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문사냥꾼 - 이적의 몽상적 이야기
이적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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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나무'라는 단편소설집을 보았을 때, 그의 영리함과 기괴함 그리고 그 악마스러운 모습에 놀란적이 있다.

그 덕분에 이적의 이 책이 놀랍게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패닉 2집의 노래가 많이 생각이 났다.

패닉 2집의 '불면증'이라던가, 'UFO'의 노래에 언뜻 언뜻나오는 읖조리는 목소리들이 그대로 글로 만들어지면, 이런 소설이 된다는 느낌이 들었고,

이적의 상상력이 돋보인다.

비꼬기, 틀어보기, 그 속에 자신의 냉소를 그대로 비춰주는...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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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교회 - 권력에 중독된 한국 기독교 내부 탐사
김지방 지음 / 교양인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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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극으로 치닫는 한국 교회

한동안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의 개신교도의 수가 줄고 있는 경향을 보아하니, 이제 몇년 지나지 않아서, 한국의 교회가 다 몰락하고, 그 많은 목사들이 실업자가 되겠다라고. 그건 하비콕스의 <세속교회>(http://blog.aladin.co.kr/hendrix/1715149)를 읽으면서 느꼈던 점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몰락해 가는 한국 교회 그리고 개신교에 대한 이상한 애증을 느꼈던 것이 사실이다. 

요즘은 생각이 바뀌었는데, 한국 교회는 '양극화'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고, 소수 재벌교회들(세계 종교건물 중 규모와 교인의 수에서 단연 100위권 안에 들어가는 매머드 교회들)을 제외하고 다들 쉽게 몰락할 것 같다. 또한 개신교 자체의 생존 양상이 사회로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숨쉬면서 그들에게 참 신앙과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믿지 않는 것이 곧바로 불이익이 되는 세상을 만들꺼라는 공포를 안겨주는 것으로 바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교회를 다니고 안 다니고의 문제가 종교적 신념이라는 다소나마 시장에서 '다양성'의 근거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 미시적 권력의 문제로서 생활세계에 존재하게 될 것이며, 거시적 권력의 문제로서 '개신교 권력'의 문제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미시적 권력 차원의 예를 들면, 다른 어떤 종교도 그렇지는 않은데, 교회를 다니는 상대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들이 이제는 어느 정도 굳혀지고 있다(특히 남자와 그 부모가 교회를 다닐 경우는 개종을 하던가, 헤어지던가 해야하는 일도 많은 듯 하다.).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지만, '자유'라는 것 자체가 어떤 구속력을 갖는 것이 아니어서 결혼에 있어서 떳떳한 불충분함으로 인정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시적 차원의 예는 어떤 것을 들 수 있을까? 이 책은 그것을 추적한 다큐멘터리이다.


정치교회, 그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말에 관하여

저자가 파헤치고 있는 것들은 교회의 '권력화'이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거시적 차원에서의 정치'에 중독된 한국교회의 모습을 파헤쳐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파헤치기 위해서 왜 그것을 걸고 넘어가는 가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처음 꺼내는 이야기가 그래서 헌법 20조의 내용이다.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지며 국교를 인정하지 않고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는.

물론 그렇다하여, 지금 그 문자 그대로의 헌법 20조의 내용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말들을 되새겨 보면서 한국 교회를 보자는 거다.

2007년에 대해서 저자는 굉장히 큰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한국 교회가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행보를 어필한 해이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에 있는 금란교회의 김홍도 목사의 이야기나, 그 외의 보수적 교회들 대부분은 사실 크게 이야기하거나, 작게 소근거리거나간에 특정후보를 밀었다. '장로'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갔다.

그런데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봐야하는 문제가, 모든 한국 교회가 보수적이냐는 문제와, 보수적 교회들이 일관되게 한 후보를 밀었냐는 문제인데. 전자의 경우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계열의 진보적 교회들은 확연히 분리되는 감이 있으며(그 중 원로 목사들은 좀 다른 색깔을 가지기도 한다.), 보수적 교회들의 집단인 한기총의 경우에도 두 후보로 갈리는 경향도 보이기도 한다. 당시 야당의 2명의 후보 중 한 후보에 대해서는 재벌교회들이 지지했다고 보이지만, 다른 한 후보의 경우 한기총 권력에서 소외된 다른 교회들이 지지하는 경향도 보여주었다.

