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들의 전쟁 1 - 제1부 늑대족의 피
마이떼 까란사 지음, 권미선 옮김 / 창비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아이들을 기르면서 판타지 동화를 읽기 시작했다. 처음엔 요정이나 용, 기사, 마법, 마녀...로 가득한 세계가 어른인 내겐 시시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근데, 천만의 말씀. 너무 재밌었다. 한 권 한 권 읽을 때마다 만나게 되는 환상의 세계는 잊고 있던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고 바싹 메말라버린 상상력에 촉촉한 비를 뿌렸다. 오랜 가뭄 뒤에 단비를 만난 기분이 이럴까.




이번에 만난 판타지 동화는 스페인이 배경이다. 정열의 나라, 스페인. 그런데 책 표지에 나타난 세계는 어둡고 음울하다. 큰 소리로 울부짖는 늑대처럼 보이는 산을 배경으로 기괴한 모습을 한 나무가 가득한 숲이 펼쳐져있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걸어가는 한 소녀가 있다. <마녀들의 전쟁>에서 이 소녀가 맡은 역할은 무엇일까. 재앙을 불러올 것인가. 아니면 모든 전쟁과 불행을 잠재울 것인가...궁금한 마음에 서둘러 책장을 펼쳤다.




주인공은 아나이드. 열네 살, 한창 사춘기의 몸살을 앓으며 감수성을 키워가는 나이지만 아나이드에겐 사정이 달랐다. 열 살이라고 보일 정도로 작은 키에 볼품없는 외모의 아나이드를 친구들은 공부벌레, 난쟁이라며 따돌렸다. 그런데  폭풍우가 몰아치던 악몽을 꾸고 난 어느날부터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의 옷이며, 신발, 핸드백, 자동차...모든 건 그대로 있는데 엄마만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엄마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순간 데메떼르 할머니가 사라진 날이 떠오른 아나이드는 엄마의 시신이라도 찾기 위해 숲을 뒤져보지만 어떤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어디로 간 걸까.




엄마의 실종은 아나이드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아나이드는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 찾아온 엄마의 친구들와 이모할머니를 통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엄마와 할머니는 물론이거니와 자기 역시 마녀라는 사실을. 뿐만아니라 아주 오랜 옛날 대마녀 오에게 오드와 옴이란 두 딸이 있었는데 옴의 후손인 오마르들이 조용히 시대와 사람들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데 비해 오드의 후손인 오디시들은 영원한 생명을 갖기 위해 오마르의 피를 빨아먹는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런데 문제는 대마녀 오가 최후의 순간에 붉은 머리의 선지자가 나타나 오마르와 오디시의 대립을 종식시킬 것이란 예언을 했는데 엄마의 실종도 그것 때문일 거라는 거였다. 어느 누구보다 똑똑하고 영리한 아나이드는 자신이 엄마를 찾겠다는 뜻을 밝히고 길을 떠나는데....




<마녀들의 전쟁> 1부 늑대족의 피 1권은 이렇게 어느날 갑자기 자신이 마녀란 사실을 알게 된 아나이드가 마녀 입문식을 하고 오디시들에 의해 납치된 엄마를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열 셋, 열 넷...막 사춘기로 접어드는 시기인 이 나이가 마녀들에겐 또다른 출발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싶다. <마녀배달부 키키>에서 키키는 열세 살이 되면서 검은 고양이 지지와 함께 집을 떠난다. 낯선 마을에 도착한 키키가 정착하는 모습은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었지만 <마녀들의 전쟁>에서 아나이드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듯하다. 5개 국어를 하고 한번 만져본 악기라면 어떤 것도 연주할 수 있는 능력으로 혼자서 마법을 깨우친 아나이드 앞에 어떤 고난과  모험이 기다릴 것인가. 그리고 잃어버린 흰고양이 아뽈로는 과연 찾게 될까...1권을 덮자마자 2권이 기다려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인계 - 중국의 4대 미녀
왕공상.진중안 지음, 심우 옮김 / ODbooks(오디북스)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클레오파트라의 코, 그것이 조금만 낮았더라면 지구의 모든 표면은 변했을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이 한 말이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땐 클레오파트라가 엄청난 미모의 소유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 클레오파트라의 외모는 소문만큼은 아니었다고 한다. 역사에 길이 남을 정도의 아름다움은 아니지만 그녀만의 매력이 있었기에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와 대결을 하게 되고 그 결과 지중해의 판도가 바뀌었다는 얘기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상징적 인 의미였던 것에 비해 <미인계>에 등장하는 중국의 4대 미녀들은 보다 구체적이다. 여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한번 돌아볼 때마다 성이나 나라가 위태롭고 기울어지게 한다 하여 ‘경국지색’이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렇다면 한 나라의 운명, 흥망성쇠의 열쇠를 쥐었던 뛰어난 아름다움을 지닌 4명의 여인은 누구인가. 바로 양귀비와 초선, 왕소군, 서시다.




