 않은 채, 전쟁의 상흔마저 닥쳤을 때, 전혀 회복될 수 없을 것 같은 지경에 이른다.

문제는 이의 해결책이다. 그들은 이러한 대외적 환경에 '이분법'적 잣대를 들이대었고, 반공주의와 친미라는 길을 택하게 되었으며, 더 문제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와 그들의 신앙을 동일선상에서 엮어버렸다는 점이다. '성서무오설'로 정리될 수 있는 근본주의적 강령은 비판이나 '자유로운 사유' 따위는 헌신짝처럼 갖다 버렸다. 그들은 '온전한 믿음'을 택하는 대신 하나님이 주신 '두뇌'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독재시대에 있어 대다수의 기독교는 한편으로는 '정치에 대한 비개입'을 이야기하면서 진보적인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사회참여를 반대하였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구국기도회'등을 통하여서 정권을 찬양하였고, 한국의 압축적인 경제성장과 교회의 압축적인 성장이 함께 했다는 것은 어쩌면 이러한 경향속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교회는 든든한 '독재정권'의 우군이었던 것이다.

최근 교회들이 제목소리를 내면서 '정치화'되는 것도 설명이 가능해진다. 그들이 갖고 있는 '근본주의적' 가치관과 사회적인 보수주의적 입장과 반하는 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악'의 무리가 나라를 집어삼키려 하는 데, 가만있을 수 있겠는가?

물론, 최근의 세련된 경향의 근본주의(NGO로 포괄될 수 있는)의 교회들은 예전처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빨갱이'를 지옥에 보내라는 사자후는 토하지 않지만, 세련된 보수(New-Right)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보수적 입장을 강력하게 제기하고 있다.

한국교회를 단순하게 '미쳤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성을 봐야한다는 것이다. 예전에 <정치교회>(http://blog.aladin.co.kr/hendrix/1859898)를 읽을 때도 생각했었지만, 교회들의 이러한 정치적 성향은 오히려 순수한 그들의 욕망의 목소리이다. 한편으로 그들은 이미 권력의 추구를 명시하고 있는 정치권력에게 놀아날 소지가 있기에 그렇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미 한국의 교회는 극우적 멘털리티 그 자체를 창출하고, 권력을 창출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고, 그것은 대형화-세습화라는 양상을 띄고 있는 교회들의 경향들을 보면서 느낄 수 있으며, 또한 '특권'(면세혜택 등)과 함께 '자본'을 함께 향유하는 교회들의 구조를 보면서 더욱 더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

진보적 기독교인은 무엇을 해야하는가?

사실, 진보적 교회 이야기를 일부러 빼놓았다. 한국의 진보적 기독교와 그 운동이라는 것은 독재정권의 시대에서도 제 목소리를 내고, 민중의 '흐느낌'을 그대로 이어받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해왔다. 초창기의 사회운동이 크리스찬아카데미 등에서 길러진 이들에 의해서 제창되었고, 또한 민중운동의 많은 이들이 '민중신학'의 세례를 받기도 하였으며, 억눌린 자들을 대변하는 교회의 역군들이 진보적 기독교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바다.

하지만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제목 그 자체가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했던 것은, '제도적' 민주화라는 것이 어느 정도 시작되었을 때부터의 '진보적 기독교'라는 것의 자리매김이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는 동안 진보적 기독교 인사들 중 많은 이들이 정부에 개입했고, 나름의 자리를 확보했었다.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아니, 어떤 차별성이라도 만들어 내었는가.

문제는 그들의 당연스러운 '변화'에 대한 자각이 부족했던 것이 먼저이리라. 그들 중 일부는 '자유주의자'였을 테고, 또 다른 사람들은 지금의 기준에서 '좌파'였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민족주의자'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이는 민주화를 위해서, 또 다른 어떤 이들은 '민중의 생존권'을 위해서, 그리고 '조국의 통일'을 위해서 기도했을 것이다. 이들의 '차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차이는 묵살되고 '범-' 이라는 접두어가 가르치듯 항상 묶여서 '덩어리'로만 보이려는 경향들이 오히려 한줌밖에 안되는 숫자의 그들의 발목을 옥죄었다. 다양한 논의를 펼치고 그것들의 실천들을 담보로해서 '연대'하는 것 보다는, 항상 뭉쳐서 '한목소리를 내야한다'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온 것은 아닐까?

안병무 이후의 민중신학이 없는 것은 어쩌면 '천개의 민중신학'을 통합한 '하나의 민중신학'을 꿈꾸기에 그래왔던 것은 아닐까? 진보적 기독교가 쇠퇴하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진보적 기독교'를 규정하려는 망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작고 다부진 '신학운동'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소망이다. 그리고 그것이 '공룡'이 되어버린 한국 개신교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다. 여전히 더 읽어야 겠지만,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꾸준히 생각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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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표정훈 지음 / 궁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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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서주의자 표정훈

예전에 그의 <탐서주의자의 책>(마음산책, http://blog.aladin.co.kr/hendrix/1780997) 을 읽었었던 기억으로, 이 책을 집었다. 책을 좋아하는 친구와 서점에 갔지만, 이래저래 방황하고 있었기에 선택의 시간을 재촉하는 분위기에 휩쓸려 그냥 집었다. 보통 내가 책을 사려할 때 고민하는 몇 가지 요소가 있는데.

