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사람동
1.
비릿내가 코를 찌른다. 비는 굵어지는 듯하더니, 이내 다시 얇아지기를 반복한다. 나는 우산을 펼쳐든다. 좀 낡긴 했지만, 주황색의 우산은 우중충한 나를 오히려 환해 보이게 한다. 우산을 쓴다고 해서, 나의 188센티에 달하는 키의 몸에 젖어오는 비를 다 막아주진 못한다. 숯이 많은 머리를 가려준다 해서, 나의 흐릿한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비가 내 얼굴로 들이닥쳐 내 안경을 덮치는 것이 싫기 때문에 우산을 쓸 뿐이다. 안경을 덮친 비 때문에, 내가 보지 못하는 낯선 세계로 떨어지는 일이 없기를 바라고 바랄 뿐.
비는 그러나 내 온몸을 적신다. 우두커니 비를 바라보다 문득 내가 신호등 앞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무더기로 지나간다. 여기가 어디쯤일까? 급하게 발을 재촉하려다 보니, 파란색 신호등이 윙크를 반복하면서 나의 걸음을 말렸다. 저 신호등은 언제쯤 나를 똑바로 마주보려나? 걸음을 뒤로 돌렸다. 사람들의 분주한 걸음걸이. 모두들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듯하다. 고개를 든다.
저 너머 5층 쯤 되어 보이는 건물이 눈에 띈다. 저게 뭐였지? 낯익은 건물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처벅처벅처벅. 떨어진 빗물이 바닥에 가득해, 발자국 소리까지 희한하게 들린다. 앞에서 오던 두 여인네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꺄르르 웃으며 빗물이 가득 고인 길바닥을 조심스럽게 고른다. 나는 여인네 둘을 힐끔 쳐다보고 약간 인상을 찡그리면서 다시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나의 변화된 걸음걸이를 눈치 챘는지 여인네들의 웃음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비는 굵어졌다 얇아졌다를 아직도 반복한다. 나는 5층짜리 건물의 앞에 서 있다.
<미친 도서관>
도서관? 기억난다. 나는 이 도서관을 매일 다닌 적이 있다. 공무원이 되겠다고 참 열심히도 다녔었지. 하지만 늘 그곳에는 친구들이 있었다. 근이란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항상 주위에 친구들이 많았다. 나의 유일한 죽마고우였던 근은 그 당시만 해도 어디를 가든 나를 데리고 다녔다. 당구를 쳐도, 노래방을 가도, 볼링을 치러 갈 때도. 심지어는, 나는 알지도 못하는 자기의 친구 생일파티까지도. 나는 공부보다는 그렇게 어울려 다니는 것이 재미있어, 도서관을 매일 갔다.
비가 갑자기 거세어졌다. 나는 재빨리 도서관 안으로 들어선다. 다시 지난날의 추억이 생각이 났지만, 그것은 추억일 뿐이다. 근은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근을 생각하자 어서 빨리 이곳을 나가고 싶어졌다. 근은 내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에, 그를 떠올리는 건 내겐 너무도 잔혹한 고문이었다. 그러나 좀처럼 비의 굵기는 줄어들지 않는다.
커피 한잔을 뽑는다. 자판기의 위-잉- 하는 소리가 텅 빈 휴게실에 울린다. 이 넓은 휴게실에 나 혼자라는 생각을 하니 자꾸만 내가 불쌍해진다.
* * *
‘자기연민에 빠져서 이 넓은 한 세상을 보낼 거냐?’
근이 내게 물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어, 너?’
‘말했잖아. 난 언제 어디서나 너와 함께 있을 거라구.’
그가 다시 사라졌다. 나는 허상을 보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래, 허상이었어. 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근은 원래부터 없었어. 내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야. 그런데, 근의 친구들은 다들 어디 있는 거지? 비가 서서히 얇아지고 있다. 나는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 밖을 향한다. 안의 세계는 언제나 답답하다.
