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절한 균형 아시아 문학선 3
로힌턴 미스트리 지음, 손석주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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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균형>. 처음엔 소설이 아닌 줄 알았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좌우대칭을 이룬다는 ‘균형’, 이것만으로 경제학이나 경영관련 자기계발서가 아닐까 했다. 하지만 여기에 ‘적절한’이란 곁들여지면서 의문이 생겼다. ‘균형’이란 단어가 이미 있는데 굳이 ‘꼭 알맞다’는 의미의 ‘적절하다’란 말은 왜 넣었을까. 거기에 또 하나, 기다란 장대 끝에 서 있는 소녀가 눈길을 끌었다. 네다섯 살이나 됐을까? 저토록 어린 아이가 손을 뻗어 가리키는 게 뭘까. 궁금증이 일었다. 그리고 습관처럼 오렌지빛 띠지를 벗겼는데, 그 순간 깜짝 놀랐다. 띠지에 가려진 부분에 있던 건 다름아닌 ‘손’이었다. 즉 누군가의 엄지손가락 위에 놓인 기다란 장대, 그 끝에 어린 소녀가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거였다. 순간 등으로 한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데 이럴수가! 대체 이 책은 무슨 이야기를 담고 있는 걸까.




책은 1970년대 중반의 인도,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고 곳곳에서 폭력과 난동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혼란을 겪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아침 열차 안에서 처음 만난 마넥과 이시바, 옴은 곧 자신들의 목적지가 같다는 걸 알게 된다.  바로 디나 달랄의 집이었다. 디나와 마넥, 이시바, 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들은 이렇게 만난다.




좋은 가문의 딸이었던 디나는 결혼 후 남편이 갑작스런 사고로 목숨을 잃자 생계가 막막해진다. 틈틈이 배운 재봉일로 생활을 꾸려가지만 도저히 해결책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친구의 소개로 의류 수출업체에 납품하는 일을 계획한다. 이에 이시바와 옴을 재봉사로 고용한다. 대학생인 마넥은 학교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로 인해 기숙사 생활이 어려워지자 어머니의 친구인 디나의 집에 하숙생으로 머물게 된다. 서로 다른 신분의 사람들. 그들은 서로 각자의 필요에 의해 디나의 낡은 집에 모이고 함께 지내게 된다. 그리고 자신만의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이어나간다. 여자 혼자 살아가기엔 가혹한 인도에서 디나는 홀로서기를 하려했고 이시바와 옴은 불가촉천민이란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열심히 재봉틀을 돌린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아랑곳없이 그들의 위태로운 삶은 결국 깨어지고 만다. 아파트에서 강제로 퇴거당한 디나는 어린 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오빠의 집으로 다시 들어가고 고향에서 신붓감을 찾아 결혼하려던 이시바와 옴은 강제 가족계획 수술로 인해 거세, 불구가 되어 구걸하는 거지로 전락한다. 그리고 마넥 역시 자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불행에 견디지 못하고 끝내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지고 마는데...




인도의 카스트 제도가 어떠한지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책에서 전하는 이야기는 실로 충격적이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불평등 차원이 아니었다. 불가촉천민은 신분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걸핏하면 학대와 고문을 일삼았다. 심지어 아들이 둘이란 것조차 죄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렇게 끔찍하고 처절한 일들을, 인도의 아픈 현실을 저자는 오히려 담담한 문장으로 풀어내고 있었다. 그게 마치 자신의 이야기 어디에도 거짓이나 과장됨이 없는 진실이라는 걸 말하는 것 같아, 더 안타까웠다.




