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트로이카 - 1930년대 경성 거리를 누비던 그들이 되살아온다
안재성 지음 / 사회평론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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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대한민국'과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대학을 다니는 동안, 내 주위에는 '해방된 조국'에 대해서 떠들고 다니는 이들이 숱하게 많았다. 그들에게 언제나 엄정한 한국사회의 대안이라는 것은 '자주'와 '반미'를 통해서 성취될 것이며, 그 롤 모델은 크게 운운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자주'와 '반미'를 선취하고 있는 그곳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들은 한동안은 부정으로, 나중에는 '역사적 정통성'을 들고나와 배를 째곤 했다.

그들에게 지친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해방'이라는 구호를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복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자본가들의 세상을 타파하고 민중의 세상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난 그들에게 조금 더 마음을 빼앗겼지만, 궁극적으로는 좀 더 튕겨나간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 지리한 'NL-PD' 혹은 '주사파-vs 좌파'의 구도를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은데,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내어 놓는 이유는, 당시에 '북한사회'에 대한 책들을 읽었을 때 PD들이 이야기하는 몇 가지의 흥미로운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난 당시에 알고 있었던 사람으로 '박헌영'과 '여운영' 정도 밖에 없었기에 다른 이들에 대한 언급이 무슨 말인지를 도통 모르고 그냥 듣기만 했지만, 그들의 이야기의 핵심은 기억할 수 있었다. "민족해방 운동의 전통이 오로지 민족주의자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다. 그 중심에는 사회주의자들 또한 한 축으로 있었으며, 민족주의자들이 밖에서 깃발을 들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칠 때, 국내에서 파업을 조성하고, 혁명운동을 하던 일군의 그룹이 존재했다" 뭐 이런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명제의 강렬함은 기억되었으나, 그 사람들이 어떤 활동을 하는 지에 대해서는 '유추'만 했을 뿐 그 디테일에 대해서 읽은 적은 없었다.

<경성 스캔들>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사실 창피하지만 이 드라마의 원작인 줄 알고 <경성 트로이카>를 집었다. 항상 사회과학-역사-철학 따위의 이야기만 나오면 세상 모든 걸 다 아는 척하며 잘난 척하던 나였지만, 이럴 때도 있다. 밑천 드러난 거 인정한다. 여튼, '재미있겠다'라고 생각하면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의 이효정의 시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내 영혼 떠나버린 빈 껍질

활활 불태워

한 점 재라도 남기기 싫은 심정이지만

이 세상 어디에라도

쓰일 데가 있다면

꼭 쓰일 데가 있다면

주저 없이 바치리라

먼 젊음이 이미 다짐해둔

마음의 약속이었느니
 
   


  잊혀져 버린 자들의 이야기. 이현상과 경성 트로이카의 이야기. 이야기는 살아남은 경성 트로이카의 운동가 이효정의 목소리를 통해서 복원된다. 어느날 인사동 전시를 보다가 비장한 그림을 보고 반해버린 저자와의 인연을 통해서 이야기는 진행된다. 
 
괜찮은 인텔리였던 이효정을 '빨갱이'로 전향시켜버린 이현상의 힘이라는 것은, 대단한 '권력'을 가진 자의 힘이 아니라 오히려 설득하는 힘과 경청하는 힘이었고, 그런 가운데 '진실'에 기대는 그의 호소력이었다. 
 
사회주의를 패션으로 생각하던 '모던뽀이'들과 '모단 껄'들을 일제는 두려워 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현장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파업을 통해서 '정치적 아젠다'를 제기하는 진짜 멋쟁이 사회주의자들에 대해서 일제는 탄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사랑도 꽃피고, 또한 질투도 싹트며, 일상이 주는 압박 또한 펼쳐진다. 언제나 '부양가족'의 문제는 남자든 여자든 그 힘을 축소시키게 되는데, 그것을 희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은 그걸 강제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세상을 뒤집어 엎고 싶었던 거다. 
 
