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한 문장부터 - 10대를 위한 글쓰기 기본기 창비만화도서관 9
이강룡 지음, 국민지 그림 / 창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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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책 읽기 수업을 하면서 가장 힘든 점은 글쓰기. 책 속에서 낯선 단어를 만나면 하나하나 의미를 찾고 의문이 생기면 질문을 던지고 답하면서 한 달에 한 권, 느리게 읽으면서 책에 대한 감상이 정리되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자기 생각이나 감상을 써 보라고 하면 아이들은 대부분 주저하고 망설인다. 맞춤법이나 잘 써야 한다는 부담 없이 써보라고 하면 그제야 마지못해 짧게 몇 줄 적는다.


 

글쓰기는 쉽지 않다. 생각을 정리하고 단어를 고르고 골라 배열하여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글쓰기는 말하기와 함께 를 표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에 등한시할 수 없는 영역이다. 조금씩 연습을 통해 익혀둘 필요가 있는데 문제는 어떻게 하는가이다.

 


글쓰기를 다룬 수많은 책 중에서 <글쓰기는 한 문장부터>는 표지가 눈길을 끌었다. 고양이가 잘못 쓴 부분을 짚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만화 형식으로 된 책이었다. ‘고 선생이라 불리는 고양이가 일상 속에서 접하는 여러 상황과 사례를 바탕으로 서연, 서윤 자매는 물론 그 가족에게 시도 때도 없이 글쓰기를 가르친다. 이를테면 [1]에서는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짚는데 어떻하지어떻게 하지로 풀어쓰거나 두 말을 합쳐서 어떡하지로 써야 한다는 것, ‘던지 / 든지’, ‘/ ’ ‘게요 / 께요등 혼동하기 쉬운 것들을 콕 집어서 설명하는데 핵심을 재미있게 풀어냈다. [2]에선 글쓰기의 표현을 다루고 있다. ‘빡세게굉장히처럼 자주 쓰는 말을 다르게 표현하는 방법을 알려주는데 정말 유익했다. 왜냐면 아이들은 무슨 일이든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무조건 짜증나!”라고 말한다. 그럴 때면 상황에 맞게 표현을 바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통해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을 것 같다.

 


중간고사를 끝낸 둘째에게 이 책을 건넸더니 아주 짧게 소감을 전했다. “그동안 틀린 줄도 모르고 그냥 지냈는데 어디가 어떻게 잘못됐고 어색했는지 알게 되었다. 글쓰는 시간만 되면 먼 산 보던 둘째도 이제 조금 달라질 수 있을까 기대가 된다.

 


글에는 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글쓰기는 한 문장부터>‘10대를 위한 글쓰기 기본기란 부제의 책이지만 연령에 상관없이 글쓰기의 기본을 알고 싶은 누구에게나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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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베이터 - 디베이팅 세계 챔피언 서보현의 하버드 토론 수업
서보현 지음, 정혜윤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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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보는 배우가 있다. 드라마나 영화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이 주연 배우만 보고 선택할 때가 있다. <그레이트 디베이터스(The Great Debaters)>가 바로 그런 경우다. 덴젤 워싱턴이 감독과 주연을 맡았는데 한 대학교수가 흑인으로 구성된 토론팀을 만들어 하버드대 챔피언십 우승까지 하게 되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1930년대 미국은 흑인차별이 극심했기에 흑인은 백인과 같은 교육을 받는 것조차 힘들었는데 그런 열악한 환경속에서 무적의 토론팀을 이끌어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토론대결을 다룬 영화였기에 토론팀을 꾸리고 훈련하고 준비하는 토론의 모든 과정이 묘사되었는데 그걸 보면서 들었던 생각. 토론은 생각보다 굉장히 어렵다는 것. 언변이 좋다고 해서 토론도 잘 할 수 있다? 글쎄...


 

여기 한 소년이 있다. 수줍음이 많아서 남들 앞에 나서기보다 뒤에서 조용히 지내는 것을 즐겼다. 하지만 소년의 안전하고 조용한 평화가 깨지고 말았으니. 바로 가족이 호주로 이민을 가게 된 것. 한국인은커녕 아시아인조차 드문 곳에서 낯선 언어로 둘러싸여서 살아간다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소년은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법을 터득해나갔고. 그리고 곧이어 많은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나서게 된다.