인도의 모순되고 비참한 현실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잘 표현한 <적절한 균형>. 800쪽을 훌쩍 넘는 두툼한 책을 쉬엄쉬엄 읽어갔다. 책장을 뒤로뒤로 넘기며 내달리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물음을 던졌다. 그래서? 무엇이 적절한 균형이라는 거지? 표지의 어린 소녀가 보여주는 아슬아슬함이 그 적절한 균형을 보여주는 걸까? 아니면 소녀의 뻗은 손, 그 끝의 뭔가에 해답이 있다는 걸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 위태롭고 아찔한 장대 끝에서 소녀가 내려왔으면 좋겠다고, 소녀의 떨리는 가슴을 따스하게 품어주고 싶다고 생각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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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천 가족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4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권일영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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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 폼포코 너구리 아냐? 모리미 토미히코의 <유정천 가족>을 보자마자 대뜸 이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기다란 전철 모양의 너구리 그림을 보고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란 애니메이션이 떠올랐거든요. 나무를 베고 산을 깎아 개발을 하려는 인간들로부터 자신들의 땅을 지키기 위해 변신술로 맞서는 너구리의 순진하고도 진지한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유정천 가족>의 표지에서도 비슷한 기운이 느껴지네요. 두 눈을 힘을 주어 부릅떠서 바짝 긴장한 듯 보이는 둔갑한 너구리들의 모습을 보니 뭔가 굳은 결심을 한 듯합니다. 대체 이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걸까요?




이야기의 배경은 일본의 전통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는 도시, 교토입니다. 그곳의 다다스 숲에는 헤이안 시대부터 이어져온 너구리 명문가인 시모가모 가문이 있는데요.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너구리는 바로 시모가모 소이치로가 그만 냄비요리가 되어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한 달에 한번 금요일에 열리는 비밀회합인 금요구락부에서 매년 송년회마다 너구리를 냄비에 삶아 먹는데 거기에 희생된 거죠. 가문의 기둥이자 든든한 버팀목이자 위대한 너구리였던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은 가족들에게 큰 혼란을 가져옵니다. 왜냐면 위대한 아버지를 꼭 닮은 아들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불행하게도 네 아들은 모두 조금씩 모자랐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의 ‘위대한 그 피를 정확하게 넷으로 나누어’ 아들들에게 물려줬거든요. 책임감만 물려받은 장남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니세에몬’이 되려고 하지만 대범하지 못하고 느긋한 성격을 물려받은 둘째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개구리로 둔갑해선 우물 속으로 숨어버리고 순진함을 이어받은 막내는 아직 둔갑술조차 서툽니다. 거기다 이 책의 화자인 셋째 야사부로 역시 바보스러움만 물려받아 오로지 재미있게 사는 것에만 관심 있는 ‘보헤미안 너구리’였으니...이런 비극이 또 있을까요. 거기에 마치 예정된 절차인 듯 시모가모 너구리들에게 위기가 닥칩니다.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던 아버지의 동생 에비스가와 가문이 차기 니세에몬이 되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시모가모 너구리들에게 위협을 가하기 시작하고 뒤이어 아버지 소이치로의 죽음 뒤에 숨겨진 비밀이 드러나게 되는데...




소설은 주체할 수 없는 바보의 피가 흐르는 시모가모 너구리 사형제와 어머니 외에도 와인을 좋아하는 텐구와 인간이면서도 수련을 거쳐 텐구의 면모를 갖춘 여인 벤텐, 에비스가와 가문의 금각, 은각 형제 등 나름 개성 있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요. 그동안 인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에 길들여져서 일까요. 이렇게 독특하고 개성강한 너구리들과 텐구가 벌이는 한바탕 대소동은 마치 만담과 판타지가 결합된 느낌을 줍니다. 위기에 닥쳤을 때 부족하지만 서로 힘을 합해 이에 맞서는 시모가모 너구리들의 모습을 보니 우리 인간과 다를바 없는 것 같았습니다.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계기도 되었구요.




