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학교 - 영국의 교육은 왜 실패했는가
닉 데이비스 지음, 이병곤 옮김 / 우리교육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내 학교 생활 - 면돌이 라이프?

그냥 저냥 겨우 겨우 하루 하루 풀칠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우리집의 경제적 여건이라는 것은 '서민'이라는 단어가 가장 적절한 수준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의 생활동안, 내 친구들은 우리집을 잘 사는 집이라고 했지만, 사실 '우리집'(정확히는 내 부모의 집)이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뭇 면목동의 사람들과 비슷한 생활패턴을 가진 평범한 면목동 사람으로 살았다는 것이 정확하리라고 본다.

왜 '면목동'을 계속 이야기하냐고? 내가 앞으로 말하고자 하는 <위기의 학교>에 나오는 '실패한 공교육'과 가장 흡사한 상황이 펼쳐져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어떤 면이 흡사하냐고?

초등학교 때,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 모두를 포함해서, 나의 관심사, 또는 약간 몸이 약한 아이들의 관심사라는 것은 언제나 '맞지 않고, 뺏기지 않고, 끌려다니지 않는 것'이었다. 학교 폭력이 심각한 수준라고 말이 나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지만, 언제나 표본적 사례는 내가 살던 동네와 일치했다.

대부분의 '공부'에서 약간 이탈해있는 녀석들은 담배를 피울 줄 알았고, 고등학교에 진입하자 흡연률은 절반을 상회했고, '왕따'의 표본적 모델은 내 중학교 1학년 이전부터 존재해왔고, 학교 나오기 싫어서 그냥 집에 틀어박히고 롯데리아에서 알바하거나 피자집에서 택트를 몰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술마시고 담배피우고, 여자와 관계를 맺는 녀석들은 즐비했다.

어른들의 기준에서 보면, 불한당 같은 양아치들의 소굴이었고, 우리가 매일 하릴없이 모여있던 '사가정역'은 우범지역이었으며, 진학률은 바닥을 쳤고, 실업계 진학비중이 40%에 가까운 서울의 지역은 아마 중랑구 특히 면목동이 전형적이었으리라고 본다.

내가 지금 깨나 먹물행세를 하게 된 건, 정말 기적같은 일이었고, 그나마 20살에 각성되어서 재수라도 해서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교에 들어가는 녀석들이나 있을까? 내 또래의 상당수는 고졸에 하릴없이 알바나 하고, PC방에서 '레벨업'에 몰두하며, 온전한 직장에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

88만원 세대가 말하는 타겟이 어쩌면 그래도 '대학'은 나오고, '토플 책은 들어본' 그런 아이들의 이야기가 주되다면, 내 주위에 있는 이들은 '대학' 언저리에 못가본 경우가 태반이고 '토플'과 '토익'의 구분마저도 명확하게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사교육비 증가가 가계에 압박을 주고 있어서, 물가상승의 원흉으로 일컬어지지만, 아직도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과외 한번 못 받고, 학원도 잘 안다니고 졸업하여 그냥 '고졸'로 끝내는 인생도 굉장히 많다. 의외로 우리 동네 아이들에게 시간은 많다.

덕택에 내 동생 역시 '먹물'로 살 수밖에 없는 마인드와 조건들을 갖추었으면서도, 공부의 길라잡이를 12년 교육동안 만나지 못했고(유일하게 만난 사람은 고3때 다닌 학원의 수학선생이었다고 한다), 미달난 지방의 사립대를 다니다가, 군대갔다와서 그나마 정신차리고 몰두하여 이제 편입을 준비하고 있는 처지다. 그에게 중고교의 기억은 끔찍하고, 그는 '의대친구' 하나를 찾을 수 없음에 동네가 '막장'이라며 욕을 하곤 한다. 이렇게 말하는 내 모습이 너무 속물적인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오로지 사회적인 권력을 갖고 있는 이들에서 너무나 멀리 내 주위의 사람들이 떨어져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는 것이다.

 

<Trainspotting>, 그리고 영국의 교육

<Trainspotting>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마약에 쩔어서 사는 녀석들, 결국에 한탕을 노리지만, 그들이 살게되는 하루 하루가 심히 '환상적'이긴 해도, 행복하다고 말하기에는 한계를 모두다 볼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보기에 '꼰대들'이 제시하는 사회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삶이란 건 너무나 갈길이 멀게 느껴진다.



그들은 그냥 '불평 많은' '구제 불능의 낙오자들'에 불과한 것이다. 아무도 그들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아무도 그들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 정말 무서운 이야기인데, 내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 자체는 하나의 '실존적 문제'일 따름이다. 하지만, 아무도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사회적 방치를 야기하며, 사회에서의 배제를 약속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난 이게 영화적 상황일 뿐이라고 생각했었지만, 닉 데이비스의 <위기의 학교>를 보면서 이게 영국의 현실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잠시 우울했다. 그 우울증은 점차 증폭되고 잇는데, 왜냐면 이게 곧 우리가 직면할 교육의 현실일 것이라는 전망에서다.

<위기의 학교>의 시작은 아이들과 실랑이하는 교사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아수라장인 교실, 반항하는 아이들, 잠시의 수습, 곧바로 이어지는 혼란의 소용돌이. 그게 지금의 영국의 교육의 현 주소다. 공교육은 확실하게 붕괴하고 있고, 교육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재규정을 해야할 만큼 가치관의 혼돈이 자리하고 있다.

쉽게 말하는 이들은, 이게 다 대처리즘Thatcherism의 탓이라고 쉽게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문제가 완전히 꼬여서 시작과 끝을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은 오히려 블레어 정부부터였다.

사회과학을 잠시 공부한 먹물들은 좀 알겠지만, 한동안 <제3의 길>이 엄청나게 히트를 쳤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마치 <제3의 길> '전도사'마냥, 좌파와 우파를 넘어선 새로운 길에 대해서 말을 했고, 자칭 '진보적' 지식인들은 이 '새로운 진보'의 길을 예찬했으며 여전히 어떤 정당의 대표는 <제3의 길>이라는 신진보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을 한다.