나는 지금 시내버스정류장에 서 있다. 버스를 탈까 말까 한참을 망설인다. 어디를 가야 하지? 버스를 타면 내가 누군지 알 수 있을까? 그냥 다른 곳으로 갈까? 그냥 한번 걸어볼까? 나는 한 시간을 그렇게 정류장 앞에서 망설이고 있다.
* * *
“아저씨, 사람동, 가요?”
나의 목소리가 작았는지 아저씨는 다시 묻는다.
“어디요?”
“사람동.”
고개를 끄덕이는 아저씨의 얼굴에선 불쾌한 빛이 역력하다. 뭐가 저렇게 불쾌한 것일까? 평일 낮이라 그런지, 비가 와서 그런지, 버스 안에 사람은 거의 없다. 버스 뒷좌석으로 걸음을 옮긴다. 떠벅떠벅떠벅. 맨 뒷좌석에선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소녀 둘이 열심히 대화 중이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함박웃음까지 곁들인다. 소녀들이 앉은 반대 방향의 뒷좌석 자리를 잡아 앉는다. 자리에 앉고 보니, 앞에서는 어머니와 딸인 듯한 여인 – 보이는 사실은, 아줌마와 어린이 한 명씩이다 - 둘이서 즐거운 담화를 나누고 있다.
버스는 질주한다. 그리 먼 거리도 아닌데, 시속 100킬로는 되는 듯한 속도로 질주했다가 급정거하는 순간을 계속 반복한다.
미친 도서관에서 사람동까지의 거리는 생각보다 꽤 멀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듯한데, 아직도 반이나 남았다. 그때 버스가 갑자기 급정거를 한다. 옆에 있던 소녀 둘 중 가운데 쪽에 앉아있던 소녀 하나가 버스 안에서 뒹군다. 소녀는 정신을 약간 잃은 듯하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 옷을 툭툭 털고는 자리에 앉는다. 또 다른 쪽에서 약간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난다. 뭐지? 하고 앞쪽으로 돌아보는데, 40대쯤 보이는 아줌마와 운전기사아저씨가 다투는 중이었다.
“아저씨가 잘못했으니까, 책임을 지셔야죠!”
“아줌마, 아줌마가 똑바로 잡고 있었어야죠! 탄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 아직 자리에도 앉지 않고. 상습범 아니야?”
“뭐예요? 내가 그럼 일부러 그랬다구? 나 참, 기가 막혀서.”
버스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아줌마가 허리를 약간 다쳤나 보다. 10분 가량 실랑이를 벌이다가, 버스에서 굴렀던 소녀의 말 한마디로 일단 버스는 다시 출발한다.
“아, 바빠요! 아저씨, 그냥 빨리 가요.”
가면서도 아저씨와 아줌마는 실랑이를 주고받다가 아저씨의 말 한마디로 일단은 아줌마도 물러선다.
“아, 아줌마. 그럼 차번호 적어가서 신고하세요.”
그러자, 아줌마는
“내가 참아야지!”
하면서 물러선다. 아줌마가 내리고 나자, 주위가 다시 조용해진다. 그리고 지금까지 달려왔던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버스는 사람동을 향해 질주한다.
* * *
서점이다. 내가 언제 버스에서 내렸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람동에 가는 버스를 타는 도중, 대형서점이 보여 ‘아저씨, 아저씨’를 외치며 급하게 내렸던 기억이 있다. 서점에서 열심히 책을 뒤지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왜 내가 여기 있는 거지? 하는 생각과 함께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제목에 주목한다.
『나쁜 아이로 키워라』『그렇다고 생각하면 진짜로 그렇게 된다』 내가 이 책들을 왜 읽고 있지? 저기 『프리미어』가 있네? 아, 저기 영화잡지들 수두룩하네. 저기에서 책 좀 보다 가야겠다. 한참을 읽다가 나는 또 주저한다. 이 책을 살까? 저 책을 살까? 아까운 생각이 들면 어떡하지? 살까 말까? 그렇게 한참을 망설인다. 좀 더 생각해보고 결정하자.