이런 과정은, 어떻게 시작된 걸까?

저자는 청와대에서 벌어지는 조찬기도회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한국의 기독교 대부분은 사실상 87년 이전까지 '정교분리'라는 명분을 크게 세우면서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 못했다고 그들은 말할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런 억압적 체제에서 '안위'를 택하면서 교회는 성장했다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극우적이고 반공적인 테제를 가지고 내려온 평남쪽의 서북 개신교가 강하게 뿌리 내렸다는 점이 그러한 정치적 분위기를 오히려 선호했다는 이야기도 되겠다.

다른 한편으로, 그런 '정교분리'의 보수적 교계와 달리 기독교장로회(기장)의 실천적인 목사들과 감리교 쪽의 목사들은 사회적 실천과 정치적 불의에 대해서 명백한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말하면서 도전했고, 탄압을 받긴 했지만, "교회가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했다"라는 말을 듣는 데에 일조했다.

하지만 87년 이후의 개신교는 점차 정치, 권력, 사회적 아젠다 들에 대해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데, 그건 한편으로 교회의 힘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전의 기성질서에 대한 회고적 방향으로서의 교회의 '정치적 지향'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보수 교회들은 한편으로는 큰 교회의 목회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보수 교회들의 연합체를 통해서, 또한 NGO를 통해서 한국사회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97년 이후 07년까지 '북한' 문제와 일반적 '정치적 민주화'라 칭하는 것에 대해서 진보적 목소리를 내는 정권이 집권하자, 그런 경향은 더욱 강화되면서 07년에 이르러 분출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고리들이 마냥 단단한 것들은 아니다. 사실 그런 목소리들의 대부분은 보수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는 목회자들의 것일 뿐, 교회의 평신도들이 그런 생각을 일관되게 갖고 있다고 보이지는 않고 훨씬 약한 수준에서 그들의 발언에 동의한다. 그리고 '한기총' 같은 대형 개신교 집단 역시도 강한 수준에서의 연합이 아니라, 겨우 겨우 적자를 면해가면서 대형교회의 '쾌척'에 의해 유지되는 집단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이를 무시할 수가 없는게, 레이코프가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에서도 이야기했던 '프레임'을 선점하는 효과를 가지는 데에 있다. 목사들이 반드시 강력하게 '누구 찍어라'라고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한기총이 친미 집회를 한다해서 그들이 개신교인들을 투표장으로 끌고와서 투표를 하기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치관과, 교회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거룩한 소리'에 섞어서 한 마디를 더 던지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섞여지는 '한마디'가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투표장에서 투표소 앞에 선 신도들의 마음에 쌓인 나머지 파문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난 미국의 '복음주의' 운동들을 한국에서 다시 재발견한다는 느낌이다. CBS와 극동방송에서 설교를 받아서 편집할 때, 목사들의 '정치적 강성발언'을 잘라놓고, 결국에 대형교회들의 지원이 아쉬워서, 그것들에 대해서 사과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실을 수 밖에 없었던 일들을 떠올리면서, 미국에서 라디오 방송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커지기 시작한 '복음주의'와 '보수주의' 운동의 파장이 떠올랐던 것이다. 또한 하루하루 지친 삶의 회복과 치유를 원하고자 교회로 교회로 향했던 이들에게 쏟아지는 은혜의 목소리에 섞여진 이러한 복선을 깔아놓은 '정치적 선동'이 한국의 정치적 지향의 위치를 더 보수화 시킨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더 문제는, 그러한 교계의 '보수화'를 정치적 세력들이 받아들이고 '천국적 가치'를 사회에서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만만한 정략적 차원의 도구로만 활용한다는 데에 있다.