그런데, 이 <제3의 길> 노선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시장실패(우파의 실패)를 넘고, 국가의 실패-노동의 실패(좌파의 실패)를 넘어서 새로운 대안을 만든다는 것인데, 사실상은 좌파의 실패에 더 큰 방점을 찍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블레어는 노동당의 강령을 변경해야 했다. 여튼 그런 이야기를 잠시 접어두더라도, 그들이 핵심적으로 말하는 곳마다 꼭 빼먹지 않았던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교육'에 대한 강조였다. 예를 들어, 실직자에게 급여를 주는 것을 넘어서서(복지welfare), 실직자에게 재교육을 시키고, 그것을 통해서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평생교육시스템'과의 연계를 통해서 일하는 복지(workfare)를 만들어 냄으로써, 기업에게는 부가가치창출의 기회를 주고, 노동계급에게는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임금을 획득하게 해 낸다는 전술이었다.

우파와 좌파가 공히 쉽게 무시할 수 없는 혁신적인 정책적 방향이라 할 수 있었고, 앤서니 기든스는 덕택에 '현자' 취급을 받기까지 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신노동당의 정책의 중심에는 '교육'이 있다는 것인데, 평생교육(재교육)을 포함하여 교육을 통한 기회 구조의 제공은 제대로 형성되고 있는가? 사회적 자본을 획득하고 있는 지배계급의 손을 그대로 들고, 제스쳐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문제제기에 대해서 저자는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는 '막장학교', '배틀로얄'이 펼쳐지고 있는 학교 현장을 발견한다. 공교육에는 더 이상 희망이 발견되지 않는다. 내버려 두면 곧 망한다. 그것이 그의 논지가 될 수 없는 현실이 기다린다.

 

영국의 교육, 막장까지 가는 길.

영국의 교육은 대처시절 교육부 장관이었던 베이커에 의해서 학부모의 학교 선택권이 추인되며, 절대적인 재정의 보조가 축소된다. 그 이후의 노동당 정권에서도 실제적이 재정의 보조는 늘어나지 않았다. 문제를 바라보는 지형자체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가난은 변명이 될 수 없다'라는 말을 통해서 인데, 사실은 이러한 명제는 잘 살펴보고 실제적으로 그것이 전제가 될 수 있는 지의 여부를 살펴봐야 하나, 영국의 정권들은 이 말자체를 신봉해야할 절대적 언명으로 여겼다. 그러한 전제에서 영국의 교육의 문제를 살펴본 그들이 내놓은 혁파과제는 '교사들의 잘못된 교육법'으로 설정되게 된다.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학교에 대한 지원을 축소하는 방법으로, '열정'이 부족하거나 '학생들을 계도하지 못하는' 선생들을 해고하는 방향으로 학교는 '개혁'되어갔다. 점차 열악한 조건들의 공립학교들은 학생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지원금을 작게 받게 되었고, 교육 여건은 점차 열악하게 되었으며, '학교 선택권'을 받은 학부모들은 좀 더 '괜찮은 학교'를 찾아 떠나게 되었고, 열정적인 선생들 몇몇도 지쳤으며, 나머지 선생들은 다른 학교로 옮기거나 교사직을 그만두거나 하였고, 결과적으로 그 학교들은 망해갔다.

그런데, 이러한 진단은 근본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학교 간의 성적격차는 언제나 '부의 격차'와 비례했고, 학습능력이라는 것 또한 가정에서의 '소득수준'에 따라서 편차를 대체적으로 보여왔다. 중요한 문제는 예산확보를 통해서 그러한 계급적 격차를 학교가 줄여나가고 교육적 여건을 열악한 지역에 더욱더 집중적으로 작동하게끔 제공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영국은 그 반대방향으로 '잘 나가는 학교'에 대한 지원을 강화했고, 그들의 모범을 칭송하는 방향으로 정책방향을 잡았다.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빈민들이 다수 사는 구역의 학업 성취도라는 것은 마치 강남구와 중랑구를 비교하는 것과 같이 엄청난 차이를 수반하게 되었고, 그들의 학교는 제대로 된 기자재 하나 없이 학업 유인을 끌어내지 못하는 방향으로 미끄러져갔고, 학생들은 제대로 된 상담교사도 없이 폭력과 탈선의 길로 방치되기 시작했다.

교육은 '계급 격차'를 완화시키고 사회통합을 만들어내야했지만, 오히려 '계급 격차'를 벌려놓고, 사회적인 이반을 양산하는 기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공교육은 그렇게 무너져 버린다.

반면 '자선사업'형태라는 초기의 이미지를 가지고서 면세와 학생유치를 통한 지원금 확보를 같이 확보한 사립학교들은 풍부한 재력을 통해서 양질의 교육을 제공했으며, 중산층의 넉넉한 학비 지출을 통해서 높은 학업성취도를 성취했고, 모두가 가고 싶은 선망의 학교가 되었으며, 한국에서 '자립형 사립고'와 '특목고'의 지위와 같이 특권적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드디어 막장에 이르게 되었다. 빈민층의 지역의 학교는 우리가 흔히 보는 영화에서의 '부랑아'들의 집단적 은신처가 되었으며, 여론은 그것을 '선생들의 잘못'으로만 만들어서 비판하기 시작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가르치려는 선생들의 노력이라는 것은 수포로 가게 되고, 이제 더 이상 아무도 희망을 쉽게 말할 수 없는 상황으로 가게 되며, 그나마의 노력을 할 교사들의 유인도 점차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만약 학교가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인원이 부족하여 유능한 전문 치료사들의 과로가 누적된다면, '부적응 학생을 학교에 정착시키는' 전략이 먹혀들지 않으면, 그리고 학교 간 성적 순위표나 교사 성과급 제도같이 이 목표에 역행하는 정책으로 인해 그나마 흔들리던 출렁다리가 완전히 무너진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만약 무단결석하던 아이들이 교문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학교 중퇴자들이 교문 밖으로 쫓겨 나왔을 때 예전보다 더 열악한 사회 안전망밖에 없다면, 더욱 많은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인생을 마감할 것이다. 청소년 범죄가 증가하고, 매춘은 늘어날 것이며, 노상강도도 많아질 것이다. 빈민가 아파트촌에서 맥없이 빈둥거리며 목적도 없이 절망에 차 하루하루를 보내는 아이들도 늘어날 것이다(p.218).