하지만 좀 아쉬웠습니다. 몇 번에 나누어 연재된 것을 책으로 묶어서인지 부분적으로 반복되는 내용이 있는데다 일본식 한자를 한글로 옮기는 번역과정에서의 난관 때문인지 몰입하기가 어려웠다. 독특하고도 유쾌한, 수시로 폭소를 터뜨릴만큼 발랄한 이야기를 쓰는 걸로 알려진 저자의 글인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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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미술관
이은 지음 / 노블마인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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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가까운 곳에 미술관과 화랑이 즐비하지만 애써 찾지 않는다. 그림이나 조각 같은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자신이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 틈틈이 동양이나 서양의 미술사나 그림에 관한 책을 읽는데도 그림을 즐기기엔 솔직히 부담백배다. 그런 내가 <수상한 미술관>을 선택한 건 이 책이 바로 추리소설이라는 거였다. 생각해보시라. 미술과 추리소설의 만남. 이것만으로도 구미가 동하지 않은가.




주인공인 김이오는 미술평론가이자 대학 강사다. 한때 그의 평론은 미술계에서 주목을 받았지만 ‘화무십일홍’이란 옛말이 있듯이 어느새 점차 주류에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원만하지 않은 대인관계와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평론은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평생 미술 밖에 모르며 열심히 살면 언젠가는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해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기대가 허물어지자 급기야 부부관계도 삐걱거리게 된다. 아내와 심하게 다툰 다음날 눈을 뜬 그는 자신의 집에서 낯선 휴대폰을 발견한다. 계속 울리는 벨소리. 그는 왠지 불길한 마음이 들면서도 전화를 집어 든다. 그리고 거기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 정체불명의 남자는 김이오에게 자신이 아내를 납치했으니 아내를 무사히 만나고 싶으면 자신과 게임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정한 장소에 가서 자신이 내는 문제를 알아맞혀야 한다는 것. 갑작스런 상황에 김이오는 당황하지만 남자는 멈추지 않고 강력하게 밀어붙인다. 그후 김이오는 의문의 남자가 제시한 ‘패러디 게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는데...




의문의 남자는 김이오가 평론에서 자신을 표절작가라고 한 것 때문에 재산도 명예도, 사랑하는 가족도 모두 잃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을 극한의 낭떠러지로 몰아붙인 당사자인 김이오와 복수의 게임을 하면서 패러디와 표절은 무엇이며 어떤 점에서 다른지 하나하나 짚어간다. 그것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반 고흐를 비롯해, 고야, 피카소, 마네 등의 유명 서양화가의 그림을 게임의 문제로 끌어와 논쟁의 도마 위에 올려놓고 김이오와 남자의 팽팽한 대결을 벌인다. 그런데 그 과정이 참 흥미롭다.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서양화의 의미를 비롯해 하나의 작품을 새롭게 바라보고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예술이 우리 일상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납치법, 협박범이 벌인 게임을 풀기 위해 주인공이 급박하게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문제를 푸는 <수상한 미술관>. 미술과 추리소설이 만나 흥미를 더했지만 솔직히 소설은 전체적으로 허술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똑같은 형식의 문제가 계속 반복되면서 벌이는 논쟁이 그저 의문을 제시하는 선에서 그친다는 건 차치하고라도 이야기의 구성은 정말 엉성했다. 소설의 초반, 왠지 영화 ‘다이하드’가 연상된다 했는데, 역시나!! 주인공을 한껏 위기로 몰아붙인 저자는 마지막 순간 놀라운 급반전을 일으키지만 그것조차 왠지 어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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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거짓말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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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이상하다....아니, 이해할 수 없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겁니다. ‘우아한’과 ‘거짓말’란 단어는 어찌보면 물과 기름처럼 정말 안 어울리는 조합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런 두 단어가 책제목이 된 데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 여겨졌습니다. <완득이>를 쓴 김려령의 작품이니 틀림없을 거라고. 그래서 선택한 책이었습니다. 예쁜 나비가 그려진 책 <우아한 거짓말>을....




