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정치 풍속사 - 나의 문주 40년
남재희 지음 / 민음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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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 풍류랑.

남재희가 권영길에게 썼던 편지(http://news.empas.com/show.tsp/cp_pr/20070921n08907/?kw=%B3%B2%C0%E7%C8%F1%20%3Cb%3E%26%3C%2Fb%3E)를 프레시안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예전에, 우석훈의 블로그(아마 이글루스 시절이었으리라 생각한다)에서 보수주의자 중에서 여전히 디테일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남재희리라는 평을 듣고 그의 이름을 기억했었지만, 아직까지 대한민국에 산 죄로 제대로 된 '보수주의자'를 본 적이 없었기에 그의 글은 굉장히 파격적으로 느껴졌다. 어설픈 감성적 진보주의자의 한 권의 책보다 더 날카로운 한 편의 글이었다.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유신 이후 10대 의원부터 여권에서(당시의 여권이라면 민정당) 의원도 했고, 전두환에게 신임을 받기도 했으며, 김영삼 정부에서 노동부 장관도 했던 사람인, 관운이 있고, 이 쯤에서 우리가 추측해보건데 굉장히 꼴통에 TK 출신 정도, 아니면 KS 마크를 달고 있는 전형적인 범생이 스타일을 생각해 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의 술 사랑, 그리고 그의 주위의 술을 사랑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버릴 수 있었고, 진짜 '풍류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들과 그들이 마셨던 술, 그리고 그들이 마셨던 장소에 대한 복원된 기억을 읽어보고, 또한 그 당시에 대한 내 생각들을 되짚어보면서 당대의 '야사 한국 현대사'를 구상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것들의 '사실성' 자체에 대해서 의문을 삼아볼 수는 있겠지만, 의미상의 '진실'은 오히려 더 크게 와닿았었고, 당대의 지성사나 사상사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또한 그들의 생활에 대한 평전이나 자서전 류를 더 읽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이 책에 나오는 명사들의 이야기를 구구절절히 말하는 것이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 나왔던 종로와 남대문, 세종로와 이태원을 가로지르는 동네들의 맛집들, 멋집들, 그리고 괜찮은 술집들은 한번씩 꼭 가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난 굉장히 '강남문화'에 대해서 거북함을 느끼는 사람인데, 그렇다고 '강남/강북'의 구도로 날을 세우고 싶은 건 아니고, 오히려 '종로/신촌/남대문'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근대의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는 장소들의 역사와 현재성이 얽혀있는 그 느낌 자체를 좋아한다. 남재희가 가는 곳들은 내가 사랑하는 '하동관 곰탕' 집을 비롯하여 그런 구미와 어울리는 곳들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할아버지와 한 번쯤 호기를 부리면서 한 잔 하고, 그의 분위기대로, 그리고 한발짝 떨어진 곳에서 내 분위기대로 한잔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강남의 메트로폴리탄을 가장하고 댄디함을 입은 척 하는 이들이 벌이는 전형적이고 몰 개성적인 모습이 싫은 거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박학다식'함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이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인물들에 대한 평 그 자체가 가능하기 위한 전제들이 남재희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사상 동향이나, 문화 동향, 그리고 그것들이 총 망라된 유흥가의 동향을 정확하게 꿰 뚫는 힘. 그것이 남재희가 가진 '박학다식함'의 출발 선상인 듯하다.

술 한잔과, 같이 마실 술 친구와, 그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공간이 그리워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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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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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기준으로 10세 미만의 아동이 5초에 1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으며, 비타민 A 부족으로 시력을 상실하는 사람이 3분에 1명 꼴이다. 그리고 세계 인구의 7분의 1에 이르는 8억 5,000만 명이 심각한 만성적 영양실조 상태에 있다. 기아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2000년 이후 1,200만 명이나 증가한 것이다. 블랙 아프리카의 상황은 특히 열악하다. 아프리카에서는 현재 전인구의 36퍼센트가 굶주림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있다(p.18).  
   