 
   

 

탐사보도에 찬사를 보내면서, 다시금 묻는 질문 "희망은 어디에?"

한학수PD가 3년 전, 황우석 신화를 벗겨낼 때 드는 묘한 불안감과 허망함처럼, 닉 데이비스의 저작은 그의 '탐사보도'가 보여주는 엄밀함에 감탄하게 만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더 뭔가 안 좋은 것이 드러날 까 두려운 불안감과 희망 따위는 버려야할 것 같은 허망함을 느끼게 한다.

한국은 영국의 경우와 좀 다를까? 좀 다르긴 하다. 여전히 한국의 대다수의 학부모들은 '학구열' 하나는 끝내주게 갖고 있고, 그건 전쟁의 경험과 유교적 분위기를 통해 생성된 것이다. 하지만 전쟁의 기억이 제공하는 폐허에서 싹을 틔웠던 '입지전적 경험'이라는 것은 경제적 규모의 성장과 함께 봉쇄되고 있고, 잠시 DJ의 '벤처기업' 붐을 타고서 창업 열풍이 불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그 가능성이 많이 없어진 상태다. 사회는 규모의 성장만큼이나 고착화되기 시작했고, 계급이라는 것이 점차 '세습'되는 경향은 한국사회 도처에서 발견된다. 명품소비에 열올리는 강남과 신도시의 '졸부'들의 부는 별 탈 없이 여러가지 '회계적 기법'을 통해서 상속되고 있고, 반대로 '가난'이라는 변명으로 인해서 교육의 기회에서 박탈되는 것은 '사교육 붐'의 이면에서 양산되고 있다.

한동안은, 학부모들의 열의와 희생을 통해서 '사교육' 기제는 작동할 테고, 서민층의 많은 수가 교육을 포기하지는 않을 듯하다. 하지만, 한세대 뒤를 생각해 본다면, 그것도 쉽게 기대할 수는 없을 듯하다. 이미 '등록금 1000만원 세대'가 개막의 서장이 펼쳐졌고, 이제 학부모의 '쥐꼬리 월급'과 '불안정한 고용구조'는 그것을 충당시키기에 슬슬 힘이 부칠 테세다. 이미 교육에서의 '학비' 문제는 사회적 문제가 되었고, 교육계의 이해당사자들은 그 비용을 이미 '만만한' 학부모에게 전가시키기로 암묵적 동의가 형성된 상태다. '가난은 변명이 될 수 없다'는 언명은 우리사회에 뿌리깊게 만연해 있지만, 동시에 그 가난 덕택에 교육의 기회는 점차 포기되는 사례가 속출할 것이다.

더 문제는 그나마의 '4년제 대학' 티켓을 끊은 이들도 곧, '해외파'에게 잠식당할 것이며, 사회는 약육강식의 구도를 그대로 교육과 그에 이어지는 '구직'에서 펼쳐낼 것이다.

이제 희망을 말하자고 우석훈은 이야기하지만, 그 희망이라는 것은, 도대체 이러한 사회적 안정성의 붕괴가 어디까지 진행되어야만 다시금 꿈꿀 수 있는 것인가? 이제 정말 꿈꾸고, 그것을 만들어야 할 만큼 위기가 온 것은 아닐까?? 파국을 막기 위해 우리 다시 꿈을 꿔야 하는 것 아닌가?

서기상의 '착한 사람들에게'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착한 사람들에게 - 서기상 

 
1.왜 우린 우리 스스로 만든 권력이 필요하다는건
알면서도 왜 아직 망설일까요
똑같은 놈 똑같은 권력이 싫고 염증이 난다
하면서도 왜 아직 망설일까요

2.돌아봐요 아니 돌아볼 필요도 없지
지금 저들이 만든 저들만의 화려한 축제뒤에서
누가 직장을 잃고 거리를 떠돌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 나갈지 막막해 눈물 짓는지

3.지금은 우리가 스스로를 믿어야 할 때
부족하더라도 잡은손 놓치지 말아야 할 때
그러다 너무 힘들댄 같은 날에 같은 시간에
같은 목소리로 욕이라도 실컷해봐요

#아직 부족해서라는 말은 말아요
아직 때가 아니라서라는말은 말아요
그건 완벽한 부모가 되기 전에
아기는 갖지도 낳지도 말란 말과 똑같잖아요 똑같잖아요.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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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03-31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일빳다..

양승훈 2008-04-01 00:33   좋아요 0 | URL
^^; 이 책 너무 좋더군요.. 쉽게 읽히고, 또 꼼꼼하기는 이를 데 없었고, 옮긴이의 상세한 설명 덕택에,, 내용이 꽂히더이다.

근데, 책의 내용은 너무나 암울한... 세상에 해야할 일들이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있는 지를 깨닫게 하는 책이죠..
 
싸우는 저널리스트들 - 국경 없는 기자회의 도전과 모험
로베르 메나르 지음, 성욱제 옮김 / 바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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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난독증이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기란 참 힘들었다. 아니, 내 자신이 책 읽을 때의 자세가 애지간히 산만했다고 치더라도, 문맥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뭐 오역을 탓할 생각은 없는데(몇 군데에서 오탈자가 발견되는 데, 그건 그냥 참을 만 했다.). 저자의 주장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그에 대한 연대기 같은 느낌은 있었으나 내용 자체에 대해 몰입이 잘 되지 않았다.

다 읽고나서 생각하니 이 책은 뭔가를 주장한다는 느낌이 별로 없다. 그냥 자신과 '국경없는 기자회'가 살아온 궤적에 대한 회고 정도가 되겠다. 혹여 이 책을 읽고나서 '국경없는 기자회'의 핵심 입장에 대한 구조적인 논평을 하려한다면 그건 굉장히 잘못된 생각이다. 이 책은 별로 짜임새 있게 쓰여진 책이 아니다.

