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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자살, 매력적 파괴욕 

인간의 본성인지는 모르겠으나, 누구나 뭔가를 한번쯤 부숴버리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사는 듯하다.

질서정연하게 서있는 것들을 한 번쯤 부숴버리고 싶은 파괴욕.

이상하게 몸이 뒤틀리면서, 거북함을 느낄 때, 그 것들을 전복하고 싶은 욕구.

그런 파괴욕의 정점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 자신의 존재를 파괴하는 것일 거다.

그렇기 때문에 명문화는 되어있지 않지만, 어떤 종교도 자살에 대해서 호의적이지 않고 금기시하는 것을 본다면, 자살은 굉장히 위험한 것으로 비추어 짐은 틀림없다.

한동안 자살 싸이트가 유행했었다. 아니 지금도 유행이다.

쉽게 편하게 아름답게 자살하는 법에 대한 연구는 끝도 없이 이어졌고, 그런 방법들로 실제 자살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나고 있다. 2007년의 대한민국의 자회상, 아니 어쩌면 전지구적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왜 자꾸 사람들은 자살에 집착하는가? 난 여기서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 따위의 사회학적 연구를 들먹거릴 생각은 없다.

오히려 난 그 탐미주의적인 '미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거다.

그 극단에 서 있는 욕망의 정점. '자신을 파괴한다'...

죽음의 욕망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신이 주어진 질서에 그대로 저항해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다는 점에서 '새로운 윤리'를 만들어 내는 생성적 욕망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생성을 이야기했던 자들 중 많은 이들이 자살을 선택하곤 했다(예를 들면 들뢰즈의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을 거다.).

 

김영하-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나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살해하도록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사람들이 무의식 깊은 곳에 감금해두었던 욕망을 끄집어내고 싶을 뿐이다. 일단 풀려난 욕망은 자가증식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상상력은 비약하기 시작하고 궁극엔 내 의뢰인이 될 소질을 스스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p.16)

주인공의 직업은 자살청부업자. 자살하고 싶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 자살을 부추기는 것은 아니다. 그가 끝끝내 찾아오지 않을 것 같으면 아예 일을 시작하지 않는다.

이 시대에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에게는 단 두가지의 길이 있을 뿐이다. 창작을 하거나 아니면 살인을 하는 길.(p.17)

그는 자살을 도와주고 그것을 글로 쓰려한다.

"그 남자는 묘한 사람이었어. 그 남자와 이틀을 보내고 나서 나는 자살을 하기로 결심하게 됐더랬어. 나는 그 남자의 권유를 뿌리치고 욕조에서 칼로 동맥을 긋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어. 이유? 아무것도 없어. 자살하는 사람들이 무슨 거창한 이유를 가지고 그러는 거 같지만 아냐. 어쩌면 그날의 퍼포먼스 때문이었을지도 몰라. 십 년이 넘게 해오던 동안 난 내가 진짜 예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날 문득 그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을는지도 몰라. 단 한 번도 나를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어디론가 계속 도망치고 있는 기분으로 나는 평생을 살아왔던 느낌이었어. ... 그 남자를 만나서 나는 내가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지 알게 됐어."(pp.149-150)

삶에서 생기를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 죽음을 통해서 제공하려 한다.

그때 유디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면모를 그녀는 보여주고 있었다. 생기. 그녀는 나와 만난 후 처음으로 얼굴에 생기를 띠고 있었다.(p.85)

"갑자기 신이 나는 거 있죠. 내게 인생이란 제멋대로인 그런 거였어요. 언제나 내 뜻과는 상관없는 곳에 내가 가 있곤 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p.85)

인생이 맘대로 되지 않으나, 끝끝내 자기를 자기 의지대로 끌고 가고 싶은 여자 유디트, 쳇바퀴처럼 도는 그냥 그런 저런 '작업'을 하는 예술가 미미. 그들에게 삶이라는 것은, 그냥 "제멋대로 그런 거"일테고, 거기에서 어떤 '행복' 혹은 '활기'를 찾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가능한 유일한 '생기'를 제공하는 방법은 죽음 뿐이다.

