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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 - 명랑한 사랑을 위해 쓴다
정이현 지음 / 마음산책 / 2007년 12월
평점 :
정이현이 끌리는 이유~
정이현의 소설 중 <낭만적 사랑과 사회>(http://blog.aladin.co.kr/hendrix/1939916)를 읽고 완전히 꽃혀서, <달콤한 나의 도시> 또한 읽어버렸다.
정이현의 소설을 읽는 이유는 그런 거였다. 할리퀸류에 나오는 여성들의 갈망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남자가 유일하게 공감할 수 있는 땅에 디딤발을 대고 쓰는 글이라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정이현의 소설은 마치 <캔디>와 <내 이름은 김삼순>의 간극만큼, 다른 여성들의 섬세한 '연애소설'들과 달라보였고 그녀의 소설은 웬지 읽을만 해 보였다.
게다가 그녀가 쏟아내는 한겨레ESC의 <남자, 남자, 남자> 칼럼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그녀의 글빨에 대한 신뢰를 가졌고, 그녀의 산문집 <풍선>을 집어들었다. 여기까지가 간접적인 소설을 읽은 배경이라면, 직접적인 이유는 이 책의 표지에 씌여있는 "명랑한 사랑을 위해 쓴다"라는 말이 끌려서 였다. 항상 여러가지 이유로 미적거리다 표현 못하거나, "화성에서 온 남자"의 관점에서 "금성에서 온 여자"의 이유를 몰라서 사랑에 실패한 경험이 있는 나에게 어쩌면 이런 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팍팍 꽂혔고, "이 언니"라면 마땅히 지침을 주지 않을 까 하는 생각도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여튼, 집었다.
근데, 이게 웬걸? 이 산문집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연애 이야기 혹은 남녀 이야기가 아닌, 그녀의 문화생활의 감상문들이었던 것이다. 처음엔, 뒷부분에서 내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거니 하는 생각을 갖고 읽기 시작했지만, 종반으로 다가갈 수록 그런 기대는 접고, 그녀의 문화생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관점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으로 보이며, 그녀의 감성이 세상에 살아가는 뭇 여자들이 자신의 '여자'인 친구들과 나누는 이야기와 웬지 모르게 흡사할 것으로 생각되어 솔직함을 느꼈다.
정이현의 문화생활 관람기, 그리고 여자가 본 세상 이야기~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시작되는 그녀의 영화 이야기와 드라마의 이야기가 쏟아진다. 역시 예측했지만 <내 이름은 김삼순>에 대한 예찬도 있고, 잘은 모르겠지만 이 책에 쓰여진 내용들이 어떤 신문의 칼럼 따위에 쓰였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누구 아는 사람 있으면 좀 알려줘 보세요!!).
읽다가, 그녀의 사랑의 관점 쯤은 뽑아 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런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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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처음으로 타인과의 내밀한 친밀감을 경험한 사람은, 미처 아무것도 '계산'하지 못한다. 상대방과 나와의 관계의 거리를 조정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매달리고 이기적으로 투정부린다. 자신의 장애와 결핍을 상대방이 온전히 채워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를 맡김으로써 사랑이 성립되었지만 역설적으로 그것 때문에 사랑은 붕괴되고 문득 이별이 찾아온다(p.20).
누군가를 칼로 베는 순간 비로소, 그전에 내 등을 찔렀던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것. 세상이 그런 방식으로 굴러간다는 교훈을 얻는 일이야말로 연애의 진정한 목적이다.
"할래? 말래?" 연애란, 그저 그렇게 남녀 개인의 은밀하고 사적인 영역일 뿐이라고 믿는가. <연애의 목적>은 바로 그런 당신의 뒤통수에 서늘한 얼음을 가져다대는 영화다. 이곳은 거대한 세트장이며 시스템은 공고하다. 다만 한 걸음만 잘못 디디면 개인의 사생활은 '사회적인 어떤 것'이 되어 객사한 거지의 동냥그릇처럼 거리 한복판에 까발려질 수도 있다. 우리는 끝없이 연애의 바깥을 꿈꾸지만, '바깥의 연애'가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세트 바깥으로 향하는 길을 내는 일은 가능한 것일까. 로맨틱 코미디로 위장한, 장르를 알 수 없는 영화 <연애의 목적>이 당신에게 묻고 있다(p.27).
상대의 완강한 등을 보며 비틀비틀 가야 하는 사랑, 보답받지 못해도 애걸할 수 없는, 그런 사랑도 사랑이다(p.39).