나는 다시 읽던 잡지를 한 번 더 훑어보기 시작한다. 직원인 듯한 아가씨가 내 곁에 다가와서, 눈치를 준다. 나는 아가씨한테 윙크를 한번 해본다. 아가씨가 황당하다는 듯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이번에는 남자 직원이 내 옆에 선다. 나는 그 남자에게도 윙크를 해본다. 이번에도 황당하다는 듯이 남자점원은 다시 돌아간다.
저 멀리서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낄낄대는 소리도 들린다. 나는 그들이 왜 웃는지 몰랐다. 뭐가 웃기다는 거지? 나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무표정하게 살 책을 고른다. 그러나 여전히 뭘 사야 될지는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결국 아무것도 사지 않고, 서점을 나온다. 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야? 바깥에는 어둠이 아주 짙게 깔려 있다. 도무지, 여기가 어딘지 가늠할 수가 없다. 이제는 돌아가야만 할 시간인 듯하다.
* * *
버스정류장. 갑자기, 내 앞에 택시가 급정거를 한다. 앞에 있던 아줌마가 택시를 타려 한다. 그런데 다른 아줌마가 그 아줌마의 앞길을 가로막더니 말한다.
“내가 먼저 잡았어요!”
하더니, 재빠르게 택시를 타고 출발한다. 택시를 놓친 아줌마는 어이없다는 듯, 씁쓸한 웃음을 짓더니, 바로 뒤에 쫓아온 택시를 타고 떠나버린다. 겨우 10초쯤의 차이?
한동안 걷혀있던 비가 조금씩 다시 오기 시작한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아줌마가 우산을 펼친다. 우산의 한쪽 귀퉁이가 뜯어져 나가, 금방이라도 그 뾰족한 철사가 내 눈을 찌를 기세다. 나는 이내 몸을 피해 아줌마와의 간격을 유지한다. 마을버스가 도착한다. 사람동.
‘마침 잘 됐군.’
나는 버스에 오른다. 마을버스라 앉을 자리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빈자리는 많이 있었다. 그러나 맨 뒷좌석은 꽉 차 있다. 맨 뒤의 바로 앞쪽에 자리를 잡고 기회를 엿본다. 옆의 아가씨인지 아줌마인지가 자꾸 뒤쪽의 눈치를 살핀다. 뒤에 있던 한 패의 학생들이 다음 정거장에서 우르르 내린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가씨인지 아줌마인지가 일어나 뒷좌석을 먼저 차지한다. 나는 그녀가 앉은 반대쪽으로 자리를 옮겨 잡고 앉는다. 마을버스는 오후에 탔던 시내버스와 달리 저속 운행을 한다. 편안함이 밀려든다. 조금씩 졸음이 몰려온다.
* * *
어느 사이엔가 방에 있는 나를 발견한다. 집이다. 아, 포근한 잠자리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다. 내일은 뭔가 다른 일이 있을 것이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잠에 빠져든다.
2.
아직도 비가 내린다. 몸은 여전히 찌푸둥하다. 왜 잠을 자도자도 피로가 가시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고 계속 누워 있을 수만은 없다. 몸을 일으킨다. 오늘 할 일이 뭔지 곰곰이 짚어 본다.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무엇인가 분명히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뭐였지? 우선은, 외출을 하자. 거리를 쏘다니다 보면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이 날 것이다. 입고 갈 옷이 있나? 청바지에 노란색 셔츠를 걸쳐본다.
‘마음에 드는 군’
어제는 내가 어떤 색깔의 옷을 입었던 것일까? 문득, 배가 고프단 생각을 한다. 내가 어제 뭘 먹었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가려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응, 나야. 오늘도 좀 그렇지?”