 


그의 이름은 서보현. 세계토론대회에서 두 차례나 우승을 거머쥔 디베이팅 챔피언으로 불린다. 현재 이력만 보면 어린 시절의 얌전했던 모습은 상상이 되질 않는다. 극과 극을 오가는 엄청난 간극. 그 차이를 그는 어떻게 채워나갔던 것일까.


 

<디베이터> 간결한 책 제목 아래 부제에 눈길이 머문다. ‘디베이팅 세계 챔피언 서보현의 하버드 토론 수업’. 그렇다 이 책은 수줍은 소년이 저자가 어떻게 하버드대 토론팀 코치로 거듭나게 되었는지 토론의 기본요소와 단계에 맞게 담겨 있다.


 

나는 수천 년간 이어져온 토론대회의 전통이 바로 공동체가 서로 상반된 주장들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런 주장들을 바탕으로건설됐다는 증거라고 말하고자 한다. - 25

 


십 년이 넘게 독서모임을 했지만 아직도 토론은 어렵기만 하다. 가장 큰 고민은 무엇에 대해 이야기할 것인지 논제를 정하는 것. 단답형이 아닌 각자의 생각과 가치관을 드러낼 수 있는 것,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질문을 통해 개인은 물론 우리 사회로 사고를 확장해서 새롭게 생각하고 고민할 수 있는 질문, 논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매번 고민하고 또 고민하게 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좋은 논쟁은 사회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일 뿐 아니라 추구해야 할 존재이기도 하다. - 28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부 토론의 다섯 가지 기술, 2부 토론의 기술을 삶에 적응하기. 그 아래 토론의 세부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가장 먼저 이야기한 것은 토론의 발제로 토론의 세 가지 유형(사실 토론, 가치 토론, 처방 토론)을 비교하면서 짚어주는 것에서 출발한다. 토론의 주제를 분석했다면 나의 생각과 주장을 상대에게 어떻게 전달하고 설득할 것인지 방법을 설계하는 논증’, 이어서 상대의 논증에 어떻게 반대할 것인지 반론을 펼치는 것에도 상대에 대한 예의를 강조한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반론은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토론 상대에 대한 신뢰의 표시였다. 상대가 우리의 허심탄회하 의견을 들을 자격이 있고 그걸 품위 있게 받아들이리라는 판단이 담긴 행위였다. - 128

 


청소년들과 독서수업에서 가끔 첨예한 대립이 예상되는 질문을 할 때가 있다. 때론 평소 생각과는 무관하게 부작위로 찬반으로 나누어서 토론을 하게 하는데 그럴 때 아이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흥미로워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상황을 보다가 다른 아이의 의견에 말을 보태는 정도로 넘어가는 아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난처해하는 아이...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난 또다시 고민하게 된다. 토론의 스킬 이전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타인의 주장을 잘 들어보는 훈련이 필요한 건 아닌가...


 

토론과 지적 양가감정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의 관점이 진정한 반대에 직면했을 때 우리에게는 더 강력하게 주장하거나 아예 포기하는 선택지만 있는 게 아니라, 한번 더 생각해서 제3의 길을 찾아내는 방법도 있다. 교육 도구로서 토론이 지닌 또다른 측면이다. 포기하지 않고 대화를 지속해나갈 수만 있다면, 토론은 우리에게 꾸준히 서로에게 배워나가는 법을 가르쳐준 다. - 331

 


얼마전 한 방송사의 토론프로그램이 1000회를 맞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지금까지 토론에서 서로 자신의 주장만 앞세우고 상대를 무시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는데 그 토론은 이제까지의 토론과는 다른 모습, 인상적이고도 재미가 있었다. 상대에 대한 예의를 지키면서 얼마든지 자신의 생각을 많은 사람들에게 피력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토론의 최강자에 오른 저자의 경험이 400쪽이 넘는 두툼한 책에 빼곡하게 담겨 있는 <디베이터>.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주눅들거나 움츠러들지 않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고 싶은 이에게 권하고 싶다.

 

 

토론은 세상의 작은 구석을 뚜렷하게 볼 수 있게 해주었다. -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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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부터 나일까? 언제부터 나일까? - 생명과학과 자아 탐색 발견의 첫걸음 4
이고은 지음 / 창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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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랜 의문 하나. 내가 늙어서 치매에 걸린다면, 그때의 일까? 아니면 나에 대한 기억을 잃었으니 그땐 가 아닌 걸까? 두말 없이 그때의 나도 나야!”라고 말하고 싶지만 자꾸 망설여진다.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질까봐서.