책은 가장 먼저 양귀비에 대해 말하고 있다. 빼어난 미인의 대명사이자 누구나 그 이름만큼은 아는 여인이 바로 ‘양귀비’가 아닐까. 뛰어난 외모뿐 아니라 가무에 능한 양귀비는 수왕과 혼인하여 수왕비가 된다 하지만 시아버지인 현종이 양귀비를 마음에 품으면서 그녀의 운명이 달라진다. 현종의 후궁으로 입궐한 양귀비는 현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귀비’가 된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양귀비’를 그냥 이름으로 알고 있었는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더불어 나의 무지함까지도.) 양귀비에 대한 현종의 사랑은 정말 지극했다. 하늘에선 한 쌍의 비익조, 땅에선 가지가 얽힌 두 나무가 되길 염원했단 그들의 사랑은 안녹산의 난으로 위기를 맞는다. 급기야 군신들은 현종에게 애물을 버리고 법을 바로잡으라는 ‘할애정법’을 요구하기에 이르고 양귀비는 화려한 생을 뒤로 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다음으로 등장한 여인은 삼국지를 통해 익히 알려진 초선이었다. 초선의 아름다움은 ‘취영청 밝은 달도 구름 뒤로 숨게 만들’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초선의 가족은 끼니를 잇기 어려울 만큼 고달픈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왕윤이란 사람이 가족을 보살펴준다. 양아버지의 은혜를 갚기 위해 초선은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 하는 역할을 스스로 떠맡는다. 조조와 관우에게도 몸을 맡긴다. 평범한 여인으로 한 남자의 아내로 살고자 했던 초선이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남자를 거치는 모습은 무척 안타까웠다.




그리고 왕소군. 그녀의 비파 켜는 모습과 소리에 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도 떨어뜨렸다고 하는데 사실 난 왕소군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있는 걸 본 지인이 책을 한번 훑어보면서 이런 말을 했다. “왕소군은 경국지색이 아니지. 한족의 문화를 오랑캐족에 전파해서 그 나라의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한 여잔데..” 지인의 그 말처럼 왕소군은 책에서 언급된 다른 미녀들과 사뭇  달랐다. 흉노족과의 화친을 목적으로 호한사와 혼인하게 됐지만 그녀를 본 황제가 왕소군 대신 다른 여인을 보내려 하지만 그게 호한사의 성미를 건드리게 된다. 자신을 희생해서 평화를 지키려한 왕소군은 호한사에게 시집을 가지만 결국 그 두 나라가 전쟁을 하는 불행을 겪게 된다.




마지막으로 만난 서시 역시 앞의 세 여인과 비슷했다. 헤엄치는 물고기를 가라앉게 만드는 서시의 미모는 그녀에게 행복을 안겨주지 않았다. 사랑하는 이가 있음에도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그리고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기구한 삶을 살아간 여인이었다.