   
 

교회의 성도들을 자신의 지지 기반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억지로 신앙인인 듯한 분위기를 연출한 이도 있고, 자신의 신앙 체험을 개인적인 정치 신념으로 확장한 이들도 있다.
 이들에게 아쉬운 점은, 자신들이 국가 운영을 맡겠다고 자처한 정치인이면서도 정작 종교 문제는 정략적인 차원 혹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고려할 뿐 국가 운영에서 종교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고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p.272).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개신교의 정치참여 그 자체를 어떻게 봐야하는 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저자는 개신교가 과연 정치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지에 대해서 묻게 되는데. 선민사상에 빠져서 배타적 신앙만을 가지고 '대속적 신앙'에 참여할 지를 놓고 협박을 하고 을러대는 그들에게 그런 자격이 있을까? 물신주의에 빠진 민중에게 해독제를 주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마취제를 제공하고 있는 교회, 어느 순간 '축복'이 되어버린 '치부욕'을 벗어나지 못하는 교회가?

많은 교회에 대한 비평들이 한결같이 이야기 하지만, 그건 너무나 기독교가 '만만하게' 인식되는 탓이 클 것이다. 정말 '예수를 닮아' 십자가를 지라고 이야기하는 교회는 없고, '믿쑴니까?'에 '아멘'만 외치면 하나님 나라에 도달할 것 같은 느낌만 제공하는 교회와 그에 안위하는 평신도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 바로 지금의 한국 개신교가 아닐까?

새로운 패러다임의 교회를 세워야 하는 것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그리고 교회가 오히려 탈속화되어 세상에 벌거벗은 몸으로 대화해야할 이유가 그것이다. 예수 앞에 떳떳하지 못한 배신자들의 기독교를 벗어나야 한국의 개신교가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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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없다 - 기독교 뒤집어 읽기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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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한국인'의 민족신이 되어버린 예수. 그런 예수는 세상에 없다.

어느 순간, 한큐에 그가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었다는 것만 알면, 구원받았다 이야기할 수 있는 예수. 그런 예수는 세상에 없다.

어느 순간, 하나님의 아들로 절대적인 신이 되어버린 예수, 그런 예수는 세상에 없다.

수십년 동안, 종교를 연구한, 기독교의 섭리에 대해서 인정하고 믿는 종교학자가 낸 결론이다. 그가 본 한국의 '기독교'의 신앙은 간단하다.

어린아이가 말하는 "우리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야"라는 식의 유아적 발상이라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그렇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 그걸 듣는 엄마는 "맞아, 아빠가 세상에서 최고야!"라고 대답해 줄테지만, 그 아이가 20살이 되어서도 똑같은 말을 한다면, 그는 유아적 사고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성장이 되지 않은 인간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의 문제라면, 큰 문제가 아니지만, 그가 기실 "우리 아빠가 최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생활에서 밀접하게 발견하고도, 우기면서 다른 사람에게 "우리 아빠가 최고"라는 사실을 믿으라고 강요하고 다니면 이 것은 곧바로 사회적 문제까지로 진화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그 수준을 벗어나야 한다.

다른 아빠들도 그들 나름에게는 최고 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하고, 내가 자라서 어떤 아빠가 되어야할 지, 어떤 엄마가 되어야할 지도 고민해 봐야 하는 것이다.

비유적 표현이 많지만, 그것이 예화로 쉽게 풀어져 있기 때문에 다가가기 쉬운, 우리의 예수에 대한 편견을,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한번 깨주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편견을 깨려는 이들에게 '빨갱이', 혹은 '신신학'의 굴레를 씌우고 있지만, 기실 이런 배타적인 태도는 한국에서만 절대적일 뿐, 다른 나라에서는 그리 큰 경향이 아닌 '근본주의적 이해'일 뿐이다.

그리고 기독교를 '유일신'이라 생각하는 태도를 갖고 있다 말하지만, 기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허구이다. 왜냐면, 김경재 목사등도 비판하고 있지만, 진정 유일신을 믿는다면, 다른 이신과 대적하는 신관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신들도 하나님의 '속성'임으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적 다원주의를 갖는 다는 것은, 기독교의 관점을 '놓고' 다른 종교를 받아들이는 '이단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어떤 식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문제에 대한 '수용적 태도'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종교를 기독교 인이 읽어야 함도 당연하다는 결론을 저자는 도출한다.