먼저, 그 내용이겠고, 둘째로 저자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려하는 건 출판사인데, 이 책의 경우는 내용에 압도되었다기 보다는 저자에 대한 믿음에서 집은 책에 속한다. 번역서의 경우에는 출판사가 두번째에 이르게 되는데, 보통 단단한 번역을 허락하는 몇몇 출판사가 아니면, 한참을 읽어보고야 책을 사게 된다. 정말 그 책의 번역이 오로지 한 출판사에서 나온 한 판본에만 있을 경우가 아니라면야, 쉽게 책을 고르지는 못하는 것 같다. 번역자에 대한 믿음이 있을 경우는 물론 제외겠지?

표정훈은 확실히 탐서주의자이다. 그의 장서량에서도 그렇고(대략 5000여권?), 책에 대한 그의 집착이 그렇고, 책을 만날 때의 접근 법이 그렇다.

   
 

 엽기적이라고 받아들일 분도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새로 나온 책을 구입하거나 증정받았을 때, 제일 먼저 책을 펼쳐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다. 책마다 그 나름의 냄새가 있기 마련이다(p.17).

 
   

사실 누구나 그 냄새를 맡고서, 즉각적인 반응을 취하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그것을 정돈하여 하나의 양상으로 인지하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나 역시 책의 냄새를 맡는데, 난 좀 오래된 책의 '삭은 냄새'도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아직 그리 고전적이지는 않아서 역시 가장 좋은 건 약간의 '향'을 첨가한 책의 냄새이다.

   
 

 책사냥꾼들이 있다.
 책사냥꾼이 보통의 사냥꾼들과 다른 점은, 사실상 일상 생활의 모든 장면들 속에서 사냥감을 물색하는 안테나를 접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신문을 비롯한 각종 언론 매체는 물론이거니와, 오랫만에 방문한 친구집 서가라든가, 약속 시간보다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눈에 들어오는 주변의 서점이라든가,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읽고 있는 책이라든가, 버리지 않고 쌓아둔 몇 년 전 신문더미라든가....(p.36).

 문자 금단 현상,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문도 들어오지 않고 변변한 책이나 책방 하나 없는 산골에서 사흘 이상을 견디지 못하는, 일종의 문명병이라고 할 수 있을 법도 하다. 사실상 치유 불능에 가까운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내릴 수 있는 처방 아닌 처방은 아마도, 병원에서조차 치료를 포기한 시한부 말기 암환자 가족에게 의사가 건네는 이런 말밖에 없을 것 같다. "집에 모시고 가서 드시고 싶은 것 마음껏 드시게 하십시오."(p.40)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책을 읽고, 많이 책을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의 충고는 굉장히 실용적인 도움이 된다. 그의 서가 정리에 대한 기억들이 우리-책벌레에게는 추억담이 될 것이고, 그의 책 소비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카드명세서에서 '서점'으로 채워진 부분을 볼 때느끼는 약간의 '지름신'에 대한 망연자실 그리고 또 다시 이어지는 '서점 러시'에 대한 '습벽'의 기억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 '책벌레' 계보로 들어오려면 뻔뻔해야 한다. 할 말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사실 책장은 한약방의 약장과 비슷하다. 이 경우 책은 약장의 약이 된다. 체질과 증세에 따라 어떤 약을 얼마만큼 써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으면, 비록 당장은 필요 없다 해도, 언젠가는 그 약효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그런 약 말이다. 이 경우 중요한 것은 우수한 품질의 약재를 고르고 갖추어놓는 감식안이라 하겠다.

 물론 책에 대해서 약과 마찬가지로 '꼭 필요하다'는 식의 표현을 쓸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필요의 종류가 워낙 다양하고 각자의 처지와 취향에 따라서 그 필요한 정도가 천차만별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가에서 먼지의 무게를 견디며 기다림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책이라 할지라도, 그 기다림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날이 오리라는 믿음을 나는 버릴 수 없다(p.65).

 
   

이런 그이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고, 뒷부분의 이야기들(출판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의 출판계 이야기, 출판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래도, 마지막 장의, 현대의 디지털 사회에서 '책'이 어떤 가능성으로 '독서'가 어떤 자원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가의 문제는 시점의 한계인지는 몰라도 크게 와 닿지 않는다. 결론이 뻔해서였을까? 정보화 시대에 있어서 우리가 '정보화' 되기 위한 자질이라는 것이 '기기 사용능력'이 아니라, 그 컨텐츠를 통해서 통합적으로 사고하고 그것들을 통해서 '창조'하는 능력이라는 것. 하지만 5년전이라는 시점을 감안해서 그냥 쉬이 읽고 넘어간다.

그리고 본인의 모습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출판칼럼리스트로써 '글을 팔면서' 그 컨텐츠들에 대한 '재발견'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에도, 22세기에도 책이 없어지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종이의 냄새를 기억하는 책벌레들이 살아있는 한, 아날로그 방식의 종이책도 여전할 듯 보인다. 촌스러운 게 고풍스러운 것으로 전환될 수도 있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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