지구 한 편에서는 비만을 걱정하고, 참살이(웰빙) 열풍이 불고 있지만, 여전히 지구 다른 한 편에서는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그득하고, 아이들의 무덤이 늘어나고 있다.

TV에서 김혜자 아줌마가 나와서 소말리아에 구호의 손길을 바라는 광고를 하고 있을 때, 북반부의 그나마 살만한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는 채널을 돌리며, 피튀기는 액션이 난무하는 미드를 보면서 하루를 보낸다. 한비야가 보여주는 세계의 모습들은, 기행기로, 어드벤쳐로만 기억될 뿐, 그 실상에 대해서 우리는 느끼지 못하고 있기에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40~50년전의 대한민국에 대한 기억이 있는 50대 이상에게 가난과 굶주림의 기억은 선명한 것이었지만, 그들의 자식들인 40대 이후(386 이후)의 세대는 그런 가난의 추억담을 노인내의 철지난 유행가처럼 들으면서 무시하곤 한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의 관리체제에 편입했던 대한민국. 생활비가 없어서 자식의 손가락을 잘라서 보험금을 타내려 했던 어떤 아빠의 이야기는 이미 잊혀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람들은 그냥 바쁘게 살고, 주위를 돌아보려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숱한 사람들이 배고픔에 허덕이고 있고, 생활보조금 몇 십만원으로 겨우 라면만 먹으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정도는 양반이다. 지구 반대쪽의 남반구의 아이들은 '경제적 기아'와 '구조적 기아'에 노출되어 죽어가고 있고, 최소한의 비타민 A가 공급되지 않아서 실명으로 치닫고 있다.

먼저, 식민지에서 독립된 이후 끊임없이 계속된 내전, 사실상 그것을 추동한 서방 선진국들의 제국주의적 태도로 인해 정치적 불안정은 계속되고 있고, 그로 인해서 일상적인 경제활동과 생산활동은 불안을 벗어나지 못했고, 이리저리 내몰려져 피난만을 다녔던 난민들의 빈곤을 불러왔다.

또한, 식민지에서 자신의 국가를 제대로 세워보겠다고 '자주관리체제'를 도입하여 농업을 세우고, 자신들의 수요에 걸맞는 시도를 했던 나라들에게는 서방 국가들의 지원을 받은 무장 쿠데타라는 폭탄이 떨어졌다.

게다가, 21세기에 즈음해서 더욱더 고도화된 발전은 끊임없는 생태질서를 교란하고 있고, 선진국들의 자본은, 그나마 환경을 팔아먹음으로 성장할 수 있는 국가들의 토호들과 자본들에게 돈을 쥐어줌으로써 그 오염을 '묵인'받고 있고, 그 결과로 사막화등이 이어지고 있으며, 최종적으로 죽어나가는 건, 농민들과 그들의 아이들이 되었다.

비참한 세계를 정확하게 이 책은 보여준다. 읽으면 읽을 수록 문제는 간단하지만, 해결이 쉽지 않아보이는 난국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분유를 공급하겠다던 아옌데의 '사회주의 국가' 칠레는 "네슬레"와, 미국의 무기를 등에 업은 쿠데타로 인해 전복되었고, 자주관리를 도입하려던 상카라의 부르키나파소는 프랑스의 힘을 업은 쿠데타로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전복되었다.

이런 구조적 난맥이 있는 상태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대의 구호활동도 예전의 선진국의 잉여생산물을 무상으로 지원받던 방식에서, 시카고의 곡물시장에서 형성되는 가격을 지불하고 사오는 방식으로 변화함에 따라서 국제 곡물가가 폭등할 때마다 여러 아이들에게 돌아갈 양식은 줄어드는 결과가 초래되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 '하이브리드' 연료와 곡류를 태워서 생산하는 '에탄올' 연료에 대한 개발이 촉진됨에 따라서 사람 먹을 것도 없는 곡류는 졸지에 연료로 활용되는 판국이 되었다. 'agflation'이 도래한 것이다. 원래도 소가 먹을 곡류가 사람이 먹을 곡류보다 풍성했는 데 말이다. 소 팔자가 상팔자다. 또한 광우병 파동이 일어나자, 묻어버리는 소가 많은데, 쇠고기 소비량이 줄어들자, 유럽연합은 덩달아서 광우병과 상관없는 쇠고기도 땅에 묻어서 가격을 보존하고 계시다.