또 하나 그의 공박이 강한 부분은, 성서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축자무오설' 하도 많이 쓰는 말이지만, 성경에 쓰여진 기록들은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서 그 영감대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하는 말인데, 우리는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예수의 계보가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 다르다는 이야기도 가능하며, 또 노아의 방주를 실제로 구현해 보려는 데에서도 불가능 하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실 성서는 그 당대의 '고백적' 언어였거나, 당시의 민족의 세계관의 투영이다. 그것들을 문자 그대로 읽고, 그대로 따르려면, 우리는 우선 노예제도를 살려내야 하고, 다시금 이민족을 정벌해야하며, 여성들을 강단에서 내려야 하고, '처녀'가 아닌 여자를 그대로 돌로 쳐 죽여야 하게 된다. 결국, 그렇게 하지 않고 있는 현실과 그 해석.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책은, '종교'가 주는 의미에 대해서 환기시키고, '종교를 믿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것들은 개인에게 있어서의 영성의 의미와, 종교가 사회에서 가지는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자꾸 그것들에 대해서는 피해가고, 교조적인 신앙들이 '신학'없이 논의 없이 우리들에게 흘러가고 있기에 '기독교' 자체가 황폐해지는 것이다.

많은 참고문헌들과 읽을 꺼리들을 던져주는 점이 유익하고, 생각할 바를 남겨준다.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드러난다.

   
 

 불교와 유교와 기독교가, 나아가 천도교나 원불교 등 이른바 민족종교까지 합심하여, 서로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하면 더욱 많은 사람 속에 이런 근본적 '의식 변화'가 일어나게 할 것인가를 논의할 때, 이런 대화야말로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나는 이런 일이 내가 사랑하는 조국 하늘 아래에서 착실히, 그리고 꾸준히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싶다(p.291).

 
   

하지만 몇 가지 부분은 모호한데,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 그는 규정하기를 피하고 싶어하는 듯하다는 것에 좀 문제가 있다. 그는 예수를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가졌다고 하지만, 내가 볼 때, 그리고 '역사적 예수' 논의들을 볼 때, 예수는 단순한 보편자로서의 인간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억압받은 자들'로 분명히 그 범주를 축소하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그 점을 벗어난 다면, '예수'에 대한 논의는 다시금 구름위로 떠오르고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그 상황에서의 종교는 맑스가 말한 '인민의 아편' 밖에 안된다. 처절한 환경에서의 위로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는 관점의 차이겠지만, 그의 말속에 들어있는 민족주의적 입장들이라는 것들이 가다듬어지지 않은 채 그냥 쉽게 쓰인다는 점이다. 차라리 정교하게 '민족'과 '겨레'에 대해서 구체적인 메시지를 준다면 모를까, 그냥 통상 대통령이 국민에게 '사랑합니다'하듯, 사용된다는 점은 엄밀성에 대해서 물음표를 던지게 하며, 김진홍 목사에 대한 평가도 이 시점에는 다시 해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런 '먹물들의' 이야기를 떠나서도, 이 책은 기존의 근본주의적인 '철부지' 기독교를 극복하는 데 해독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반가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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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1406 2008-03-04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기독교 도서에서 빼 주시고, 반기독교 도서로 넣어주세요...

양승훈 2008-03-04 18:15   좋아요 0 | URL
아뇨. 그렇게 하기는 곤란한데요? 님이 '기독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지평에서 생각하시는 지에 대해서 논하고 싶지는 않지만, 제가 만나는 예수에 대해서 생각할 여지를 충분히 주었고, 그런 고민들을 가지고 다시금 '믿는다는 것'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반기독교' 딱지를 붙이는 것에 동의할 수 없어요. 이 책을 아마 안 읽어보셨겠죠? 일독을 권합니다.

