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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피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8월
평점 :
생활이란 건 누구나 다 구질구질한 냄새를 풍기는 것!
마흔 즈음의 직장인들은 대부분 비슷한 고민들을 하기 마련입니다. 마흔 이후에도 똑같이 직장생활을 할 수 있을지, 아니면 미리 미리 다른 준비를 해야하는 건 아닌지 말입니다.
건달도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가지고 있는게 없다면 더더욱이요.
마흔! 깡패짓을 하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라고 희수는 생각했다. 하지만 마흔하나에도 마흔둘에도 별수없이 깡패짓을 해야 할 것이다. 열여덟에 이 바닥에 들어와서 이 나이를 처먹도록 아직 집 한 칸도 장만 못했다. 결혼도 못했고, 모든 돈도 없었다. 모은 돈은커녕 도박빚만 잔뜩이었다. 이 짓을 때려치우고 나가서 먹고살 만한 마땅한 기술도 없었다. 설령 다른 기술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나이에 어딜 가서 새로 시작할 것인가. 마흔, 변두리 지역 깡패들의 중간 간부, 만리장 호텔의 지배인, 집 한 칸 없이 호텔방에 빌붙어 살며 부하들 몰래 우울증 약을 먹고 있는 전과 4범의 사내. 그게 희수의 현주소였다. 54쪽
'구암'이라는 부산 바닷가를 꽉 잡고 있는 패거리의 넘버투를 담당하고 있는 희수. 그는 손영감 밑에서 온갖 궂은 일들을 하며 호텔 지배인이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손영감이나 패거리가 아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분이나 이권은 없습니다. 일을 처리할 때마다 손영감에게 조금씩 받아쓰는 용돈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데, 마흔을 앞두고 있는 희수는 그래서 고민이 많습니다. 게다가 다른 가족이 없는 손영감에게는 '도다리'라는 조카가 한 명 있는데, 손영감은 부모가 없는 이 조카를 가엾게 여겨 희수가 대부분 관리하고 있는 이 호텔도 손영감이 죽으면 조카의 몫이 될 확률이 큽니다.
예전에 희수처럼 손영감 밑에서 일을 했지만 지금은 독립해서 자신만의 사업을 하고 있는 '양동'의 스카웃 제의를 받은 희수는, 손영감이 던진 말 한마디에 불쑥 호텔을 그만두겠다고 합니다. 손영감은 살짝 아쉬워하는 눈치지만, 그렇다고 희수의 미래를 보장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거나 붙잡지는 않습니다.
구암(拘巖)의 건달들은 아무도 양복을 입지 않는다. 9쪽
구암의 바닷가에서 활동하는 건달들은 아무도 양복을 입지 않습니다. 구암을 주름잡고 있는 손영감의 말 때문입니다. 손영감은 '양복 입고 설쳐대는 건달들이 추리닝을 입고 설쳐대는 건달보다 더 먼저 감옥에 가고 더 오래 감옥에 있더라'고 말합니다. 통계적으로 봤을 때도 그 말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추리닝을 입을 건달보다는 양복을 입고 있는 건달들이 더 큰 인물들일테니까요.
손영감의 호텔의 뛰쳐나와 양동과 함께 전자오락 사업을 시작한 희수는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고, 오래된 에스페로 대신 비싼 벤츠를 타고 다닙니다.
부산의 가상마을 '구암'에서 펼쳐지는 건달들의 활극이라고 하기에는 낯설지 않습니다. 시커먼 양복 대신 추리닝을 입고 동네를 어슬렁 거리는 건달들, 아무리 험한 말들을 입에서 내뱉어도 생활의 언어처럼 느껴집니다. 직업이 건달이고, 사채꾼에 창녀일 뿐인지 그들의 몸 속에서도 우리와 같은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실제로 김언수 작가가 어릴 적에 살았던 바닷가 마을의 풍경이 소설 속 '구암'과 닮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희수가 양복을 입고 벤츠를 타고 다니면서부터 낯설어집니다. 희수는 평범한 사무실처럼 보이기 위해 보통의 사무실들이 입주해 있는 곳에 사무실을 얻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평범한 사람들과는 더욱더 멀어지는 것 같습니다.
희수가 이권 다툼에 끼어 들었다가 배신을 당해 상대 편 건달들에게 잡혀 갔다는 소식을 들은 손영감은 자신의 호적에 희수의 이름을 올리고, 호텔을 희수 앞으로 넘겨줍니다. 바로 그날 손영감은 교통사고를 당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지만, 희수는 무사히 풀려나게 됩니다. 아무리 건달이라고 해도 합법적으로 등기가 되어 있는 건물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피』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전국의 건달을 잡아 들였던 시절, 1993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쯤이면 희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이것은 누아르가 아니다.
이것은 차라리 우리 안에서 늘 끓어넘치고 있는 그 뜨거운 것들에의 송가다. 뒷표지
실제로 책을 펼쳐보면 홍보문구와 다른 책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홍보문구 그대로입니다. 이 소설은 '누아르'가 아닙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당신은 건달인 '희수'에게서 자신의 모습과 자신의 고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뭔 냄새가 이리 많이 나노."
"다 생활의 냄새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활이란 건 누구나 다 구질구질한 냄새를 풍기는 것이라고, 사우디아라비아 공주라도 생활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질구질할 거라고 희수는 생각했다. 146~147쪽
인간이란 게 그렇게 훌륭하지 않다. 별로 훌륭하지 않은 게 훌륭하게 살려니까 인생이 이리 고달픈 거다. 305쪽
무능하고 착한 것은 나쁜 것이다. 사람은 나빠서 나쁜 것이 아니고 약하기 때문에 나빠지니까. 4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