이런 그들의 열정이라는 것들도, 일제의 압제하에서, 또한 해방후의 좌우대립속에서 '이방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순간 결국 '이룰 수 없는 세상'의 꿈으로 아스라히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북에서는 '미제의 쁘락치 박헌영'파로 분류되어 사상검증과 '자아비판'이 필요했고, 남쪽에서는 '빨갱이'라는 그 한마디로 모든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얻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광장>의 이명훈의 고민이라는 것은 마음 속의 것이었다면, 이건 모든 곳에서의 폭압을 수반한 물리적인 것이었다. 
 
이제 해방후 60년이 넘었고, 전쟁이 끝난지 55년이 되어가지만, 이들은 여전히 제 위치를 부여받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독립운동>의 정사(正史)에도 기록되지 못하는 이방인의 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이는 글로, 또 다른 어떤 이는 발로 뛰면서 해방을 갈구 했다. 그들에 대한 재평가는 우리의 몫이고 우리의 '정치적 건강함'의 척도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 살아남아있는 자들의 기록이 역사라는 비관적인 견해를 모르는 바가 아니다. 지금 쇠락해 있지만,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새로운 기록의 발견이라는 것에 역사를 대입한다면, 우리가 복권해야 할 역사는 이런 것이 아닐까? 괜한 알맹이 없는 국체 논쟁을 할 께 아니라면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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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말하다 김혜리가 만난 사람 1
김혜리 지음 / 씨네21북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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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 공감하고 경청하여 얻어낸 기록들

<그녀에게 말하다>. 그녀에게 말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문화예술인들의 기록이다. 흔히 궁금할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예전에 한 동안 씨네21을 열심히 본 적이 있었다. 한겨레 21과 씨네 21을 한꺼번에 사서 다 읽는 것이 한 주의 윤택한 나의 문화활동이라는 신념이 있었을 때였다(물론 지금도 그런 마음이 변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상하게 그만큼의 여유가 없다.). 당시 '김혜리가 만난 사람'이라는 꼭지를 통해서 문소리와의 인터뷰를 읽은 기억이 있는데, 그의 남편에 대한 이야기,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까지 다른 <연예가중계> 따위에서 절대 찾을 수 없는 질감으로 토로하는 문소리를 보면서 인터뷰의 질이 다름을 느낀 적이 있었다.

예전에 내가 가지고 있는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중심에는 '구조'가 있었다. 사회구조, 또 문화구조, 계급구조, 권력구조 등등등 '-구조'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지경으로 세상의 '틀'에 대해서 지독하게 중심을 두고 바라바 왔었다. 하지만 그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세상의 구조라는 것은 아무리 지독한 완고함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신'의 영역이 아닌 이상 변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갈 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이건 들뢰즈와 알튀세를 읽던 내 결론이다), 어쨌거나 지금의 구조만을 계속 뜯어본다고 해서 모든 결론을 낼 수는 없다.

그래서 점차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고, 예전에 '사회경제사'와 '국제체제' 등에 대한 관심이 지배적이었던 것에서 점차 변화하여 이제는 '지성사', '인물사', '평전', '자서전' 그리고 '수필'쪽에 훨씬 많은 관심을 쏟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 요즘 향후 직업에 대한 결단을 내린 가운데, '방송-신문' 등을 포괄한 언론, 그리고 그 주위에 거대하게 포진하고 있는 엔터테이너 시장에 대해서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 같으면 그 구조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분석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결론도 정해져 있었을 것이다. '그 중심에는 자본'이 있다. 물론 지금의 결론도 큰 틀에서 그것에서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구조 안에서 꿈틀대면서 또한 그 구조가 갖고 있는 맥락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하기에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다.