드팀전 2008-03-25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헨드릭스의 사진이 멋집니다..처음 인사드리네요...우연히 정말 우연히 들어왔어요^^
'그런 예수는 없다'가 이 책에 가장 적합한 제목이 아니었을까 해요...그러면에서 이 책이 '반기독교적'이라는데는 생각을 같이 하지 않습니다.(전 반-한국기독교이자 비기독교인입니다만.) 오히려 맹신과 비난이라는 이중의 덫에 빠진 한국 기독교를 살릴 수 있는 인식론적 단초들을 제공하지 않나싶습니다.예전에 저희 아버지께도 선물해드린 적이 있었습니다.좋았다고 하시더군요..^^

옆에 리스트를 보니까 언론고시(?)에 관심이 있으신가 봅니다.저도 예전에..

양승훈 2008-03-25 18:42   좋아요 0 | URL
원래, 그런 제목이었다더라구요.. '그런 예수는 없다' .. ^^;
헨드릭스를 워낙 좋아해서 말이죠 ㅋㅋ
언론고시에 관심이 있고, 한두해는 아마 그것에 매진할 듯합니다. '매진' 하지는 않고 있는 지금이긴 하지만요.. ;;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류상태 지음 / 삼인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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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의 늪에서 발 빼기

이 책의 저자는 목사였다. 그것도 예장 통합쪽의 목사로 활동했었고, 대광고등학교의 교목이었으며, 숱한 고등학생에게 종교과목을 가르쳤던, 그냥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한국사회의 목회자였다. 하지만, 강의석 사태를 분기점으로 하여서 그 틀에서 벗어난 '이단아'가 되었고, 현재의 시점에서 그는 교목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다. 그냥 한 사람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갖는 이가 되었다.

보통, 평신도들에 있어서 교회에 지쳐 나오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고, 주위에 수두룩하다. 교회에 가서 누리고 싶었던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평안' 등의 정신적 안위였다면, 교회에 가서 그걸 도대체 찾을 수 없는 요즘이기에 그들은 교회를 나오고야 만다. 보통 이런 이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깊이 탐구하지는 않았지만, 세상에서 부딪히는 현실과 괴리된 교회의 '몰상식'에 놀라거나 정서적 '황폐함'에 자괴감을 느끼고 떠날 수밖에 없는 경우인 것이다.

다만, 이 책의 저자 류상태의 경우에 놀라운 것은, 그는 주류기독교가 주는 관념에 대해서 타협이든 동의이든 간에 그 신학과 신앙의 방향성에 발을 맞춰가던 사람이었고, 어쩌면 그것들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그리고 자신의 주위 사람에게 '선생'으로써 가르치던 사람이었다는 데 있다.

그렇다고해서 그가 보수적 한국 기독교 신학의 'Zealot' 역할 만을 했던 것은 아니고, 나름의 고민에 비추어 가면서 그것들을 바라봤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것의 요소에는, 그가 언급했던 '예수 세미나' 그룹의 '역사적 예수' 논의가 있을 것이고, 한국의 민중신학 등의 요소가 있었을 것이다(내가 알게 된 김강기명도 약간 그런 사람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는 한국 기독교의 배타적 관점이 제공하는 '착각의 늪'에서 빠져나왔고, '불거토피아'(http://cafe.daum.net/bgtopia) 등에서 지속적인 한국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성찰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전에 읽었던 그의 책(http://blog.aladin.co.kr/hendrix/1713606) "당신들의 예수"에서 가장 센세이션했던 "부처님 머리에 담뱃재를 털고" 부분에 흠뻑 빠지고, 한국 기독교에 대한 가치관 하나를 잡을 수 있었는데, 먼저 쓰여진 이 책 "한국 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같은 경우 그런 관점의 시작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교회는 어떤 점에서 예수를 배반했는가?

도대체 뭐가 문제인걸까? 이제는 더이상 한국의 기독교가 확장하지도 않는 형국이다. 오히려 천주교 같은 경우 신도의 수의 확장이 있지만, 더 이상 기독교(개신교)는 수의 확장도 오히려 (-)로 전환된 상태고, 사회 병리적인 현상으로 자리잡았다. 어쩌다 그렇게 된건가?

이 책에는 그 병리적 현상들과 그 현상들에서 나타나는 뿌리 깊은 병패가 나타나있다.