'경제적 기아'는 어쩌면, 자연환경의 일시적 변화와 일시적 전쟁 등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구조적 기아'는 사회구조의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저자의 말이 폐부를 찌르고 후벼판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지구에 사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공민이 될 수 있을까?

지글러의 대안은 간단하다. 신자유주의적 질서의 혁파, 그리고 구호보다는 그 사회의 개혁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 간단하지만 어려운 이 대안들에 대해서 이제 숙고만 할 시간이 지나가고,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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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과 오른손 - 좌우 상징, 억압과 금기의 문화사
주강현 지음 / 시공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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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 되면 아무런 계획 없이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보리라 선택한 책이었다. 주강현은 언젠가 TV에서 보았었는데,, 도올에는 못 미쳐도 상소리 잘 쓰면서 강의하는 민속학자다. 그의 강의는 차분하면서 씨니컬하고, 갑자기 격정적이 될 때가 있다.

이 책은 문화사적인 좌우 대칭, 그리고 지리의 배치 등을 보여준다. 그를 위해서 엄청난 자료를 동원해 이를 입증한다.

공간이라는 것의 정치경제학~ 그것에 대한 문화사적 분석이다..

사실 이 책은 단순한 이론 사회학을 뛰어넘어서 문화인류학이나 복식학의 범주를 질주하고 있기에, 이진경의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같은 책 처럼.. 한번 눈에서 감을 일으면,, 쭈욱 그냥 지나치게 된다. 따라서 어느정도의 '문화인류학'적 소양이 필요하다. 일반 교양서는 아닌 셈이다. 다만 오랫동안 천천히 따져가면서 읽고 '옳거니' 하면서 읽으면 음미할만한 책이다.

따라서 나에게 남는 것은 '다량의 정보가 홍수처럼 왔다가 갔다가 한' 기억이고.. 몇가지 문구가 기억 남는다.

왼손과 오른속은 선천적으로 '우열의 성질'을 갖는 것이 아니라, 맑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말했듯,, '특정한 관계'(사회적 관계)한에서만 차별받거나 배제될 따름이다.

또한 현대에 있어 왼손에 대한 붐이라는 것도 사실은,, 왼손에 대한 '배제'의 논리가 깔려 있으며, 그 왼손의 유용성의 척도를 강조하는 사람들 조차 사실은 '경제성'에만 주안점을 둘 뿐 왼손과 오른손의 대등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대칭을 추구하나 사실은 비대칭 적이며, 자연은 비대칭적이나 오히려 그러한 대칭에 대해서 비차별적이다..


난 왼손잡이야... 나나난나난나나나나나 나나나나나나나 ......

그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고, 내 유치원 선생이 말한 것 처럼 왼손이 저주받은 손으로 거듭나지 않는 것은,, 결국 '유전자'를 갖고 논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에 달려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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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까치글방 133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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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아무도 읽지 않았으면서 다 읽은 것 처럼 지껄이는 책들이 있다. 예를 들면, 칼 맑스의 "자본",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존 스튜어트밀의 "자유론" 등등.... 사회과학에 대해서 소이연 쯤 하는 작자들은 언제나 그들의 이름을 들먹거리지만, 사실 그러한 책들을 읽은 사람은 5% 안짝에 불과할 것이다. 아니 5%도 후할지 모르지...

이 책도 정말 그러한 책 중에 하나다. 우리는 국정교과서 6차 과정부터 랑케와 이책의 저자 E. H. 카의 입장을 비교하면서 역사란 무엇인지를 탐구하지만, 내가 볼 때, 국정교과서를 집필한 작자들도 카의 입장을 열심히 본 것 같지는 않은 것 같다.