김혜리의 책은 그런 문제의식을 해결해 주는 내 첫번째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김혜리는 굉장히 꼼꼼한 인터뷰어다. 지승호의 인터뷰를 보면서 '꼼꼼한' 인터뷰라는 것이 어떤 것인 지에 대해서 생각헤 보았지만, 그녀는 본인의 전공인 '영화'를 제외하고도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의 디테일을 무섭게 추적하면서 인터뷰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따금 허를 찔린 인터뷰이들의 '앓는 소리'도 종종 느껴진다. 사회과학을 하는 이들의 좋은 인터뷰라는 것은 '매서운' '치명적인' 측면이 종종 부각되어야 하는데, 문화예술을 하는 사람들의 인터뷰에 우선 필요한 것은 '공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혜리는 '공감'에 충실하며 '경청'함으로써 더 많은 결과들을 얻어낸다는 생각이 들며 그 와중에 인터뷰이들의 '밑바닥'을 은연중에 긁음으로 '허'를 찔리게 하는 결과를 얻어낸다.

가장 맘에 드는 인터뷰는 강금실과 김선아의 그것을 꼽아내고 싶은데, 우선 강금실의 인터뷰는 그녀가 갖고 있는 '춤추는 칼'의 느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윤곽을 그려내는 것이었고, 김선아의 인터뷰라는 것은 '성장하는 연기자'의 소탈함이 물씬 풍기는 것이었다. 물론 다른 인터뷰들도 그녀의 '꼼꼼함'과 '공감'이 어우러 내는 하나의 짧은 자서전의 구술자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따금은 이런 책들을 왜 집는 지에 대해서 굉장히 궁금해 했었는데, 인터뷰의 매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게되는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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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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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집기까지

우선 내 이력을 털어놔야 할 것 같다. <내 이름은 김삼순>을 보면서 '삼순이 식' 남자 꼬시기에 열광했고, <연애시대>를 보면서 오히려 가슴이 애려왔다. 감우성과 문정희의 '노력하지만 되지 않는 사랑'에 대해 절절히 공감했었다. 하지만, <연애시대>는 나에게 '연애'에 대해서 생각하게 했다면, <내 이름은 김삼순>은 남자와 여자의 권력관계, 그리고 한국사회에서의 '여자'라는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드라마였다.

뭐, 나 역시 어쩌면 대한민국의 90%에 속하는 남자일 지 모른다고 요즘 생각하는 바인데, 겉으로는 '여성주의' 운운하지만, 실제로 내 안에 간직되어있는 마초 기질이라는 것에 대해서 자주 발견하게 되고 그 때 그 때 놀라긴 하지만, 실제로 그것들을 바꾸어 가면서 사는 지에 대해서는 장담하지 못한다. 나 역시 20대 중후반의 대다수 남자들이 그렇듯, 연애가 주는 환상과 상관없이 '작업의 순서'에 대해서 이따금씩 떠올리고 그 교과서에 맞추며, '진도'라는 것에 종종 강박감을 느끼곤 한다.

세상엔 참 많은 연애소설이 있고, 숱한 사람들이 연애소설을 읽는데, 난 사실 연애소설을 즐겨보는 편이 아니다. 특정한 국면이 왔을 때에 몰아서 보는 편인데, 예를 들면 연애가 잘 안풀린다거나, 여자친구와 헤어졌을 때, 이럴 때에 연애소설을 본다. 전자의 경우 솔루션을 찾고 싶을 때이고(솔루션의 측면에서 연애소설이 수백권의 연애공식에 대한 책들보다 낫다.), 후자의 경우 나와 주인공을 동화시킴으로서 빨리 그런 쓸쓸한 마음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이다. 지금이 그 중 어떤 시점인지에 대해서 말하고 싶진 않지만, 요즘이 그런 때이다.

한겨레에 쓰는 정이현의 칼럼들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사실 그냥 요즘 잘 나가는 소설가이겠거니 했다. 그리고 서점에서 봤던 정이현 책들의 커버 '띠지'의 그녀의 얼굴이 예쁘다고 생각한 적이 좀 있었을 따름이다. 이번의 경우에도 그냥 눈에 익고, "남들 다 보니까" 하는 마음에서 샀고, 읽었다.