게다가 죽음은 아름답고 매력적이지 않은가?

"눈동자에서 반짝이던 두 점의 빛은 마지막 희망 같은 거에요. 피로와 권태에 찌든 주름살이 얼굴을 뒤덮고 있어도 숨길 수 없는 게 있죠. 그런 희망은 삶을 향한 게 아니라 휴식을 위한 거에요."(p.71)

진정한 휴식(죽음)을 찾아주는 주인공...

그를 우리는 비난해야 하는가? 어떤 근거로? "그래도 생명은 소중한 거에요?" 사실상 그들의 인생은 사회적으로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 아니었나??

갈때까지 밑바닥으로 기어간 막장인생의 유디트. '잘 벗고' '파격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는 예술가로 불리는 미미.

더 이상 되돌아갈 수 없고, 규정지어진 그들의 구도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그들에게 제시해야하는거지?

물론 다른 길을 한 번 밟어나가면서 전혀다른 결과들이 생겨날 수 있다.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언제나 구심력은 작용하게 마련이고, 쳇바퀴는 계속 굴러가기 마련이다. 김영하의 이 때의 감성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1996년)

나는 기억한다. 그 무렵 나는 스피드에 중독돼 있었다. 경부고속도로에서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몇 바퀴를 회전한 일도 있었고 서울 도심에선 함정단속을 벌이던 경찰차와 추격전을 벌인 일도 있었다. 또 앞으로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시스템을 저주했고 정치적 무관심을 적극적으로 옹호했고 일하지 않을 권리, 게으를 권리를 찬양했다. 국가가 개인의 환각에 개입하는 것에 반대했으며, 아니 사실은 국가가 하는 모든 일에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선거 참여를 독려하는 모든 진영을 조소했으며 야당과 시민단체도 거기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얌전히, 선량한 시민으로 그 정체를 감추고 살고 있었다. 골초였고 매일 밤 술을 마셨다. 마셨다 하면 며칠 동안 마셨다. 말하자면 그때의 나는, 죽어도 좋다, 고 생각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 그렇지만 자살을 결행할 만큼 독하지는 못했으므로 일종의 정치적 자살을 결심하고 골방에 틀어박혀 이상한 소설들을 써대기 시작했다.(pp.219-220)


원색의 페인트를 흰 캔버스에 뿌려대는 느낌의 색감과, 금기를 차갑게 비웃으며 써대는 문체가 맘에 들었다. 특히 츄파춥스를 떠올릴 때의 아찔함이란...

극단적인 문화적 레디컬의 냉소가 깃든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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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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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미 자본주의 남한에 찌들대로 찌들어 버린, 하지만 북의 명령에 거부할 수는 없는 남파간첩 기영,
80년대 주체사상을 익히고 혁명적으로 살려했으나, 삶에 치여서 어느새 그냥 그런 주부로 사는 마리
재주가 많으나, 한국사회의 모순이라는 것을 쉽게 몸으로 느끼고 사는 그들의 딸 현미
그리고 주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연류되어있는 인물들..

하루만에 북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은 남파간첩이라면, 어떻게 할텐가?

과연 털고 갈 수 있을텐가?? 만약, 자본주의에 대한 환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귀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면, 당신은 너무 순진한 것이다.

단순히 가족이 엮여 있기에 때문 만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양쪽의 체제 둘 다 그에게 만족을 줄 수 없기 때문일 거다.

북에 귀환을 하지 못할 경우는 어떻게 해야하지? 일단 거기까지 생각할 틈은 없다. 아니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왜냐면, 그들이 예전에 벌인 북 고위 인사출신

탈북자들을 대하는 것을 본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배신자의 척결에 얽혀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

이미 그렇게 저렇게 여기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해 버린, 생의 반절을 살아버린 그냥 그럭저럭한 가장.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는가?