근데, 자꾸 저자가 쉽게도 '기독교' 신앙, 신학 그 자체를 공격하는 이유는 뭘까? 사실, 기독교의 특정 부문에 대해서 공격하면 되는 것 아닌가?


   
 
 사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성장한 것이 아니라 살찐 것이었다. ... 체계적인 다이어트를 해서 살을 빼고 건강을 회복하지 않으면 심각한 질병의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다이어트에 성공하고 건강을 되찾아 우리 사회로부터 존경을 회복하는 길은 없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이 너무도 멀고 험하게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며 뼈를 깎는 자성의 노력이 없이는 한국 교회가 살 길은 요원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윤리적 도덕적 차원의 반성과 개혁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며, 정통 교리로 인정하고 따라온 모든 신학적인 문제를 원점에서 재검토해 보고 예수가 전한 복음의 원형, 즉 예수의 삶과 정신으로 돌아가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pp.80-81)
 
   

즉, 한국 교회의 병패의 이면에는 한국에서의 특수한 '신학적 문제'들의 근본적 해결이 필요한 것이다.

그는 한국 교회의 배타성, 세속화 및 물신화, 역사성 결여, 가부장적 권위주의, 성서 문자주의(축자무오설), 종말론적 환상주의 등의 병패를 지적한다.

그리고 그 병패의 중심에 기실은 평신도들보다 목회자들의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데올로그화 된 목회자 집단.. 그들은 '예수의 신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신앙'을 가르치고 선포하며, 대속신앙에 의거 지속적인 인간의 '죄'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 모든 승리를 얻는 다는 식의 협박을 지속한다. 그들의 정화를 바랬기에, 그 권력 구조에서 류상태는 갖고 있던 지위를 바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책을 읽던 도중, 강의석 사건에 대한 일지가 나온다. 상식적인 선에서의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라는 것이 학교라는 '억압 기제'에서 얼마나 무력한지에 대해서 배운다.

부흥회에서 나오는 '성령의 불'이 우리를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 지에 대한 그의 말들이 귓가에 맴돈다.


   
 
 사흘 동안의 집회가 끝나자 회원들의 얼굴은 천사같이 변했다. 근심과 걱정이 사라진 천진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3일간의 체험'을 통해 자주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박탈당했으며, 거의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다. 이제 그들이 교회에 가면 새로운 움직임이 일 것이다. 그들이 속한 교회 한가운데서,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그들은 성령의 불덩이가 되어 다른 교인들의 심령에도 불을 지를 것이며, 교회는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가 될 것이었다. 집회에 참석한 회원들은 그렇게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소중한 이성과 분별력을 교회에 갖다 바쳤다(p.20).
 
   

개개인의 '의심하는 신학'에 대한 강조도 되새길만 하다.


   
 
한국 교회 목사여! 성도들에게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가르치는 것은 '스스로 어리석고 분별력 없는 바보가 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목사와 장로들이여! 예수를 제대로 믿고 전하고 싶다면, 당신들이 하느님 편에 서 있는지 하느님을 등지고 서 있는 지 의심하며 돌아보라. 그리고 성도에게 자유롭게 의심하고 말할 수 있도록 하라. 교회의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면, 당신들뿐 아니라 성도도 쉽게 중병에 전염될 것이다.
 바른 목회자, 바른 장로, 바른 신앙인이 되고 싶으면 의심하라. 한국 교회가 하느님 앞에 바로 서 있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pp.39-40).
 
   

 
그 외에도 성서에 대한 기존 해석들에 대한 비평등도 있는데, 기실 이 것들의 그의 강조따라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사실 신학자들은 대충 알고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안팔릴 까봐 잘 '설교' 시간에 말하지 않고, 감추는 것들에 불과하다.
 
'생동감 있는 신학'을 위해서는 결국, 자신의 깨어진 사고와 끝없는 의심 그를 통한 성장이 필요할 테고, 그것들이 해결되면서 참 '신앙'을 이야기할 수 있을 거고, 그 때쯤에서야 한국사회에서도 '예수'에 대해서 툭터놓고 더 도그마 없는 열린 대화와 영성에 대한 교류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류상태의 글은 이런 '문제제기'로 훌륭하다.
 