장구한 중국의 역사 한 켠에서 자신의 미모를 이용하거나 희생해서 역사를 바꿔나간 양귀비, 초선, 왕소군, 서시. 삼국지를 통해 초선을 알긴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네 명의 여인들을 이 책을 통해 처음 만났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무척 설레었다. 남자의 입장에서 남자가 주도해나가는 역사에 아무리 미인이라지만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안타깝다...는 거였다. 아름다운 미모를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사랑하지 못했다. 자신만의 삶을 살지 못하고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던 여인들의 삶은 생전엔 어느 누구보다 화려했지만 결코 부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소박하고 평범함 속에 깃든 아름다움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09-01-19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인박명이라잖아요? ㅠ.ㅠ 몽당연필님 새해 인사가 늦었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

몽당연필 2009-01-19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미인박명!! 갑자기 그 말이 생각 안 나더라구요. ㅠㅠ;;
바람돌이님 새해맞이 인사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세실 2009-01-19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한때 서시 닮았다고 했는데 자살 했군요. ㅎㅎ
 
자유와 교육이 만났다, 배움이 커졌다 - 아이들도 교사도 행복한 학교, 키노쿠니
호리 신이치로 지음, 김은산 옮김 / 민들레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프리스쿨, 대안학교를 처음 알게 된 건 <창가의 토토>란 책을 통해서였다. 돌전의 아이를 키우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이유가 뭘까 찾아보다가 읽게 됐다. 교실에 앉아 수업보다 창밖을 내다보길 더 좋아하는 토토를 학교에선 퇴학시킨다. 그래서 도모에 학원을 다니게 되는데 교실이 기차를 몇 칸 연결되어있는 특이한 곳이었다. 특히 교장선생님이 인상에 남았다.  아이들의 말을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들어주시는 자상한 분이었다. 결코 평범하지 않는 그 곳에서 토토는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그리고 개성강한 친구들과 함께 자연을 사랑하는 아이로 조금씩 성장해가는 토토의 모습이 정말 감동적이었다.




<자유와 교육이 만났다. 배움이 커졌다>란 책을 손에 들고 순간 토토가 떠올랐다. ‘아이들도 교사도 행복한 학교 키노쿠니’에서 만나게 될 다정한 교장선생님과 수많은 토토!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두근 설렜다.




책은 시작부터 유쾌하다. 명색이 교장선생님인데 저자 호리 신이치로는 월요일 아침부터 아이들에게 야단을 맞는다. 책상이 지저분하다며 “언제쯤 치울거냐”, “교장이 이래서야 남부끄러워서 원...”하고 투덜댄다. 그런 아이들에게 “일 많이 하는 사람 책상은 다 이렇게 되는 거야”라며 대충 얼버무리는 호리상. 학교가 얼마나 자유로운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학년도 시험이나 성적표, 숙제, 한술 더 떠서 선생님이란 호칭도 없는 키노쿠니 학교. 선생님이 주인공인 일반학교와 달리 아이들이 주인공인 키노쿠니에서는  프로젝트라는 참여수업을 한다. 자신의 희망에 따라 공무점에서 목공이나 원예활동을 하는 아이가 있는가하면 요리를 하고, 농장에서 닭을 기르는 일에 전념하는 아이들도 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생이면 학생답게 얌전히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해야지, 무슨 프로젝트...하고 생각할거다. 하지만 키노쿠니에서 프로젝트는 단순한 손작업이나 육체노동이 아니라 일종의 지적탐구다. 손과 몸을 움직이는 활동을 통해 아이들은 자신감을 갖게 되고 성취하는 기쁨, 함께 나누는 즐거움을 저절로 배우게 된다. 실제로 책 곳곳에서 수록된 사진으로 아이들이 만든 박물관이나 미끄럼틀을 볼 수 있는데 정말 대단하다.




키노쿠니에서의 즐겁고 흥미진진한 일상으로 출발한 책은 이후 자유교육, 자유학교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한다. 니일의 서머힐을 처음 알고 신선한 충격을 받은 저자가 자유학교를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해왔는지 자유학교가 어떤 원칙으로 학교의 이념과 운영방식에 대해 얘기한다. 또 기존 학교에서 왕따나 등교거부와 같은 문제를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학교에 대한 아이들의 이의신청이라고.