그런데 읽다보니, 이건 '연애소설'이 아니다. 어떤 솔루션은 커녕, 한국사회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관념들에 대해서 가볍게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내가 여성학이라는 학문을 통해서 여자들이 말하는 남자의 '기만적 행태'에 대한 기술은 많이 읽었지만, 여자가 말하는 '여성의 환상'에 대한 소설은, 나에겐 처음이었다. 사실, 뭐 내 경험의 일천함일 수도 있다.

여자가 쓰는 '사랑'의 진실

이건 뭐 완전 '난도질'의 연속이다. '연애소설'이 아닌, 여성사회학이라고 해야하나? 근데 여성학이라는 것이 '남성과의 불균등한 권력관계'에 촛점을 둔다면, 작가는 여자에게 촛점을 둔다. 그리고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여자들끼리 술자리에서 할 법한 '언니들의 연애 테크닉 강좌'를 풀어놨다고 할까?

   
 

키스할 때 눈을 뜨는 건, 나 바람둥이야, 라고 광고하는 일이다. 그러나 첫 키스에서 여자가 너무 적극적일 필요도 없었다. 나는 새침한 척, 입술을 아주 약간만 벌려주었다(p.10).

대개의 남자들은 입맞춤 후에는 바로 가슴 쪽으로 관심을 돌린다. 애피타이저 다음에 메인 요리를 먹는 것처럼 당연한 순서로 생각하는 것이다. "너 그 여자애랑 진도 어디까지 나갔니?"라고 서로 비교하는 남자애들에게 연애는 포트리스 게임과 다르지 않다.

아직 확실한 관계가 아닌 남자가 가슴을 더듬기 시작하면 일단 매몰차게 몸을 빼는 편이 좋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다. 남자에게 가슴을 허용하는 것은 보통 이상의 지속적인 친밀감을 허용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남자에게 가슴을 허락한다는 것은 또한 그 아랫부분에 대한 접근을 적정선까지 묵인하겠다는 암묵적인 동의이므로, 일단 가슴을 정복한 남자는 머지않아 더 노골적인 요구를 해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어한다, 는 속담을 한시도 잊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p.11).

 
   

그러면서 여자들의 '속물성'이라는 것도 드러내는 데, 차 없는 남자의 피곤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나(p.12), HYATT를 통해 표현되는(p.14) '물신성'을 가차 없이 드러낸다. 첫번째 단편인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결론부에 차를 가지고 있으며, Law School 학생인 어떤이게 꽂혀 자신이 '3년동안 묵은 팬티'를 입으면서 버텼던 '순결'을 쉽게 소멸시켜버리는, 동시에 그 '순결'이라는 것이 어떤 산화의 숭고한 과정(선혈)도 남기지 않는 '허무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쯤 남자의 '전형적 태도'와의 맞물림은 다시금 '연애'라는 것 자체의 계급성, 사회적 성격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달콤하면서도 끝맛은 언제나 쓴 초콜렛이라고 해야하나??

'몸'을 통한 거래를 통해서 자신의 '커리어'를 작성하고 있는 여자의 이야기인 <트렁크>, 아빠의 '번개팅녀'를 산부인과에 보내줄 돈을 만들려고 '로리타 사이트'의 사진을 촬영하는 이야기인 <소녀시대> 등등 모두 즐겁게 읽을 수 있지만, 뒷맛은 쓰다.

이런 느낌이라면 이해가 될까? 아는 여자애집에서 놀다가 몰래 그녀의 일기장을 보면서 키득키득 대다가 돌아보니 그 일기장에 '바보 같은 년'으로 표기 되어있는 되있던 그 멍청한 여자가 '내 전 여자친구'였다는 그런 느낌?