흔히 우리가 그의 입장이라고 하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하는 데, 그 말뜻을 단순하게 자신의 주관이 살아있는 역사관으로 국정교과서는 "해석" 수준의 차원으로 한정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할 경우, 에피쿠로스의 상대주의나, 니체의 상대주의와 카의 '해석'의 차원에서의 역사 인식은 어떤 차이를 갖게되는 가?

카는 국제 정치학의 패러다임으로 볼 때, 고전적 "현실주의자"로 분류한다. 현실주의자와 상대주의자....... 어폐가 있지 않는가?

그러한 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더더욱 이 책을 탐독해야 한다.

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언제나 사회적 관계 안에서의 개인, 그리고 역사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역사에서의 "끊임없는 대화"는 변동하고 있는 사회적 관계 그리고 그 안에서 꿈틀대는 역사가, 그리고 그 둘의 상호작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단순한 차원의 자의적 해석이 아니라, 해석들의 충돌 그리고 사회적 관계에서의 반영. 그것들의 상호작용의 앙상블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최근의 프랑스철학과도 쉽게 닿을 수 있다(물론 이 책에서 내내 프랑스 철학자들은 그의 이빨에 희생당한다.)

따라서 그러한 인식에서 포퍼, 랑케 같은 실증주의자들은 기껏해야 '사료를 모으는 수집가' 정도로 보일 따름이고, 못하면 '사기꾼'이 되는 것이다(책의 모든 부분에서 포퍼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가 거침없이 지껄이는 '사회주의'...

그런 맥락 상관없이 읽히는 국정교과서의 '역사란 무엇인가?'...

그 차이를 느끼기 위해서 우리는 더더욱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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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오해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 사회평론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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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Gould 그를 만나다.

2003년 2학기였나?

한동안 경제학에 미쳐있을 때로 기억된다.
경제학을 공부했던 이유는  "맹신적인 수량화의 기술자들이 무슨생각으로 그러고 있을까"가 궁금해서였다.

그 때 나에게 주류 경제학의 마법을 명쾌한 근거로 풀어줄 수 있는 수업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과학철학이라는 과목이었다.

그 때는 엄밀한 의미를 잘 몰랐으나, 기실은 그 수업은 근대 과학의 기초라 상정되는 인식론적 문제들(연역법, 귀납법, abduction(유추법?))에 대한 우리의 환상을 깨주는 역할을 했었다.

예를 들면, 귀납법 같은 경우야, 아무리 많은 사례가 있더라도, 그것의 인과관계를 해석하는 이론적 틀이 없으면, 확증될 수 없다는 거, 그리고 반대로 연역적 방법을 통해서 고안된 이론이라하더라도, 그 것이 현실에서 유의미하게 투영되지 않는 이상은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

그러면서 매우 한정적인 경우에만 통계가 이론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도! 미친 기술자들이 판치는 현재의 정치학/경제학자들은 마치 통계적으로 상관관계(coherent)가 성립되는 경우, 그 자체를 인과관계(causal)가 성립하는 것으로 가정하지만, 실제로 수학적인 계산은 그 자체만으로는 어떠한 인과관계도 도출할 수 없다.

그 수업에서 마지막으로 다루었던 것은 찰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와 굴드의 그에 대한 비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이전에 서점에서 미국에서 왜 4할타자가 없었는 지 등의 주제등을 통해서 대중적 과학서를 써냈던 제이굴드를 기억했던 나는, 그에 대한 호기심을 느꼈었다.

그리고 까먹고 있던 도중 4학년이 지나, 어느날 갑자기 어떤 신문의 서평에서 '굴드 - 사회주의자이자 진화생물학자'라는 그에 대한 평가와, 그의 저서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서 20세기 최고의 과학자 중 한명에 선정된 그를 알게 되었을 때, 난 주저없이 그를 알고 싶어졌고, 이 책을 집게 되었다.