작년 3월, 큰아이가 2학년이 되어 새로 반 배정을 받았을 때, 남편과 나는 제일 걱정됐던 게 있었다. 제발 담임으로 그 선생님만은 아니었으면...하고 빌었다. 아이들에게 별로 관심도 없으신데다 몸이 안 좋으셔서 휴직을 하고 아이에게 할 얘기를 칠판에 적는 필담(갓 입학한 초등1학년에게)을 하신다는 선생님. 근데 일이 어긋나려고 그랬는지 바로 그 분이 큰아이의 담임선생님이 되셨다. 몸을 움직이는 활동을 싫어하셔서 그런지 학교에 체육복을 입고 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한창 활동량이 많은 아이들인데도 말이다. 자연히 산만하고 별난데다 덩치까지 큰 남학생 몇 명은 선생님 눈 밖에 났다. 아직 어린아이 때문에 급식은커녕 학교에 찾아가지도 않는 난 작년 한해가 정말 힘들었다. 조만간 새 학기엔 어떤 선생님을 만날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최근의 상황 때문인지 키노쿠니 어린이마을의 작은 학교 키노쿠니 학교의 얘기를 읽으면서 내 마음은 극과 극을 달렸다. 얼굴가득 만족한 웃음을 띤 아이들의 모습이 마냥 부러웠지만 그 반면에 우리의 학교, 우리의 아이들이 처한 교육 현실을 떠올리면 불끈불끈 화가 치밀었다. 아이의 개성과 자율성을 키워주기 보다 권위를 앞세우는 학교. 학습이 처지는 아이에게 차근차근 가르치기보다 학원에 안 다니고 뭐했냐며 면박을 주는 선생님. 답답하고도 답답하다. 그리고 슬프다.




그렇다고 대안학교나 자유교육이 모든 문제의 정답이란 건 아니다. 하지만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우리 교육현실을 볼 때 적어도 실마리를 풀 수 있는 단서는 되지 않을까. 우선 대안학교를 등교거부나 왕따로 인한 학교부적응 아이나 문제아가 가는 곳이라는 사람들의 고정관념부터 변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남편조차 색안경을 끼고 있지 않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남자 - 제138회 나오키 상 수상작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쿠라바 가즈키의 <내 남자>. 나오키상 수상작이라는 것만으로도 유혹적이다. 거기에 띠지의 이 문구! ‘해서는 안 될 가장 처절하고 슬픈 사랑...아름답지만 위험하고 달콤하지만 죄의 향기가 나는 소설!’. 얼마나 매혹적인지! 금지된 것에서 느껴지는 위험의 향기가 느껴지지만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내 남자는 훔친 우산을 천천히 펼치면서 이쪽으로 걸어왔다....우산을 훔친 사람인데, 그 동작은 영락한 귀족처럼 매끄럽고 우아하다. 나는 그의 그런 모습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스물여섯 살인 나오가 결혼식을 앞두고 만나는 양아버지인 준고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양아버지를 ‘내 남자’라 하다니! 시작부터 충격이다. 양아버지가 사랑하는 내 남자가 된 데에는 피치못할 사정이 있을거라 여겼다. 근데 그게 아닌가? 왠지 야릇한 분위기 속에서 하나와 요시로의 결혼식이 진행된다. 그리고 신혼여행을 다녀온 하나는 놀라운 소식을 듣는다. 양아버지인 준고가 사라졌다는 것. 벽장에 숨겨놓은 ‘그것’까지 사라졌다. 하나는 깨끗하게 정리된 예전의 집에서 망연자실하고 비 냄새가 나는 남자인 준고를 그리워한다.




그후 책은 하나와 결혼한 요시로와 준고, 하나, 준고의 연인이었던 고마치, 다시 하나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조금씩 조금씩 과거로 돌아가면서 이야기와 사건들이 서술되는 방식이다. 일본소설 특유의 문체. 나긋나긋하면서 조용한 문체와 감성적인 문장, 거기에 소설의 배경인 일본의 북쪽대륙 항구마을인 몸베쓰, 겨울이면 온 바다가 유빙으로 가득 차는 곳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정경묘사는 어느새 독자들을 책으로 완전 몰입하게 만든다.