범이다. 아, 오늘 그에게 운전연수를 시켜주기로 했었지. 아니, 원래는 어제 해주기로 했었던 것 같다. 비 때문에 오늘로 연기했었는데, 오늘도 역시 비가 내린다.
“그래, 내일 보자.”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집에 둔 채, 집을 나선다. 비오는 날 핸드폰은 짐이 될 뿐이다.
* * *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이상하다. 뛰어다니는 사람을 볼 수가 없고, 간혹 흰색의 치마와 옷을 갖춰 입은 사람이 눈에 띈다. 가는 곳곳에 이런 사람이 있다. 대체, 여기가 어디지? 어떤 사람은 짐을 싣고 다니는 바구니에다 바퀴를 달아 끌고 다니기도 한다. 주위를 보니, 온갖 학용품들이 가득하다. 아, 여기가 내가 바라던 그곳이던가? 그러나 거기에는 가격표가 붙어 있다. 주머니를 뒤져본다. 겨우 백 원짜리 몇 개만 달랑 손에 잡힌다. 지갑을 꺼내본다. 전화카드 한 장만 손에 잡힐 뿐, 천 원짜리 한 장 찾아볼 수 없다. 갑자기 웃음이 나온다. 하하하, 까르르. 사람들이 나를 힐끗힐끗 쳐다본다. 우하하하, 데굴데굴. 나는 있는 대로 오버하면서 바닥을 구른다. 사람들이 여전히 나를 힐끗 쳐다볼 뿐, 관심이 없는 듯하다. 어느 순간인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 번쩍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정신을 잃는다. 또 어둠이다.
* * *
여기는 너무 어둡다. 어둠 속에서, 박혜경의 <빨간운동화>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이 노래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 갑자기 라디오에서 우당탕 소리가 난다. 누군가가 라디오를 집어던져 라디오를 맞힌 것이다. 라디오에서 지지직 소리가 났다. 그렇게 라디오의 운명은 끝이 난다.
‘대체 내가 왜 저런 장면을 보아야 하지?’
* * *
어둡지만, 어두운 거리다. 살 것 같다. 나는 가게로 들어간다.
“이봐요! 멀쩡한 라디오를 집어 던지면 어떡해요? 아깝잖아요!”
“당신이 뭔데 참견이야?”
“나? 라디오한테 머리 얻어맞은 놈!”
기억은 길을 잃고 방황한다.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현실을 살고 있는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나는 라디오한테 머리를 얻어맞는 놈일까? 도대체, 나는 지금 뭘 보고 있지?
* * *
“엉덩이 대!”
학교다. 왜 내가 중학교 시절로 돌아와 있는 것일까? 저 선생님은?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선생님이 때릴 때 왼쪽 엉덩이 갖다 대고, 오른쪽 엉덩이 갖다 대고 이랬다.”
다른 친구가 그 말에 물었다.
“그랬더니, 뭐래?”
“그냥, 웃더라.”
대체, 뭐가 웃기다는 거지? 대체, 저 친구는 왜 저럴까? 저렇게 하면 덜 아플까?
* * *
“이봐요? 정신 차려요. 이봐요?”
누군가가 나를 흔든다.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당신 정말 라디오한테 머리 얻어맞은 적 있어요?”
“네? 아, 글쎄요. 모르겠는데요.”
“방금 엊어 맞았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네, 제가 그랬어요? 그런데 제가 여기 왜 있지요? 안녕히 계세요.”
뒤에서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린다. 혀는 왜 차는 것일까? 혀를 차면 말이 잘 되기라도 하는 것일까?
* * *
“어떻게 잘라드릴까요?”
“네?”
여기는 또 어디인가? 비오는 거리를 마구 걷다가 기분전환이나 한번 해볼까 하고 들어온 곳인데, 많이 보던 아가씨가 보인다. 그리고 내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한다. 왜 이러지?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보면서 묻는다.
“뭐라구요?”
“어떻게 잘라 드리냐구요?”