2.

굴드는 진화생물학자이다. 그의 논의의 중심에는 언제난 사회/과학의 상호관계, 그리고 그 두가지가 분리될 수 없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순수한 과학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지능테스트와 순수하게 인간을 서열화시킬 수 있는 속성인 g에 대해서 연구한다. g(general intelligence)는 순수한 IQ 테스트를 기반으로 한 데이터를 토대로 통계화되어서 나타난 속성이다. 중요한 것은 그 자체는 아무런 실재적 물질로 물화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g를 고안해 낸 스피어맨이나, 버트 같은 이들은 이 자체를 하나의 물질적 속성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그 결과, 지능이라는 것이 인간의 선천적 속성이 되고, 아무리 교육을 받아도 개화될 여지가 없는 이들에게는 '배제'의 속성이 부여된다.(이는 마치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의 범죄자들을 다루는 방법과 같다.) 영국의 11+ 시험(초등학교에서 직업교육과 엘리트 교육을 분리했던(!) 시험)이 그러한 맥락에서 시행된다. 하지만 통계적 상관성만으로 유추할 수 있는 g라는 개념은 미분할 경우, 여러가지 다양성으로 표현될 수도 있으며, 이는 미국의 교육에서 '다양성'을 추구하는 견지의 방향성을 갖추어 주었다. 이른바 지능과학에서의 '평등주의'라고나 할까?

 굴드는,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 두가지 입장 모두를 해체시켜버린다. 통계적 상관만을 갖는 속성인 g라는 것 자체가 어떠한 물질적인 근거가 될 수 없으며, 따라서 그것을 다양성으로 보거나 일반지능으로 보는 가는 상관없이, 그것은 환경의 요인과 선천적 요인의 '변이'를 언제나 간직할 수밖에 없는 '잠재성'인 것이다. '결정적'인 무언가는 될 수없는 것이다.


3. beyond Biology and Evolution Science

 "만약 빈곤의 책임이 선천적인 것에 있지 않다면, 우리의 책임은 막중하다." -찰스 다윈

 현재 내가 평생 공부하겠다고 덤빈 정치학을 비롯한, 여타의 사회과학은 통계와 계량분석, 그리고 그 잘난 경험과학의 메타포와 게임이론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모든 사회적 관계라는 것은 수학적 함수로 셋팅되고, 거기에서 나타나는 R 값이 0.4 미만인 어이없는 상관성도 엄청난 결과처럼 여겨지고 있고, 모든 것은 수학적 상관성을 갖고 있는 다음에야 존중받는다. 그런 작자들이 기껏한다는 짓거리는 60년대 근대화이론가들이 "경제성장률과 정치적 민주화 지수에 양의 상관관계(!)가 발견되기 때문에 경제만 성장하면 정치가 민주화될 거다"라는 헛소리를 삐약삐약하게 했던 것의 재판 삼판만 계속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복지정책과 경제성장이 음의 상관관계에 있기 때문에, 복지를 줄이라는 주장등등....

 2001년 미국 정치학회보에는 Mr. Perestroika라는 사람의 이메일이 도착했다. 왜 양적 방법을 쓰지 않는 이들은 미국 정치학회보에 글을 쓸 수 없으며, 왜 교수가 될 수 없으며, 모든 이가 경험과학을 공부해야만 하는 지였다. 그 후 역사적 연구의 대가였던 Theda Skocpol(하버드 정치학과)가 미국정치학회장이 되기도 했지만, 실제로 그 관행은 여전히 계속되고, 예를 들어 내가 미국에 유학가서 질적방법과 역사적 연구 그리고 사회적 관계에 대한 '비수량적 방법'을 쓰는 이상, 나는 미국에서 교수가 되는 것은 애시당초 포기해야하며, 내가 갈 곳은 길거리에서 데모하고, "New Left Review"나 "Monthly Review", "Politics & Society"에나 기고하는 천덕꾸러기 '급진주의자'로 낙인찍힐 따름 아닌가?