여자들이 읽는 다면, 아마 꿈 말고, 자기 친구에게 자기가 해주던 그런 이야기처럼 느껴질 테지만, 난 뒤집힌 '신데렐라 스토리'를 읽은 기분이다. 다이어트하기위해서 안먹다가 거식증에 걸린 나머지 간만에 '사과한쪽' 냉큼 집어들었다가 잠들어버린, 백설공주의 느낌?? 백마탄 왕자는 어떤 판단을 해야하는가?? 그런 상상들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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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빛나는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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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들은 결혼을 택했을까?

사실 굉장히 궁금하다. 결혼에 대한 생각자체를 뒤집어버리고 싶었던 것일까? 결혼은 사회적 약속이다. '정 때문에 산다' 이런 말을 우리 부모와 그 이상의 세대에서는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상 '사랑'이라는 전제를 주례사부터 시작하여, 대개의 일상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 한다.

난 플라토닉 러브를 믿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순수한 감정 이면에 얼마나 복잡한 권력관계가 깔려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그 '사랑'이라는 것의 실체에 깔려있는 육체성에 대해서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여튼 <반짝반짝 빛나는>의 이 두명은 결혼을 감행한다. 주인공 쇼코는 무츠키가 좋았기에 결혼해다고 이야기한다. 그게 '좋은 감정'이 진실이라면, 쇼코는 플라토닉 러브를 믿는 다는 것이 된다. 왜냐면, 무츠키는 게이니까.

   
 

 엄마의 전화는 이래서 싫다. 우울한 일만 생각하게 된다. 무츠키는 여자를 안고 싶어하지 않는다. 키스도 해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알코올 중독에 걸린 아내와 호모 남편, 참 내, 그야말로 끼리끼리다(p.16).

 
   


물론 실마리를 찾아볼 수는 있다. 무츠키가 자신의 히스테릭한 조울증을 '치유'해 주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쇼코니까.

하지만, 이렇게 '사랑'과 '좋아함'에 대한 전제를 '환상적인 감정' 그 자체로 환원해 버려서 시작되는 그들의 결혼은 당연히 순탄할 수가 없다. 감정과 일상이 충돌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혼은 '사회적 약속'이니까. 결혼은 둘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둘과 그 주위의 모든 사회적 관계가 충돌하는 것이니까. 만약 둘의 감정이라는 것이 일치되게 '정신적 사랑' 그 자체에, 어쩌면 '우정'에 충실하다 하더라도 이건 쉬운 상황이 아니다. 쉽지 않다.

   
 

 "그 녀석과 결혼을 하다니, 물을 안는 것이나 진배없지 않느냐?"(p.19)

"그러나 물을 안는다는 말 만은, 내 안에 선명하게 새겨지고 말았다. 소꿉장난처럼 재밌고, 자유롭고 편한 결혼의 대다라고 생각하였다"(p.20).

 
   


소꿉장난도 아니고, 결혼에 대해서 이렇게 소박하게 생각하다니. -_-; 이제 난점들이 솟구쳐 올라간다. 쉽게만 생각해 봐도, 양가 가족들의 문제에 봉착할 테고, 게이 남편의 '남자친구'에 대한 문제가 올라올 것이다. 더 문제는 아내 쇼코가 게이 남편에게 '게이 남편' 이상을 기대한다는 거다.

   
 

 나는, 당장 무츠키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에 와서 새삼스럽게 하네기의 꿈을 꾸다니, 무츠키 탓이다. 무츠키가 그런 말을 했기 때문에, 가슴에 응어리진 불안이 점점 목구멍으로 치밀고 올라와, 나는 거의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다(p.44).

 나는, 세상이란 참 잘못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도시의 하늘에야말로 별이 필요하고, 무츠키 같은 사람한테야말로 여자가 필요한데. 나 같은 여자가 아니라, 좀 더 상냥하고 제대로 된 여자가(p.55).