아. 미용실이구나.
“짧게 잘라주세요.”
“안경은 벗어주세요.”
이 미용실을 대체 언제 왔었지? 안경을 벗자, 그녀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녀를 보고 싶은데. 라식수술을 할까? 아니면, 안경을 끼고 잘라달라고 해? 이발하는 내내 그 생각에 매달린다.
“자, 맘에 드는지 한번 보세요.”
“좀 더 짧게 잘라주세요. 길면, 답답해서요. 지난 번 처럼요”
“죄송해요. 지난번이 언제인지 모르겠어요. 최대한 잘라 드릴께요.”
여기 온 지도 꽤 오래되기는 했나 보다. 그녀가 갑자기 귀여워 보인다. 시간이 지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 * *
무릎이 앞으로 구부러진다. 왜 갑자기 발이 구부러졌지? 하면서 발을 펴는데, 발 뒤로 무엇인가 묵직한 것이 와 닿는다. 저게 그랜저라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가던 길을 계속 간다. 옆에서 아가씨의 호객용 목소리가 들린다.
“아저씨, 괜찮으세요?”
뭐가 어쨌다는 거지? 지금 나한테 하는 소리인가? 나는 가던 길을 멈추지 않는다. 왼쪽 다리가 약간 저려왔지만, 별 이상은 없는 듯하다. 나는 멈추지 않는다. 눈은 앞만 보고 걷는다.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저 여자가 아무리 나를 유혹하더라도 나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앞만 보고 걷는다.
* * *
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간다. 내일이 무슨 요일이지? 아, 내일은 영화를 보러 가는 날이다.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 집이다. 아, 포근한 잠자리다. 내일은 기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잠에 빠져든다.
3.
영화는 조조를 봐야 한다. 그래야, 넉넉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서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다. 나는 늘 금요일이면 극장을 간다. 오늘도 역시 아침 일찍 일어나 극장으로 출발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갑자기 그 극장을 번쩍 들어 내동댕이친다.
“좋은 영화도 많잖아!”
기억 속의 극장이 난도질당한다. 영화를 보던 나의 표정이 굳는다. 그 극장이 통째로 쓰레기통을 향해 날아간다.
번쩍, 갑자기 천둥이 친다. 마른하늘에 웬 날벼락? 꿈이다. 아니, 꿈이 아니라 상상이다. 나는 다시 영화 속으로 몰입된다.
“이까짓 거 안 봐도 되잖아?”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아무도 없다. 다시 영화 속이다. 톰 크루즈가 드디어 잡혀가는 장면이다. 왜 잡혀가는 것일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는 잡힌다.
* * *
“너, 이 새끼 잘못했다고 안 빌래?”
가슴이 조마조마해진다. 저 목소리는 어디서 나는 거지? 영화 속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지만,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몇 좌석 앞에 앉아있는 수많은 관객의 뒷모습은 모두 여자의 머리카락이다. 대체, 자꾸만 나를 괴롭히는 저 목소리는 뭐지?
“라디오 그만 들어, 이 새끼야!”
나는 귀를 잡고 오열을 한다. 톰 크루즈는 분명히 미래의 인간 감옥에 갇혀 꼼짝할 수 없을 텐데, 왜 다시 멀쩡하게 활개를 치고 다니는 것일까? 사람들은 영화에 푹 빠져 있다. 나의 귀에 들리는 이 소리들. 나는 쓰러진다.
* * *
핸드폰이 울린다. 범이다.
“오늘, 날씨 좋지? 별일 없으면 간다?”
햇살이 따갑다. 오랜만에 보는 햇빛이 반가웠다.
‘차 가지러 가야지.’
그런데 내가 언제부터 운전을 했던 것일까? 나는 한 번도 운전을 배운 적이 없는데. 범이가 내게 운전연수까지 받는 것을 보면, 나는 꽤 오랫동안 운전을 한 듯하다. 범이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는 어떻게 생긴 친구일까?
