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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 A
조나단 트리겔 지음, 이주혜.장인선 옮김 / 이레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내가 혼자서 심야영화를 본다고 하면 지인들은 깜짝 놀란다. 무섭지 않느냐고. 그럼 난 무서운 거 없다고. 횡단보도만 하나 건너면 바로 집이라 위험하지도 않다고 말한다. 사실이 그러니까. 하지만 어쩌다 한번씩 털이 삐죽삐죽 서고 소름이 끼칠 만큼 무서울 때가 있다. 늦은 밤 가장 두려운 존재를 만났을 때다. 그건 한 맺힌 귀신도 폭력배나 술 취한 사람도 아니다. 바로 십대 청소년들. 그것도 서너 명이 무리지어 있으면 그 곁으로 발걸음 떼는 것조차 두렵다. 언제부터일까. 한창 감수성 예민하고 활달하며 사랑으로 충만할 시기의 아이들이 사람들에게 두려운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
창밖으로 상체를 드러내고 어딘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람. 어딜 보고 있는 걸까. <보이A>. 표지부터 왠지 공허한 기운이 감돈다.
‘코끝을 스치는 냄새도 오랜만이었다’로 책은 시작한다. 잭이란 이름이 평범하면서도 근사한 이름이어서 선택했다는 보이A. 드디어 감옥이 아닌 공간에서 태양을 바라보게 됐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도 자랐던 동네도 모두 버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죄를 범했는지 아무도 모르는 낯선 동네에서 잭 버리지가 되어 살아가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 말투를 고치고 응원하는 축구팀에 대해 공부하고 과거도 만들어냈다. 더구나 곁에는 오랫동안 자신을 돌봐주고 힘이 되어주던 테리가 있는데도 그는 왠지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다. 무엇 때문일까.
보이A. 그는 어렸을 때 늘 따돌림 당하던 아이였다. 그러다 우연히 보이B를 만나고부터 그의 일상이 달라진다. 친구와 함께 한다는 게 뭔지 몰랐던 A는 B를 만나면서 모처럼 만족스런 날들을 보낸다. 하지만 A는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B는 엄마들이 절대로 같이 어울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인물이라는 걸.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A는 곧 끔찍한 범죄에 휘말리고 만다. 10살의 어린 소녀를 살해한 혐의로 사법처리를 받게 되는데....
이 책은 1993년 영국 리버풀에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한 쇼핑센터에서 두 살 난 아이가 실종되어 대대적인 수색을 벌이지만 결국 주검이 되어 발견됐는데 당시 그 아이를 살해한 범인이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들이었다는 것이다. 전국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이 사건으로 인해 영국은 CCTV 천국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이었으며 그로 인해 사람들이 얼마나 분노로 치를 떨었는지 하는 것이 아니다.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했다. 그래서 주변 상황들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사건의 이면에 숨은 것들을 들춰내고자 했다. 사건의 중요한 핵심은 고스란히 남겨둔 채 오로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 수 있는 것, 사회적 이슈로 만들 수 있는 사항들을 부풀려서 과장해서 전달됐을 경우 그로 인해 어떤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했던 게 아닐까.
몇 달 전, 소년범을 다룬 책을 읽었다.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지만 미성년자란 이유로 가벼운 처벌에 그치고 마는데 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몇 년 후 당시 사건의 범인이었던 소년들이 연이어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그를 추적하는 과정이 담겨 있었다. 처음 책을 읽으면서 가졌던 ‘대체 누가 범인일까’하는 생각들은 책장이 넘어가면서 ‘갱생이란 무엇인가’ ‘한 번 지은 죄는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씻을 수 없는가.’란 의문으로 확대되었다.
새로운 곳에서 제 2의 삶을 시작한 보이A는 직장과 동료, 사랑하는 연인이 생긴다. 자신의 과거를 밝힐 수 없다는 죄책감이 여전히 그를 괴롭혔지만 그래도 행복한 날들을 보낸다. 그러다 우연히 한 소녀의 생명을 구하면서 그는 영웅이 된다. 그런데 그 일이 오히려 자신의 목을 죄는 올가미가 될 줄이야....
‘갱생이란 무엇인가’ ‘한 번 지은 죄는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씻을 수 없는가.’ 다시 생각해보지만 쉽사리 답을 내릴 수가 없다. 내 주변의 누가 알고 보니 범죄자였다면 그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변함없는 태도로 그를 대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지만 이것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건 수학문제를 푸는 것처럼 정답이 나오는 게 아닐뿐더러 쉬운 일도 아니다. 그저 가장 합리적이고 적절하며 올바른 해답을 기대할 뿐...
잠든 아이의 얼굴을 바라본다. 키가 어느새 내 어깨를 훌쩍 넘어버렸지만 아직 순수하고 여린 아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나 요령도 조금씩 터득하고 있다. 몇 년 후 아빠만큼 키가 크고 목소리도 굵어지면 어떻게 될까. 그때가 되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이 아이를 두려운 눈을 쳐다보는 건 아닐까. 이율배반적인 생각이지만 제발 그렇지 않기를...
소설 <보이A>를 읽을 때 이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의 상영소식을 들었는데 지방에선 상영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자신의 죄를 가슴에 담고 잭이 되어 속죄하며 살고자 했던 보이A를 어떻게 영화에 담아냈을까 꼭 보고 싶었는데....너무나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