다만, 대안적 공동체에 대해서 '새길교회' 같은 '예수 클럽' 형의 모델을 보여주지만, '안티테제'를 크게 못 벗어나고 있다는 점이 좀 아쉽다. '공동체'에 대한 논의는 온라인을 벗어나서 우리의 생활과 밀접하게도 연장되야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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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신학의 미소 - 동시대인 총서 11
김진호 지음 / 삼인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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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꼬뮤날레 1회로 기억이 된다, 들뢰즈와 관련된 논의들을 가지고 예수를 읽어내는, 신학을 읽어내는 일군의 학자들이 토론을 시작했고, 마지막에 김진호라는 목사가 한마디 한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는 왜 아직도 목사의 직함을 달고 있는 걸까요?" 서로 너털거리는 웃음을 지으면서 끝났지만, 어쨌거나 잠시 정적.

그리고 나서, 그들이 주로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라는 곳에서 민중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한동안 그 홈페이지를 기웃거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전에도 이야기했듯이(http://blog.aladin.co.kr/hendrix/1848274) 민중신학에 대해서 관심만 갖고 아무런 읽는 노력을 해보지 않았던 나로서, 그들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리도 만무했고(지금도 일천한 데 말이다.), 역시 열심히 게시물을 열람하지 않았다.

<반신학의 미소>를 산건, 2007년 8월 5일인데, 사게 된 것도 한동안 갖고 싶어했지만, 크게 우선순위가 가지 않았기 때문에 한참 망설이다가, 류상태의 <당신들의 예수>를 읽다보니 우선 순위가 앞으로 오게되었다(http://blog.aladin.co.kr/hendrix/1713606). 하지만 당시에 읽기에 너무 난해해서 덮고 있다가, 요즘에 벼른 김에 읽어버리자는 마음으로 한 번 주욱 읽었다.

이 책은 삼인의 '동시대인 총서'의 다른 책들 구성과 같이 논문들의 모음이고, 따라서 논문들의 주제도 다양하고, 한군데로 딱 모아진다고 말할 수 없다. 저자도 인정하는 바다. 다만 저자의 말처럼 '반신학의 구상'을 하는 차원에서 그나마 이야기의 선이 모아진다고 주장한다.

1,2 장의 내용은 사실 별로 와닿지 않았고, 분석적인 사회과학 논문식으로 쓰여진 3장 "교회의 위기와 반신학" 부분이 나에게 가장 쓸모가 있었다.

'민중신학'을 도대체 왜 하는가? 그에 대한 그의 대답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교회라는 제도적 실재를 반그리스도적인 것이라고 규범적인 비판을 가하는 것과,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현실태로서의 교회의 유의미성을 부정하지 않는 것 사이에 모순적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원리적인 규범성과 그것의 현실적인 실행은 종종 상보적인 실천의 패러독스를 담고 있다(p.235).

 
   

그리고 그가 민족주의라는 것의 황폐함을 알고 있고, 젠더의 문제가 단순한 차이의 인정의 문제가 아니라 푸코식의 미시권력-훈육질서 와 관련되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는 점이 굉장히 놀라웠다. 실은 내가 바라보는 신학자에 대한 편견일 수 있겠다. 또한 민중의 구상에 있어서 '민족'처럼 '상상속의 공동체'가 아닌 그것을 다시금 어떻게 구성해 낼 것인가의 문제를 발견하고 있다는 점에서 7년이 지난 저작이지만 굉장히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의 구상에서 역동적인 '니체적' 활력이 느껴지는 것이었고, '생동' '생명' 그 자체의 강력한 힘이 느껴진다.

또한 요즘 한참 읽었던 '예수 세미나'(역사적 예수 연구) 동향에 대한 논평도 굉장히 세련되고 그것의 '실천적 함의'에 대해서 짚어내는 부분들이 내 공부의 '지도의 필요성'을 다시금 일깨워 줬다.

그의 <예수 르네상스>와 <예수 역사학>을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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