 만약 그러한 양적 방법론과 통계 그리고 게임이론으로 거대한 정치현상의 총체적인 면을 구상할 수 있다면 내 기꺼이 그 길로 가겠지만, 사실 커다란 관계의 조망이라는 건, 애시당초 통계적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며, 동시에 그들은 '거시적 예측' 따위는 하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한다.

 또한 이런 거대한 계량 방법의 이데올로기는 후쿠야마 같은 미친 새끼들이 '역사의 종언'을 외치는 배경과 그리 멀리 있지는 않다. 역사적 조망과, 사회적 관계에 대한 심층적 연구, 여러가지 초학제간 연구를 가로막는 것은, 그 이면에 자신들이 그렇게 자랑하는 '상관성'이라는 것의 허구성이 드러날까봐 노심초사하는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이 실제로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승리'라는 표면적 주제보다, 안도의 한숨이자, '새로운 꿈'을 빨갱이들이 꾸지 않았으면 하는 조바심인 것 처럼 말이다.


4. re-thinking Gould

 re-thinking marxism이라는 저널을 보면, 그 마지막 호(2003)에 특집으로 굴드에 대한 기사를 싫었다. 그의 실천적 삶과, 언제나 말하기는 꺼려했던 그의 사상적 배경을 보여준 저널...

 그의 업적에 대해서 평가를 하는 것은 나로써 무리다. 다만 그의 생물학적 접근을 통해 사회과학의 현재 작태가 얼마나 한심하고 터널 시야에 갖혀있는 지는 명백하게 알 수 있지 않나?

 경제학/정치학 방법론 시간에 어김없이 과학철학의 논의를 살펴보기는 했지만, 그것은 언제나 Karl Popper와 Thomas Kuhn의 논쟁, 그리고 J.S. Mill의 방법론 수준에서 끝났고, 그 이후는 통계와의 지리한 싸움으로 끝이나 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대안적이라 할 수 있는 Alexander Wendt의 사회구성주의라던가, 들뢰즈-가타리/푸코를 위시한 프랑스 철학의 탈구조주의 논의 그리고 바슐라르 가스통의 과학에 대한 문학적 메타포는 고려되지 않았다. 물론 그것들을 그들이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 것들을 물을 때, "그건 난 잘 모르는 데" 수준으로만 해줘도 고맙겠지만, 어떤 이들은, "그건 내 논의와 전혀 상관없다. 쓸데 없는 소리는 하지마라"라고 입을 가로막곤 한다.

 '신'이 의심되지 않는 시절 신 자체에 대한 논의는 언제나 신성모독이고 화형이 지극히 당연했고,
 '성리학'의 진리가 국가 이데올로기인 조선시대에서 유교에 대한 탄력적 이해조차 '사문난적'으로 찢어 죽임을 당하고, 모든 가족이 노비가 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당당하게 '에티카'를 통해서 '신'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해체했고, 우리가 믿는 상징적인 '신'에 대해 비웃음으로서 새로운 장으로 진입할 토대를 제공했다.

 정약용도, 박지원도, ..........

 '통념'에 대한 대안이라는 것은 언제나 '꿈'꾸는 자에게서 나온다는 거.. 굴드가 나에게 준 또 하나의 교훈이었다. 

*조금 더 보태자면, 그의 연구 방법은 엄밀하게 푸코식의 '계보학'적 접근과 연장선상에 있다. 어떤 대상의 원류를 찾아서 그 위대함을 밝히는 것이 아닌, 오히려 어떤 위대하다고 생각되는 것의 꼭대기까지 추적해서 그 '쭉정이' 같은 성질을 폭로하고야 마는 방법.

 그리고 그의 존재론적인 토대는 사회적 관계라는 맑스적 테제에 가장 깊이 간직되어있는 양식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1세기의 맑스주의자가 할 일은 이런 일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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