 
   


자신의 '이성애자'였던 남자친구의 꿈을 꾸면서 남편을 찾는 아내. 갈등은 이미 시작부터 내재해 있었다. 남편 무츠키 역시 편할 수 없다.

   
 

 요늘 쇼코는 굉장히 말이 많다. 나는 곤이 열변으로 꾸며 냈을 이야기를 생각하고, 장인의 인상 좋게 웃는 얼굴을 떠올리고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딸과, 사위와, 사위의 애인이 내 천자(川)를 그리며 자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그 사람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p.73)

 
   


하지만 무츠키의 하해와 같은 도량은, 아내의 '애인'을 소환한다.

   
 

 오늘 아침에 휴대폰이 울린 것도 미리 계획된 일이었던 것이다. 무츠키의 식욕이 떨어지지 않기를 바랬는데, 환자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까지 일었는데. 나는 옆에 있던 미즈호의 가방을 껴안고, 먼저 노란색 손수건을, 그리고 화장품 지갑과 수첩을, 갈색 선글라스 케이스를, 헤어 브러시와 유타의 비스킷을, 차례차례 땅바닥에 내던졌다. 암만 그래도 그렇지, 하네기도 하네기다. 부탁을 한다고 이렇게 대뜸 나오다니, 멀쩡한 얼간이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왕왕 울었다(pp.116-117).

 
   


갈등은 고조되고, 병원에 실려가는 아내, 아내는. 뭔가 깨닫는다. 결국 남편은 그녀가 기대했던 그런 '평범한 남편'은 아니라는 것.

   
 

 "하지만, 그들은 마법의 사자래. 무리를 떠나서, 어디선가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하는 거지. 그리고 그들은 초식성이야. 그래서, 물론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단명한다는 거야. 원래 생명력이 약한데다 별로 먹지도 않으니까. 다들 금방 죽어 버린다나 봐. 추위나 더위, 그런 요인들 때문에 사자들은 바위위에 있는데, 바람에 휘날리는 갈기는 하얗다기보다 마치 은색처럼 아름답다는 거야(pp.125-126).

 좋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설교할 수 있겠어? 미즈호가, 나한테 아내로서의 자각이 부족하다고 그랬어. 나한테 필요한 것은 상식이 아니라 오히려 자각이라고(p.129).

 
   


그래 이제 둘은 인정했다 치자. 하지만 또 쉽지 않은 건 위해서 언급했던 '사회적 약속'으로서의 결혼 때문이다. 하지만, 둘은 약간의 거짓말(남편이 그 애인과 헤어졌다고, 그리고 아이를 갖겠다고)을 통해서 '쿨함'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남편에게 자신과 맞선 1주년 기념으로 남편의 '남자친구'를 선물하다니....

   
 

 어둠에 별이 아로새겨져 있는 그림, 이란 말이지. 무츠키의 인생에서, 나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곤을 따라잡을 수 없다. 무츠키는 왜 느닷없이 그런 얘기를 한 걸까(p.186).

 
   


화해 후에도 이런 아쉬움은 계속 따라다닌다. 여튼 그들은 '우정'을 통해서 '육체적 이성애'를 포기함으로써 그들의 결혼을 유지하고 '플라토닉 러브'에 도달한다.

그들의 우정에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 해서 결혼을 유지하는 이유는 뭘까? 그게 궁금했다. 난 여전히 침대에서 부대끼면서 싸우면서 그렇게 지내는 부부를 상상하기 때문이겠지?

에쿠니 가오리의 표현은 현란하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눈에 그림으로 꽂힌다. 하지만, 불편하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왠지 모르게 '판타지' 그 자체라고만 생각되어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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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석 - 시대의 과제에 맞섰는가 한국의 저널리스트 시리즈
김지석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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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이런 인식이라면, 난 앞으로도 한겨레를 최고의 신문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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