젊은 시절, 우리나라의 386처럼, 프랑스에는 68세대가 좌파 이념의 세례를 받았고, 역시 저자인 로베르 메나르도 그런 이념의 세례를 받아 트로츠키 사상과 상황주의(자주 언급되는 프랑스 68혁명 당시의 이념으로 일상성에서 벗어난 '국면'-즉 상황을 통한 문화적 운동이 주가 된다고 볼 수 있겠다)에 탐닉했다가 저널리스트로서 명성을 날리다가, 처음에는 "제3세계의 혜택 받지 못한 사람들의 현실을 세상에 전함으로써 여론의 주의를 환기시키"(p.63)위해 '국경없는 기자회'를 창설했고, 전세계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언론의 자유를 말하면서 활동했다.

초창기의 국경없는 기자회는 언론의 자율성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외부에서 주어지는 언론에 대한 억압 두 가지 측면을 함께 공격하면서 싸워왔으나, 점차 언론의 자율성에 대한 내부 비판이라는 모토는 사라지게 되고, 언론 자유를 침해하는 나라에 대한 선전전이 주된 그들의 활동이 된다.

알제리, 르완다, 이라크, 세르비아 사태 등등에서 지역Local 단위의 언론인들에 대한 탄압에 대한 선전전을 하면서 환기를 하고, 그것을 통해서 '언론의 자유'에 대해서 언급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건 '기자의 자유'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으로 들릴 뿐, 크게 '언론의 자유'에 수렴되는 지는 도대체 장담을 못하겠다.

그리고 그의 이념과 저널리스트의 삶이 어떻게 어우러졌었고, 어떻게 이념을 버렸는 지에 대해서도 명확하지 않다. 그냥 '실용주의자'가 된 것일까?

그들도 인정하지만 스타 저널리즘(스타 저널리스트의 맹활약을 통한 홍보와 그를 통한 자금 확보Funding) 덕택에 국경없는 기자회가 성장했지만, 언론 자체가 클 수 없는 토양에서의 자생 미디어의 생성 조건 따위에 대한 언급(위에서 이야기했던 내부적 요소들)을 생략한 한에서는, 외부의 억압 정권에 대해서 비판을 하고, 기자들을 구출을 할 수 있을 지언정, 새로운 대안 언론의 '창출'을 돕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게 노벨 평화상을 준 것도 내가 볼 때는 그들이 가장 안전한 NGO 이기 때문이리라는 생각도 해 본다. 그들은 어떤 나라에도 실제적인 위협을 주지 않고, 오히려 그 국가들의 '품위'를 장식하는 효과를 제공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프랑스적 '허영'이 절정에 이르면 이렇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테러리즘'으로 상징되는 중심없는 게릴라들의 성장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공식적인 루트인 언론-국가 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현 상황이 위기라고 말을 한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위기는 언론-여론의 관계에 대해서 자신들이 눈을 감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옛적, 운동권의 팸플릿이 돌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국가와 대등한 위치에서 교섭을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주장에 대해서 민중들이 울었기 때문이었다는 뻔한 대답을 다시금 해야하는 시점이 되어버렸다.

그는 프랑스 대사들의 다음과 같은 말을 비판하는 데, 내가 볼 때는 이 말이야 말로 중요한 외부인의 제3세계를 볼 때의 유의점 같다.

   
  메나르 씨, 아프리카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완전히 다른 세상이지요. 내가 아프리카를 다닌 지가 벌써 몇 년이 지났습니다. 다른 사람들, 반대자들도 마찬가지에요. 이 정도까지 오는 데 200년이나 걸렸어요. 저들에게 시간을 좀더 줘야 합니다(p.192).  
   

이런 태도조차 갖추지 않고, 단순히 언론 자유의 침해라고 본인들이 규정짓고 모험을 하듯이 침투해서 선전전만을 펼치는 그들 기자들에 대해서 뭐라고 생각해야 할까? 기자들이야말로 그들의 사회에 더욱더 내밀하게 침투해서 그들 삶의 '결'을 더 엄밀하게 표현해야하는 것 아닌가? 이런 식이면 자신들의 가치관의 주입밖에 되지 않는다. 아무리 그들의 입장이라는 것이 순수하더라도 말이다.

진실어리진 못해도, 세상을 좀 환히 바라보고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서 메시지를 만들어 나아가는 저널리스트가 되겠다고 생각한 지 좀 되었는데, 이 책을 읽고 느낀 바라는 것은 '기자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같은 것으로 환원하는 순간에 무감각해져버리는 언론인의 둔함이다. 그 둔함을 피해가기 위해서 12000원의 돈을 지불했다는 생각에 본전 생각이 난다.

그는 여전히 볼테르의 주장(난 당신의 주장에 반대한다. 하지만 난 당신이 당신의 주장 때문에 억압당하는 것에 반대한다.)에 근거한 애매한 똘레랑스를 근거로 자신들의 활동-기자질-을 정당화하고 또 그럴 계획일 테지만, 난 좀 다른 길을 찾아봐야 한다고 바라보고 있다.

지금 생각컨데 내가 그릴, 또 그리고 싶은 저널리스트의 상은 이런 게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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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
에르베 캄프 지음, 진민정 옮김 / 에코리브르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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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부자와 생태문제를 결부시키는가?

사실, 난 여전히 버스보다는 택시를, 그리고 택시보다는 내 차를 선호하는 대기오염을 더욱더 악화시키는 데 일조하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서 좋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그 문제점들이 나타나고 있는 부의 불평등이라던가, 계급 갈등에 대해선 항상 민감하게 생각하고 더 나은 대안을 만들어가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예전에 <녹색희망>이라는 책에 대한 신문의 서평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좌파가 왜 녹색(생태)의 아젠다에 공감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잠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곧 잊었고, 생태의 문제에 대해서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와는 좀 외떨어진, 괜히 웬지 모르게 좀 있는 이들의 아방가르드적인 운동일 따름이라고 치부해왔고, 그렇기에 사실 지금도 무지하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이 책은 나 같은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세상을 다시금 똑바로 본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도전을 던진다. 그리고 혹여 생태주의라는 것을 낭만적이고 오지랖 넓은 이들의 관점 혹은 이데올로기라고 생각 하는 이들에게 "자 똑바로 보라고!"라고 외치는 책이다. <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라는 제목이 보여주듯, 이 책은 현재의 생태적 위기와 자본주의 축적의 연관을 보여주고, 그 것들이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 지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생태문제와 자본주의의 모순은 함께 맞물려 있는 것이다.