하루의 이야기가 한시간씩 한 챕터씩으로 펼쳐진다.

단순히 기영의 중심구도로 이야기가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리의 시점에서, 현미의 시점에서, 그리고 또 그들과 연류된 국정원 직원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린 애인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두사람의 남자와 동시의 관계를 갖는 아줌마의 이야기나,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 수치스러운 기억을 갖고 있는 친구의 악소문을 활용하는 중학생의 이야기나....

어쩌면, 우리의 삶의 복합체의 이야기다. 또 어떻게 본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꿈같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우리의 결에 묻어있는 흠결이 너무나 잘 드러나는 이야기다.


"하루아침에 모든 게 달라졌다. 아니, 세계는 변한 것이 없었다. 변한 것은 오직 그뿐이었다. 지난 이십 년간 그는 유혹에 넘어가지도 않았고(혹은 적절한 유혹을 받지 못했고), 구매자들이 흥미를 느낄 만한 엄청난 정보를 취급하지도 않았고, 위에서 지시하는 모든 일을 대체로 무난히 수행해왔다. 그런데도 그의 운명은 갑자기 그 방향을 틀어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스파이든 다른 그 무엇이든, 실패한 남자가 된다는 것은 쓸쓸한 일이었다. 그는 옆으로 눈길을 돌렸다. 거기, 실패한 남자의 아내가 앉아 있었다."(pp 345-346)

"어쩌면 이것이 시작일 것이다. 여기서 한 번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면 카프카의 인물들처럼 그 어떤 복잡한 폐쇄회로 속을 분주히, 그러나 반복적으로 오가면서, 자신에게는 절박한 비극이 타인에게는 우스꽝스런 희극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계속 겪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하였다. 이들은 동물행동학을 연구하는 생물학자처럼 자신의 행동들을 무심히 내려다보리라."(p.379)
 

기실 개개인의 의지와는 별로 상관없이 흘러갈 것 같은 세계, 어쩌면 반대로 세계는 반대로 가만히 있지만, 내 자신이 변하고 있는 것 아닌가??

결론은, 허무하다. 그냥 그렇고 그런, 서로의 내면으로는 상처받았지만, 절대 인상을 구기고서 빈정상했다고 티내기에는 가혹한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인상을 피고 세상과 대해야만 겨우 살아남을 만큼 가혹하게 살고 있지는 않는가???

역사의 행위자들을 다면적으로 비추면서 그 갈등들을 끈적거리지 않게 서늘하게 비추는 소설이다.

"기영은 차분히 그들이 알려주는 것들을 들어 익혔다. 그러면서도 빈 강의실을 가득 채운 과장된 엄숙함 때문에 모든 상황이 현실이 아니라 한편의 소극처럼 느껴졌다. 이들이 정말 남한의 체제를 전복할 혁명적 전위들이란 말인가? 이 솜털이 보송보송한 젊은이들이? 이들이 그 극악하다는 안기부의 고문을 견뎌내고 폭압적 국가제도를 전복할 수 있단 말인가? 기영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북에서 본 혁명가들은 오진우나 김일성처럼 모두 칠십줄을 넘긴 노인들이었다. ... 어쨌든 기영은 이제 NL진영의 활동가가 된 셈이었다."(p.193)


혁명의 시대로 했던 때의 사람들을 한발짝 떨어져서 비추어주고, 그 시대가 허무하게 스러져버린 지금과 연결지을 수 있는 건 어쩌면, 기영이라는 인물만이 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 시대를 겪어보지 못하고 지금도 겪지 못한, 후대의 사관만이 가능하겠지..

소설은 역사가 아니다. 하지만, 그 결의 촉감을 나타내기에 소설은 역사책보다 어떨 때는 더 매력적인 방법을 제공하는 지도 모르겠다. 다분히 주관적으로. 하지만 역사 또한 역사가의 취사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었던가????