사랑을 해본 사람들은 안다. 사랑은 권력관계다. 더 사랑하는 쪽이 약자다. 더 사랑하는 쪽이 언제나 지게 되어 있는 불평등한 게임이 사랑이다(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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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했던 만큼은 이 만큼이었고, 나머지의 부분에서는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을 우회적으로 영화, 드라마를 만났던 시선들을 통해 보여준다. 예를 들면, 30대 여자에게 비추어지는 29세 이른바 '노처녀' 들의 이야기에 대한 관점(마치 30을 인생의 무덤인 냥 묘사하는 시선)에 대한 분개 따위 말이다. 또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들도 한 번 곱씹어 볼만하게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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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내가 지금보다 네 살이 어리다면 매일 춤추고 다니겠다. 근데 <싱글즈>의 나나도 그러더니 왜 영화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노처녀들은 죄다 스물아홉 살인 거야? 전쟁터에 총알받이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걔들 서른 살 맞이하는 자세가 너무나 비장하지 않아?" "꼭 일이냐, 결혼이냐,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놔야 삼십대를 시작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스물아홉 살짜리 남자가 자기 나이의 무게 때문에 괴로워하는 영화 본 적 있어? 이게 바로 서른 넘은 여자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재생산하는 거라고!"(p.106)
어린이는, 천사인가? .... 기억 한번 더듬어보시라. 먼 옛날 얘기도 아니다. 기껏해야 2, 30년 전, 당신은 어떤 어린이였는가? 때 묻지 않은 영혼? 순진무구의 표상? 오호, 정말 그러셨는가? 물론 기억만큼 왜곡이 쉽고 빈번한 영역도 없을 테니, 당신은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옛날 그 시절의 아이들은 얼마나 순수하고 착했는지. 거기 비하면 요즘 애들이 되바라지고 발랑 까지긴 했어. 다 삭막하게 변해버린 세상 탓이야.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여전히 맑고 순수하지." 아, 예. 그게 사실이라면 당신은 아마도 본인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행성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셨나 보다. 참고로, 서울 변두리에 위치한 내 모교는, 일명 콩나물 교실에 3학년까지 2부제 수업을 실시하던, 80년대 당시 기준에서 몹시 평범한 공립학교였다.
그 시절 우리는 다 친구였다고? 아이들이 몇 명이 모이면 자연스레 패가 갈리던 것, 잊으셨나 보다. 왕따라는 단어가 없었다고 해서 모두의 은근한 따돌림의 대상이던 아이가 없었던 건 아니다. 교실은 사회의 축소판 같았다. 나름대로의 권력욕과 배신, 음모와 질투도 분명히 실재했다. 몸이 작아도, 어린이는 들끓는 욕망을 가진 인간들이다. 우리는, 어른들은, 그걸 자꾸만 까먹는다. 혹시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닐까 의심스러울 만큼. 그동안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했던 어린이들은 순백색의 내면세계를 지닌 거의 완벽하게 무욕적인 존재로 묘사되곤 했다(pp. 153-1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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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옆길로 새지만, 뭐 그런 거 있지 않나? 특히 진보적인 관점을 가진 남자들이 갖는 트러블인데, 남자들끼리 '거시적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논하다 보면 술잔은 기울어가고, 이미 욕설은 난무한 가운데 결국 봉착하는 이야기의 종결점은 "근데, 너 ~랑 잤냐?"(보다 훨씬 더 걸진 표현으로..) 차라리, 정치적 진보는 같은 지평에서 싸워볼 수나 있지만, 여자와의 관계 등등 '미시적 세계'(그들의 말로 하자면, 야들야들하고 아기자기할 것으로 추정되는 여자들의 이야기, 게이같은 이들의 이야기)은 논할 수 없는 주제, 다룰 수 없는 문제이며, 그것에 대한 적대적 태도는 곧바로 'out' 콜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는 것 말이다.
정이현의 이야기는 남녀가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현실에서의 문제들에 대한 제기이며, 어쩌면 진보운운하는 인간들은 이런 이야기 담론에서 어떤 말들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해 봐야하지 않나?
물론 남성의 담론구조와 여성의 담론구조가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같은 지평에서 서로의 말들을 이해하고, 서로의 관점에서 스며들면서 이야기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데, 정이현의 글들을 읽으면서 어떻게 그런 이야기들을 할 수 있는 지, 그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발랄하면서도 정곡을 신랄하게 찌르되, 또한 그렇게 후비지는 않는.. 쿨하게 '핫'한 이야기를 꺼내는 능력이랄까? '아이크림'과 자본주의를 동시에 이야기하는 사람. 이런 언니들을 만나고 싶어요!!
다시 돌아오자면, 정이현의 글들을 읽으면서 그녀가 읽었던 책들을 알 수만 있다면 좀 구해다 읽고 싶은 마음이고, 그녀가 봤던 영화들을 다시금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명랑한 사랑'에 대한 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명랑하게 말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좀 생각해 본다. 소통이 '명랑'하다면, 그 결과물도 명랑하지 않을까라는 얼토당토하지 않은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