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

우석훈의 책들(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 아픈 아이들의 세대, 도마 위에 오른 밥상)의 공통적인 서술방법이 있다. 굉장한 위기의 경보를 명확하게 울린 후, 그 맥락에 대해서 파헤친 후, 약간 누그러뜨린 대안들(사실은 소박한)의 제시가 그 방법인데, 에르베 캄프의 서술 방법도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서두는 그렇기에 무시무시한 경고로 시작한다.


   
 
 인류가 출현하기도 전에 일어났던 다섯 번의 주요한 생물 멸종에 뒤이은 여섯 번째 멸종은 이제 공식적인 표현이 되었다(p.23).

 스위스의 전문가 마티스 와커나겔(Mathis Wackernagel)이 고안한 개념에 따르면, 우리 사회의 '생태학적 흔적', 즉 생태학적 충격은 '지구의 생물학적 능력'을 넘어서고 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1960년에 인류는 이 생태학적 능력의 절반밖에 사용하지 않았으나 2003년에는 그 능력보다 1.2배를 더 사용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지구가 생산하는 생태학적 자원보다 더 많은 자원을 인류가 소비한 셈이다(p.32).

 그러나 정말 기막힌 것은 우리 눈앞에서 이미 참극이 반복되고 있고, 위기의 신호들이 끈질기게 확산되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 경관을 해치는 풍력 발전, 원자핵 재개발, 친환경 연료 개발, '사회적 책임이 뒤따르는 투자', 새로운 시장 개척을 위한 로비 착수 등으로 해석되는 '지속 가능한 발전'에 대한 전적인 믿음이 상황의 흐름을 바꿔버릴 수 있다고는 그 누구도 진지하게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용어는 '생태학'이라는 비속어를 없애버리기 위한 의미론적인 무기다. 그러나 프랑스, 독일, 미국을 더욱더 발전시켜야 할 필요가 있을까?(p.41)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말에 대한 믿음 조차도 허물어 버린다. 우리는 아예 '개발'이라는 말을 떼어내야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위기 상황에 대해서 놀랍게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데, 이는 일단 위기를 심각하지 않게 받아들인 다는 것(현 상태에 대한 낙관), 그리고 위기가 설령 있다해도 기술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기술발전에 대한 낙관)이 깔려있기 때문인데. 더 중요한 것은 부유층의 생활 패턴(명품으로 대변되는)과 그것을 추종하는 그 아래 계층들의 심리, 그리고 그것을 추동해 내고 있는 과두민주제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에 언급한, 부유층의 생활행태라는 것과 과두민주제라는 문제를 생각해 보건데, 생태문제라는 것은 곧바로 정치의 문제가 되며 자본주의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생태문제가 균등하게 우리에게 오지 않고, 빈부 격차라는 자본주의의 모순과 함께 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실제로 세계적인 차원에서는 사회적 구제 장치가 고장 난 상태다. 더 이상 돈을 많이 가진 부유한 자들의 증가가 대다수 일반인들의 물질적인 조건의 개선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이 도시 빈민층의 확대다. 농민층이 농촌 생활의 궁핍에서 벗어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선택하는 한 방법이었던 '도시화'는 이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띤다. 국제연합의 거주자 관련 조직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10억여 명의 도시인이(세계 30억 도시인 중) 도시 빈민가에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빈곤은 '도시적 삶의 확대에서 가장 큰 특성'이 되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농촌의 빈곤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불도 전기도 없는 누추한 도시의 가옥에서 그리고 내일에 대한 영구적인 불확실성 속에서 불안정한 직업이나 노리면서 살아간다. 대개는 푹 꺼진 배를 부여안은 채로(p.62).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덜 번다는 것, 그것은 견딜 만하다. 그러나 그들 수준으로 벌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져버린 것은 견디기가 쉽지 않다. 사회의 계층 이동 가능성은 이제 희박하다(p.65).

 금전적인 개념 이외의 빈곤을 걱정하는 또 다른 방식은 이처럼 인간 존재의 환경적 조건에 대한 묘사와 관련될 것이다. 더구나 생태학적 위기로 인한 결과들을 우선적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빈곤층이다(p.71). .... 홍수나 사이클론, 해일 등의 자연 재해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방법도 피해를 복구할 가능성도 거의 가지지 않은 빈곤층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잔인하게 공격당하고 있다(p.72). .... 기후 변화의 충돌은 세계의 가장 빈곤한 계층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예컨대 가뭄을 악화시키고 가장 메마른 지역들에서 농업 생산을 감축시키면서. 사실 온실 효과의 주범인 가스 배출은 본질적으로 부유한 사람들로부터 비롯된 것인데도 말이다(p.73).
 
   

 
 
결국 저자의 말마따나 "빈곤과 생태학적 위기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문제들(p.74)"인 것이다.

이런 상황은 보통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추동하고, 보통 정상적인 사회라면 사회의 생존을 위해서 이러한 문제가 있을 때 나름의 기제를 통해서 작동해야 하는 것인데, 문제는 브레이크가 안 걸린다는 것이다. 왜 일까?

그것에 대해서 저자는 부유층들의 gate-keeping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 온존이 사회적 기제의 작동을 막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의 부유층에 대한 묘사는 압권이다.
 