 


의 시작도 그와 비슷하다. 언제 어느 단계부터 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세포단계부터인가, 수정란 단계부터인가. 아니면 세상에 태어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인가. 아이들이 어릴적에 종종 질문을 했지만 한 번도 속 시원하게 대답해주지 못했다. ? 나도 잘 모르니까. 만물의 영장이란 인간으로 태어나 살아가지만 는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답을 아직도 찾지 못했다.

 


이제 그런 고민은 접어두어도 될 것 같다. 최근 출간된 창비출판사 [발견의 첫걸음] 시리즈인 <세포부터 나일까? 언제부터 나일까?>에서 의 출발, ‘의 시작에 대한 질문을 쉽고 흥미롭게 풀어내었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나는 누구일까?’에서 에 대한 탐색을, 2우리는 누구일까?’에서는 우리로 대상을 확장하여 생각해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나는 누구인가. 생명과학계의 오랜 질문이기에 내용이 난해하지 않을까, 솔직히 걱정을 했다. 하지만 얇고 작은 사이즈의 책, 거기다 누군가와 이야기하듯 구어체로 풀어쓴 문장 덕분에 생명의 기원이란 거대한 주제를 쉽게 읽을 수 있었다. 하나의 챕터마다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이 이어지는데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관련된 실험을 통해 설명해 놓아서 읽는 내내 아하하고 무릎을 쳤다.

 


이를테면 내 몸은 내 맘대로 할 수 있다고 하지만 나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건 대뇌뿐이라는 것.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 대뇌조차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님을 실험을 통해 밝혀졌다고 한다. ‘언제부터 나인가에 대해서도 저자는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이야기한다. 정자와 난자부터? 수정란이나 세포분열부터? 아니면 심장박동이 시작되는 순간? 그렇담 뇌가 깨어나는 순간? 과연 언제부터일까.

 


영화를 통해 접했던 것들, 인간복제를 비롯해서 안면이식, 뇌이식, 인공장기 등에 관한 이야기도 언급되어 있어서 흥미로웠다. 또 우리 몸을 구성하는 물질을 이야기하면서 몇 년 전 한 방송사의 예능프로그램 [알쓸@]을 통해 소개되었던 내용(1598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숨을 거두기 전 내쉰 마지막 숨에 들어 있던 질소 분자 1개를 지금 우리가 1회 호흡할 때 들이마실 확률)이 수록되어 있어서 더욱 눈길을 끌었다.

 


엉뚱한 질문이니까. 경험해보지 않은 거여서 깊게 고민하거나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만 다르게 해도 눈앞에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펄쳐진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청소년 대상이지만 성인이 읽기에도 손색없는 책. 이제라도 만나서 천만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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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샤 창비청소년문학 117
표명희 지음 / 창비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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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막내, 인자 느그 집 가나?”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친정과 시댁, 양가에 인사를 드리고 신혼집으로 향하는 내게 친정엄마가 말씀하셨다. 이제 니 집으로 가느냐고. 결혼했으니 앞으로 여기, 친정에 자주 못 올 거란 의미. 애정 표현에 서툰 엄마로선 이것이 막내딸과의 아쉬움을 표현한 최대치였다. 하지만 친정엄마가 간과한 것이 있으니 나의 살림 솜씨가 형편없다는 거다. 한동안 친정집 방문이 어려울 거란 예상과는 달리 거의 매일 내 집 드나들 듯 들락거렸다. 같은 도시, 버스로 고작 20분 거리에 불과하지만 사랑 하는 가족, 어릴 적 추억이 가득한 집을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내가 태어난 나라, 조국을 떠난다는 건 어떨까. 얼마나 큰 결심을 하고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할까. 감히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여기 한 가족이 있다. 한 쌍의 부부, 그리고 그의 네 아이 버샤, 텔민, 세실, 나즈.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아끼고 큰아이는 동생들을 세심하고 돌보는, 그야말로 다복한 가족이다. 하지만 그들을 둘러싼 환경, 머물고 있는 공간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미래를 꿈꾸기 이전에 오늘 하루를 무탈하게, 내일도 무사하게 맞이할 수 있는지조차 장담할 수 없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은 하루에도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국제공항의 출국장이기 때문이다.