* * *
내가 그의 옆자리에 있다. 그에게 말을 하고 있다.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만, 햇빛이 워낙 눈부셔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다. 내가 말하는 것을 보아선, 나는 꽤 오랫동안 운전을 한 듯하다. 그가 내게 한마디 한다.
“내가 다른 것은 막 배웠어도, 운전 하나만은 참 체계적으로 배우는 것 같아.”
그의 웃는 모습이 참 매력적이었다는 것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의 눈이 참 귀엽게 보였다는 것도. 그러나 범이는 어느 순간 또 내 기억 속에서 사라져 있다. 대체, 범이는 누구지? 얼굴은 여전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 * *
집이다. 아, 포근한 잠자리다. 내일은 기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잠에 빠져 드려는데 누군가가 내 방문을 두드린다.
“누구세요?”
“누구세요라니? 하루 종일 밥도 안 먹고, 방안에 틀어박혀서 뭐하니?”
방문을 여니, 어디선가 본 듯한 중년의 여인이 보인다.
“아줌마, 누구세요?”
“아줌마? 얘 좀 봐? 너 미쳤니? 엄마보고 아줌마가 뭐야?”
내게 엄마가 있었던가? 도저히 기억할 수가 없다.
“엄마? 그럼, 아빠도 있나요?”
“진짜 얘, 정신 나갔나 보네? 아빠, 아빠!”
저 너머에 50대는 훨씬 넘어 보이는 중년의 아저씨가 시야에 들어온다. 저 아저씨는?
“아저씨, 혹시 버스 운전하세요?”
“아저씨라니? 네 아버지가 버스 운전하시는 것도 잊어버렸니?”
“혹시, 두 분이서 싸우신 적 있어요? 허리 때문에?”
“그래 있지.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알았니? 며칠 동안 방에서 나오지도 않던 놈이.”
나는 다시,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낀다. 대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인 것일까. 라디오는 어디 있을까? 나는 미친 듯이 방안을 둘러본다. 미니 콤포넌트 하나와, 낡은 TV위에 좀 오래된 듯한 비디오데스크가 하나 놓여 있다. 방 주위의 벽에는 색이 바랜 신문기사들이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붙어 있었고, 책상 위에 담배가 한 갑 놓여있고 그 옆에 천 원짜리 빨간색 라이터가 놓여 있었다. 나는 담뱃값 속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모양의 꽁초를 하나 골라 불을 붙인다. 담배의 희뿌연 연기가 꿈처럼 아득하게 창문 밖으로 사라지고 있다.
4.
아침이다. 비가 내린다. 굵은 장대비다. 좀처럼 그칠 기색이 아니다. 잘 정돈된 방이 눈에 들어온다. 그 방 한가운데에 잡지가 하나 놓여 있다. 언제 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 잡지를 집어 든다. 영화에 대한 소식이 가득히 묻어있는 잡지다. 신이 나서 마구 읽어댄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다 보니, 어느 새 비가 그친다. 햇빛이 쏟아질 줄 알았는데, 햇빛은 쏟아지지 않고 어두운 구름만이 내 마음속을 싱숭생숭하게 들락거린다. 책상 위를 들춰보니, 재떨이에 담배꽁초가 수북하다. 밤새 담배를 다 피워버린 모양이다. 가장 길게 남은 장초를 하나 뽑아 들고, 다시 불붙이기를 시도한다. 라이터는 아침 내내 들이닥친 비 때문인지 좀처럼 점화가 되지 않는다. 선풍기로 라이터 말리기를 시작한다. 1단, 2단, 3단. 선풍기의 속도가 올라갈수록 나의 머리카락이 더욱더 세게 뒷머리 쪽으로 뻗는다. 다시, 점화를 시작한다. 드디어 불이 붙었다. 담배연기가 벽을 타고 기어오른다. 벽에 붙어있던 신문기사가 하나 눈에 띈다.