 


   
 
 빈틈없는 매니저는 마치 보통 사람들이 자전거나 전기톱을 고를 때처럼 수송용 항공기 카탈로그를 뒤적거린다. 나는 그에게 다른 수송기들에 비해 연료를 아주 적게 먹는-1600킬로미터를 가는데 1톤도 채 안 되는 연료가 소비되는-그래서 제조업자가 그린 머신(green machine)이라 명명한 팔콘 900EX를 권한다. 상상해보라. 스스로를 진정한 환경보호론자라 느끼면서 자신의 전용기를 타고 나는 모습이라니......(p.91).
 돈은 이제 더 이상 숨길 게 아니다. 아니, 반대로 이제는 오히려 노골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아주 멋진 파티를 여는 것만큼 괜찮은 아이디어는 없으리라. 프랑수아 피노는 자신의 개인 박물관 개관식을 위해 920명의 '친구'들을 베네치아에 초대했다. 그들은 당연히 전용기를 타고 왔고, 그로 인해 마르코 폴로 공항은 포화 상태였다. 헬리콥터들을 그 승객들을 그라시 궁전으로 태워 날라야 했고, 그 때문에 제트기 160대를 다른 공항으로 보내야 했다(p.92).
 
   


뭐 그들의 취향에 불만은 나 역시 없다. 언젠가 우석훈이 이야기했었지만, 문제는 이런 사회는 유지가능성이 떨어진 다는 것에 있다. 관리되지 않는 위기의 연속은 사회의 붕괴를 초래한다. 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이것을 즐기는 듯 하다. 이러한 그들의 심리와 그것들의 사회적 효과에 대해서 저자는 베블렌의 툴을 도입하여 설명한다.


   
 
오늘날처럼 문명화한 사회에서 사회 계급의 경계는 불분명하며 유동적이다. 어떤 조건이든 상위 계급의 규칙은 어려움에 부딪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상위 계급은 자신들의 구속력을 띤 영향력을 사회 구조의 위에서 아래로, 가장 비천한 계층까지 확장한다. 결과적으로 각 계층의 구성원들은 바로 위 계층의 삶의 방식을 이상적인 삶의 방식처럼 받아들이고, 이 이상을 향해 모든 힘을 쏟아 붓는다(p.105).
 
   

우리 모두에게는 차별화하려는 속성이 있고, 모든 계층은 더 위의 상위 계급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데, 이는 소득의 개선 뿐만 아니라, 소비 습관을 통해서 자신들의 계급을 탈바꿈 하려는 '허영심'과도 함께 맞물린다. 하지만 이러한 상류층의 소비행태를 따라가려는 순간 그 밑의 계층들은 곧바로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황새를 쫓아간 뱁새처럼 말이다. 맑스의 말이 떠오른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다." 말을 좀 바꾸자면 "모든 소비 문화는 지배 계급의 소비 문화이다."

이런 상황을 개선할 수는 없을까? 문제는 미디어를 통해서 우리의 주장들을 '열성 당원'(zealot)의 그것으로 치환하고 있는 언론의 환경(이는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닌가 보다), 그리고 네그리의 '훈육통치'의 양식마냥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펴보려 하는 생태적 방식의 통제(예를 들면 RFID 카드-교통카드-를 통해서 우리의 위치를 식별할 수 있는 것처럼) 등의 방식으로 우리가 통제되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적으로 광고에 의해서 미디어가 움직이기에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무력화되는 전반적인 구도하에 있고, 또한 '9.11' 이후의 미국처럼 인권 따위는 무시한 채, 죄수에 대한 고문 등으로 표현되는 통제적 정책들은 기술발전과 맞물려 우리의 '정치적 저항'에 대해 억압적 방법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러한 구도들이 우리를 옥죄고 있다는 저자의 진단을 보면서, <1984>의 빅 브라더를 연상해 보았다. 저자는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에 나오는 경구를 인용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가? 사실, 디테일한 대안제시가 이 책의 목적은 아닌 듯하고,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우석훈 처럼 '정책적 아젠다'까지는 못 나아가고 있다.


   
 
 좌파는 불평등의 원인들과 생태학을 두루 아우르면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시대에 뒤처져 다른 사상들처럼 전반적인 혼돈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p.155).
 
   

어떤 문제이든, 문제는 항상 얽혀져 있고, 그것을 풀어가는 과정에 대해선 실천을 통해서 모색할 수밖에 없다. 난 저자가 '전술가'이기를 바랬지만, 그의 직업이 '기자'라는 것에서 유추해 볼 수 있듯이, 그는 세상에 대한 정밀한 묘사만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그림은 그려졌고,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움직일 수 있는 지가 관건이 될 듯하다.

발로 뛰면서 기사를 써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디테일의 충실함이 느껴지고, 집요하게 추적한 느낌을 주는 글이다. 나 역시 이런 글을 쓰고 싶어 미치겠다. 이 책을 통해서 '경제 성장'의 마법에서, 명품의 '환상'에서 깨어날 수 있게 되길 기대해 본다. 최소한의 이 책에 대한 기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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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심 2008-03-26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 달아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환경문제와 부의 문제가 서로 다른 문제가 아닌 같은 문제로 엮어서 이해하는 것에는 큰 점수를 줄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제목이 부자들이 어떻게 지구를 망쳤나라고 정한 것은 거기에 대한 일말의 해결책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어야 한다고 보며 저널리스트적 사실 관계는 권력관계에 숨어 있는 장치를 들춰내서 그 장치를 작동하는 원리 및 해결책이 나와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서 적어놓았던 것입니다. 사실, 이 책에 대해 큰 기대를 하고 받기 때문에 제 개인적으로 큰 점수를 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서재를 둘러보니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아서 기분이 많이 좋습니다. 탐서가의 길을 계속해서 진행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양승훈 2008-03-26 16:48   좋아요 0 | URL
네,, 울프심님의 생각이 이해가 되고, 그런 '대안적 방식'에 대한 책들도.. 그냥 청빈하고 소박한 것들 말고, 디테일이 있는 '정책' 혹은 '장치를 작동시하는 원리 및 해결책'에 대해서 저 역시 궁금하고 모색하고자 하는 데..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을 해요.. ^^
 
오늘의 거짓말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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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녀가 쓴 책 중 네 번째로 읽은 책이다. 뭐랄까, 누군가도 이야기했었지만, 정말 '읽는 맛'이 있는 글쓰기이다. 너무나 부러워 시샘하게 만드는 글쓰기. 예를 들면, 난 이런 글쓰기엔 정말 소질이 없다. 당연히 잘나가는 소설가와 나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도 사실 말이 되지는 않지만,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글쓰기와는 너무나 다른 방향인 거다. 정이현의 글쓰기는.. 부럽고. 나도 이런 질감이 느껴지는 글을 쓰고 싶담 말이다...