 

나누고 가르는 거라면 정말 지긋지긋하다. 우리가 이런 처지에 내몰린 것도 알고 보면 그런 구분 때문이다. 같은 무슬림도 시아파와 수니파로 나뉘고, 같은 수니파도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고…… 그뿐인가? 군인도 정부군과 반군으로 나뉘고, 뒷배가 되는 나라도 미국과 러시아로 나뉘고……. 사소한 나누기에서 시작한 불씨가 결국 같은 민족끼리 총을 겨누는 내전으로 치달아 사람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까지 내몰지 않았나. -36.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언어도 통하지 않는 땅에 발을 디딘 그들은 출국장 한 켠에 여행 가방과 휘장을 둘러 임시로 거처를 꾸렸다. 조국에선 부유한 명문가에서 태어나 풍족한 생활을 누렸던 그들이지만 지금은 한 달이 넘는 동안 오직 난민 심사에서 무사히 통과하는 것만 바라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나라는 웬만해선 난민을 잘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기다 무슬림에 대한 인식도 최악. 때문에 그들의 난민신청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희박했다. 국경을 몇 차례 넘으면서 자금사정도 악화되었다. 그들에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사회에 악영향을 주지 않는 온순한 사람들이란 인상을 주기 위해 어떻게든 우선 사람들 눈에 띄면 안되었다. 그것이 유일한 생존수칙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불회부결정이 내려지고 마는데……


 

어느새 출국장 끝이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의 마지막 지점에 이른 것이다. 어릴 적 화려한 미로 같던 통로를 지나 이르던 황금 지붕의 모스크처럼 이곳도 내겐 해방구나 다름없다. 유리 벽 너머로 보이는 바깥세상이라야 드넓은 활주로가 펼쳐진 공항 마당이 전부지만……. -190


 

공항 출국장에서 난민처럼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를 읽으며 순간 톰 행크스가 출연했던 영화 <터미널>이 떠올랐다. 모국에서 갑자기 터진 쿠데타로 오갈 데가 없어지자 주인공이 어쩔 수 없이 공항에서 지내는 줄거린데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고 해서 인상적으로 봤던 기억이 난다. 그 영화처럼 소설 속 가족도 공항에서 살아가기 위해 어렵게 끼니를 해결하고 책을 구해 낯선 언어를 익히고 자신들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 다가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명쾌한 해결책은 쉽게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설상가상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세계는 공포의 도가니가 되고 마는데...


 

거대한 우주에서 보자면 한낱 벽촌에 지나지 않을 이 지구 위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은 신의 눈에 얼마나 가련하고 가소로운 존재일까. 한쪽에서는 테러와 전쟁으로 울부짖고 다른 쪽에서는 축제와 파티로 환호하는, 어수선하고 모순투성이인 이 행성이 말이다. 엄밀히 따지면 우리는 기껏 지구의 껍데기에 달라붙어 아등바등 살아가는 가련한 피조물 아닌가. -110

 


수수께끼를 푸는 기분으로 소설을 읽었다. 버샤가 실어증을 앓게 된 어떤 이유일까. 이 가족이 안고 있는 비밀은 대체 뭘까. 무슬림에 대한 선입관, 고정관념을 전환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어질 이야기가 궁금해서 책장 넘기는 속도가 빨라졌지만 결국 묵직한 숙제가 남겨졌다.

 


국경을 넘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건 마음의 벽을 허무는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살아갈 나라의 국경선 앞에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갖고 서 있다. 그들이 마음의 문을 열어 우리를 맞아줄 날을 기다리며…….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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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시간 - 도시 건축가 김진애의 인생 여행법
김진애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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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괄한 음성, 호탕한 웃음소리, 어떤 일이나 상황에서도 뒤에 숨지 않고 당당하게 앞에 나서서 시원하게 일갈하는 배짱 두둑한 모습. 여러 매체를 통해 접한 김진애의 모든 것이 낯설었다. 딸부자집 막내딸로 태어나 여중, 여고를 거쳐 줄곧 어디에서도 만나지 못한 캐릭터였다. 왠지 모르게 씩씩하고 유쾌한 언니 같은 느낌? 건축가이자 정치인, 그리고 <김진애의 도시이야기> 3부작으로 스테디셀러 작가로도 알려진 김진애. 그가 풀어놓은 여행 이야기가 궁금했다.

 


<여행의 시간>도시 건축기 김진애의 인생 여행법이란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저자가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터득한 여행 비법을 담은 책이다. 이것만 보면 딱히 이 책의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포털에서 검색만 해도 여행에 관해서 세세한 것까지 알려주는 유투버와 블로거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아직 실망하기엔 이르다. 저자가 바로 김진애가 아닌가.