‘생체시계 맞추면 성공한다 - 때에 따라 공부-일 효과 달라져요’
아침엔 자신감이 풍부하다고? 그래서 설득이나 사과는 식사 직전에 하면 좋다구? 내가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이 있는데, 그게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다시 정신이 든다. 조용히 문을 연다.
“잘 잤어?”
미용실 아가씨가 왜 여기 있는 것일까?
“누, 누, 누구세요?”
희한한 일이다.
“이제는 자기 동생도 몰라보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오빠, 나랑 병원 좀 가자. 이리 와.”
그녀의 손에 이끌려, 나는 병원에 간다. 의사가 나를 불러 세운다. 그녀는 내 옆에 앉아 나의 증세에 대해서 차근차근 말한다. 의사가 묻는다.
“어디가 안 좋으십니까?”
나는 그녀가 말하도록 내버려 둔다.
“며칠 전부터 오빠가 이상해요.”
의사가 묻는다.
“말씀이 없으시군요. 보호자만 남아주시고, 잠깐만 나가주시겠어요.”
나는 여전히 아무 말하지 않고, 의사의 지시대로 한다. 그녀가 나를 부축한다. 의사가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 * *
방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이 든다. 다시, 아무 말 없이 문을 열어젖힌다. 어제의 그 여인이다. 자칭, 엄마라고 하는.
“밥 먹어라.”
“밥이라뇨? 당신이 제 엄마인지 아닌지 어떻게 증명하죠? 밥에 독을 탔는지 안 탔는지 어떻게 알죠?”
그녀의 이마에 주름이 생긴다. 동시에, 그녀의 동공도 순식간에 배로 커진다. 저 표정은 놀랐을 때 짓는 표정이 분명하다. 나는 문을 쾅 하고 닫는다. 그녀가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함이 내 몸 안에서 일어난다. 나는 문을 안에서 잠근다.
* * *
‘바보야, 내가 원한 것은 그게 아니란 말야!’
이상하다. 근이 또 나타났다. 그는 분명히 죽었다. 나는 분명히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기억이 있다. 그는 자살했다고 했다. 왜 자살했는지는 아직까지 아무도 모른다. 궁금해진다. 그는 왜 죽었을까.
‘넌 죽었잖아! 왜 자꾸 나타나는 거야?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정말 아직도 모르겠니?’
번개가 번쩍 하고 내리치더니, 천둥소리가 우리를 갈라놓았다.
* * *
갑자기 누군가가 고함을 치는 소리가 들린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아까 그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목이 멘 목소리다. 고함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나는 귀를 막았다. 그래도 그 소리는 손바닥을 뚫고 더 선명하게 들려온다. 나는 방문을 열고 그 고함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한다.‘아빠’라 불리는 그 사람이 ‘엄마’라고 불리는 그 사람에게 계속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당신 때문에 애가 저 모양이잖아! 애 나이가 벌써 서른이야, 서른! 여태 저러고 있으니, 한심하지! 당신이 잘못 가르쳤잖아!”
“지겨워, 지겨워.”
문득, 라디오에 머리를 얻어맞은 기억이 난다. 저 사람이 내 머리에 라디오를 집어 던진 사람이다. 죽여야 할 사람이다. 저 사람이 내가 영화를 본다는 이유로 보던 비디오를 집어 던지고, 라디오를 내 머리에 던진 사람이다. 죽여야 한다. 어릴 때부터 별러 오던 일이다. 나는 부엌에 가서 식칼을 들고 나온다. 그들의 얼굴이 놀람과 두려움으로 일그러진다. 나는 그에게 칼을 들이댄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얼굴이 근으로 바뀌어 있다. 근이 말한다.