홋카이도의 작은 섬에 살던 하나는 어느날 갑작스런 해일로 가족을 잃고 혼자 살아남는다. 부모님이나 형제와 함께 죽지 못한 걸 후회하고 안타까워하는 하나 앞에 한 청년이 나타난다. 그의 이름은 구사리노 준고. 자신을 먼 친척이라 소개한 그는 하나를 데려가 키울 의사를 밝힌다. 해양순시선을 타면 바다에서 며칠을 지내야하는 직업 때문에 여러 어려움이 있을거라는 주위 친척들의 만류도 무릅쓰고 준고는 하나를 양딸로 삼는다. 그리고 그 둘은 조금씩 서로의 향기와 체취에 매료되기 시작한다. 하나가 준고이고 준고가 하나인 생활이 이어지는데....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사촌간의 결혼이 허용되는 일본사회의 특성 때문인지 근친상간이나 동성애가 소설이나 만화에 자주 거론된다. 그래서 처음엔 금지된 사랑을 하는 두 주인공이 배다른 남매나 오래전에 헤어진 친남매가 아닐까...생각했다. 그런데!! 책에서 털어놓는 이야기는 내 상상을 벗어났다. 그래선지 책을 읽으면서 정말 괴로웠다.




숨가쁘게 책을 다 읽고 나서 며칠이 지났다. 그런데도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나타난다. 유복한 집안의 아들로 부족함이나 구김 없이 자란 요시로, 그는 왜 하나와의 결혼을 결심하게 됐을까. 영혼을 보거나 기운을 느끼는 그는 하나의 집 벽장에서 하나와 준고가 저지른 죄의 증거를 봤다. 그런데도 왜? 하나와 준고는 왜 서로에게 그렇게 집착하게 됐을까? 서로를 끝없이 탐하는 삶, 둘이 하나가 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던 그들...이해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하나의 엄마는 왜 딸을 그토록 미워했을까? 하나가 정말 그녀가 배로 낳은 딸이 맞나? 불륜에 의해 임신했더라도 그래도 자식이고, 딸인데...해일이 덮치는 순간 하나의 가족이 취한 행동은 가족이란 뭔지...란 의문을 품게 했다.  하나의 출생의 비밀은 끝끝내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큰 의문은 바로 사라진 준고의 행방이다. 어디에 있든 죽을 때는 반드시 바다 옆으로 돌아올 거라는 자신의 말대로 바다로 향한 걸까. 그들의 씻을 수 없는 죄의 증거를 가지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스터 후회남
둥시 지음, 홍순도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이 화상아, 넌 그런 것도 모르냐?”, “아이고~오, 이 답답아!!”, “야! 쩡광셴!! 너의 반복 학습능력은 완전 바닥이야 바닥. 그거 알어?”.




책을 읽는 내내 답답해죽는 줄 알았다. 엽기의 도를 넘어서서 주인공의 앞뒤 꽉 막힌 행동은 나의 이해반경을 훨씬 벗어나 있었다. 똑같은 일, 똑같은 실수를 몇 번이나 반복하고 그럴때마다 자신의 얼굴이나 입을 스스로 쥐어박거나 찰싹찰싹 때리는 걸 보고 슬며시 의심하기도 했다. 이 남자, 정말 정상이야? 살짝 모자라는 거 아냐?




<미스터 후회남>. 아~니, 이렇게 궁상맞은 남자가 또 있을까. 제 멋대로 깎은듯한 헤어스타일에 긴 코, 콧구멍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들이칠까 걱정될 만큼 위로 뻥 뚫려있다. 크기만하다. 거기다 코 밑이랑 턱엔 삐죽삐죽 수염이 보인다. 하지만 더 인상적인 건 남자 눈빛이다. 여덟팔자처럼 아래로 찡그린 눈썹에 커다란 눈동자. 불쌍하다 못해 처량하기 짝이 없다. 이런 얼굴을 어른들은 아마 복이 붙은 데가 하나도 없는 관상이라고 하시겠지?