 


여행에 대한 로망이란 거의 본능적인 것이어서 아무리 누르려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 9


 

계획했던 포르투갈 여행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무산된 이야기로 책은 시작된다. 바이러스의 위협을 오로지 집콕으로 버텨냈던 날을 지나 어느 정도 일상으로의 회복이 가능해지자 사람들이 가장 많이 했던 것은 바로 여행이었다.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 낯선 곳으로 떠난다는 건 갖가지 위험과 고생이 예견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는 데엔 분명히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하나. 어떤 여행을 떠나야 할까.


 

여행이란 우리가 열심히 구축해온 일상의 성체를 깨는 시간이다. 익숙한 일상, 낯익은 사람들, 손에 익은 물건들에서 벗어나서 예기치 못했던 만남, 낯선 사람들과 문물을 마주하면서 새로운 자극을 받는다. -103

 


저자는 가장 먼저 홀로여행을 이야기한다. 유학시절 파리로 떠난 첫 홀로여행은 순탄하지 않았다고 한다.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가방을 노리는 소매치기를 만나고 나니 숙소에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고 몸짓으로 소통하는 것이 익속해지자 인생에서 홀로여행은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이 되었다고 한다. 드넓은 자연보다 도시를 빨빨거리고 여행하기를 즐기는 저자는 잠깐씩 멍때리는 시간을 가진다는데 그것조차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홀로여행은 나를 발견하게 해주는 최고의 기회다. 나의 가능성과 한계, 나의 기질과 성향, 나의 동기와 목료, 나의 역량과 준비태세, 나의 심리와 행위, 나의 불안과 약점 등을 홀로여행이라는 의외의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나를 발견해주는 태도’, 사실 이것이 여행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이 아닐까? -42

 


어떤 이를 여행의 동반자로 선택하는지에 따라 여행의 느낌도 달라지는걸까. 저자는 커플여행을 비롯해서 아이들과의 여행, 부모님과의 효도여행, 반려동물과의 여행 경험담을 풀어놓는다. 아이들이 성장한 이후로 부부가 여행을 떠날 때는 유서를 써놓고 비행기에 오른다거나 반려견 울럼과 둘이 떠난 여행 이야기가 눈길을 끌었는데 저자에게 절친한 친구이자 보디가드이자 가족이었던 울럼이 떠났을 때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까 짐작할 수 있었다. 가난한 여행과 부자 여행을 언급한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전재산인 집을 팔아서, 조기명퇴하고 퇴직금으로 온가족이 세계일주를 하는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대단하다’, ‘용감하다고 생각했는데 저자 역시 마찬가지였나보다. 여행에 있어서 돈과 시간은 필수요건인데 그 두 가지 요건을 만족시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그렇다면 어떤 여행이 좋을까 고민이 되는데 저자는 가난한 여행을 통해 강한 멘탈과 적응력을 기를 수 있어 두고두고 남는 체험이 된다며 꼭 해보라고 권한다.


 

여행이란 어차피 돈과 시간 사이의 줄타기다. 인생이란, 불공평하게도 또는 아주 공평하게도, 돈이 없을 때는 시간이 많고 돈의 여유가 있을 때는 시간에 쫓길 확률이 높다. -194~195쪽

 


지난 겨울, 오랜만에 가족여행을 다녀했다. 12, 국내 인근 지역을 다녀온 게 전부였지만 다른 점이 있었다. 언제나 음식 재료를 바리바리 싸 들고 갔는데 이번엔 패스하고 근처 식당에서 해결하기로. 차로 이동하면서 느긋하게 둘러보다가 배가 출출해지면 주변 식당을 기웃거렸다. 저녁을 먹고선 바로 숙소로 가지 않고 야경이 아름답다는 곳을 찾았다. 그렇게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뒤늦게 알게 된 것이 있었으니. 이번에 여행한 도시를 가깝다는 핑계로 몇 번이나 찾았지만 야경을 제대로 감상한 건 처음이란 사실. 의외였다. 우리 가족이 이제야 여행의 재미를 깨닫게 된 건 아닐까. 다시 찾아온 여행의 시간, 기대가 된다.


 

여행에 대한 진짜 에필로그란 여행기나 출장 보고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쓰는 에필로그다. -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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