 내 선배들의 이야기와, 내 삼촌의 이야기와, 내 또래의 이야기가 묘하게 오버랩된 소설이다. 탐미적인 김영하를 봤다면, 이번에는 혁명의 시대를 겪은 김영하를 보는 기분이랄까??? 여전히 김영하는 유려한 문체와 탁탁 씹히는 질감의 어휘를 쓴다.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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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
무라카미 류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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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의 추억? 

누구나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살아온 환경에 따라서 굉장히 그 추억의 강도나, 내용은 다를 수밖에 없는데...

어떤이에게 어린 시절이 엄마의 따뜻한 품과, 학교에서 선생님을 사모했던 일, 아름답게 사색하던 일의 추억을 만들어 낸다면,

또 다른 어떤이에게 어린 시절은 매일 싸움박질이 벌어지는 길거리, 선생에게 대들면서 대거리 했던 일, 중학교 때에 담배를 피우면서 불만들을 토로하던 일들로 기억되기도 한다.

순수 소설이나 시, 영화 대신 여럿이 모여서 집에서 보던 야동을 기념비적인 문학으로, 또 문화체험으로 기억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감성을 지니느냐도 그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 같다. 길거리 문화에 익숙해 지거나, 아니면 아파트 문화에서 자라거나 혹은 ...

다른 한편으로는 시대적 상황과도 결부되는 데, 내가 85~6년도에 고등학교를 다니고 87년에 대학을 입학했다면, 지금과는 사뭇다른 정서를 갖고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특정 국면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상황이라는 걸 무시할 수 없다는 거다.

69

제목부터 음란하지 않은가? 1969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무래도 sex 체위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딱 이정도 감성으로 무라카미류는 소설을 전개한다.

68혁명이 문화적으로 전세계를 흔들고 청춘에게 많은 꿈들을 현실로 만들라고 강요하던 시기.

어떤 시절이었을까???

주인공 야자키(겐 - 무라카미 류)은 혁명의 정당성을 이야기하고, 바리케이트 봉쇄를 말하고, 니체를 이야기하고, 비틀즈를 이야기하고, 트로츠키, 마오를 이야기하지만 결국 그건 떠들어 대는 멘트들에 불과하다. 사실 겐은 책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닌데다가, 제목정도 알고서 너무 떠들어 대는 것에 대해서 부담을 느낄 정도니....

야마다는 실제로 책을 엄청나게 읽지만, 야자키저럼 질러대지는 못한다. 오히려 소심하게 뒤에서 주도면밀하게 실수하지 않게끔 조정을 할 뿐.

그들은 여러가지 혁명적인(?) 행동을 기획하고 벌인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이념에 경도되어서도 아니었고, 거창한 행동강령을 지닌 것도 아니었고 오로지 즐겁게, 그리고 '천사'를 꼬시기 위해서 였다.

한편으로 비판할 수 있다. 고작 그런 찌질한 이유로 그런 일들을 벌이는 것의 무모함에 대해서. 하지만, 다시 물어보자. 그 동기가 과연 무시할 만큼 가치가 없는 것인가???

"나는 꽤 길게 내 생각을 말했다. 전공투운동, 맑스주의, 60년대 안보투쟁의 교훈, 카뮈의 부조리소설, 자살과 프리섹스, 나치즘, 스탈린, 천황제와 종교, 학도출진, 비틀스, 니힐리즘에서 이웃 이발소 주인의 권태와 퇴폐에 이르기까지,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 그렇습니다, 사실은 나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말입니다, 라고 나 스스로 말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pp.159-160)

"아뇨, 그냥 여학생 시선을 끌고 싶어서 했을 뿐이에요, 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p.161)

사실 지금의 나야 그렇게 변호할 수 있었겠지만, 그게 가능했겠는가?? 하지만 이런 사건들은 그들을 변화시킨다.