뭐, 이 책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고, 뒷 부분에 있는 평론가처럼 그녀 소설의 본질에 대해서 구구하게 늘어놓을 만큼 문학에 대해, 이런 글쓰기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내공이 나에게는 없다.

다만, 뭐랄까? 지난 번에 읽었던,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서 주로 다루어 지던 여자들이 30대 초반, 그리고 미혼이면서도 꿋꿋이 또한 영리하게 살아가는 그런 여성들이었다면.

이번에 다루어 지는 여성들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여성들이 다수라는 느낌이다. 물론 1990년와 1980년대의 저자 자신을 비추는 것만 같은 "삼풍 백화점"과 "위험한 독신녀" 등의 이야기도 있지만, 아무래도 그녀가 다루는 주된 이야기의 중심 인물들은 40대로 넘어가는 듯 하다. 그녀의 나이 탓인가? 아니면 지평의 확장? 난. 그래도 지평의 확장이라는 느낌이 든다. 왜냐면,, "타인의 독백" 등의 소설 에서는 여전히 정이현이 가지고 있는 영리한 여자들의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뭐랄까? 내가 읽은 소설이 얼마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 거창한 소설들(예를 들면 조정래, 황석영)에 비해서 확실히 가벼운 주제이지만, 그 가벼운 주제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고나서 이상하게 차분하게 가라앉으면서 이 것 저것 많은 생각이 든다는 거다... 우리 안에 내밀하게 끼어있는 때들이 박박 벗겨져서 타일에 떨어지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문제는 그 때들이 아무리 밀어도 밀어도 계속 나온다는 데 있다. 정이현의 화자들은 언제나 착하지 않고, 때묻어 있고, 위악적이지만, 또 게다가 사회에 대해서 삐딱하지만. 그들은 나름의 살 방법을 찾고 영악하며,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서 살아간다. 뭐랄까? 속물이 된 여성주의자 내지는 좌파??

그들이 주는 효과는, 우리가 드러내지는 않지만 내심 갖고 있는 습속들을 꼬집는 효과를 발휘한다는 거다. 왜냐면, 그들의 내면이 글로서 우리에게 표출되니까 말이다...

이제 그녀는 어떤 주제든 쉽게 녹여내기 시작한 것 같다. 더 스케일이 큰 이야기들도 쓸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런 일상에서의 우리 속내를 잊지 않고 계속 녹여주었으면 좋겠다. 김영하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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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 - 명랑한 사랑을 위해 쓴다
정이현 지음 / 마음산책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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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이 끌리는 이유~

정이현의 소설 중 <낭만적 사랑과 사회>(http://blog.aladin.co.kr/hendrix/1939916)를 읽고 완전히 꽃혀서, <달콤한 나의 도시> 또한 읽어버렸다.

정이현의 소설을 읽는 이유는 그런 거였다. 할리퀸류에 나오는 여성들의 갈망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남자가 유일하게 공감할 수 있는 땅에 디딤발을 대고 쓰는 글이라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정이현의 소설은 마치 <캔디>와 <내 이름은 김삼순>의 간극만큼, 다른 여성들의 섬세한 '연애소설'들과 달라보였고 그녀의 소설은 웬지 읽을만 해 보였다.

게다가 그녀가 쏟아내는 한겨레ESC의 <남자, 남자, 남자> 칼럼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그녀의 글빨에 대한 신뢰를 가졌고, 그녀의 산문집 <풍선>을 집어들었다. 여기까지가 간접적인 소설을 읽은 배경이라면, 직접적인 이유는 이 책의 표지에 씌여있는 "명랑한 사랑을 위해 쓴다"라는 말이 끌려서 였다. 항상 여러가지 이유로 미적거리다 표현 못하거나, "화성에서 온 남자"의 관점에서 "금성에서 온 여자"의 이유를 몰라서 사랑에 실패한 경험이 있는 나에게 어쩌면 이런 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팍팍 꽂혔고, "이 언니"라면 마땅히 지침을 주지 않을 까 하는 생각도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여튼, 집었다.

근데, 이게 웬걸? 이 산문집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연애 이야기 혹은 남녀 이야기가 아닌, 그녀의 문화생활의 감상문들이었던 것이다. 처음엔, 뒷부분에서 내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거니 하는 생각을 갖고 읽기 시작했지만, 종반으로 다가갈 수록 그런 기대는 접고, 그녀의 문화생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관점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으로 보이며, 그녀의 감성이 세상에 살아가는 뭇 여자들이 자신의 '여자'인 친구들과 나누는 이야기와 웬지 모르게 흡사할 것으로 생각되어 솔직함을 느꼈다.

 

정이현의 문화생활 관람기, 그리고 여자가 본 세상 이야기~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시작되는 그녀의 영화 이야기와 드라마의 이야기가 쏟아진다. 역시 예측했지만 <내 이름은 김삼순>에 대한 예찬도 있고, 잘은 모르겠지만 이 책에 쓰여진 내용들이 어떤 신문의 칼럼 따위에 쓰였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누구 아는 사람 있으면 좀 알려줘 보세요!!).

읽다가, 그녀의 사랑의 관점 쯤은 뽑아 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런 것 아닐까?

   
 
 생애 처음으로 타인과의 내밀한 친밀감을 경험한 사람은, 미처 아무것도 '계산'하지 못한다. 상대방과 나와의 관계의 거리를 조정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매달리고 이기적으로 투정부린다. 자신의 장애와 결핍을 상대방이 온전히 채워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를 맡김으로써 사랑이 성립되었지만 역설적으로 그것 때문에 사랑은 붕괴되고 문득 이별이 찾아온다(p.20).

