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신
마르크 함싱크 지음, 이수영 옮김 / 문이당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아무렇게나 닥치는 대로 책을 읽다보면 간혹 책의 흐름이 느껴질 때가 있다. 비슷한 주제나 관련 있는 내용의 책을 연이어 읽게 되는데, 이번에 또 그런 경험을 했다. 얼마 전 <창경궁 동무>란 책을 읽었는데 영조의 즉위 당시의 상황과 사도세작의 죽음, 이산 정조의 어린 시절이 담담하고 부드러운 문장으로 표현된 소설이었다. 이산의 어린 시절 친구였던 정후겸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어 색다른 느낌을 받았는데, 그 후에 읽게 된 책이 ‘사도세자는 뒤주에서 죽지 않았다’는 띠지의 문구가 적힌 <충신>이다.




‘이제 막 스물두 살이 된 규장각 정6품 기사관인 송인준이’ 삼복더위 속 좁은 서고에서 서책을 뒤적이는 것으로 책은 시작된다. 새로이 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기록을 찾지만 이틀 걸러 한번 꼴로 빠지는데다 왕가의 기록에 영중추부사 이천보의 와병을 왜 넣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투덜댄다. 급기야 자신을 뽑아준 이문원을 대궐 앞에서 기다린 끝에 만나 넌지시 운을 떼보지만 알 수 없는 대답만 할 뿐이다. 돌아서는 젊은 선비를 바라보며 이문원은 20여년 전에 벌어졌던 참혹한 일을 떠올린다.




흡사 신선도에서 빠져나온 듯한 세 인물, 영중추부사 이천보와 좌의정 이후, 우의정 민백상이 은밀하게 모임을 갖는다. 셋 모두 골수 노론의 영수로 받들여지는 삼정승으로 그런 그들이 야심한 시각에 어쩔 수 없이 입에 올린 얘기는 바로 온양을 다녀온 세자의 병세에 관해서였다. 매독의 초기증상인 궤양이 나타났다가 며칠 뒤 사라졌다는 것. 어릴 적 그렇게 총명하고 영민했던 세자가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보인 것도 큰일인데 세자의 증상만으로는 정확한 병명조차 알 수 없어 그들은 밤새 고민한다. 그때 밖에서 세 정승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문원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친구 서영우와 조일천과 함께 어의 장의삼을 찾아간다. 서소문 밖 후미진 골목을 빠져나와 의원의 집에 도착한 이문원과 친구들은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된다. 아버지에게 긴히 전할 것이 있다고 했던 어의 장의삼은 이미 죽어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지병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살해됐다는 걸 알게 된다. 세자의 병을 가장 가까이에서 치료하고 그 단서를 쥐고 있는 유일한 인물의 죽음 앞에서 그들은 망연자실하고 마는데.




먼 친척인 이천보의 양자가 된 이문원은 글공부와 담을 쌓았지만 타고난 총명함으로 상황 판단력이 빠른 인물이었다. 그런 그의 곁에서 침에 능한 서영우와 이름난 가문의 자손이지만 글보다 무예가 깊은 조일천이 함께 하면서 어의 장의삼의 의문에 싸인 죽음과 그 배후는 누구인지, 세자의 병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풀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후 그들은 죽은 장어의가 남긴 의문스런 문서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동안 사도세자는 붕당정치와 권력의 희생양의 되어 뒤주에 갇혀 죽은 걸로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이 전하는 이야기는 무척 놀랍고 충격적이다. 왕권을 둘러싼 갖은 비리와 암투를 보고 있으면 권력이 대체 무엇이길래 왕권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기 위해 이토록 냉혹하고 잔인해질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이 책의 가장 놀라운 점은 바로 저자인 마르크 함싱크가 한국에서 태어나 벨기에로 입양되었다는 점이다. 업무차 보게 된 <진암집>에서 의문스런 내용을 접한 것이 이 작품을 쓰게 된 배경이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어를 모르는 저자가 250년 전 왕이 아들인 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비극적인 사건이란 한국적인 소재를 가지고, 이토록 탄탄하게 이야기를 펼쳐보이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13개 국어에 능통한 멀티랑구어인 저자는 현재 그림자 작가로 통하는데, 그림자 작가라도 좋다. 그의 다음 작품을 만날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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