"유일한 복수 방법은 그들보다 즐겁게 사는 것이다.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싸움이다. 나는 그 싸움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지겨운 사람들에게 나의 웃음소리를 들려주기 위한 싸움을, 나는 죽을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p.269)

가네시로 가즈키의 좀비스 시리즈나, 무라카미 류의 69.

유쾌하게 현실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유쾌하게 비추어 댄다. 그들은 '유쾌하기' 때문에 '멋지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시대의 전복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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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예수
류상태 지음 / 삼인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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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갈등

생각해보면 나에게 유년기의 대부분의 기억은 교회로 환원된다. 내 친구들의 대부분이 교회친구들이고, 내가 어떤 사유를 함에 있어서 항상 켕기고 걸리적 거리는 모든 부유물의 시작은 교회에서 배운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고등학교 때 철모르는 자신감인지, 혹은 영성에서 오는 에너지였는 지는 모르겠으나, 찬양단의 리더를 한 적도 있고, 학생회에서 간부를 한 적도 있었다.

담배를 피울 때, 술을 마실 때 같은 개인의 취향을 결정하는 문제에서부터 시작해서, 사회적 이슈에 대한 사고를 함에 있어서까지 내가 믿는다고 기록하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은 끝끝내 따라붙어왔고, 또한 지금도 일정부분 나와 함께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세계관이 나에게 어떤 가능성으로 다가왔고, 또한 그것들이 나에게 어떤 희망을 주었는 지에 대해서 항상 갈등했고, 지금도 갈등하고 있다.

대학을 다니면서 시작한 고민은 아니다. 보통 모태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20살이 넘어가면서 고민을 많이 한다는 데, 내 고민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것이었다. 교회생활이 생활의 전체였을 때조차도 고민은 멈추지 않고 튀어나왔고, 그건 지금에서 생각해 보건데, 당연한 것이었다. 생활세계에서 내가 배운 '기독교적 가치'들은 실제 나를 옥죄는 억압에 불과한 적이 많았다.

그렇다해서 내가 신앙을 청산하려 하려 했던 건 아니다. 난 오로지 유연한 사고와 가치관을 갖고 싶었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러한 내 사고방식은 언제나 말썽거리가 되어왔다.

이런 말썽은 나로 하여금 교회를 옮기게 만들었다. 유년기 전체를 함께 했던 친구들이 있는 母교회를 떠나서 유연하게 내 생각을 유지할 수 있는 교회로 옮겼다. 하지만 전적으로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여전히 불편한 마음이고, 여러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그렇다면 난 어떤 문제들에 대해서 불편했는가?

일단 기독교인들의 이해할 수 없는 배타성이었고, 둘째 기독교인들의 이해할 수 없는 무식함이었고, 셋째 기독교인들의 이해하기 싫은 문화적인 보수성이었다.

매번 설교에서 나오는 "세상에 물들지 말라"는 말의 위선도 참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그들은 살고 있지 않다는 말인가? 세상에서 부유해서 천국열차티켓을 갖고 있는 '선민'으로서 떠 다니겠다는 이야기인가? 혹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 '표'를 강매하라는 이야기인가?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말로??

혼자만의 공부가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우선 모든 기독교가 그런 것이었냐는 것(하비콕스의 "세속도시", 도올 김용옥의 "요한복음 강해", 김진호 선생의 "반 신학의 미소" 등을 읽었다.)에서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낼 수 있었다. 최소한의 지점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 뿌리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신학을 최소한의 수준에서 공부해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QT집 같은 쓰레기 같은 '프로파간다 모음집'이 아닌,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성찰을 해야한다고 생각을 했고, 그 문제의식을 지우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독학으로 탐독한 적이 있었다. 절대자에 대해서 한정적인 방법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끝끝내 남았다. 내가 접해왔던 기독교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신이 절대자라면, 그에게 어떠한 인성을 부여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건 당연히 불가능하다.