‘내일을 준비하던 천지가, 오늘 죽었다’ 본문에 들어가기도 전에 적혀있는 이 짧은 문장을 보자마자 제 가슴에선 ‘쿵’ 소리가 났습니다. 천지란 인물이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 전혀 알 수 없는데도 이상하게 두근거림이 멈추질 않았어요. 왠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일을 준비하던 천지’라니, 혹시...?




저의 예감은 맞았습니다. 천지는 중학생 소녀였습니다. 갑작스런 사고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와 언니 만지와 가난하게 살아가지만 그래도 착한 마음씨를 가진 참 맑은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것도 자살. 왜일까요? 한창 친구와 재잘대며 수다를 떠는 재미에 푹 빠져있을 나이의 아이가 갑자기 죽음을 결심하게 된 이유가 대체 뭘까요?




언니 만지는 동생의 갑작스런 죽음 뒤에 숨겨진 의문을 풀어가려 합니다. 동생과 늘 함께 다녔던 친구 화연을 만나 얘기를 나누지만 뚜렷한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다만, 화연이로 인해 천지가 많이 괴롭힘을 당했을 거라고 짐작만 할뿐, 어디서도 동생을 죽음의 낭떠러지로 내몬 이유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하나씩 하나씩 알게 되지요. 천지가 지금껏 어떤 나날을 보냈는지. 뭐든지 꾸미고 만들기를 좋아할만큼 꼼꼼하고 공부도 그런대로 잘 하는 차분한 아이라고 알고 있던 천지는 실은 언제 부서질지 모를 정도로 연약하고 섬세한 아이였습니다. 다만 자신 속에 담긴 슬픔과 아픔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진 게 문제였어요. 천지는 서서히 떠날 준비를 합니다. 하지만 미움을 가지고 갈 수 없었던 천지는 자신의 마음을 남깁니다. 붉은색 털실 뭉치에....




가슴이 저리고 아팠습니다. 천지가 무심코 넘긴 털실뭉치 속의 편지를 엄마와 언니가, 친구 화연이와 미라가 조금이라도 빨리 읽었다면 어땠을까...천지가 죽음에 이르는 걸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고개를 쳐들어 목울대를 울렸습니다. 천지도 저와 같은 심정이었을까요? 생의 마지막 짧은 순간 천지는 꿈을 꿉니다. 자신의 가족이, 친구가 거짓이 아닌 진실한 마음으로 자신을 따스하게 품어주는 광경을...결국 현실이 되지 못했던 꿈을...




김려령의 작품은 <우아한 거짓말>이 처음입니다. 빨리 쉽게 읽히는 책이지만 책장을 덮고 전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천지의 마음에 남은 상처가, 동생의 아픔을 미리 알아채지 못한 만지의 후회가, 세상을 버린 딸을 가슴에조차 묻을 수 없는 엄마의 억울함이 수시로 떠올라 울컥 눈물을 쏟아내곤 했습니다.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무엇이 그토록 천지를 힘겹게 했는지. 그리고 저를 돌아봅니다. 나도 내 아이를 힘겹게 하고 상처를 주고 있는 건 아닐까. 겉만 번지르르한 우아한 거짓말을 하고 있진 않았을까.




김려령의 전작인 <완득이>를 구입만 해놓고 아직 읽지 않았습니다. 이제 완득이를 만날 차례입니다. 그 속에서 만나게 될 저의 또 다른 모습, 숨겨진 내면에 걱정도 되지만 더 이상 피해선 안되겠지요. 깨어질 각오를 하고 맞서겠습니다. 응원, 해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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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
마르크 함싱크 지음, 이수영 옮김 / 문이당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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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게나 닥치는 대로 책을 읽다보면 간혹 책의 흐름이 느껴질 때가 있다. 비슷한 주제나 관련 있는 내용의 책을 연이어 읽게 되는데, 이번에 또 그런 경험을 했다. 얼마 전 <창경궁 동무>란 책을 읽었는데 영조의 즉위 당시의 상황과 사도세작의 죽음, 이산 정조의 어린 시절이 담담하고 부드러운 문장으로 표현된 소설이었다. 이산의 어린 시절 친구였던 정후겸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어 색다른 느낌을 받았는데, 그 후에 읽게 된 책이 ‘사도세자는 뒤주에서 죽지 않았다’는 띠지의 문구가 적힌 <충신>이다.