‘별다른 의견이 없지. 아가씨? 그러면 이제부터 내 얘기를 슬슬 시작해보겠어.’ 이렇게 시작한 책은 주인공인 쩡광셴이 들려주는 자신의 인생이야기이자 후회담이다. 어쩌다 우연히 보게 된 아버지와 자오산허의 불륜행각. 들통난 아버지와 자오 할아버지는 광셴에게 ‘아무것도 못 본거’라며 단단히 입조심을 시킨다. 하지만 자기 속에만 담고 있기에 너무 큰 비밀이었던걸까. 다정하게 대하는 엄마한테 속이는 게 너무 미안해서, 다른 사람에게 절대 말하지 않겠다는 친구 위바이자의 맹세를 믿고 또 자오완넨에겐 얼떨결에 광셴, 기어이 일을 치고야 만다.




그때부터 시작된다. 광셴의 후회담은. “내가 제일 무서운 건 다른 게 아니야. 바로 몹쓸 놈의 네 입이야”라며 자신의 입이 집에 화를 불러들이니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하지 말라는 엄마의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광셴의 입은 제어불능이다. 자신을 좋아해서 치마까지 걷어 올린 샤오츠에게도 ‘저질’이라며 소리를 지른다. 근데 일이 꼬이려고 했던 걸까. 광셴은 샤오츠가 떠난 뒤에야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샤오츠에게 지난날 자신의 실수를 사과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 그녀를 찾아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샤오츠에겐 다른 남자가 있었다.




또 직장동료이자 친구인 자오징둥이 자신의 말실수로 인해 자살하게 되는데 그 원인제공자였던 장나오를 만난 광셴은 보자마자 다시 열에 들뜬다. 거기다 위바이자의 부추김이 더해져 광셴은 장나오의 숙소에 침입하기에 이른다. 결국 광셴은 강간죄로 8년형을 받고 감옥에 간다. 그런 그에게 루샤오옌은 정성을 다한다. 예전보다 달라진 그의 모습에 광셴이 이제야 제정신을 차렸구나 싶을 찰라에 광셴, 또 일을 친다.




자신의 강간죄가 무고하다는 게 판명되고 출소하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광셴은 우리의 기대(?)에 결코 어긋나지 않았다. 루샤오옌과 장나오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 우왕좌왕할 때는 어이가 없었다. 급기야 종이 두 장에 루샤오옌과 장나오의 이름을 적어서 하나를 골라서 결혼하겠다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늘어놓을 때는 너무 화가 나서 책을 덮어버리고 싶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부분도 있었다. 하나도 잘난 구석이 없는 광셴을 여자들이 뭐 좋다고 그렇게 매달리는 건지. 아무리 중국이란 나라가 우리와 다르고 또 시대적 배경(당시 중국은 문화대혁명 시기)이 다르다 치더라도 여자의 기준이란 비슷하지 않을까. 책임감이나 주체성이라곤 눈 씻고 봐도 없는데다 걸핏하면 논리도 맞지 않는 말을 늘어놓고 걸핏하면 말실수를 하는 남자. 나 같으면 열 트럭을 갖다줘도 싫다. 우리의 얼굴 중에 귀나 눈이 두 개인데 비해 입이 하나인 이유가 뭐겠는가. 세치 혀를 함부로 놀리지 말라는 게 아닌가.




둥시의 책은 <미스터 후회남>을 통해 처음 만났다. 금욕, 우정, 충동, 일편단심, 신체, 방랑, 후회록(어처구니없게도 마지막 끝나는 순간에도 대미를 장식한다) 7개의 장에 걸친 광셴의 후회막급인 인생역정을 보면서 내 가슴팍을 얼마나 쳤는지 모른다. 답답해서. 참 딱하고 불쌍한 인생이다 싶다. 애처롭게 뒤를 바라보는 광셴이 언제쯤이면 후회스런 지난날을 이겨내고 시선을 똑바로 앞으로 향하게 될까. 과연 후회남, 동정남이란 딱지를 떼게 될까. 기대가 된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거예요. 후회라는 것은 집 앞을 다 봤는데도 불구하고 눈이 갑자기 보이지 않아 집을 못 보는 것과 같아요. 또 집으로 가는 길이 가가운데도 일부러 빙빙 돌아 쿠바까지 가는 것과 같다고요. 더 말할까요. 후회는 자기가 다 지은 집이 무너지는 광경을 보는 것과 같아요. - 26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