구약의 하나님 혹은 하느님은 분명 인격적인 신이다. 복수의 신이기도 하고, 또한 어떨 때는 유대 민족에게 환희를 주는 신이기도 하다. 하지만 절대자라면 그러한 방법으로 사유하면 안된다. 왜냐면, 절대자에게 '증오'가 있다면 또한 '사랑'이 있다면, 그건 결국 자신을 한정짓는 결계가 있다는 말이 되고 그건 절대자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증명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약은 유대인이 바라본 '신'에 대한 이야기일 따름이다. 그렇게 상대화시켜 놓지 않으면 결국 기독교라는 것은 '적'과 '아군'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네오콘의 논리가 전형적이다.). 믿는 선민들과 믿지 않는 악마의 자식들. 너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의 문제.

그런 날 서있는 맹목적인 가치들이 무서웠다. '논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전'만이 가능한, 또한 자신들의 가치관으로 재단하는 판단만이 가능한 기독교. 난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고, 이런 나에게 기독교가 원래 그런 종교라고 말한다면, 난 차라리 교회를 다닌다고 말하지 않기로 했다.
 

류상태 - "당신들의 예수"

저자에게는 분노가 끓어넘친다. 이런 이유에서다.

그들은 제 글에서 분노가 묻어난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제 마음속에는 분노가 가득 차 있습니다. 저는 제 안에 분노심이 들어 있다는 것, 또한 그것이 저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분노를 삭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 분노가 저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고, 한국 교회뿐 아니라 기독교가 태생적으로 지닌 독선과 배타를 폭로하는 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pp.234-235)

그는 대광고 강의석 사건 이후 목사직을 내 던지고 야인으로 살아왔다. 물론 그 와중에 새길교회에 머물기도 했었으나, 지금은 다시 야인이다.

야인으로 한발짝 물러나서 생각하는 사유는 맹렬하게 비판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배타적인 신앙이 얼마나 폭력적인 지, 한계에 도전하지 않는 신앙이 얼마나 결과적으로 무서운 결론을 내는 지에 대해서 저자는 잘 보여준다.

'부처님 머리에 담뱃재를 떨고'라는 어느 스님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기독교인들은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자기가 믿고 섬기는 분의 머리 위에 어떻게 담뱃재를 떨 수 있는가. 그러나 불교계에서는 너무나 잘 알려진 말이며, 깨우침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전제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열린 마음의 표현이다.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라도 문구에 얽매이면, 그 말씀(문구) 너머에 있는 속 깊은 뜻을 놓칠 수 있다. 그러니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뿐 아니라 그 분에게도 매이지 말며, 그분의 깨달음까지도 넘어서라는 말이 되겠다. 부처님마저도 진리를 깨우치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 기독교인은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예수님은 다르지 않은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며 본질상 신의 성품을 갖고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기에 그분은 오류가 있을 수 없으며, 그분의 말씀이 담긴 성경 역시 한 점 오류가 없는 진리의 말씀이다.' 이른바 성서무오류설인데, 성서를 그렇게 이해하는 한 기독교는 독선과 배타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또한 기독교와 견해를 달리하는 문화와 종교를 존중할 수 없고, 대화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한 채 끝없는 분쟁과 갈등을 양산하게 된다.(pp.67-68)

 공존하는 사유를 위해서 넘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 지에 대해서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천국으로 인도받았다 생각하는 이들의 짓거리들을 생각해 보는 책이기도 하다. 십자군전쟁, 이라크 전쟁, 그리고 이랜드 사태를 생각해 보게 된다.

 난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나갈 계획이 없다. 한 발도 뺄 생각이 없다.

 사유의 연속선상에 언제나, 또한 한국사회의 병리현상으로서의 기독교를 계속 생각할 계획이다.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의 100주년. 이제 그 100년의 역사는 다시 쓰여야 한다.

 맹목적 신앙에서 유연한 통찰로. 배타적 신앙에서 상생의 상호배움으로.