 누군가를 칼로 베는 순간 비로소, 그전에 내 등을 찔렀던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것. 세상이 그런 방식으로 굴러간다는 교훈을 얻는 일이야말로 연애의 진정한 목적이다.
 "할래? 말래?" 연애란, 그저 그렇게 남녀 개인의 은밀하고 사적인 영역일 뿐이라고 믿는가. <연애의 목적>은 바로 그런 당신의 뒤통수에 서늘한 얼음을 가져다대는 영화다. 이곳은 거대한 세트장이며 시스템은 공고하다. 다만 한 걸음만 잘못 디디면 개인의 사생활은 '사회적인 어떤 것'이 되어 객사한 거지의 동냥그릇처럼 거리 한복판에 까발려질 수도 있다. 우리는 끝없이 연애의 바깥을 꿈꾸지만, '바깥의 연애'가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세트 바깥으로 향하는 길을 내는 일은 가능한 것일까. 로맨틱 코미디로 위장한, 장르를 알 수 없는 영화 <연애의 목적>이 당신에게 묻고 있다(p.27).

 상대의 완강한 등을 보며 비틀비틀 가야 하는 사랑, 보답받지 못해도 애걸할 수 없는, 그런 사랑도 사랑이다(p.39).

 사랑을 해본 사람들은 안다. 사랑은 권력관계다. 더 사랑하는 쪽이 약자다. 더 사랑하는 쪽이 언제나 지게 되어 있는 불평등한 게임이 사랑이다(p.49).
 
   


내가 원했던 만큼은 이 만큼이었고, 나머지의 부분에서는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을 우회적으로 영화, 드라마를 만났던 시선들을 통해 보여준다. 예를 들면, 30대 여자에게 비추어지는 29세 이른바 '노처녀' 들의 이야기에 대한 관점(마치 30을 인생의 무덤인 냥 묘사하는 시선)에 대한 분개 따위 말이다. 또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들도 한 번 곱씹어 볼만하게 만들어 준다.
 



   
 
 "그러게, 내가 지금보다 네 살이 어리다면 매일 춤추고 다니겠다. 근데 <싱글즈>의 나나도 그러더니 왜 영화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노처녀들은 죄다 스물아홉 살인 거야? 전쟁터에 총알받이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걔들 서른 살 맞이하는 자세가 너무나 비장하지 않아?" "꼭 일이냐, 결혼이냐,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놔야 삼십대를 시작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스물아홉 살짜리 남자가 자기 나이의 무게 때문에 괴로워하는 영화 본 적 있어? 이게 바로 서른 넘은 여자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재생산하는 거라고!"(p.106)

 어린이는, 천사인가? .... 기억 한번 더듬어보시라. 먼 옛날 얘기도 아니다. 기껏해야 2, 30년 전, 당신은 어떤 어린이였는가? 때 묻지 않은 영혼? 순진무구의 표상? 오호, 정말 그러셨는가? 물론 기억만큼 왜곡이 쉽고 빈번한 영역도 없을 테니, 당신은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옛날 그 시절의 아이들은 얼마나 순수하고 착했는지. 거기 비하면 요즘 애들이 되바라지고 발랑 까지긴 했어. 다 삭막하게 변해버린 세상 탓이야.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여전히 맑고 순수하지." 아, 예. 그게 사실이라면 당신은 아마도 본인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행성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셨나 보다. 참고로, 서울 변두리에 위치한 내 모교는, 일명 콩나물 교실에 3학년까지 2부제 수업을 실시하던, 80년대 당시 기준에서 몹시 평범한 공립학교였다.
 그 시절 우리는 다 친구였다고? 아이들이 몇 명이 모이면 자연스레 패가 갈리던 것, 잊으셨나 보다. 왕따라는 단어가 없었다고 해서 모두의 은근한 따돌림의 대상이던 아이가 없었던 건 아니다. 교실은 사회의 축소판 같았다. 나름대로의 권력욕과 배신, 음모와 질투도 분명히 실재했다. 몸이 작아도, 어린이는 들끓는 욕망을 가진 인간들이다. 우리는, 어른들은, 그걸 자꾸만 까먹는다. 혹시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닐까 의심스러울 만큼. 그동안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했던 어린이들은 순백색의 내면세계를 지닌 거의 완벽하게 무욕적인 존재로 묘사되곤 했다(pp. 153-154).
 
   


 
잠깐 옆길로 새지만, 뭐 그런 거 있지 않나? 특히 진보적인 관점을 가진 남자들이 갖는 트러블인데, 남자들끼리 '거시적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논하다 보면 술잔은 기울어가고, 이미 욕설은 난무한 가운데 결국 봉착하는 이야기의 종결점은 "근데, 너 ~랑 잤냐?"(보다 훨씬 더 걸진 표현으로..) 차라리, 정치적 진보는 같은 지평에서 싸워볼 수나 있지만, 여자와의 관계 등등 '미시적 세계'(그들의 말로 하자면, 야들야들하고 아기자기할 것으로 추정되는 여자들의 이야기, 게이같은 이들의 이야기)은 논할 수 없는 주제, 다룰 수 없는 문제이며, 그것에 대한 적대적 태도는 곧바로 'out' 콜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는 것 말이다.
 

정이현의 이야기는 남녀가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현실에서의 문제들에 대한 제기이며, 어쩌면 진보운운하는 인간들은 이런 이야기 담론에서 어떤 말들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해 봐야하지 않나?
 

물론 남성의 담론구조와 여성의 담론구조가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같은 지평에서 서로의 말들을 이해하고, 서로의 관점에서 스며들면서 이야기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데, 정이현의 글들을 읽으면서 어떻게 그런 이야기들을 할 수 있는 지, 그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발랄하면서도 정곡을 신랄하게 찌르되, 또한 그렇게 후비지는 않는.. 쿨하게 '핫'한 이야기를 꺼내는 능력이랄까? '아이크림'과 자본주의를 동시에 이야기하는 사람. 이런 언니들을 만나고 싶어요!!
 

다시 돌아오자면, 정이현의 글들을 읽으면서 그녀가 읽었던 책들을 알 수만 있다면 좀 구해다 읽고 싶은 마음이고, 그녀가 봤던 영화들을 다시금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명랑한 사랑'에 대한 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명랑하게 말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좀 생각해 본다. 소통이 '명랑'하다면, 그 결과물도 명랑하지 않을까라는 얼토당토하지 않은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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