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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평점 :
“야, 왜 이렇게 전화가 안 되냐, 괜찮아?” “거기 지금 난리 났던데, 별 일 없어?” “아이구~~ 다행이네.” 대학졸업 후 직장 때문에 서울에서 지낼 때.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멀쩡하게 보이던 백화점 건물이 순식간에 와르르, 그야말로 폭~삭, 내려앉았다. 텔레비전으로, 뉴스로 이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가족과 친구들은 깜짝 놀랐다. 내 자취방이 서울에, 그것도 문제의 백화점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혹시나?’했던 것. 걱정이 돼서 연락하려는데 마침 전화가 불통이었단다. 휴대폰도, 삐삐도 없던 때였으니 오직 전화로 생사여부를 확인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조차 안 되니 벌렁거리는 가슴 진정시키느라 난리를 치렀다고 한다. 사실 내가 그 백화점에 가는 건 일 년에 한두 번? 갈까 말까 했지만 그걸 알 턱이 없으니 얼마나 애를 태웠을지.......
책은 마흔 두 살의 박선녀가 ‘대성’백화점 붕괴사고에 휘말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가난한 국밥집의 딸이었던 박선녀. 그녀는 우연히 하이틴 모델을 찾는 이에게 발탁되어 모델 일을 시작한다. 그러다 ‘마담 조’의 눈에 들어 룸쌀롱에서 특별한 손님을 모시게 되는데, 극히 일부의 귀빈층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녀는 자연스레 부동산의 흐름을 알게 되고 투자의 길에 발을 내딛는다. 또 잠깐 호텔의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다가 새롭게 룸쌀롱을 차리는데, 그곳에서 환갑을 넘긴 김진(김회장, 남산 영감)을 만나 그의 후처가 되면서 부유한 ‘사모님’의 생활을 누리게 된다. 그런데 김회장의 둘째 며느리 생일을 맞아 백화점을 찾았는데 바로 그때 건물이 붕괴되고 말았다.
박선녀가 훨씬한 키에 매력적인 외모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면 김진은 치열한 생존본능이 삶의 바탕이 되었다. 거기에 중국어와 일본어에 능통하고 상황판단이 빨라 만주에서 밀정으로 일하다가 일본의 패망을 계기로 서울로 돌아왔다가 이번에는 미군 특무기관인 CIC요원이 되면서 그는 제주의 4.3 항쟁을 비롯한 근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에 연이어 관계하게 된다. 특히 70년대 강남개발과 관련해 개발 요지의 땅을 매입해 성공한 것을 시작으로 정관계에 비자금을 뿌리면서 차곡차곡 부를 축적해 나간다. 그러다 박선녀를 만나고 강남의 중심에 백화점을 개점하는 등 아무런 이상없이 부유한 말년을 보내는 가 했는데, 어느날 그의 백화점이 내려앉아 버린 것이다.
이후 책은 부동산업자인 심남수와 박선녀와 동업(?)으로 나이트클럽을 운영했던 조직폭력배 홍양태, 붕괴된 백화점의 건물더미에서 박선녀 가까이에 갇혀 있다가 마지막 생존자로 구출된 점원 임정아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5장에 걸쳐 펼쳐진 다섯 명의 삶은 단순하게 보면 박선녀를 비롯한 그녀와 관련된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박선녀와 김진, 심남수, 홍양태, 임정아의 삶은 우리의 근현대사 그 자체였다. 대한민국에 자본주의가 뿌리를 내리면서 서울공화국, 강남특별구, 부의 상징으로 통하게 되는 과정이 담겨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척박해진 나라를 개발이란 이유를 앞세워 앞만 보고 내달아온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 이면에 숨겨진 그늘과 추악한 욕망까지도 고스란히 볼 수 있었다. 다만 한 권으로 압축하기엔 많은 이야기를 담아 때론 몰입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강남이 형성되는 과정, 역사 ‘강남 형성사’를 통해 욕망의 허상, 덧없음을 느낄 수 있었던 <강남몽>. 이 책을 읽고 나니 언뜻 떠오르는 게 있었다. <개밥바라기별> 출간 이후 황석영 저자 강연회에서 들었던 ‘stopgap’. 일명 ‘구멍마개’라고 하는데 우리가 한 시대를 지나면서 겪었던 수많은 일과 오류들을 당시엔 그냥 지나쳤더라도 이후엔 반드시 그 구멍마개를 열어 상처를 치유하고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을 거쳐야 된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이나 사회 모두 자폐가 된다는데. <강남몽>을 통해 바라본 우리의 근현대사도 바로 사회적 차원의 구멍마개를 열어보는 것이 아니었을까. 지금보다 나아지기 위해 지난날의 과오를 되돌아보고 상처를 쓰다듬고 화해를 시도하는 계기, 그런 과정을 거쳐야 사랑도 싹틀 수 있다는 걸 저자는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래야 꿈에서 깨어날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