 강원룡 목사님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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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직선 2007-11-29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 역시 교회 안에(그것도 작지 않은 교회) 있으면서 교회를 등질 생각은 아직 안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예수를 찾는 작업은 제 개인적인 일이기도 하겠지만 제 이웃들과 함께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죠..
감사합니다.

양승훈 2007-11-29 16:47   좋아요 0 | URL
물론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하고싶은 걸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진보적인 교회에 다니고 있는 건지도요.. 하지만,, 뭔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게 많아서 다시 고민을 접곤 하죠. 이웃과 함께! 그게 중요한 것 같아요
 
지식 e - 시즌 1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1
EBS 지식채널ⓔ 엮음 / 북하우스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사실 난 단편적인 지식들이 늘어져 있는 책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유기적인 맥락에 따라 재편되지 않은 지식의 가나다식 혹은 abc식의 나열의 지식이라는 것은 정말 어떤 사람이 내게 말했던 것처럼 "개나 줘버리"라고 하고 싶을 정도였다.

서사없이 abc 혹은 가나다 순으로 나열된 어떤 단어의 개념을 단순하게 주는 백과사전식의 편성은 그 자체로 분리되어있는 죽은 지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떤 개념이든, 혹은 지식이든 그것이 탄생한 맥락이 있고, 책에서의 개념이라는 것은, 특별한 내용이라는 것은 항상 그것이 뿌리박고 있는 책 안에서의 맥락(context)와의 유기적 관계에서만 힘을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편적인 지식들의 암기라는 걸 아예 하지 않기로 결심을 하기도 했었고, 실제 어떤 새로운 사실을 암기하려하기보다, 그것과 관련된 자료들을 겹치게 읽음으로써 몸에 각인되게 하려 노력해 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항상 그런 공부 방법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당장의 필요에 의해서 '단편적 지식'들의 '양적' 확보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 놈의 퀴즈프로그램 출연 때문에 말이다. 신문 스크랩과 책에 밑줄긋기. 되도록이면 참으려 했었는데 이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러가지 '지식''교양''상식'에 관련된 책들을 구매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서점에서 덩달아서 빛이 나는 책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바로 이 책이었다. <지식e> 두둥. 사실 tv에서 종종 보아왔지만, 그것들이 어떤 내용까지 다뤄왔는 지에 대해선 생각을 안해봤다.

책을 읽으면서 참 기발하면서도 충실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Cogito Ergo Sum이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를 비틀어서 Sentio Ergo Sum을 써버리는 센스가 맘에 들었고,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잊고 사는 지식('잃어버린 지식을 찾아서'일 것이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참 맘에 들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식당에서 쫓겨나자 금메달을 강에 던져버리고, 자신의 이름을 주인의 것 캐시어스 클레이가 아니라 자신 본연의 것으로 찾았던 무하메드 알리에 대한 이야기나, 맨발의 마라톤 선수로 명성을 날렸으나 하반신 마비로 인해 더 뛸 수 없게 되어버려 좌절 할 듯 했으나 결국 장애인 대회에서 다시금 메달을 획득한 아베베 비킬라의 이야기에서 '감동'과 '공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Crazy Horse(타슈카 위트코)와 사라바트만, 축구공, 블러드 다이아몬드에 대한 이야기에서 현대 사회의 이면에 대해서 도대체 내가 알고 있는 건 뭔가하는 자책 마저 느끼기에 충분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은

암기하는 정보가 아니라 생각하는 힘입니다.

현학적인 수사가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메시지입니다.

빈틈 없는 논리가 아니라 비어있는 공간입니다.

사고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필요한 지식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얄팍한 상혼의 재테크 기법이나, 경제용어보다 더 중요한 우리의 삶의 문제에 대해서 하나 하나 화두를 던져주는 것이 어쩌면 더 중요한 삶의 지식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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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아빠 2008-06-09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식e>에 관한 설문조사로 도움을 받고 싶은데요
http://blog.naver.com/image2two 에 오셔서
내용을 확인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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