* * *
‘나를 너의 아버지로 생각해.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내가 대신 죽어줄게. 날 죽여. 그리고 기억해. 넌 살인자가 아니야. 그리고 또다시 그런 순간이 오면 넌 스스로 죽어야 해. 자기 가족을 죽인 패륜아로 평생을 감옥에서 보낼 생각 하지 마. 그건 너와 나의 우정을 저버리는 일이야. 절대, 잊어버리지 마. 그리고 그 순간이 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란 것을 잊지 마’
* * *
그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나는 칼을 들이댔던 손의 방향을 내 심장으로 돌렸다.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될 거라고 했던가. 내가 나를 죽이는 순간이? 눈물 한 방울이 눈 속에서 톡 튀어나왔다. 그 눈물이 내 가슴에서 뿜어 나오는 핏줄기 속에 파묻혔다. 그리고 나는 웃을 수 있었다. 영원히 기억하고픈, 정말 행복한 순간이 나를 향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5.
“증상이 언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글쎄요. 그것을 정확히 모르겠단 말씀입니다. 저 아이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진찰을 해봐야 알겠습니다만, 조현병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아버님 되시죠? 정수범씨와 아버님과의 관계는 평소에 어떠했습니까?”
“무슨 질문이 그래요? 지금 저 아이가 나 때문에 저렇게 됐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이보시오. 말도 안 되는 소리! 저 아이는 미쳤어. 그냥 미쳤을 뿐이야.”
“조현병의 원인이 분명하게 밝혀지진 않았기 때문에 꼭 아버님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치료를 위해서는 아버님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버님도 같이 치료를 받으셔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보시오! 지금 나까지 환자 취급을 하는 것이오? 당신까지 미쳤어? 저 아이는 내 아이오! 내 아이는 내가 더 잘 안단 말이오! 저 애는 어렸을 때부터 내가 길러왔어! 당신이 뭐야? 저 애가 미쳤으면 치료를 할 생각부터 해야지, 왜 나까지 걸고넘어지는 거야?”
6.
가만히 웃고 있던 30세의 아이가 그를 붙잡고 있던 보호사들을 힘차게 밀쳐내더니, 히죽 웃으며 아버지 곁으로 다가간다. 그가 아버지 앞에 굳은 얼굴을 하고 말을 한다.
“내가 왜 당신 애야? 난 나야! 당신의 권력 따위에 굽히지 않아. 당신이 버스에 나를 가두고 아무리 나를 몰고 다녀도 난 언제든 내려달라고 할 권리가 있어. 당신이 열어주지 않으면, 난 뛰어내려야만 해. 왜냐구? 난 나의 목적지가 있거든. 당신이 원하는 목적지가 내가 내려야 할 곳은 아니야. 그런데 당신은 내가 내려달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버스를 세워주지 않았어. 당신이 가는 곳으로 무조건 같이 가자고만 했어.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택한 거야. 버스에서 뛰어내리기로. 난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야. 난 나라구!”
“이 새끼가! 지금 나한테 대드는 거냐? 이거 완전 미친 새끼 아냐? 저 아이, 내 아이 맞아? 내 아이라면 저렇게 대들지 않을 거야! 저 아인 내 아이가 아냐! 저리 꺼져!”
지진이 일어난 듯한 진동이 병실을 가득 채웠다. 그곳에는 아이와 아버지의 싸움을 멀뚱히 바라볼 뿐, 아무도 그들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고요는 그들의 파도를 더욱 더 거세게만 몰아갔다. 하지만 30세의 아이는 아버지의 <저리 꺼져!>란 말이 나오자마자, 다시 히죽 웃더니 경찰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러나 그의 눈은 경찰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를 부축해 주는 듯한 모습으로. 그는 경찰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녀가 돌아왔어요! 내가 사랑하는 미용실의 그녀가 돌아왔어요! 범이랑 근이도 곧 저희 집에 놀러온대요. 하하하하! 자기야, 다시는 날 떠나면 안돼! 응? 절대로 떠나면 안돼! 사랑해, 자기야! 나, 지금 너무 행복해.”
모두들 안쓰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가운데, 단 하나의 눈동자만이 경멸에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