‘이제 막 스물두 살이 된 규장각 정6품 기사관인 송인준이’ 삼복더위 속 좁은 서고에서 서책을 뒤적이는 것으로 책은 시작된다. 새로이 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기록을 찾지만 이틀 걸러 한번 꼴로 빠지는데다 왕가의 기록에 영중추부사 이천보의 와병을 왜 넣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투덜댄다. 급기야 자신을 뽑아준 이문원을 대궐 앞에서 기다린 끝에 만나 넌지시 운을 떼보지만 알 수 없는 대답만 할 뿐이다. 돌아서는 젊은 선비를 바라보며 이문원은 20여년 전에 벌어졌던 참혹한 일을 떠올린다.




흡사 신선도에서 빠져나온 듯한 세 인물, 영중추부사 이천보와 좌의정 이후, 우의정 민백상이 은밀하게 모임을 갖는다. 셋 모두 골수 노론의 영수로 받들여지는 삼정승으로 그런 그들이 야심한 시각에 어쩔 수 없이 입에 올린 얘기는 바로 온양을 다녀온 세자의 병세에 관해서였다. 매독의 초기증상인 궤양이 나타났다가 며칠 뒤 사라졌다는 것. 어릴 적 그렇게 총명하고 영민했던 세자가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보인 것도 큰일인데 세자의 증상만으로는 정확한 병명조차 알 수 없어 그들은 밤새 고민한다. 그때 밖에서 세 정승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문원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친구 서영우와 조일천과 함께 어의 장의삼을 찾아간다. 서소문 밖 후미진 골목을 빠져나와 의원의 집에 도착한 이문원과 친구들은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된다. 아버지에게 긴히 전할 것이 있다고 했던 어의 장의삼은 이미 죽어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지병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살해됐다는 걸 알게 된다. 세자의 병을 가장 가까이에서 치료하고 그 단서를 쥐고 있는 유일한 인물의 죽음 앞에서 그들은 망연자실하고 마는데.




먼 친척인 이천보의 양자가 된 이문원은 글공부와 담을 쌓았지만 타고난 총명함으로 상황 판단력이 빠른 인물이었다. 그런 그의 곁에서 침에 능한 서영우와 이름난 가문의 자손이지만 글보다 무예가 깊은 조일천이 함께 하면서 어의 장의삼의 의문에 싸인 죽음과 그 배후는 누구인지, 세자의 병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풀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후 그들은 죽은 장어의가 남긴 의문스런 문서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동안 사도세자는 붕당정치와 권력의 희생양의 되어 뒤주에 갇혀 죽은 걸로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이 전하는 이야기는 무척 놀랍고 충격적이다. 왕권을 둘러싼 갖은 비리와 암투를 보고 있으면 권력이 대체 무엇이길래 왕권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기 위해 이토록 냉혹하고 잔인해질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이 책의 가장 놀라운 점은 바로 저자인 마르크 함싱크가 한국에서 태어나 벨기에로 입양되었다는 점이다. 업무차 보게 된 <진암집>에서 의문스런 내용을 접한 것이 이 작품을 쓰게 된 배경이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어를 모르는 저자가 250년 전 왕이 아들인 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비극적인 사건이란 한국적인 소재를 가지고, 이토록 탄탄하게 이야기를 펼쳐보이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13개 국어에 능통한 멀티랑구어인 저자는 현재 그림자 작가로 통하는데, 그림자 작가라도 좋다. 그의 다음 작품을 만날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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